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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책 : 프로이트

왜 스스로를 책망하는가?

정신 건강은 많은 부분 초자아가 정상적으로 발전하느냐즉 초자아가 사적이지 않고 객관적으로 되는가에 달려 있다비전문가 분석의 문제」 지그문트 프로이트


     

우리는 많은 정신적 고통 속에 살아갑니다. 직장을 예로 들어볼까요? 쏟아지는 업무, 촉박한 마감, 성과에 대한 압박. 상사의 노골적인 혹은 은근한 질책 등등. 그 모든 일들은 우리에게 크고 작은 정서적 고통을 줍니다. 이런 정서적 고통은 우리네 정신 건강을 해치지요. 시도 때도 없이 치밀어 오르는 분노나 무기력, 혹은 가벼운 우울증부터 호흡이 곤란해질 정도의 공황장애까지. 이 모든 증상들은 우리네 정신 건강에 이상이 생겼다는 적신호일 겁니다.   

   

 어떻게 우리의 정신 건강을 회복할 수 있을까요? 원론적인 답은 어렵지 않습니다. 정신적 고통을 줄이면 됩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요? 흔히, 정신적 고통을 야기한 외부적 원인을 제거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쉽게 말해, 자신에게 스트레스를 주는 외부적 요소(많은 업무·촉박한 마감·성과 압박·상사·사장…)들을 없애야 한다는 것이죠. 이는 올바른 해법일까요? 즉, 직장을 바꾸거나 혹은 상사나 사장이 바뀌어서 업무가 줄고 마감에 여유가 생기고 성과 압박이 덜해지면 정신 건강이 회복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스트레스의 외부적 원인은 정신 건강에 악영향을 미치긴 하지만 우리네 정신건강을 위협하는 근본적인 원인은 아닙니다. 우리네 정신 건강을 위협하는 근본적인 원인은 외부가 아니라 내부에 있습니다. 우리 내부에 있는 그 근본적인 원인은 무엇일까요? 바로 자책입니다. 스트레스의 외적 요소들에도 불구하고 스스로를 책망하지 않는 이들은 자신 나름대로 정신 건강을 잘 유지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반면 스트레스의 외적원인(일‧인간관계‧경제적 문제…)을 모두 내적 원인(무능력‧게으름‧이기심‧나약함‧산만함…)으로 돌리는 이들도 있습니다. 정신 건강에 심각한 적신호가 발생하는 이들은 바로 이런 부류입니다.      



 다시 직장의 예로 돌아가볼까요? 과도한 업무, 촉박한 마감, 성과 압박, 상사의 질책에 시달리는 직장인이 있다고 해보죠. 그는 분명 그 외부적 원인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겠지요. 하지만 그것이 우리네 정신 건강을 심각할 정도로 위협하지는 않습니다. 그 모든 스트레스가 자신의 무능력, 게으름, 이기심, 나약함, 산만함 때문이라고 자책할 때, 그의 정신 건강은 심각하게 위협받게 됩니다.      


 이는 직장의 여러 군상들을 통해 쉽게 확인할 수 있지 않나요? 직장 스트레스 앞에서 불평불만이라도 하는 이들은 나름 자신의 삶을 유지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반면 직장 스트레스가 모두 자신의 탓이라고 여기며 깊은 자책에 빠지는 이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크고 작은 마음의 병(분노‧무기력‧우울증‧공황장애…)을 얻어 삶이 파괴되곤 합니다. 


 이제 우리의 정신 건강을 잘 보살필 방법을 알겠습니다. 그것은 ‘자책하지 않기!’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자책에서 벗어나 정신건강을 회복할 수 있을까요? 이에 대해 프로이트는 ‘정신 건강은 많은 부분 초자아에 달려 있다.’고 말합니다. 즉, 우리의 정신건강의 상당부분은 초자아와 관계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먼저 프로이트가 인간의 마음을 어떻게 파악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프로이트는 인간의 마음이 ‘이드’, ‘초자아’, ‘자아’라는 세 가지 층위로 구성되어 있다고 말합니다. ‘이드’는 인간이 신체를 갖고 있기 때문에 발생하는 본능적인 마음(“지금 배고프니까 옆 사람 음식 뺏어 먹을 거야!”)이고, ‘초자아’는 그 본능적인 마음을 금지하는 마음(“그게 인간이 할 짓이니”) 입니다. ‘자아’는 ‘이드’와 ‘초자아’ 사이의 갈등을 절충하고 타협시키는 마음(“조금만 참았다가 집에 가서 맛있는 거 먹자”)입니다.     

 

 ‘초자아’는 무엇일까요? 쉽게 말해, ‘부모’로 인해 발생한 내면화된 금지의 마음입니다. 우리는 감시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도 남의 물건을 함부로 훔치지 않죠? 왜 그럴까요? ‘부모’가 그것은 나쁜 짓이라고 우리의 마음에 각인시켰기 때문입니다. ‘초자아’는 (생물학적 혹은 사회‧문화적) 부모로부터 기원한 관습‧도덕‧윤리에 따른 내면화된 금지의 마음입니다. 자책하는 마음은 바로 이 ‘초자아’와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과도하게 엄격한 부모 아래서 자랐던 아이와 그렇지 않은 아이가 있다고 해봅시다. 이 둘이 성인이 되어서 직장 상사나 동료들에게 크고 작은 비판과 비난을 받았다고 해봅시다. 누가 더 크게 자책하게 될까요? 아마도 엄격한 부모 아래서 자란 아이일 겁니다. 왜 그럴까요? 엄격한 부모는 아이에게 더 강력한 초자아를 물려주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초자아는 스스로를 책망하는 마음의 중핵을 차지합니다. 그러니 우리네 정신 건강을 잘 보살피는 데 있어서 초자아라는 마음을 잘 다루는 것만큼 중요한 일도 없을 겁니다.      



 이 ‘초자아’를 어떻게 다루어야 할까요? 초자아 때문에 자신을 책망하게 되니까 그것을 없애버리면 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초자아’는 없앨 수도 없고, 없애는 것이 좋은 것도 아닙니다. ‘부모(관습‧윤리‧도덕)’ 없이 존재하는 사람은 있을 수 없고, ‘부모(관습‧윤리‧도덕)’를 없애는 것이 좋은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프로이트의 해법은 이렇습니다.      


 “정신 건강은 많은 부분 초자아가 정상적으로 발전하느냐, 즉 초자아가 사적이지 않고 객관적으로 되는가에 달려 있다.” 프로이트는 정신 건강을 잘 돌보려면 초자아를 없앨 것이 아니라 정상적으로 발전시켜야 한다고 말합니다. 초자아의 정상적 발전은 사적이지 않고 객관적으로 발전시키는 것입니다. 이는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상사(사장)’과 ‘아버지’는 전혀 상관없는 존재임을 깨달으면 됩니다. 우리가 타인을 책망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책망하게 되는 것은 무의식적으로 특정한 타인을 부모의 자리에 두기 때문입니다.    

  

 정말 그렇지 않나요? 과도한 업무를 지시하고 부당한 질책을 하는 상사‧사장 앞에서 (그를 원망하는 것이 아니라) 자책하게 되는 마음이 들 때가 있죠. 이는 어린 시절 부모 앞에서 혼나던 아이의 심정과 정말 똑같지 않나요? 자책의 마음은 특정한 상대를 (무의식적으로) ‘부모’의 자리에 두고 동시에 자신을 늘 반성해야 하는 아이의 자리에 두기 때문에 발생하는 감정입니다.      


 누군가 앞에서 자책의 마음이 든다면, 가장 먼저 해야 할 질문이 있습니다. “나는 그를 부모의 자리에 두고 있지는 않은가?” 자책하지 않음으로써 정신건강을 잘 돌보기 위해 늘 새겨야 할 주문이 있습니다. “당신은 나의 부모가 아닙니다.” 이것이 바로 초자아를 사적이지 않고 객관적으로 발전시켜 나가는 방법입니다. 진정한 어른이 된다는 것은, ‘초자아’를 얼마나 객관적으로 발전시켜 나가느냐의 문제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철학자의 일상적 조언』

     

수행자들이여道流그대들이 올바른 견해를 얻고자 한다면你欲得如法見解다만 사람들의 미혹에 빠지는 일이 없어야 한다但莫受人惑안을 향해서건 밖을 향해서건向裏向外무엇인가 만나는 것이 있다면 편하게 죽여라逢著便殺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逢佛殺佛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여라逢祖殺祖나한을 만나면 나한을 죽이고逢羅漢殺羅漢부모를 만나면 부모를 죽이고逢父母殺父母친척을 만나면 친척을 죽여라逢親眷殺親眷임제록』 임제 

    

 새로운 ‘부모’를 만드세요. 기존의 부모의 말을 거스르게 만들 새로운 ‘부모’를 만나야 합니다. 초자아는 ‘부모’가 물려준 낡은 유물입니다. 그러니 초자아는 줄어들수록 우리네 삶은 활기차질 겁니다. 하지만 초자아가 부정적 기능만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초자아의 긍정적 기능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자기성찰입니다. 자기중심적인 인간은 자신의 잘못을 진지하게 돌아보는 대신 남 탓을 하거나 자신을 합리화하곤 합니다. 이때 초자아는 자기부정의 고통을 감당하며 자신을 성찰할 수 있는 공간을 열어줍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의 딜레마 앞에 섰습니다. 초자아를 줄이면 자책을 줄여 기쁨에 이를 수 있지만 동시에 남 탓과 자기합리화를 하느라 슬픔에 빠지게 됩니다. 이 딜레마 앞에서 어떻게 해야 할까요? 슬픔의 초자아를 버리고 기쁨의 초자아를 생성해야 합니다. 슬픔의 초자아는 무엇일까요?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부모(관습‧윤리‧도덕)’이며, 그 ‘부모’의 닮은 꼴(선배‧상사‧사장…)들입니다. 이들은 탐 탓과 자기합리화를 막지만 과도한 자책으로 우리네 삶을 슬픔으로 몰아넣지요. 

 그렇다면 기쁨의 초자아는 무엇일까요? 자신이 선택한 ‘부모(관습‧윤리‧도덕)’입니다. 이는 구체적으로 누구일까요? 매혹적인 타자입니다. 그 타자는 매력적인 연인일 수도 있고, 온 마음으로 흠모하게 된 가수‧선생‧시인‧화가‧철학자일 수도 있습니다. 그들은 기쁨의 초자아입니다. 그들은 우리가 자책에 휩쓸리게 두지도 않으면서 동시에 우리의 삶을 진지하게 돌아볼 수 있도록(자기성찰) 해주는 존재입니다. 

 임제 선사는 ‘부모’를 죽이고 ‘부처’를 죽이라고 말합니다. 이는 그들을 없애서기 위해서 아니라 “올바른 견해”를 얻기 위해서입니다. ‘부모’와 ‘부처’를 죽여야 하는 이유는, 오직 ‘나’이기에 만날 수 있는 ‘부모’와 ‘부처’를 만나기 위해서입니다. 그 새로운 ‘부모’와 ‘부처’를 통해 새롭게 형성된 ‘초자아’를 통해 우리는 자기긍정과 자기성찰 사이에서 절묘하게 균형 잡으며 행복한 삶(올바른 견해!)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겁니다. ‘부모’를 없애려 하지 말고, 새로운 ‘부모’를 만나려는 여행을 떠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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