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밥벌이를 할 것인가?
인간의 위대함은 언제나 자신의 삶을 재창조하는 데 있다. 자기 자기에게 주어진 것을 재창조하기. 어쩔 수 없이 받은 것도 다시 닦아서 윤을 내기. 인간은 노동을 통해서 자신의 자연적인 삶을 재창조한다. 『중력과 은총』 시몬 베유
밥벌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가장 엄중하고 긴급한 문제입니다. 꿈, 사랑, 우정, 정치, 예술 등등 우리네 삶에서 중요한 많은 문제들이 있죠. 하지만 이는 모두 밥벌이의 문제 앞에서 배부른 사치로 전락하고 맙니다. 당장 밥벌이가 위협받을 때, 꿈, 사랑, 우정, 정치, 예술 같은 것은 모두 허황된 이야기처럼 들리게 마련입니다. 문제는 이 엄중하고 긴급한 문제인 밥벌이가 결코 녹록치 않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밥벌이는 지겹고, 치사스럽고, 고됩니다. 어쩌면 이것이 우리네 삶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네 삶을 조금 더 기쁜 삶으로 인도할 것들은 분명 꿈‧사랑‧우정‧정치‧예술에 있습니다. 이는 변치 않는 삶의 진실입니다. 하지만 밥벌이의 중압감에 시달리느라, 그 소중한 것들을 돌볼 겨를이 없습니다. 어쩌면 이것이 우리가 늘 행복을 바라지만 늘 불행 속에 머무르는 근본적인 이유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당장 다급한 문제(밥벌이)를 해결하느라 정작 중요한 문제(꿈‧사랑‧우정‧정치‧예술)를 돌보지 못하는 삶은 필연적으로 불행해질 수밖에 없으니까요. 밥벌이는 우리네 삶을 정말 숨 막히게 하죠. 매일 일을 해야 밥을 먹고 사는데, 바로 그 일이 너무 지겹고 치사스럽고 고될 때, 삶의 무게에 짓눌려 질식할 것만 같습니다. 시몬 베유는 이런 밥벌이의 고통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육체노동의 극심한 고통은, 오직 생존하기 위해서 이토록 오랜 시간 노력해야 한다는 점에 있다. 노예에게 노동의 목적은 그저 생존하는 것뿐이다. 그 어떤 행복도 목적이 되지 못한다. 따라서 노예는 거기서 해방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식물 수준까지 떨어질 수밖에 없다. 『중력과 은총』 시몬 베유
베유의 말처럼, 밥벌이의 고통은 오직 생존하기 위해 오랜 시간 노력해야 한다는 점에 있습니다. 노예처럼 일하는 이들의 목적이 무엇인가요? 그것은 그저 생존하는 것이고, 이로서는 어떤 행복에도 결코 도달할 수 없습니다. 이는 지금 우리가 처한 밥벌이의 모습과 정말 똑같지 않나요? 돈만 많으면 이 꼴 저 꼴 안보고 당장 일을 때려 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밥벌이를 그만두지 못하는 것은 정말이지 먹고 살기 위해서(생존!) 아니던가요.
“노예는 거기서 해방되어야 한다.” 베유는 이런 삶에서 벗어나 조금 더 인간다운 삶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단호하게 말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동물조차 되지 못한 식물, 즉 한 자리에서 붙박여 꼼짝달싹 못하는 “식물 수준까지 떨어질 수밖에 없다”고 진단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식물적 혹은 노예적 삶으로부터 벗어나 조금 더 인간답게 살 수 있을까요? 주식을 하든, 경매를 하든, 부동산을 하든, 돈을 많이 벌면 될까요?
많은 돈을 벌어서 빨리 은퇴하기! 이것이 우리 시대 대부분의 이들이 밥벌이의 고통으로부터 벗어나려는 보편적인 방법이지요. 대부분의 사람들이 돈, 돈, 돈거리며 사는 것은 야심찬 탐욕이라기보다 노예적 삶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서글픈 발버둥에 가까울 겁니다. 이 서글픈 발버둥은 성공할 수 있을까요? 아마 불가능할겁니다. 믿지 못하실 수도 있겠지만, 돈을 많이 벌든 그렇지 않든, 은퇴, 즉 무노동의 삶은 행복은커녕 조금 더 인간다운 삶에도 가닿지 못합니다.
두 종류의 무노동이 있습니다. 돈이 없는 상태의 무노동과 돈이 많은 상태의 무노동. 이 두 경우보다 행복 혹은 인간다운 삶에 이르지 못합니다. 전자, 즉 돈을 많이 벌지 못하고 은퇴하는 경우는 말할 필요도 없지요? 그는 결코 행복이나 인간다운 삶에 가닿지 못할 겁니다. 그는 이내 다시 지겹고 치사스럽고 고된 노예의 삶으로 돌아와야 할 테니까요. 후자의 경우, 즉 돈이 많은 상태에서 은퇴(무노동)은 상황이 다를까요?
전혀 그렇지 않을 겁니다. 운이 좋아 돈을 많이 벌게 되어 은퇴를 해도 상황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물론 이 경우는 생존을 위해 노동해야 하는 고통으로부터는 벗어날 수 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 역시 근본적으로 행복한 혹은 인간다운 삶에 이를 수는 없습니다. 이 경우는 노동의 고통으로부터 벗어나는 대가로 무노동의 공허와 무기력 속에 던져질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누가 일이 ‘생존’의 수단이 아니라고 말하나요? 인간에게 일은 분명 ‘생존’의 수단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생존’은 단순히 ‘생계’만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진정한 의미에서의 ‘생존’입니다. 우연히 큰돈을 얻게 되어 온갖 불평불만을 늘어놓던 직장을 그만 둔 이를 알고 있습니다. 그는 직장을 그만두고 아무런 일도 하지 않고 긴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에게 행복하고 인간다운 삶이 펼쳐졌을까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그는 생기를 잃고 갑자기 늙어버렸습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일까요? 그가 노동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즉, 은퇴 뒤에 찾아오는 갑작스런 늙음은 무노동의 공허와 무기력의 결과였던 겁니다. 오히려 투덜거리며 일하던 시절이 오히려 더 생기 있고 활력적인 모습이었습니다. 이처럼 일은 죽음(늙음)으로 가는 일을 늦추는 ‘생존!’적 활동입니다. 이런 삶의 진실에 대해 베유는 이렇게 말합니다.
“인간의 위대함은 자신의 삶을 재창조하는 데”있고 “인간은 노동을 통해서 자신의 자연적 삶을 재창조한다.” 밥벌이는 ‘생계’로서 ‘생존’이 아니라 ‘재창조’로서의 ‘생존’으로 대해야 합니다. 인간은 오직 자신의 일로서만 자신의 삶을 재창조해나갈 수 있습니다. 일하지 않는 자들이 생기를 잃고 늙어가는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자신의 삶을 재창조하지 않는 이들에게 남겨지는 것은 죽음을 향한 늙음뿐이니까요.
그렇다면 어떻게 ‘생계’가 아닌 ‘재창조’로서의 밥벌이를 할 수 있을까요? 지금의 직장 혹은 직업을 그만두고 새로운 일을 찾아야 할까요? 이는 하나의 대안이 될 수 있을지는 몰라도, 근본적인 해법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근본적인 해법은 무엇일까요? 어떻게 우리의 삶을 재창조할 수 있는 밥벌이를 할 수 있을까요? 시몬 베유는 이에 대해 근본적인 해법을 제시해줍니다.
“자기 자신에게 주어진 것을 재창조하기!” “어쩔 수 없이 받은 것도 다시 닦아서 윤을 내기!” 베유의 말은 어려운 말이 아닙니다. 글 쓰는 것을 좋아하는 공대생이 있습니다. 그는 생계의 문제 때문에 직장에 취업을 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공학’이 아니라 ‘글쓰기’를 통해 자신의 삶을 재창조하는 노동을 하고 싶었습니다. 그런 그는 직장을 그만두고 곧장 소설가 되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는 먼저, ‘공학’에 관한 책을 쓰는 것으로 ‘글쓰기’ 노동을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시작된 글쓰기는 시간이 지나 에세이로 그리고 다시 철학으로 이어져 전업 작가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베유가 말한 “자기 자신에게 주어진 것을 재창조하기!” “어쩔 수 없이 받은 것도 다시 닦아서 윤을 내기!”입니다.
우리는 종종 힘든 일이 있을 때, ‘전부 아니면 전무All or Nothing’의 자세를 취할 때가 있습니다. 밥벌이의 문제 앞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직장에서 삶이 질식해가면서도 “직장 다니는 게 최선이야!”라며 어떤 변화도 취하려 하지 않거나, “당장 때려 치고 새로운 일을 할 거야!”라며 성급하게 모든 것을 변화시키려 합니다. 아무 것도 바꾸려 하지 않거나 성급하게 모든 것을 바꾸려는 ‘All or Nothing’의 태도는 모두 지혜로운 삶의 자세가 아닙니다.
삶은 ‘멈춤’과 ‘단절’이 아니라 ‘연속’입니다. 좋든 싫든, 우리는 자신에게 주어진 것을 가지고 무엇인가를 재창조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신체적 조건이든, 재정적 조건이든, 전공이든, 경력이든, 어쩔 수 없이 주어진 것을 닦아서 다시 윤을 낼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어쩔 수 없이 우리에게 주어진 것을 가지고 멈추지도 말고 단절하지도 말고, 연속적으로 우리네 삶을 바꾸어 나가야합니다.
행복한 밥벌이를 하고 싶은가요? 먼저 어쩔 수 없이 자신에게 주어진 것이 무엇인지 살펴보고 그것을 긍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주어진 것들로부터 새로운 것들을 재창조합니다. 그렇게 우리네 삶이 반짝일 수 있도록 윤을 내야 하빈다. 그럴 수 있을 때, 우리는 ‘생계’로서의 밥벌이를 넘어 우리네 삶을 ‘재창조’하는 행복한 밥벌이로 나아갈 수 있을 겁니다.
『철학자의 일상적 조언』
가장 인간적인 문명은 육체노동을 주축으로 하고, 육체노동을 최고의 가치로 삼는 문명이다. … 육체노동이 최고의 가치인 것은 생산하는 물건과의 관계가 아니라 인간과의 관계에 의한 것이다. 『자유와 사회적 억압의 원인들에 대한 성찰réflexions sur les causes de la liberté et de l'oppression sociale』시몬 베유
행복으로 가닿는 밥벌이를 원하나요? 몸을 써서 일하세요, 여기서 ‘몸을 쓴다’는 것은 과격한 육체노동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순수한 정신노동을 지향하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사실은 순수한 정신노동은 무노동입니다. 우리가 정신노동이라고 여기는 많은 일들은 사실은 육체노동입니다. 변호사가 의뢰인을 변호하는 것도, 의사가 환자를 진료하는 것도, 소설가가 소설을 쓰는 것도 모두 고된 육체노동입니다.
밥벌이는 왜 지겹고 치사스럽고 고된 일이 되었을까요? 그것은 육체노동과 정신노동의 이분법이 성립되었기 때문입니다. 사장(자본가)은 육체노동이 아닌 정신노동을 하지요? 그의 정신노동의 정체가 무엇인가요? 육체노동을 하는 직원들을 어떻게 더 착취할까를 고민하는 일일 겁니다. 이는 뒤집어 말해, 우리가 육체노동이 아닌 순수한 정신노동을 지향할 때, 우리 역시 누군가를 착취하는 자리에 있을 수 있다는 말에 다름 아닐 겁니다. 열심히 일자리를 구하고 있다고 말하는 아들이 사실은 부모의 돈을 착취하고 있는 것처럼 말이지요.
베유는 “가장 인간적인 문명은 육체노동을 주축으로 하고 육체노동을 최고의 가치로 삼는 문명”이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모두가 육체노동을 할 때만 인간과의 관계가 더욱 인간다워지기 때문입니다. 책상머리에 앉아만 있는 사장이 있다고 해봅시다. 그 사장-직원의 관계는 언제나 착취-불만의 관계인 경우가 대부분이지요. 하지만 몸을 움직여 일하려는 사장은 다르지요, 그 사장-직원의 관계는 조금 더 인간적인 관계로 구성됩니다. 당연하지 않나요? 누군가 정신노동만 하려 할 때 육체노동을 할 대상에게 일방적 지시(착취)만 하게 되지만, 모두가 육체노동을 할 때 모두 함께 웃으며 일할 수 있게 되니까요. 몸을 써서 일할 것! 이는 ‘나’와 ‘너’와 ‘우리’ 모두가 행복한 밥벌이를 할 수 있는 가능성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