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은 어떻게 현실이 되는가?
미래는 손에 거머쥘 수 없는 것이며, 우리를 엄습하여 우리를 사로잡는 것이다.
미래, 그것은 타자이다. 미래와의 관계, 그것은 타자와의 진정한 관계이다. 《시간과 타자》 에마뉘엘 레비나스
희망은 무엇일까요? 어떤 일을 하거나 혹은 어떤 일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누구에게나 이런 희망이 있죠. 어떤 이는 돈 걱정 없이 살 수 있는 부유한 삶을 희망합니다. 어떤 이는 지겨운 직장을 벗어나 자신이 원하는 일을 하며 사는 자유로운 삶을 희망합니다. 어떤 이는 죽기 전에 진정한 사랑을 한 번 해보기를 희망하지요. 이런 희망은 좋은 것일까요?
희망은 희망일 뿐입니다. 희망은 ‘지금’이 아니라 ‘미래’의 일이기에 그저 희망할 뿐이니까요. 그런데 왜 세상 사람들은 희망에 목을 매는 걸까요?(“희망을 가져!” “희망을 놓지 마!” “희망 없는 삶은 의미가 없어”) 희망의 현실화 가능성 때문입니다. 쉽게 말해, 미래의 희망들(부유함‧천직‧사랑…)이 언젠가 지금 내 눈 앞에 펼쳐질 가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희망은 그 자체로는 공상이나 망상에 다름 아닙니다. 희망은 그것이 현실화될 때에만 진정한 기쁨이 됩니다.
그렇다면 희망은 어떻게 현실이 될 수 있을까요? 부자를 희망하는 가난한 이는 어떻게 부자가 될 수 있을까요? 세상 사람들은 그 답을 갖고 있습니다. 바로 의지와 노력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흔들리지 않는 굳건한 의지와 어떤 경우에도 멈추지 않는 노력으로 희망은 현실이 될 수 있다고 믿지요. 그런 것도 같습니다. 지독히도 가난한 이가 불굴의 의지와 노력으로 부자가 된 흔한 스토리는 어디선가 한 번 즈음을 들어봤을 테니까요. 하지만 이는 대표적인 삶의 오해죠.
의지와 노력으로 희망은 현실화되지 않습니다. 죽기 전에 진정한 사랑을 한 번 해보기를 희망하는 지독한 자본가가 있다고 해봅시다. 그의 희망은 의지와 노력으로 현실화될 수 있을까요? 돈을 벌려고 했던 그 자본가적 의지와 노력으로 그는 사랑에 이를 수 있을까요? 쉽게 말해, 불굴의 의지와 각고의 노력으로 천 번, 만 번 소개팅을 하고 세계 곳곳으로 사랑을 찾아 여행을 떠나면 그는 진정한 사랑을 하게 될까요? 우리는 이미 알고 있지 않나요? 그가 ‘섹스’를 살 수 있을지 몰라도 진정한 ‘사랑’을 얻을 수는 없으리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이처럼 의지와 노력은 희망이 현실화되는 조건이 아닙니다.
희망은 미래의 일입니다. 레비나스는 그 “미래는 손에 거머쥘 수 없는 것”이리고 합니다. 그것은 우리의 의지와 노력과 상관없이 “우리를 엄습하여 우리를 사로잡는 것”입니다. 있는 그대로의 삶을 살펴봅시다. 의지와 노력이 있다면 모두 부자가 될 수 있나요? 순진한 소리입니다. 남다른 의지와 노력에도 불구하고 가난하거나 혹은 자신이 원하는 부유함을 갖지 못하는 이들은 얼마나 많던가요? 반대로 별다른 의지와 노력 없이 부자가 된 이들 역시 분명 존재합니다.
그렇다면 ‘희망의 현실화’를 위한 진짜 조건은 무엇일까요? 레비나스는 ‘타자’에 달려 있다고 말합니다. 레비나스는 희망적인 삶에 대해 이렇게 진단 내립니다. “미래와의 관계, 그것은 타자와의 진정한 관계이다.” 의지와 노력은 분명 희망이 현실화되는 데 있어서 필수적 조건입니다. 하지만 그 필수적인 조건(의지·노력)은 결국 ‘타자’라는 근본적인 조건에 따른 파생(종속)조건일 뿐입니다. 즉, 어떤 타자를 만나느냐에 따라서 의지와 노력이 생길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의지와 노력의 유무뿐만 아니라 그 크기 역시 타자에 의해 결정됩니다. 의지와 노력이 생긴다하더라도, 그 크기 역시 어떤 타자를 만나느냐에 따라 달라지게 마련이니까요. 이는 우리네 삶에서 얼마든지 증명 가능합니다.
학창시절, 수학 공부가 싫지만 수학 선생님을 진심으로 좋아하게 되었을 때 수학 공부에 대한 강력한 의지와 노력이 촉발되곤 합니다. 또 한없이 게을렀던 이가 사랑하는 이(연인‧자식)을 만나 의욕 넘치는 부지런한 이가 되곤 합니다. 이처럼 의지와 노력 자체가 ‘타자’라는 조건에 따라 증가되거나 감소되는 부가조건일 뿐입니다. 달리 말해, 우리의 희망이 그저 망상에 그칠지 혹은 현실이 될지는 우리가 어떤 사람을 만나느냐에 달려 있는 셈입니다.
결국 희망은 ‘타자’를 통해 현실화됩니다. 가난한 이가 부자가 되는 것도, 직장인이 천직을 찾는 것도, 자본가가 진정한 사랑에 이르는 것도 모두 자신의 희망을 현실화해줄 ‘타자’를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물론 그 ‘타자’가 아무나인 것은 아닙니다. 하루 동안, 우리가 만나는 타자가 얼마나 많던가요? 그들은 우리의 희망이 현실화되는 데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못하지요. 우리의 희망을 현실화시켜줄 ‘타자’는 우리가 결코 회피할 수 없는 강력한 타자입니다. 그 ‘타자’와 진정한 관계를 맺게 될 때 희망은 현실이 됩니다.
부자라는 희망은 언제 현실화될까요? 부유한 삶이 얼마나 자극적인 것인지 혹은 가난한 삶이 얼마나 처참한 것인지를 강력하게 확인시켜주는 타자를 만났을 때입니다. 천직이라는 희망은 언제 현실화될까요? 원하는 일을 하며 사는 것이 얼마나 기쁜 일인지 혹은 원치 않는 일을 하며 사는 일이 얼마나 슬픈 것인지를 적나라하게 확인시켜주는 타자를 만났을 때입니다. 사랑이라는 희망은 언제 현실화될까요? 진정한 사랑을 주고받는 일이 얼마나 소중한 인지 혹은 그런 사랑이 없는 삶이 얼마나 무의미한지를 절절하게 깨닫게 해주는 타자를 만났을 때입니다.
희망하는 삶이 현실이 되기를 바란다면, 결코 혼자 있어서는 안 됩니다. 타자와 관계가 없다면 미래와의 관계 역시 존재하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타자’를 만나러 가야 합니다. 우리의 의지와 노력의 크기를 증가 혹은 감소시킬 ‘타자’ 더 나아가 우리의 의지와 노력의 방향 자체를 바꾸게 할 ‘타자’를 만나러 가야 합니다. 바로 그 ‘타자’가 우리가 언젠가 살게 되기를 바라는 삶을 바로 지금 여기에 펼쳐줄 겁니다. ‘타자’, 그것이 바로 우리의 미래입니다.
『철학자의 일상적 조언』
몇몇 혁명가들이 어떻게 생각하건, 욕망은 본질적으로 혁명적이다. … 욕망은 그 자체로, 저도 모르게, 자신이 바라는 것을 바람으로써 혁명적이다. 『안티오이디푸스』 질 들뢰즈 & 펠릭스 가타리
삶이 변하기를 바라나요? 타자를 만나세요. 그 타자는 자신이 욕망하는 타자이고, 동시에 자신의 욕망을 촉발하는 타자입니다. 우리가 어떤 삶을 희망하건 간에 그것은 바로 그 타자에게 달렸습니다. 타자를 욕망하는 만큼, 그 타자가 촉발하는 욕망의 크기만큼이 우리네 삶 역시 변하게 될 겁니다.
변화 중 극적이고 결정적인 변화를 우리는 ‘혁명’이라고 합니다. 우리네 삶에서 그런 혁명은 어떻게 가능할까요? 그것은 바로 욕망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욕망에 매혹됩니다. 그 매혹이 바로 우리네 삶을 극적으로 변화시키는 원동력입니다. 욕망은 본질적으로 혁명적입니다.
원치 않는 일로는 삶이 좀처럼 변하지 않지요? 왜 그럴까요? 원치 않는 일은 그 일을 함으로써 자신이 변하게 될 모습만을 자꾸 바라게 되기 때문입니다. 다이어트에 왜 실패할까요? 그것은 원치 않는 운동과 식단을 억지스럽게 유지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다이어트는 어떻게 가능할까요? 그것은 매혹적인(욕망하는) 운동과 식단을 찾았을 때입니다. 매혹적인 운동을 찾고, 건강에 해롭지 않지만 맛있는 음식을 찾았을 때입니다. 그때 삶은 변화하게 되겠죠. 그 “욕망(운동‧식단)은 그 자체로, 저도 모르게, 자신이 바라는 것을 바람으로써 혁명적”이 되니까요.
우리네 삶을 바꾸어줄 타자 역시 욕망하는 타자, 욕망을 촉발하는 타자이어야 합니다. 거부할 수 없는 매혹을 가진 이를 욕망(사랑)하게 되었을 때, 우리의 삶이 혁명적으로 변하게 되는 것처럼 말입니다. 늘 무책임하게 살아가던 이가 사랑스러운 아이를 낳고 책임감 있는 가장이 되는 것이 그런 경우일 겁니다.
또한 타자는 마음속 깊은 곳에 있어서 자신조차 알지 못했던 욕망이 무엇이었는지 마저 알려 줄 겁니다. 늘 외향적이고 활동적인 이가 차분하고 정적인 이를 사랑하게 되었을 때, 자신 안에 시와 음악을 욕망하는 마음이 있었다는 깨닫게 되는 것이 이런 경우 일겁니다. 이유를 알지 못한 채 끌리는 욕망은 진정으로 우리가 바라는 삶이 무엇인지를 드러내는 신호이니까요. 욕망하는 타자, 욕망을 촉발하는 타자만이 우리네 삶의 혁명을 촉발할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