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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 : 비트겐슈타인

진정한 대화는 어떻게 가능한가?

우리가 ‘언어’라고 부르는 것은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의 일상의 언어 장치, 우리의 낱말의 언어 장치이다. 『철학적 탐구』 비트겐슈타인     
내가 규칙을 따를 때, 나는 선택하지 않는다. 나는 규칙을 맹목적으로 따른다.  『철학적 탐구』 비트겐슈타인』


 우리는 많은 대화를 하며 삽니다. 하지만 그중 진정으로 말이 통하는 대화는 얼마나 될까요? 친구, 직장, 심지어 가족과의 대화에서도 이해를 통한 공감에 이르기보다 오해로 인한 상처에 이르는 경우가 더욱 일반적입니다. 이처럼, 서로의 속내를 진심으로 이해하고 공감하며 교감하는 대화는 정말 드물지요.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일까요? 즉, 이해를 통한 공감의 대화보다 오해로 인한 상처의 대화가 더 일반적인 걸까요?      


 이에 대해 세상 사람들은 흔히 언어(말‧글)를 잘 사용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진단합니다. 쉽게 말해, 자신이 말하려는 바를 상대에게 명확하고 조리 있게 말하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이는 사실일까요? 전혀 그렇지 않지요. 누구보다 언어(말‧글)을 명확하고 조리 있게 사용한다는 논객들의 흔한 토론이 이를 잘 증명하지 않나요? 그네들의 토론에서 서로의 속내를 이해해서 공감‧교감하는 경우를 본적 있나요? 아마 없을 겁니다. 대부분의 토론은 오해로 인한 다툼의 향연이니까요.      


 그렇다면 소통이 아닌 불통의 대화를 하게 되는 진짜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우리가 언어를 잘못 사용하기 때문이 아니라 언어 자체를 오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어떤 의미일까요? 흔히, 언어를 사회적 약속이라고 말하지요? 즉, “핸드폰 어디 있어?”라고 말해야지 “폰핸드 어디 있어?”(약속된 낱말의 파괴) 혹은 “있어 어디 핸드폰”(약속된 문법의 파괴)이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지요. 이는 ‘언어의 본질은 사회적 약속에 있다’는 관점입니다. 



 이런 관점은 옳은 걸까요? 이보다 삶의 진실을 모르는 어리석은 말도 없을 겁니다. 실제 삶에서 언어의 본질은 ‘사회적 약속’이기보다 ‘개인적 약속’에 가깝습니다. 물론 이 말이 대화를 하면서 모든 사회적(문법적) 약속을 파괴해도 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오렌지를 요구하면서 “지렌오 하나 갖다 줘”라고 말하거나 혹은 “줘 갖다 오렌지”라고 말해서는 안 될 겁니다. 

     

 분명 언어(대화)는 사회적 약속 아래서 작동합니다. 하지만 실제 우리네 언어(대화)에서는 그 사회적 약속 아래 존재하는 수많은 개인적(일상적) 언어들이 작동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 비트겐슈타인은 “‘언어’라고 부르는 것은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의 일상의 언어 장치”라고 말합니다. 쉽게 말해, ‘언어’의 본질은 우리네 일상에서 개인적으로 사용하는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난해한 이야기일 수 있으니 예를 들어봅시다.      

 

 “너를 하늘만큼 사랑해”라고 말하는 이와 “너 씨발 존나 사랑해”라고 말하는 이가 있습니다. 이 둘은 언어의 사회적 약속을 파괴했나요? 그렇지 않지요. 그렇다면 이 둘은 서로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나요? 그렇지도 않죠. 둘 모두 ‘상대를 아주 많이 사랑한다.’는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이 둘은 다른 언어를 쓰는 것일까요? 


 전자는 ‘아주 많이’를 “하늘만큼”이라고 표현하는 일상에서 살아왔고, 후자는 그것을 “씨발 존나”라고 표현하는 일상을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실제 삶에서 언어는 ‘사회적 약속(습관)’이기보다 한 사람의 삶의 맥락이 만들어내는 ‘개인적 약속(습관)’에 가깝습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며 이해를 통한 공감보다 오해를 통한 다툼에 휘말리게 되는 이유 아니던가요? 


 “너 씨발 존나 사랑해!” 누군가 우리에게 이렇게 사랑고백을 했다고 해보죠. 우리는 그 사랑의 마음을 이해하고 공감하기 어려울 겁니다.  오히려 “넌 왜 욕을 하고 그러니”라며 그의 마음을 오해해서 다투고 상처 주게 될지도 모릅니다. 이제 왜 진정한 대화가 그토록 드물고 어려운지 알겠습니다. 그것은 세상 사람들이 언어를 ‘개인적 약속’의 산물로 보기보다 (자신의 개인적 일상을 중심으로 한) ‘사회적 약속’으로 간주하기 때문일 겁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진정한 대화를 할 수 있을까요? 이에 비트겐슈타인은 이렇게 답해줍니다. “내가 규칙을 따를 때, 나는 선택하지 않는다. 나는 규칙을 맹목적으로 따른다.” 이것이 어떤 의미일까요? 여기서 비트겐슈타인이 말하는 ‘규칙’은 언어규칙입니다. 보편적인 ‘사회적 약속’으로서의 규칙이 아니라 한 사람의 삶의 맥락(일상)이 만들어낸 개인적 언어규칙 말입니다. 그 개인적 규칙, 즉 ‘나’의 일상적 규칙과는 너무 다른 ‘너’의 일상적 언어규칙을 맹목적으로 따를 때 진정한 대화는 가능합니다.


      

 이제 진정한 대화가 어떻게 가능한지 알 것도 같습니다. 진정한 대화의 시작은 상대의 언어규칙을 파악하는 일입니다. 그 언어규칙은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바로 그 사람의 삶 안에서 알 수있습니다. 진정한 대화는 '언어'의 문제가 아니라 바로 '일상'(삶!)의 문제였던 겁니다. 우리가 진정한 대화에 이르지 못하는 이유는 언어 집착하느라 상대의 삶을 섬세하게 살피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대화를 바란다면, 자신의 삶의 맥락 안에서 고착된 언어규칙을 고집하지 않아야 합니다. 상대의 삶을 살피며 상대의 언어규칙을 파악하고 그것을 맹목적으로 따라야 합니다. 바로 그때 진정한 대화, 즉 공감과 교감의 대화가 가능합니다. 그런 진정한 대화는 어떤 모습일까요? 조금 구체적으로 말해볼까요? 


 “너 씨발 존나 사랑해!”라는 ‘너’의 말을 “너를 아주 많이 사랑해”라고 듣게 되는 대화입니다. “나도 너를 하늘만큼 사랑해”라는 말 대신 “나도 너를 씨발 존나 사랑해!”라고 ‘너’에게 말할 수 있는 대화입니다. 자신의 언어규칙을 버리고 상대의 언어규칙 속으로 기꺼이 뛰어들 때 우리는 진정한 대화에 가닿게 될 겁니다. 진정한 대화란, 어찌 보면 굉장히 쉬운 일일 수도 또 어찌 보면 불가능할 만큼 어려운 일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철학자의 일상적 조언』

나의 언어의 한계들은 나의 세계의 한계들을 의미한다논리철학논고』 비트겐슈타인     


진정한 대화를 하고 싶은가요? ‘말’에서 눈을 떼고 ‘삶’을 들여다보세요. 한 사람의 언어는 그의 ‘말’과 ‘글’에 있지 않습니다. ‘삶’에 있습니다. 한 사람의 언어는 그 사람이 걸어온 ‘삶’ 안에 있습니다. 우리에게 불쾌함과 불편함을 주는 언어(말‧글)를 사용하는 이들이 있지요. 어떤 이는 과도하게 거친 욕설을 섞어 쓰는 이들이 있고, 또 어떤 이는 불필요하게 어려운 단어 혹은 외국어를 섞어 쓰는 이들이 있지요. 우리가 그네들의 말(글)을 보려 할 때 우리는 그들과 결코 대화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그들과 대화할 수 있을까요? 왜 그들이 그런 언어를 사용할 수밖에 없었는지를 이해하려 그의 삶을 들여다보려 해야 합니다. 욕설을 자주 쓰는 이들은 그럴 수밖에 없는 삶에서 웃고 울었을 것이며, 어려운 단어와 외국어를 쓰는 이들은 그런 삶에서 웃고 울었을 겁니다. 그의 ‘말’(언어)이 아니라 그 ‘삶’(일상)을 보아야 합니다. 기뻤고 슬펐던, 웃고 울었던 그의 ‘삶’ 안에 그의 ‘말’(일상의 언어장치!)가 있으니까요.

 비트겐슈타인의 말처럼 ‘나의 언어의 한계는 나의 세계의 한계’이죠. 이는 내가 사용할 수 있는 언어만큼이 ‘나’의 세계의 크기라는 단순한 의미만을 담고 있지 않습니다. 이는 ‘나’의 언어 한계 넘어 ‘너’의 언어로 들어갈 때, ‘나’의 세계 한계 넘어 ‘너’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다는 의미마저 담고 있을 겁니다. 

 “나의 언어의 한계들은 나의 세계의 한계들을 의미한다.” 젊은 비트겐슈타인의 치기어린 이야기는 이제 이렇게 바꾸는 편이 좋겠습니다. “나의 세계의 한계를 넘어서 너의 세계로 들어갈 때, 나의 언어의 한계들 너머 너에게 갈 수 있다.” 진정한 대화란 그런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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