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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해 : 베르그손

왜 오해하는가?

사실상 기억에 젖어 있지 않는 지각은 없다우리는 우리 감각에 현재 직접적으로 주어지는 것들에다 과거 경험의 무수한 세부들을 섞는다매우 자주 그 기억들은 실제 지각을 이동시킨다그러한 이동이 일어날 때 우리는 실제 지각에서 단지 몇몇 실마리즉 이전의 이미지들을 상기시킬 수 있는 단순한 ‘기호들만을 취할 뿐이다물질과 기억 앙리 베르그손



 세상 사람들은 나이가 들어가며 점점 사람들을 만나려 하지 않습니다. 이는 물리적인 의미이기보다 정서적인 의미에서 그렇습니다. 나이가 들수록 물리적으로 만나는 사람의 수가 점점 늘어나는 경우도 많지요. 하지만 정서적으로도 그럴까요? 전혀 그렇지 않죠. 나이가 들어가면서 자신의 속내를 진정으로 털어놓고 만날 수 있는 진정한 관계들은 점점 줄어드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늙어가며 외로움과 공허감을 호소하는 이들이 많아지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일 겁니다. 물리적으로 만나는 관계가 아무리 많다고 한들, 정서적으로 만나는 이들이 없다면 삶은 외롭고 공허해지기 마련이니까요. 그렇다면 왜 진정한 관계를 점점 맺으려 하지 않게 되는 걸까요? 바로 오해 때문입니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가장 큰 고통 중에 하나는 오해 받는 일겁니다.      


 우리의 속마음을 오해하는 이들 앞에서 크고 작은 상처를 받아보지 않은 이들은 없을 겁니다. 누군가로부터 오해를 받게 될 때의 슬픔(당황‧분노‧좌절‧증오‧냉소…)이 너무나 크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은 점점 사람들을 만나려 하지 않게 됩니다. 관계를 줄여서 오해의 상처 역시 줄여보려는 시도인 셈이죠. 하지만 이는 지혜로운 시도는 아닙니다.



 나이가 많든 적든 사람에게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오해의 위험을 감당하며 속마음을 터놓고 지낼 사람이 필요합니다. 오해 받을 때의 슬픔(분노‧좌절‧증오‧냉소…)보다 혼자 남겨진 슬픔(외로움‧공허함)이 우리네 삶을 더 불행하게 만드는 까닭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오해를 어떻게 다룰 것인지에 대해 고민해보아야 하는 이유입니다. 오해를 잘 다룰 수만 있다면, 우리는 누군가를 만나 진정한 관계를 만들어나갈 수 있을 테니 말입니다.


 왜 오해를 하게 되는 것일까요? 베르그손의 표현에 따르면, “기억에 젖어있지 않은 지각은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어떤 의미일까요? ‘오해한다’는 것은 ‘잘못 지각한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그런 잘못된 지각은 왜 발생하는 걸까요? 바로 ‘기억’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볼까요? ‘규섭’과 ‘인철’이 함께 밥을 먹고 있습니다. “너 요즘 돈 없지?” ‘규섭’이 ‘인철’에게 말했습니다. 그때 ‘인철’은 정색하는 표정으로 “너 지금 나 무시하냐?”라며 화를 냈습니다. ‘인철’은 ‘규섭’을 오해한 겁니다.


 왜 ‘규섭’은 ‘인철’에게 돈이 없는지 물은 것일까요? 요즘 부쩍 돈 때문에 힘들어하는 ‘인철’의 상황에 마음이 쓰여 자신이 밥값을 내려고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인철’은 ‘규섭’의 선의를 비난과 무시로 오해를 했습니다. ‘인철’은 왜 오해했을까요? 어린 시절부터, 가난하다는 이유로 비난받고 무시 받았었던 ‘인철’의 기억 때문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무엇인가를 지각할 때, “현재 직접적으로 주어지는 것(친구의 선의)들에다 과거 경험의 무수한 세부(가난의 기억)들을 섞게” 됩니다.     



 바로 이것이 오해의 근원입니다. 우리가 갖고 있는 기억들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실제 지각을 이동”(선의→비난‧무시)시켜 버립니다. 그런 이동은 “실제 지각(친구의 선의)에서 단지 몇몇의 실마리, 즉 이전의 이미지(가난의 기억)들을 상기시킬 수 있는 단순한 ‘기호’(“너 요즘 돈 없지?”)들만을 취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변에 존재하는 수많은 오해는 바로 이런 과정으로 발생하게 됩니다. 결국 오해는 우리가 갖고 있는 저마다의 기억 때문에 발생하는 일입니다.


 오해에서 자유로워지려면 가장 먼저 ‘기억’을 잘 살펴보아야 합니다. 자신 혹은 상대가 특정한 기억에 강하게 사로잡혀 있는지 잘 살펴보아야 합니다. 누군가 특정한 기억에 강하게 사로잡혀 있다면 그는 결코 한 사람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직장에서 잔소리를 많이 듣던 직장인이 아내의 작은 요청에 화를 내는 경우를 생각해볼까요? 그가 화를 낸 이유는 아내를 오해했기 때문입니다. 즉, (끊임없이 잔소리를 들어야  했던) 직장의 기억에 사로잡혀서 아내를 오해한 것입니다.  

    

 이는 마치 교통사고를 당한 기억에 사로잡혀 있는 이들이 자동차를 ‘이동수단’이 아니라 ‘흉기’로 오해하는 마음과 유사합니다. 물론 반대 경우의 오해도 있을 겁니다. 늘 욕설로 애정을 표현했던 부모 밑에서 자란 아이는 누군가의 모욕적인 욕설에서 애정을 느끼게 되는 오해가 이런 경우이겠지요. 어떤 경우든, 오해는 결국 한 사람의 기억에 의해 발생하게 되는 것은 동일합니다.  

    

 “기억에 젖어 있지 않은 지각”은 없기 때문에 인간에게 오해(잘못된 지각)는 불가피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기억이 없는 인간은 없으니까요. 하지만 그렇다고 오해에서 벗어날 길이 전혀 없는 건 아닙니다. 어떻게 오해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단순히 지각하기보다 어떤 지각이든 그 지각에는 반드시 어떤 기억이 들러붙어 있다는 사실을 지각해야 할 겁니다.      



 이는 오해 하는 경우와 오해 받는 경우, 두 경우의 문제 모두에 적용할 수 있습니다. 근본적으로 모든 오해는 지각의 오해로 발생합니다. 즉 누구에게나 있을 수 밖에 없는 왜곡된 지각을 순수한 지각이라 확신하기 때문에 벌어집니다. 친구‧연인‧아내의 말과 행동을 지각할 때 우리는 결코 순수하게 지각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지각에는 반드시 어떤 기억이 들러붙어 있습니다. 그 사실을 지각해야 합니다.      


 오해 하는 경우부터 생각해볼까요? 짙은 화장에 짧은 치마를 즐겨 입는 동료를 보며 그녀가 문란할 것이라 지각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런 지각은 오해죠. 이는 자신이 상대를 (어떤 기억에도 영향 받지 않고) 순수하게 지각했다고 확신했기에 발생한 오해입니다. 그 지각(그녀는 문란하다)은 자신의 개인적인 기억(음란물을 자주 본 기억)이 들러붙어 있기에 발생한 오해입니다. 만약 자신의 지각(그녀는 문란하다)이 자신이 본 음란물의 기억이 들러붙었기 발생한 지각은 아닌지 성찰해볼 수 있다면, 오해는 현저히 줄거나 사라지게 될 겁니다.      

 오해를 받는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군가 우리를 문란한(괴팍한‧무례한) 여자라고 오해할 수 있지요. 하지만 이는 크게 신경 쓸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가 자신을 오해하지만 않는다면, 타인의 오해는 크게 신경 쓸 필요가 없습니다. 그 오해는 우리 자신의 문제이기보다 상대가 그릇되게 지각을 할 수밖에 없게 만든 상대의 기억의 문제일 뿐이니까요. 우리를 오해하는 이들에게 그저 넌지시 이야기해주면 됩니다. “내가 문란해(괴팍해‧무례해)보이는 건 당신의 문란한 기억은 때문인 것은 아닐까요?” “사실상 기억에 젖어 있지 않는 지각은 없다.” 이 삶의 진실을 깨닫는 것으로 오해로부터 어느 정도 자유로워질 수 있습니다.      



『철학자의 일상적 조언』


지각의 편리함과 신속성은 그러한 대가를 치른 것이다그러나 거기서부터 또한 온갖 종류의 착각들이 생긴다물질과 기억 앙리 베르그손 

         

 오해로부터 벗어나려면 불편함과 더딤을 견뎌야 합니다. 왜 오해는 사라지지 않는 걸까요? ‘오해’는 편리하고 신속하기 때문입니다. 한 사람의 진정한 속내를 읽어내는 ‘이해’는 불편하고 더딥니다. 이는 당연한 일입니다. 한 사람의 속내는 복잡하고 미묘하며 또한 수시로 변하니까요. 한 사람의 속내를 읽어내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죠. 바로 이 때문에 오해의 충동이 발생합니다. 

 오해는 ‘할 수밖에 없는 마음’이 아니라 ‘하고 싶은 마음’에 가깝습니다. 상대를 ‘이해’하기보다 기존의 기억에 의존에 상대를 ‘오해’하는 편이 상황을 신속하고 편리하게 파악할 수 있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틱틱 거리는 말투를 가진 사람이 사실은 속정 깊은 사람일 수 있습니다. 그의 속내를 ‘이해’ 하려면 불편함을 견디며 그를 오래보아야 합니다. 하지만 세상 사람들은 그런 불편함과 더딤을 견디려 하지 않죠. 한 사람을 편리하고 신속하게 파악하고 싶어 하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 “지각의 편리함과 신속성” 때문에 상대를 오해하고 또 오해받게 되는 “온갖 종류의 착각들이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에 난무하는 오해들은 그런 “지각의 편리함과 신속성”을 위해 치른 불행한 대가인 셈입니다. 그러니 오해로부터 벗어나고 싶다면 편리함과 신속함을 버려야 합니다. 한 사람을 편리하고 신속하게 이해하고 싶다는 바람 때문에 그 사람을 오해하게 되는 것이니까요. 

 누군가 우리를 편리하고 신속하게 지각 해주기를 바란다면 오해는 필연적입니다. 그러니 오해 받고 싶지 않다면 누군가 우리를 편리하고 신속하게 지각해주기를 바라는 마음부터 버려야 합니다. 또 반대로 누군가를 오해하고 싶지 않다면 한 사람을 편리하고 신속하게 지각하려는 태도를 버려야 합니다. 

 오해로부터 벗어나 진정한 관계를 맺고 싶다면 한 사람을 지각하는 과정에서 불편함과 조바심을 견디며 천천히 섬세하고 조심스럽게 다가서려 해야 합니다. 그 지난한 과정 속에서 진정한 관계는 꽃필 수 있을 겁니다. 꽃이든 사람이든, 오래 보아야 예쁘고, 자세히 보아야 사랑스러운 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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