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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알튀세르

‘나’는 왜 ‘내’가 되었는가?

헤이 거기 당신!” 만일 우리가 상정한 이론적 장면이 길거리에서 일어난다고 가정한다면호명된 개체는 뒤돌아볼 것이다이 단순한 180˚의 물리적 선회에 의해서 그는 주체가 된다왜냐하면 그는 호명이 바로’ 그에게 행해졌으며, ‘호명된 자가 바로 (다른 사람이 아니라라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아미엥에서의 주장』 「이데올로기와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 루이 알튀세르 



 ‘나’는 왜 ‘내’가 되었을까요? 이는 난해한 질문도 괴상한 질문도 아닙니다. 우리는 모두 저마다의 정체성을 갖고 있습니다. 어떤 이는 괴팍한 ‘나’이고 어떤 이는 자상한 ‘나’입니다. 어떤 이는 열정적 ‘나’이며 어떤 이는 무난한 ‘나’입니다. 어떤 이는 성급한 ‘나’이며 어떤 이는 여유로운 ‘나’이지요. 어떤 이는 경제적 ‘나’이며 어떤 이는 예술적인 ‘나’이지요. 이처럼 우리 모두는 저마다 ‘나’라고 정의할 수 있는 어떤 특성을 갖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그런 ‘나’가 되었을까? 그것은 운명적이거나 혹은 유전적인 결과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지금의 ‘나’가 될 수밖에 없는 주어진 어떤 원인(사주팔자‧유전자…)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 원인은 반드시 외부적 조건과 상호작용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의 ‘나’는 내적 원인(사주‧유전자)과 외적 조건(환경)의 상호작용의 결과입니다. 한 날 한시에 태어난 쌍둥이도 천차만별인 정체성을 갖고 있는 경우가 이를 증명하는 경우일 겁니다.      


 우리는 우리가 될 수 있었던 수많은 ‘나’ 중에서 지금의 ‘나’가 되었을 뿐입니다. 달리 말해, 지금의 ‘나’가 괴팍한‧무난한‧성급한‧경제적 ‘나’이더라도, 그 ‘나’는 자상한‧열정적‧여유로운‧예술적 ‘나’가 될 수도 있었을 겁니다. 바로 이것이 지금 자신의 모습이 탐탁지 않은 이들이 ‘나’는 왜 지금의 ‘내’가 되었는지를 더 자주 묻게 되는 이유일 겁니다. 지금의 (탐탁지 않은) ‘나’가 된 이유를 찾으면 (내가 바라는) 다른 ‘나’로 변할 수 있을 것이란 희망을 품을 수 있으니까요.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지금의 ‘나’가 되었을까요? 알튀세르라면, ‘호명呼名’(이름 부르기) 때문이라고 답할 겁니다. 길을 걷고 있을 때 누군가 “헤이 거기 당신!”이라고 우리를 부른다고 해봅시다. 그때 우리는 뒤를 돌아보게 되겠지요, “이 단순한 180˚의 물리적 선회에 의해서” 우리는 “주체” 즉, 바로 ‘나’가 되게 됩니다. 달리 말해, 누군가의 호명이 우리에게 행해지고, 그 호명된 자가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바로 ‘나’라는 깨달았을 때 우리는 비로소 ‘나’가 된다는 겁니다. 


 쉽게 말해, 누군가 ‘나’의 이름을 부를 때 ‘나’가 된다는 겁니다. 이것이 알튀세르의 ‘호명呼名이론’입니다. 알튀세르의 ‘호명이론’은 난해하기보다 황당합니다. 겨우 이름을 부르는 것에서 ‘나’라는 존재가 만들어진다니요? 이보다 더 황당하게 들리는 말도 없을 겁니다. 하지만 이는 삶의 진실을 아주 날카롭게 통찰하는 논의입니다. 예를 들어볼까요? ‘이도혁’이라는 늘 소심한 한 아이가 있다고 해봅시다. 그 아이는 왜 소심해졌을까요? 그의 부모가 그 아이를 ‘이도혁!’이라고 불렀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호명'이 그 자체가 아니라 누가(정확히는 어떤 사회구조에서) '호명' 했느냐입니다. ‘도혁’의 어머니는 성격이 급한 청결강박을 가진 분이었고, 아버지는 다혈질의 원칙주의자였습니다. 방이 조금만 어지럽혀져 있을 때, 어머니는 아이를 다그치듯 불렀습니다. “이도혁!” 지각을 하거나 준비물을 잊었을 때, 아버지는 아이를 윽박지르듯 불렀습니다. “이도혁!” 부모의 이 호명에 아이가 “네”라고 답하는 순간 아이는 “주체(나)”가 만들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방을 더럽힐까 실수할까 늘 조마조마 하느라 주눅 들어 있는 소심한 “나!(주체)”가 되어버린 겁니다.      



 반대로 ‘권민주’라는 아이가 늘 여유 있고 명랑한 '나'가 된 이유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아이의 주변(가족‧친척‧선생‧친구…) 사람들이 그 아이를 “민주야~”라며 차분하고 밝고 따뜻하게 불러주었기 때문일 겁니다. 아이들만 그럴까요? 전혀 그렇지 않죠. ‘황진규’라는 사람이 있다고 해봅시다. 그는 대학생일 때는 도전적이고 열정적인 ‘나’였으며, 군대에서는 경직되고 폭력적인 ‘나’였으며, 직장에서는 무기력하고 순종적인 ‘나’였습니다. 그는 왜 그렇게 되었을까요? 대학생 때의 “진규야~”라는 호명이 도전적이고 열정적인 주체(나)로, 군대에서의 “황 일병!”이라는 호명이 경직되고 폭력적인 주체(나)로, 직장에서의 “황 대리!”호명이 무기력하고 순응적인 주체(나)로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이도혁!’ ‘권민주!’ ‘황진규!’ 이처럼 누군가 우리를 부르고 우리가 뒤를 돌아볼 때 우리는 주체가 됩니다. 우리는 태어나는 순간에는 아무런 존재도 아닙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 어느 순간 ‘황진규!’(권민주!)라는 호명에 대답하게 되는 순간이 옵니다. 바로 그때가 바로 나의 정체성이 확증되는 순간입니다. “황진규(권민주)!”라는 호명에 응답하는 순간, 그 사람은 한국인이고, 황(권)씨 성을 가졌고, 중학생(대학생)이고, 노동자(자본가)의 아들(딸)이라는 주체로 탄생하게 됩니다.      


 이에 대해 알튀세르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우리가 호명이라고 부르는 이러한 매우 정확한 사건을 통해 개인들을 주체로 ‘변형’시키는 방식으로 활동하고 ‘작용’함을 암시하는 것이다.” 즉, 이누군가 이름을 부르고 “네”라고 답하는 과정에서 한 개인의 생각·판단·행동 등 한 사람을 규정하는 주체성이 성립하게 된다는 겁니다. 이런 호명이론은 사회적 차원으로 확장할 수 있습니다. 


 한국의 직장과 스웨덴의 직장을 생각해봅시다. 한국의 직장에서 “황진규”라는 호명과 스웨덴의 직장에서 “다르덴”이라는 호명은 같은 주체(나)를 성립하지 않습니다. “황진규”라는 호명은 직장에서 주눅 들어 눈치를 보거나 굽실거리는 주체를 성립하게 되는 반면, “다르덴”이라는 호명은 자본가(사장)과 동등한 존재로서 주체를 성립하게 됩니다. 이는 한국의 사회(직장)에서의 호명은 인간보다 자본이 더 높은 가치를 갖는 관계 내에서 호명이고, 스웨덴의 사회(직장)에서의 호명은 자본보다 인간이 더 높은 가치를 갖는 관계 내에서 호명이기 때문일 겁니다.      


 이처럼, 누군가 우리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단순한 호명이 아닙니다. 그 호명은 ‘항상-이미’ 구성되어 있는 특정한 사회적 관계(가정‧학교‧군대‧직장‧자본주의‧경쟁중심사회‧사회주의‧복지중심사회…) 속의 호명이고, 바로 이 호명이 특정한 ‘나’를 형성시키게 됩니다.      


 ‘나’는 왜 ‘내’가 되었을까요? 지금의 ‘나’가 어떤 모습이든, 특정한 사회적 관계 내의 호명 아래서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지금의 ‘나’의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자책할 필요 없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잘못이기보다 ‘항상-이미’ 존재해왔던 사회적 관계 아래서의 호명 때문이니까요. 지금 나의 모습이 마음에 든다고 우쭐할 필요 없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노력이기보다 ‘항상-이미’ 존재해왔던 사회적 관계 아래서의 호명 때문일 뿐이니까요.  ‘나’는 그저 이름 불려진 ‘나’일 뿐입니다.      



『철학자의 일상적 조언』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김춘수  

   

 다른 ‘나’가 되고 싶나요? 우리의 이름을 ‘다르게’ 불러줄 사람을 찾으세요. 여기서 ‘다르게’는 두 가지 방식이 있습니다. 이름 자체를 다르게 불러주는 방식과 같은 이름을 다르게 불러주는 방식입니다. 먼저 이름 자체를 다르게 불러주는 방식부터 이야기해볼까요? 우리는 언제 가장 다른 ‘나’가 될까요? 바로 사랑 받을 때입니다. 연인의 애칭이 이런 삶의 진실을 가장 잘 드러냅니다. ‘나’의 이름이 있지만 연인은 ‘나’를 “애기야” “이쁜이” 등등으로 불러 줄 때가 있지요. 연인이 우리의 이름을 다르게 불러 주었을 때, 우리는 기존의 ‘나’가 아닌 “애기”가 되고 “이쁜이”가 됩니다. 이렇게 우리는 다른 ‘나’가 되곤 합니다. 

 같은 이름을 다르게 불러주는 방식도 있습니다. 우리는 언제 다른 ‘나’가 될까요? 다른 사회적 관계 속으로 들어가게 될 때입니다. 이민이나 유학을 생각해볼까요? 이민이나 유학을 가서도 자신의 이름을 계속 유지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한국에서 호명(“김영순”)과 외국에서의 호명(“김영순”)은 같은 이름을 부를 뿐, 사실은 전혀 다른 호명입니다. 한국의 사회적 관계 속에서 호명된 “김영순”과 미국의 사회적 관계 속에서 호명된 “김영순”이 형성하게 될 주체는 전혀 다른 주체일 수밖에 없습니다. 

 역설적이게도 호명이론에서 중요한 건 호명이 아닙니다. 주체를 성립하는 호명에서 중요한 건, 이름 그 자체가 아닙니다. 이름이 불러지는 사회적 관계입니다. ‘나’를 “김영순”이라고 부르든, “애기야”라고 부르든, “이쁜이”라고 부르든 그것은 사실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나’를 호명하게 되는 ‘너’가 중요합니다. 그 ‘너’만 있다면, ‘나’를 애칭으로 부르든 이름을 부르든 ‘나’는 기존의 ‘나’를 벗어나 새로운 ‘나’가 될 테니까요. 그러니 중요한 것은 호명이 아니라 ‘나’의 이름을 ‘다르게!’ 호명해줄 ‘너’입니다. 

 지금의 ‘나’를 벗어나 새로운 ‘나’가 되고 싶다면, 우리는 ‘너’를 찾아야 합니다. 우리의 이름을 다르게 불러줄 소중한 ‘너’ 말입니다. 김춘수 시인은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왜 누군가의 ‘꽃’이 되지 못했을까요? 우리가 ‘꽃’이 될 수 있는 호명을 아무도 해주지 않았기 때문일 겁니다. 아직 꽃이 되지 못한 이들을 위해 김춘수 시인의 이야기를 감히 이렇게 바꾸고 싶습니다. “내가 그의 이름을 ‘새롭게’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새로운’ 꽃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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