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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배려 : 미셸 푸코

어떻게 나를 배려할 것인가?

 자기배려epimelesthai heautou는 중요한 의미를 하나 가지고 있습니다… 이 말의 어원은 … 수련하다’ ‘단련하다라는 의미를 갖습니다… 배려epimelesthai’는 정신적인 태도라기보다는 훨씬 행동의 형식응용적이고 규칙화된 경계 행위의 의미를 갖습니다주체의 해석학 콜레르 주 프랑스 강의 1981~1982』 미셸 푸코     


자기 본래 상태의 회복을 위해 스스로를 다시 세울 수 있는 수단이 존재합니다단 한 번도 되어본 적 없는 자기되기가 바로 자기실천의 가장 핵심적인 요소 중 하나이며 중심 주제입니다주체의 해석학 콜레르 주 프랑스 강의 1981~1982』 미셸 푸코     



 ‘다른 사람을 배려하기 전에 자신을 먼저 배려해야 한다.’ 익숙한 조언입니다. 이는 정말 옳은 말입니다. 삶이 언제 가장 불행해질까요? 다른 사람들의 눈치 보느라 정작 자신을 위해서 살지 못하게 될 때입니다. 삶이 언제 가장 행복해질까요? 그것은 다른 누구보다 자신을 잘 돌보며 자신을 가장 먼저 배려할 때일 겁니다. 그러니 우리네 삶을 잘 살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을 가장 먼저 가장 잘 배려하는 일일 겁니다. 


 그렇다면 자신을 배려한다는 건 어떤 것일까요? 흔히 배려를 (타인이든 자신이든) 그 대상을 친절하고 상냥하게 대하는 일이라고 여깁니다. 하지만 진정한 배려는 그런 것과 전혀 상관이 없스니다. 배려가 무엇인가요? 특정한 대상을 도와주거나 보살펴주려는 마음입니다. 그러니 진정한 배려는 상대와 상황에 따라 그 형식이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진정으로 누군가를 돕고 보살핀다는 것은 상대와 그 상대가 처한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으니까요.     


 배고픈 이에게 음식을 주는 것이 배려인 것처럼, 체력이 약한 이에게 운동을 강권하는 것 역시 배려입니다. 더위에 지친 아이에게 차가운 음료를 주는 것이 배려인 것처럼, 감기에 걸린 아이에게 아이스크림을 뺏는 것이 진정한 배려입니다. 이처럼, 진정한 배려는 때로 불친절이나 다그침 혹은 강압적인 양상으로 드러날 수도 있습니다. 



 ‘자기배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은 단지 자신을 친절하고 상냥하게 대하는 일이 아닙니다. 푸코는 이 “자기배려”가 친절함이나 상냥함같은 “정신적인 태도라기보다 훨씬 행동적인 형식, 응용적이고 규칙화된 경계 행위”에 가깝다고 말합니다. 즉, “자기배려”는 “‘수련하다’ 혹은 ‘단련하다’라는 의미”를 갖는 일종의 수행修行입니다. 쉽게 말해, “자기배려”는 어떤 경지에 이르기 위해 매일 무술이나 운동을 수련하고 단련하는 행동적이고 규칙적인 수행의 이미지에 가깝습니다. 

     

 “내가 돈에 집착하는 것은 가난했기 때문이야.” “내가 게으른 것은 직장일 많아서야.” 이런 태도는 ‘자기배려’일까요? 늘 돈에 집착하느라 주변 사람들에게 크고 작은 상처를 주는 이가 자신의 문제를 친절하고 상냥하게 합리화‧정당화하려는 태도는 결코 ‘자기배려’가 아닙니다. 직장 일 이외에는 항상 무기력해져 있는 이가 자신의 문제를 상냥하게 친절하게 합리화‧정당화하려는 태도는 결코 자기배려가 아닙니다.

      

 자기배려는 때로 자신을 불친절하게 다그치고 강압적으로 대하는 태도입니다. 그렇다고 이 자기배려가 자신을 부정하거나 학대하려는 태도는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이 자기배려는 진정으로 자신을 긍정하며 돕고 보살피는 태도에 가깝습니다. 매일 붓글씨를 수련해 일가를 이루는 서예가 혹은 매일 신체를 단련해 일가를 이루는 무예가처럼, 자신의 삶 안에서 때로는 엄격하고 고된 반복적인 수행을 통해 이르게 되는 어떤 경지가 바로 ‘자기배려’입니다.      



 푸코는 이런 수행을 ‘자기실천’이라고 합니다. 푸코는 진정한 ‘자기배려’에 이르기 위해서는 부단한 ‘자기실천’의 과정이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자기실천’의 과정에서 이르게 되는 ‘자기배려’는 어떤 모습일까요? 그것은 ‘자기되기’입니다. 푸코에 따르면, ‘자기실천’은 “자기 본래 상태의 회복”, 진정한 ‘나’ 돌아가는 과정입니다. 푸코는 이 “자기실천의 가장 핵심적인 요소”에 대해 이렇게 설명합니다. “단 한 번도 되어본 적 없는 자기되기!” 이는 생경한 이야기일 순 있겠으나, 난해한 이야기는 아닙니다. 


 체력을 약한 이들에게 운동을 가르친 적이 있습니다. 그 수업을 들었던 이들은 대부분 하나 같이 운동과는 전혀 상관없는 인생을 살아온 분들이었습니다. 몸 쓰는 법을 알지 못하는 분들에게 그 수업은 때로는 조금 엄격하고 강압적이고 고되었을 겁니다. 그 수업을 한 번도 거르지 않고 충실히 운동했던 이가 있었습니다. 그는 항상 정적이고 차분하며 정제된 생활을 하는 이였습니다. 그는 그 운동 수업을 정말 수행처럼 임했습니다. 수업이 끝나는 날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폭발적인 운동에 흥미가 생겼어요." 이것이 바로 ‘자기배려’입니다. ‘자기실천’을 통해 “단 한 번도 되어본 적 없는 자기되기”에 이르렀기 때문입니다. 그는 이제껏 숨이 턱까지 차며 근육이 찢어질 것 같은 폭발적인 운동은 자신과 전혀 상관없는 일이라고 여기며 살아왔습니다. 하지만 그는 불편하고 불쾌하며 때로는 고통스러울 수 있는 “행동의 형식, 응용적이고 규칙화된 경계 행위”를 기꺼이 견뎌내었습니다. 그 ‘자기실천’을 통해 그는 자신 안에 있었지만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자신을 발견함으로써 “단 한 번도 되어본 적 없는 자신”이 되었습니다. 진정으로 자신을 배려한다는 것은 이런 것입니다.   

   

 “나는 차분한 사람이야.” “나는 다혈질이야” “나는 돈이 가장 중요한 사람이야.” “나는 운동과는 관계없는 사람이야.” “나는 사람들과 마찰을 빚기보다 원만히 지내고 싶은 사람이야.” 이처럼 우리는 모두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자신에 대한 앎은 단지 (믿고 싶은) 믿음일 뿐, (알아야 할) 진실이 아닙니다. 우리네 삶을 있는 그대로 살펴볼까요? 우리의 인생은 그 시작부터 특정한 훈육(가정·학교·국가…)에 의해 특정한 자아가 자리 잡습니다. 그런 자아를 ‘나’라고 믿고 있을 뿐입니다.

      

 훈육된 자아는 진정한 ‘나’가 아니죠. 그 자아 안에는 언제나 오류·왜곡·악습·의존성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훈육된 자아는 진정한 ‘나’를 오해하는 오류를 범하게 만듭니다. 또 지속적인 훈육으로 인해 내면화된 악습과 의존성 때문에 진정한 ‘나’를 끊임없이 왜곡하게 마련입니다. 기존의 (차분한‧다혈질‧원만한‧계산적) ‘나’를 진정한 ‘나’라고 믿는 것은 훈육된 자아에 똬리를 틀고 있는 오류‧왜곡‧악습‧의존성을 넘어서지 못한 결과일 뿐입니다.      


 우리는 ‘자기실천’을 통해 이 우리 안에 있는 오류·왜곡·악습·의존성을 넘어서야 합니다. ‘자기실천’은 분명 불편하고 불쾌하며 낯설고 고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는 우리네 삶에서 결코 우회할 수 없는 실천 중 하나입니다. ‘자기실천’을 통해서만 우리 내면 깊은 곳에 가해진 훈육으로 인해 결코 드러날 기회가 없었던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 긍정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자기발견’과 ‘자기긍정’을 통해 특정한 훈육을 통해 속박되어 있던 진짜 ‘나’를 해방하는 것. 그것이 바로 진정한 ‘자기배려’입니다.


       

『철학자의 일상적 조언』

          

전향은 자기로 가는 향해 가는 활동자기로부터 시선을 떼지 않는 활동자신을 결정적인 목표로 고정시키는 활동그리고 궁극적으로 자기에 도달한다거나 되돌아가는 행위로 규정됩니다주체의 해석학 콜레르 주 프랑스 강의 1981~1982』 미셸 푸코


 자신을 배려하고 싶은가요? ‘전향’하세요. 전향이 무엇인가요? 기존에 자신이 갖고 있는 가치관을 전면적으로 바꾼다는 의미입니다. 정치적 전향 혹은 종교적 전향이 대표적일 겁니다.  기존의 정치적 이념을 전면적으로 바꾸거나(진보→보수) 혹은 기존의 종교적 믿음을 전면적으로 바꾸는 일(기독교→이슬람교)이 ‘전향’에 해당할 겁니다. 

 자기배려를 위한 ‘전향’은 어떤 의미일까요? 이는 자신을 배려하고 싶다면, 일정 정도 과거의 자신과 결별해야 한다는 의미일 겁니다. “나는 원래 운동을 싫어해” “나는 직장생활이 제일 잘 맞아.” “나는 안정적인 생활이 편해.” “나는 사람들과 어울리는 걸 잘 못해” 누구에게나 이런 자신의 가치관이 있죠. 진정으로 자신을 배려하고 싶다면, 이런 기존의 자신을 모습(가치관)과 결별하며 ‘전향’해야 합니다. ‘전향’, 즉 기존의 자신의 모습들을 포기하지 않고 자신을 구원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왜 그래야 할까요? 지금 우리가 ‘나’라고 믿는 모습(가치관)들은 대부분 특정한 훈육에 의해 포획된 모습에 지나지 않습니다. 게으른 ‘나’, 소극적인 ‘나’, 관심·인정을 원하는 ‘나’, 돈이 좋은 ‘나’, 안정적인 생활을 바라는 ‘나’ 이런 ‘나’는 모두 부모·선생·사회에 의해 훈육된 ‘나’일 뿐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진정으로 자신을 배려하기 위해서는 지금껏 부여잡고 있는 ‘나’의 특성들을 과감하게 포기할 수 있어야 합니다. 

 자기배려를 위한 ‘전향’은 대단히 거창하거나 어려운 일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귀찮고 힘들더라도 운동을 꾸준히 해보는 것, 불편하고 불쾌하더라도 타인의 관심·인정에서 벗어나는 시도를 해보는 것, 위험하더라도 불안정하고 가난한 삶을 기꺼이 경험해보는 것. 그 모든 일들은 ‘전향’입니다. 인생에 한 번 즈음은 과감하게 ‘전향’할 수 있어야 합니다. 과거의 훈육된 ‘나’와 결별하는 전향이 자신을 진정으로 구원할 수 있는 ‘자기배려’의 길을 열어주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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