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권태 : 질 들뢰즈

일상은 왜 지겨운가?

어쩌면 반복이라는 것 자체가 이미 속박인지도 모른다그러나 만약 반복이 죽음을 가져온다면구원과 치유를 가져오는 것또 무엇보다 다른 반복을 치유하는 것도 역시 반복이다차이와 반복 질 들뢰즈     



 일상은 지겹죠. 직장은 두말할 것도 없고, 가정, 친구 심지어 연인에게서 마저 권태를 느끼게 되곤 합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 걸까요? 단순히 오래되었기 때문일까요? 즉, 직장‧가정‧친구‧연인이 오래되었기 때문에 지겨워진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매년 근무지나 업무를 바꿔야 하는 직장인을 생각해볼까요? 그의 직장생활은 피로하고 고될 수는 있으되, 결코 권태롭지는 않을 겁니다. 가정‧친구‧연인도 마찬가지죠. 아주 오래되었지만, 1년 혹은 한 달에 한 두 번 밖에 볼 수 없는 가족, 친구, 연인은 권태가 아니라 애절함과 그리움의 대상이 될 겁니다. 이처럼, 권태는 단순히 오래되었기 때문에 발생하는 감정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일상의 권태는 어디서 올까요? 반복입니다. 직장‧가정은 왜 권태로워졌을까요? 매일 똑같은 일‧장소가 지겹게 반복되었기 때문입니다. 친구‧연인과 함께하는 삶은 왜 권태로워졌을까요? 그들과 함께 하는 일상이 지겹게 반복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는 반대로 생각해보면 더욱 분명해집니다. 반복이 없던 시기를 생각해보죠. 신입사원(혹은 어린) 시절, 직장(혹은 가정)은 권태는커녕 두려움과 호기심이 뒤엉킨 역동적인 공간이었을 겁니다. 친구와 연인도 그렇지 않나요? 그네들과 처음 만났을 때, 지겨움은 없고, 긴장과 설렘이 뒤엉킨 역동적인 시간을 보냈었죠. 이처럼 새로움(반복 없음)은 역동성을 낳고, 반복은 권태를 낳습니다.    



 들뢰즈는 이런 삶의 진실에 대해 “반복이라는 것 자체가 이미 속박”이라고 말합니다. 무엇인가 반복될 때 그것은 우리네 삶을 옭아매는 속박이 됩니다. 그리고 그 속박은 단순한 지겨움에 그치지 않죠. 들뢰즈의 말처럼, 심지어 권태를 야기하는 “반복은 죽음을 가져”오게 됩니다. 이는 단순한 비유이거나 과장만은 아닐 겁니다. 반복된 권태는 우리네 삶을 서서히 죽음으로 몰아갑니다. 권태는 ‘삶의 활력’生氣을 교살하니까요.  이런 죽음의 그림자는 우리네 일상에서 아주 쉽게 접할 수 있습니다.


 20년 동안 같은 장소에서 같은 업무를 한 직장인의 눈빛을 본 적이 있나요? 불치병을 얻어 점점 생기를 잃고 서서히 죽어가는 이의 눈빛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겁니다. 그들은 물리적으로 살아 있으되, 정서적으로는 죽어 있는 상태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권태는 가벼운 지겨움이 아니라 죽음의 그림자를 드리우는 치명적 감정인 셈입니다. 그렇다면, 이 권태로부터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까요?


 많은 이들은 흔히 찾는 방법이 있죠. 새로움(반복 없음)입니다. 즉, 지겹게 반복되는 일상에서 일탈해서 새로운 대상을 찾으려 하죠. “뭐, 새로운 거 없어?” 일상적 권태에 짓눌려 가는 일들의 입버릇이죠. 끊임없이 새로운 영화나 드라마를 찾고, 새로운 사람을 만나려 소개팅을 하고, 새로운 취미를 찾으려 여기저기 기웃거리고, 새로운 곳으로 여행을 떠나는 이들은 흔하죠. 이는 모두 새로움을 통해 권태를 벗어나려는 일상적 시도들입니다. 이들의 시도는 성공하게 될까요? 즉, 그들은 새로움을 찾아 권태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아마 그렇지 않을 겁니다.



 “결국 다 지겹네.” 새로움(반복 없음)으로 권태를 벗어나려 했던 이들이 끝내 하게 되는 말입니다. 새로움을 통해 잠시는 지겨움에서 벗어날 수 있겠으나, 그들이 끝내 도착하게 되는 곳은 공허와 허무의 감정일 겁니다. 이는 권태 너머 권태입니다. 새로운 드라마를 보고,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새로운 취미를 찾고, 새로운 곳으로 여행을 가면 잠시 권태에서 벗어날 수는 있겠지만, 근본적인 권태는 여전히 사라지지 않을 겁니다.


 오히려 그들은 더 큰 권태(공허와 허무)에 시달리게 될지도 모릅니다. 새로움을 통해 권태로부터 벗어나고자 했지만, 그것으로도 결국 심연의 권태를 해소하지 못했으니까 말입니다. ‘권태(지겨움)→새로움(신작 영화‧드라마)→권태(공허‧허무)→새로움(신작 영화‧드라마)→권태(더 큰 공허‧허무)… ’ 이 끝없는 악순환이 평범한 이들이 겪고 있는 권태의 양상일 겁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심연의 권태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까요? 이 질문에 대해 들뢰즈는 수수께끼 같은 답변을 던집니다. “만약 반복이 죽음을 가져온다면, 구원과 치유를 가져오는 것, 또 무엇보다 다른 반복을 치유하는 것도 역시 반복이다.” 들뢰즈는 반복이 죽음의 그림자(권태)를 가져오지만, 동시에 반복이 그 죽음의 그림자로부터 우리는 치유하고 구원한다고 말합니다. 이 난해한 말은 어떤 의미일까요?



 흔히 모든 반복은 지겹다고 생각하지만 이는 삶의 진실이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두 가지 ‘반복’이 있습니다. 슬픈 반복과 기쁜 반복입니다. 전자는 어떤 것을 반복했을 때 점점 슬픔(지겨움‧짜증‧우울‧불안)에 잠식당하게 되는 반복이고, 후자는 어떤 것을 반복하면 할수록 점점 기쁨(음미‧충만‧유쾌‧활력)이 차오르게 되는 반복입니다. 이는 ‘직장’의 반복과 ‘사랑’의 반복으로 쉽게 설명할 수 있습니다.      


 ‘직장’의 반복은 전형적인 슬픈 반복이고, ‘사랑’은 대표적인 기쁜 반복입니다. 슈베르트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직장’인이 있다고 해보죠. 그는 매일 같이 반복해야 하는 직장에서 지쳐 집으로 돌아오면 슈베르트를 반복적으로 듣습니다. 즉, 그는 직장도 ‘반복’하고, 슈베르트(사랑)도 ‘반복’하며 사는 셈입니다. 그에게 이 두 반복은 같은 반복일까요? 이 둘은 전혀 다른 아니 정 반대의 반복입니다. 직장의 반복은 삶을 질실케 하는 ‘권태’(슬픔 : 지겨움‧짜증‧우울‧불안)을 주고, 슈베르트의 반복은 삶의 활력을 불어넣는 ‘생기’(기쁨 : 음미‧충만‧유쾌‧활력)을 줄 테니까요. 


 삶이 권태에 빠졌나요? 새로움을 찾을 시간이 아닙니다. 반복을 찾을 시간입니다. 단, 슬픈 반복이 아닌 기쁜 반복을 찾아야 합니다. 슬픈 반복은 죽음의 그림자를 드리울 뿐이고, 가벼운 새로움은 공허와 허무를 채울 뿐입니다. 삶의 활력을 촉발하는 반복은 오직 기쁜 반복뿐입니다. 반복하면 반복할수록 삶의 활력이 은은하게 차오르는 그런 반복의 대상을 찾아야 합니다. 그 대상이 무엇이든 반복해서 음미하면 할수록 더 깊은 기쁨을 주는 대상을 찾아야 합니다. 그때 죽음의 그림자를 드리우는 권태로부터 벗어나 활력 넘치는 삶을 발견할 수 있을 겁니다.     



『철학자의 일상적 조언』

               

시를 마음으로 새겨야 하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머리는 교환의 신체기관이지만심장은 반복을 사랑하는 기관이다차이와 반복 질 들뢰즈


 삶이 지겨운가요? ‘시’를 읽으세요. 시의 본질은 무엇일까요? 반복입니다. 시를 한 번만 읽는 사람은 시를 읽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좋은 시는 반복해서 읽으며 음미할 때 진정으로 우리 곁에 와 닿습니다. 여러분에게는 그런 ‘시’가 있나요? 여기서 ‘시’는 단지 문학 작품만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그 ‘시’는 ‘사람’이도, ‘운동’이어도, ‘그림’이어도, ‘영화’여도 좋고, ‘음악’이어도 좋습니다. 

 한 ‘사람’을 반복해서 만나지만 전혀 지겹지 않고 만나면 만날수록 더 깊은 기쁨을 주는 사람이 있나요? 매일 ‘운동’하러 가지만 지겹기는커녕 매번 더 큰 기쁨을 더해주는 운동이 있나요? 매번 반복해서 보고 듣지만 그때마다 전혀 새로운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그림’과 ‘영화’와 ‘음악’이 있나요? 그런 ‘시’와 같은 사람‧운동‧그림‧영화‧음악이 우리네 삶을 권태로부터 구원할 겁니다. 

 반복할수록 지겨운 대상(사람‧운동‧그림‧영화‧음악…)이 있죠. 그런 대상은 “교환의 신체기관”인 ‘머리’로 만나는 대상일 겁니다. ‘머리’가 계산해서 효율과 효과를 따질 때 반복은 지겨워질 수밖에 없죠. 반면 반복이 새로움과 활력을 준다면 그 반복의 대상은 “반복을 사랑하는 기관”인 ‘심장(박동!)’이 반응하는 대상일 겁니다. 심장이 반응하는 대상은 반복할수록 더 큰 기쁨을 주게 마련입니다. 

 ‘시’는 마음의 고향의 같은 존재입니다. 아주 오래 반복되었지만 지겹기는커녕 음미하면 할수록 잔잔하고 은은한 기쁨으로 안정감을 주는 존재. 그래서 삶의 고통이 찾아올 때 찾게 되는 존재. 그것이 바로 ‘시’입니다. 우리는 ‘시’적인 한 사람(운동‧영화‧그림‧음악)을 찾아야 합니다. 그 한 사람(운동‧영화‧그림‧음악)을 반복해야 합니다. 늘 교환만을 생각하는 ‘머리’가 아닌 “반복을 사랑하는” ‘심장’이 반응하는 대상을 찾을 때, 권태 너머 생기 넘치는 삶에 이를 수 있습니다.      



                    

이전 18화 자기 배려 : 미셸 푸코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