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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관 : 피에르 부르디외

습관은 바꿀 수 있을까?

행위자가 가지는 미래에 대한 행위 성향은 특정한 물질적 존재 조건 하에서 만들어지며특정한 객관적 기회의 구조(하나의 객관적 미래)라는 형태로 파악된다이 미래에 대한 성향은 구조화된 구조structured structure’인데이는 동시에 구조화하는 구조structuring structure’처럼 작동한다자본주의의 아비투스』 피에르 부르디외   



 습관. 우리네 삶을 실제적으로 밀고 가는 힘이죠. 흔히 깊은 생각과 고민이 우리네 삶을 밀고 나간다고 믿지만 이는 전혀 사실이 아니죠. 생각과 고민이 실제 우리네 삶에 미치는 영향은 미비하기만 합니다. ‘공부하고 운동하며 살아야 한다.’ 이렇게 생각하고 고민하며 사는 이들은 흔합니다. 하지만 그런 삶을 체화해서 실천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지요. 우리네 삶을 실제적으로 구성하는 힘은 습관에 있기 때문입니다.          


 습관은 중요합니다. 좋은 삶을 살고 있는 이들은 좋은 습관을, 나쁜 삶을 살고 있는 이들은 나쁜 습관을 갖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니까요. 이런 중요한 습관을 만들거나 바꿀 수 있을까요? 물을 필요도 없는 질문입니다. 의지의 문제가 남기는 하겠지만, 새로운 습관을 만들거나 기존의 습관을 바꿀 수 있다는 데 누구도 이견이 없을 겁니다. 공부(운동) 습관이 없다고 하더라도, 의지를 갖고 꾸준히 공부(운동)을 하다보면 어느새 그것이 새로운 습관이 되곤 하니까요.    

  

 그런데 습관은 정말 만들거나 바꿀 수 있는 것일까요? 조금 깊게 생각해보면 이는 쉽게 답할 수 없는 질문임을 알게 됩니다. 습관에는 두 가지 습관이 있습니다. 의식적 습관과 무의식적 습관. 의식적 습관은 무엇일까요? 이는 말 그대로 자신이 의식하고 있는 습관입니다. 예컨대, 게임, 군것질, 독서, 운동 등등 이런 습관은 우리가 분명하게 의식하고 있는 습관입니다. 이런 의식적 습관은 상대적으로 쉽게 바꿀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무의식적 습관도 있습니다. 즉, 우리가 의식적으로 인지하지 못하는 수많은 습관들이 있습니다. 이는 구체적으로 어떤 습관일까요? 태도나 취향, 성향, 감정, 욕망 같은 것들이지요. 예를 들어볼까요? 고수를 고약한 맛으로 느끼지만 김치를 맛있다고 느끼는 것. 슈베르트의 곡에서 지루함을 느끼지만 아이돌 가수의 노래에서 감동을 느끼는 것. 책이나 공연에 돈 쓰는 것에는 강한 거부감이 들지만, 옷이나 음식을 사는 데는 전혀 거부감이 없는 것. 이처럼 삶을 대하는 특정한 태도나 취향, 성향, 감정,욕망 역시 모두 습관입니다.

      

 습관이 무엇일까요? 반복적인 행위를 통해 내면화된 생활방식으로 정의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러니 특정한 태도, 취향, 성향, 감정,욕망 역시 모두 습관인 셈입니다, 우리는 왜 김치를 맛있는 것으로, 아이돌 음악을 감동적인 것으로, 옷이나 음식에 돈을 아끼지 않게 되었을까요? 그것은 긴 시간 게임‧군것질‧독서‧운동에 길들여져 그것이 습관이 된 것처럼, 반복적인 행위를 통해 내면화된 습관화된 일입니다. 우리가 이런 습관들을 습관이라 인지하지 못하는 것은 그 습관(태도‧취향‧성향‧감정‧욕망)들이 모두 무의식적 습관이기 때문입니다.     


 부르디외는 이러한 습관을 “행위자가 가지는 미래에 대한 행위 성향”이라고 정의합니다. 어떤 사람이 앞으로 어떤 행위를 하게 될지를 결정하는 성향이 바로 습관이라는 겁니다. 부르디외는 의식적 습관과 무의식적 습관을 모두 아울러 ‘아비투스’라고 말합니다. ‘아비투스Habitus’는 무엇일까요? (‘Habitus’는 ‘habit습관’의 어원이다.) 주어진 상황에서 적절한 판단과 행동을 유도하는 감성구조(느낌‧감각)입니다. 이는 사회적 조건과 환경(가정‧학교‧교육…)에 의해서 몸과 마음에 각인되는 습관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부유하고 많은 배운 이들은 그들만의 ‘아비투스’가 있고, 가난하고 못 배운 이들은 그들만의 ‘아비투스’가 있습니다. 전자는 정갈한 음식과 와인, 클래식 음악과 문학에서 즐거움을 느끼고, 가난하고 못 배운 이들은 푸짐한 음식과 소주, 대중음악과 연속극에서 즐거움을 느낍니다. 즉, 정갈한 음식‧와인‧클래식 음악‧문학에서 즐거움(혹은 불쾌감)을 느끼는 감성구조 혹은 푸짐한 음식‧소주‧대중가요‧연속극에서 즐거움(혹은 불쾌감)을 느끼는 감성구조가 바로 '아비투스'입니다.       


 ‘아비투스’는 정말 바꾸기 어려운 습관입니다. 그래서 부르디외는 ‘아비투스’를 “구조화된 구조structured structure”라고 말합니다. 특정한(가난한 혹은 부유한) 환경이라는 구조에서 자란 아이의 내면은 특정한 습관으로 구조화(고착화)되지요. 이처럼, ‘아비투스’는 “구조화된 구조”이기에 너무나 견고합니다. 이는 우리네 삶에서 너무 쉽게 확인되지 않나요? 가난하고 못 배운 이가 양은 적고 비싼 음식을 즐겁게 먹을 수 있을까요? 가사도 없는 클래식 음악을 즐겁게 들을 수 있을까요? 교양 있는 사람으로 보이기 위해 즐거운 척을 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진정한 즐거움을 느끼기는 어려울 겁니다.  


 우리가 문제 삼아야 하는 습관은 의식적 습관이 아닙니다. 바로 ‘아비투스’입니다. 우리의 모든 의식적 습관들은 모두 ‘아비투스’라는 근본적 습관에 의해서 자리 잡기 때문입니다. 왜 공부하고 운동하는 습관이 없을까요? 어린 시절부터 그것이 습관화될 조건과 환경에서 자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왜 게임하고 영상을 보는 습관이 생겼을까요? 어린 시절부터 그것이 습관화될 조건과 환경에서 길러졌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갖고 있는 모든 의식적 습관은 모두 ‘아비투스’의 작용아래서 형성된 것입니다. 그러니 진정한 의미에서 습관을 바꾼다는 것은 '아비투스'를 바꾼다는 말에 다름 아닐 겁니다. 



 그렇다면 아비투스는 바꿀 수 있을까요? 그렇습니다. 부르디외는 아비투스가 분명 “구조화된 구조”이지만 “이는 동시에 구조화하는 구조structuring structure처럼 작동한다”고 말합니다. 아비투스는 구조화되어서 견고하지만 완전히 고정(고착화)되어 있지는 않습니다. 즉, ‘아비투스’는 새로운 습관을 “구조화하는 구조”(유동화)의 기능도 합니다. 이는 누구나 한 번 즈음 경험해봤을 겁니다. 고수가 든 쌀국수를 먹지 못했던 사람도 쌀국수를 몇 번 먹다보면 그 맛이 가끔 생각나기도 합니다. 역한 냄새가 나는 염소 치즈도 몇 번 먹다보면 그 맛의 매력을 알게 되기도 합니다. 이는 모두 “구조화하는 구조”로서의 ‘아비투스’의 작동입니다.

     

 습관을 바꾸는 일은 “구조화된 구조”에서 “구조화하는 구조”로 나아가는 일입니다. 조금의 불편함과 불쾌감을 견딜 수만 있다면 ‘아비투스’는 "구조화된 구조"에서 "구조화하는 구조"로 전환될 수 있습니다. 이는 복잡하거나 현학적인 말이 전혀 아닙니다. 사랑하는 이 앞에서조차 돈을 아끼려는 ‘아비투스’를 가진 이는 흔하지요. 이런 ‘아비투스’는 ‘잘못된 것’이라기보다 ‘어쩔 수 없는 것’에 가까울 겁니다. 그는 그런 ‘아비투스’가 생길 수밖에 없는 조건과 환경에서 길러졌을 테니까요.  


 하지만 그런 ‘아비투스’도 얼마든지 바꿀 수 있습니다. 조금 고통스럽더라도, 사랑하는 이에게 돈을 아끼지 말고 크고 작은 선물들을 해보세요. 고약했던 고수가, 역겨웠던 염소치즈가 음식의 풍미를 더해주는 맛있는 재료가 된 것처럼, 돈을 아끼지 않고 사랑하려는 마음이 삶의 풍미를 더 해주는 아름다운 재료가 될 겁니다. 조금의 불편과 불쾌를 감당할 수 있을 때, ‘아비투스’는 "구조화된 구조"를 넘어서 새로운 아비투스를 생성할 수 있는 "구조화하는 구조"가 될 겁니다. 그렇게 ‘아비투스’를 넘을 때 이제껏 경험해보지 못한 새로운 삶의 지평이 열릴 겁니다. ‘아비투스(습관)’을 바꿀 때 우리는 새로운 ‘존재’가 됩니다.


                                

『철학자의 일상적 조언』 


마주침의 대상은 감각 속에서 실질적인 감성을 분만한다이것은 감각될 수 있는 어떤 것이 아니라 감각되어야 할 어떤 것이다차이와 반복』 질 들뢰즈      

‘퓨전fusion’을 즐기세요. 아비투스 너머 삶을 바꾸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내면화된 ‘아비투스’는 우리의 기쁨과 슬픔의 감성구조로 확실히 자리 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삶의 맥락(가정‧학교‧교육…) 아래서 익숙했던 것(김치‧라면…)에서 유쾌함을 느끼고 낯선 것(고수‧치즈…)에서 불쾌함을 느낍니다. 이것이 ‘아비투스’를 넘기 어려운 이유죠. 항상 유쾌한 것을 취하고 싶고, 불쾌한 것을 회피하고 싶은 것은 인간의 본성이니까요.

 이 문제는 ‘퓨전’으로 극복할 수 있을 겁니다. 퓨전은 마주침입니다. 서로 다른 두 종류 이상의 것을 섞어 새롭게 마주치게 하는 것입니다. ‘고수’와 ‘치즈’를 직접적으로 경험하는 것, 즉 “구조화하는 구조”(새로운 습관)로 낯선 대상을 경험하는 일은 불편하고 불쾌한 일일 겁니다. 이때, 고수를 넣은 라면, 치즈를 넣은 김치볶음밥과 같은 퓨전음식을 경험해보면 어떨까요? 그런 잘 만든(마주친) 퓨전요리를 경험할 수 있다면, 우리는 고수와 치즈를 통해 유쾌하게 새로운 ‘아비투스’를 구성할 수 있을 겁니다. 

 퓨전은 기존의 ‘아비투스’(구조화된 구조) 너머 새로운 ‘아비투스’(구조화하는 구조)를 생성하는 좋은 대안일 수 있습니다. 클래식과 대중가요를 잘 어울리게 섞은 퓨전음악, 철학과 일상을 잘 어울리게 섞은 퓨전학문, 운동과 놀이를 잘 어울리게 섞은 퓨전운동. 이런 퓨전은 작게는 익숙한 것의 유쾌함으로 낯선 것의 불쾌함을 낮추어 줄 것이고, 크게는 익숙한 것과 낯선 것의 절묘한 조화로 더 큰 기쁨을 줄 수도 있을 겁니다. 견고한 ‘아비투스’를 넘어서 새로운 삶의 지평을 열고 싶나요? 퓨전, 즉 새로운 마주침이 새로운 ‘아비투스’의 길을 내어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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