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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정욕구 : 악셀 호네트

왜 인정받기를 바라는가?

인간은 필연적으로 인정받으며필연적으로 인정하는 존재이다 인간 자체는 인정 행위로서 운동이며이러한 운동이 바로 인간의 자연 상태를 극복한다즉 인간은 인정행위다인정투쟁 악셀 호네트          


사랑관계 속에서 성장한 최초의 상호인정 관계는 이후의 모든 정체성 발전의 필연적 전제이다인정투쟁 악셀 호네트


 

 우리네 삶을 얽매는 많은 요소들이 있습니다. 그 중 가장 큰 요소는 누가 뭐래도 ‘인정욕구’일 겁니다. 조금 구체적으로 살펴볼까요? 우리는 돈에 얽매여 살죠? 이는 돈이 없어서 생필품을 살 수 없기 때문일까요? 어떤 이는 차에 얽매여 살죠? 이는 작고 낡은 차의 기능성이 떨어지기 때문일까요? 어떤 이는 화장에 얽매여 살죠? 이는 화장한 자신이 만족스럽기 때문일까요? 어떤 이는 직장에 얽매여 살죠? 이는 업무가 많아서 일까요? 모두 그렇지 않습니다. 그 모든 것은 바로 인정욕구 때문이죠.   


 교환 수단으로서의 돈이 없어서 고통스러운 것이 아니죠. 돈이 없는 자신을 아무도 인정해주지 않을까봐 고통스러운 것이죠. 작고 낡은 차가 주는 불편함은 기능성이 아니라 타인의 시선 때문이죠. 화장의 피곤함 역시 화장하는 행위의 피곤함이 아니라 타인의 인정을 바라는 마음 때문이죠. 직장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일이 많아서 피곤한 것이 아니라 유능한 직원으로 인정받으려는 마음 때문 아니던가요? 이처럼 우리네 삶을 얽매는 요소는 다양하지만, 근본적으로는 모두 인정욕구 때문입니다. 


 그래서 일까요? 나름 똑똑하다고 자부하는 이들은 이렇게 말하곤 합니다. “다른 사람한테 인정받으려고 하지 마세요!” 이는 가능한 일일까요? 즉, 얽매인 삶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삶으로 나아가기 위해 타인의 인정으로 부터 벗어나려는 일련의 시도들은 성공할 수 있을까요?  이는 헛똑똑이들의 어리석은 시도일 뿐입니다. 이에 대해 악셀 호네트는 이렇게 말합니다. “인간은 필연적으로 인정받으며, 필연적으로 인정하는 존재이다.” 호네트에 따르면, 인간에게 ‘인정’은 선택 사항이 아니라 존재 조건입니다.



 “인간은 인정행위다.” 이것이 호네트가 말하는 인간의 정의입니다. 이는 부정할 수 없는 삶의 진실입니다. “다른 사람한테 인정받으려고 하지 마세요!” 대중들 앞에서 당당하고 자신 있게 외치는 이를 생각해볼까요? 그의 그런 당당함과 자신감은 어디서 왔을까요? 부모이든, 친구이든, 연인이든, 혹은 팬들이든 누군가의 ‘인정’이 있었기 때문일 겁니다. 인간은 누군가의 ‘인정’이 없다면, 주체적인 한 인간으로 존재할 수 없습니다. 여기서 ‘인정’은 작게는 관심‧칭찬이며 크게는 사랑일 수도 있을 겁니다. 


 “인간 자체는 인정행위로서 운동이며, 이러한 운동이 바로 인간의 자연 상태를 극복한다.” 호네트의 이 말 역시 이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누군가(부모‧친구‧연인…)로부터 ‘인정’(관심‧칭찬‧사랑)받고 또 누군가(부모‧친구‧연인…)를 ‘인정’(관심‧칭찬‧사랑)하는 운동을 끊임없는 합니다. 그 운동을 통해 인간의 자연 상태, 즉 실오라기 하나 없이 온통 낯선 것뿐인 세상으로 홀로 던져진 상태(공포‧당황‧주눅듦‧의존성…)을 조금씩 극복해나게 됩니다. 호네트의 말처럼, 누군가에게 ‘인정’을 받고 누군가를 ‘인정’하는 행위가 없다면 인간은 자연 상태를 극복해나가며 한 인간으로서 존재할 수 없습니다.  


 “타인의 인정을 갈구하지 말라” 당당하고 자신감 넘치는 이런 언행은 무지하거나 기만적입니다. 그들의 당당함과 자신감은 사실 타인의 ‘인정’으로부터 온 것입니다. 이런 삶의 진실을 알지 못하고 ‘타인의 인정을 바라지 말라’고 외치는 이는 얼마나 무지한가요? 만약 이런 삶의 진실을 모두 알고서도 ‘타인의 인정을 바라지 말라’고 말했다면 이는 얼마나 기만적인 일인가요? 자신 역시 누군가의 ‘인정’으로 당당함과 자신감을 얻게 되었으면서 타인에게는 그 삶의 진실을 숨기는 것이니까요.



 이제 우리는 하나 문제점에 봉착합니다. ‘인정’이 인간의 존재조건이라면, 타인에게 ‘인정’받으려는 노력을 무분별하게 긍정해야 하는 걸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인정욕구를 완전히 부정하는 삶만큼이나 인정욕구를 무분별하게 충족하려는 삶 역시 불행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인간의 숙명과도 같은 이 인정욕구를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 걸까요? 호네트는 이이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사랑관계 속에서 성장한 최초의 상호인정 관계는 이후의 모든 정체성 발전의 필연적 전제이다.”     


 호네트에 따르면, 한 인간의 정체성이 건강하게 발전해나가는 인정행위는 두 가지 필연적 전제가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사랑’과 ‘상호인정’입니다. 먼저 ‘사랑’에 관해서 이야기해보죠. 인정행위가 필연적이라고 해서 아무에게나 ‘인정’받으려 하거나 아무나 ‘인정’하려 해서는 안 됩니다. ‘사랑’의 관계 속에서 인정 행위를 해야 합니다. ‘인정’에는 조건적 인정이 있고, 무조건적 인정이 있습니다.  


 ‘사랑’은 무조건적 인정입니다. 직장(동료‧상사‧사장)에서 인정받는 것과 가족‧연인에게 인정받는 것은 전혀 다른 인정이죠. 전자는 조건적 인정이기에 정체성을 파괴할 가능성이 있지만, 후자는 무조건적 인정이기에 정체성을 건강하게 발전시켜나갈 수 있습니다. 어린 시절 부모에게 깊은 사랑을 충분히 받았던 이들이 건강한 마음을 가진 어른이 되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일 겁니다. 



 또 하나의 전제가 있습니다. 바로 ‘상호인정’입니다. ‘사랑’의 관계에서 인정을 받더라도, 그 인정행위가 상호적이지 않다면 그것 역시 우리네 삶을 건강하게 만들어주지 않습니다. 부모의 사랑을 예로 들어볼까요? 부모가 아이를 무조건적으로 인정(사랑)한다고 아이가 반드시 건강한 정체성을 갖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부모에게 충분히 사랑받은 아이 역시 건강한 정체성을 갖지 못하게 되는 경우는 흔하죠.  

    

 이런 일은 왜 일어나는 것일까요? 부모에게 사랑받았지만 아이가 부모를 인정(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사랑(인정)은 있지만, 그 사랑(인정)이 상호적이지 않을 때, 한 인간은 건강한 정체성을 갖기 어렵습니다. 연인 관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상대가 나를 사랑하는 눈빛으로 아무리 인정을 해주어도 내가 상대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상대의 인정이 나의 정체성을 건강하게 발전시키기 어렵습니다.    


 인간에게 인정행위는 필연적입니다. 하지만 그 인정행위는 결코 무분별해서는 안 됩니다. 인간은 반드시 ‘인정’이 필요하지만, 그 ‘인정’은 ‘사랑’의 관계 속에서 ‘상호인정’할 수 있는 ‘인정’이어야 합니다. 인정욕구의 철저한 부정("아무에게 인정받지 않겠어!")과 인정욕구의 과도한 긍정("모두에게 인정 받아야 해!)"은 모두 불행으로 가는 길입니다. 기쁜 삶은 그 두 갈래 길 사이에 있습니다. 사랑의 관계 속에서 서로를 인정하는 삶! 이것이 행복으로 가는 ‘인정’ 방식입니다.

          

『철학자의 일상적 조언』


사랑하는 사람은 신비스럽고 몽롱하게 사랑의 대상을 찾고 사랑에 빠져야 한다그래야만 사랑 때문에 장님이 되고애인의 모든 결점에 대해 장님이 되고애인의 모든 불완전성에 대해 장님이 된다… 그러나 연애는 그가 애인과 다른 사람을 혼동하는 일이 없게 하는 탁월한 눈을 주기도 한다사랑의 역사 쇠렌 키에르케고르           

 주체성을 버리세요. 이것이 진정한 ‘인정’을 받는 길입니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이와 반대로 말하죠. “주체적으로 사세요.” 그들이 말하는 주체성은 무엇일까요? ‘나’를 가장 중심에 두고 타인과 세계를 대하라는 말일 겁니다. 이는 얼핏 보면 뭔가 그럴듯하고 멋있는 말인 것 같지만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나’를 중심에 두고 타인과 세계를 대할 때 우리는 무엇을 잃게 될까요? 바로 ‘사랑’과 ‘상호인정’입니다. 누가 뭐래도, 사랑의 표어는 “당신 뜻대로 하소서”입니다. 그런데 주체적인(이라고  믿는) 이들은 항상 ‘자신’의 뜻대로 하려고 하지 결코 ‘당신’ 뜻대로 하려고 하지 않지요. 그래서 주체적인 이들은 필연적으로 '사랑'을 잃습니다. 그들은 ‘사랑’만을 잃게 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은 ‘상호인정’마저 잃을 수밖에 없습니다. 주체성을 표방하는 이들은 자신이 인정받는 데 혈안이 되어 있을 뿐, 좀처럼 타인을 인정하지 않죠. 타인을 인정한다는 것은 자신의 주체성에 흠집이 생기는 것처럼 느낄 테니까요. 이처럼 주체성은 사랑과 상호인정을 배격합니다. 이것이 자기성애narcissism적인 주체성(“내가 세상의 중심이야!)이 우리네 삶을 불행으로 몰고 가는 방식입니다.  

 진정한 주체성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자기성애적인 주체성을 버릴 때 얻게 되는 주체성입니다. 자기성애적인 주체성을 버릴 때 ‘사랑’과 ‘상호인정’에 이르게 됩니다. 그 사랑과 상호인정 속에서 발견하게 되는 ‘나’가 바로 진정으로 주체적인 ‘나’입니다. ‘나’를 버리고 ‘너’를 사랑하고 그 ‘너’로부터 인정받는 과정에서 발견하게 되는 ‘나’ 바로 그 ‘나’가 진정으로 주체적인 ‘나’일 겁니다. ‘나’를 통해 ‘너’를 보는 주체성은 자기성애적인 주체성일 뿐입니다. ‘너’를 통해 ‘나’를 보는 것! 이것이 바로 진정한 주체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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