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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 알랭 바디우

왜 사랑할 수 없는가?


사랑의 적은 경쟁자가 아니라 이기주의입니다.『사랑 예찬』 알랭 바디우



 사랑이 사라진 시대를 삽니다. 사랑에는 두 가지 종류의 사랑이 있습니다. 공적(공동체적)인 사랑과 사적인 사랑입니다. 먼저 공적인 사랑에 대해서 이야기해볼까요? 이는 공동체적 사랑, 즉 자신과 직접적으로 관계하진 않지만 함께 살아가는 이들에 대한 사랑입니다. 이런 사랑은 이미 신화가 되어버렸습니다. 생면부지의 사람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일은 이제 세상에는 존재하지 않는 동화나 신화 속 이야기가 된지 오랩니다.


 정말 그렇지 않나요? 마음만 먹으면 편히 살 수 있는 유능한 이(변호사‧의사‧독지가…)들이 고통 받은 사회적 약자들을 위해 가난을 감당하며 국경을 넘는 사례를 목격하곤 합니다. 이때 세상 사람들은 사랑이 아닌 의구심과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곤 합니다. “얼굴도 모르는 남을 왜 도와줘. 뭔가 꿍꿍이가 있겠지” 이런 의구심과 의심의 시선은 공적인 사랑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기 때문일 겁니다.

      

 공동체적 사랑만이 그럴까요? 사적인 사랑 역시 점점 더 사라져가고 있습니다. 사적인 사랑은 무엇일까요? 이성애적 사랑 혹은 가족애적 사랑이 대표적인 사적인 사랑입니다. 남녀가 만나 연애를 하고, 또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 가정을 꾸리게 되면서 자연스레 발생하게 되는 사랑이 있죠. (세상 사람들이 실재하는 사랑이라고 믿는) 이 지극히 사적인 사랑마저 이제 점점 사라져가고 있습니다. 이 역시 부정할 수 없을 겁니다.


      

 

서로를 사랑한다고 입버릇처럼 떠드는 연인들이 데이트 비용 때문에 다투는 일이 일상적 풍경이 된지 이미 오래되었지요. 가족애 역시 마찬가지 아닌가요? 부모가 자녀를 사랑으로 보살피기보다 돈이 얼마나 들어가는지 혹은 그 돈이 들어간 만큼 효과를 내고 있는지를 살피는 것 역시 일상적 풍경 아니던가요? 우리 시대의 사적인 사랑 역시 자본적 계산에 의해 잠식당한지 오래입니다. 공동체적 사랑은 이미 화석처럼 굳은 신화가 되었고, 사적인 사랑마저 화석처럼 굳어져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왜 사랑할 수 없게 되었을까요? 세상 사람들은 흔히 '경쟁자'들 때문이라고 답합니다. 즉, 사랑을 교살하는 적은 경쟁자라는 것이죠. 여기에는 두 가지 '경쟁자'가 있죠. ‘나’의 사랑을 방해하는 경쟁자와 ‘나’와 경쟁해야 하는 경쟁자. 전자를 ‘사랑의 경쟁자’로, 후자를 ‘생계의 경쟁자’로 표현할 수 있을 겁니다. 전자, 즉 ‘사랑의 경쟁자’는 누구일까요? 이는 흔한 삼각관계를 생각하면 됩니다. 내가 누군가를 사랑하려는 데, 그 사랑을 방해하려는 경쟁자가 나타날 수 있죠. 그 경쟁자만 없다면 사랑할 수 있는데, 그 경쟁자 때문에 사랑할 수 없게 되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사랑을 방해하고 가로 막는 그 경쟁자가 바로 ‘사랑의 경쟁자’입니다. 


 후자, 즉 ‘생계의 경쟁자’는 누구일까요? 이는 조금 더 일반적인 경쟁자입니다. 이들은 생계의 문제를 두고 ‘나’와 경쟁해야 하는 이들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 경쟁자들 때문에 사랑할 수 없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왜 사랑하지 않느냐?’ 이 질문에 열 명 중 여덟아홉은 세상살이가 팍팍해서라고 답합니다. 이는 먹고 살기 위해 경쟁해야 하는 이들이 많아서 사랑할 여유가 없다는 의미입니다. ‘사랑의 경쟁자’이건 ‘생계의 경쟁자’이건, 사랑할 수 없는 이유는 경쟁자 때문이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습니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요? 우리는 그러한 경쟁자들 때문에 사랑할 수 없는 것일까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이에 대해 바디우는 이렇게 말합니다. 



 “사랑의 적은 경쟁자가 아니라 이기주의입니다.” 이것이 어떤 의미일까요?  엄밀히 말해, 사랑에는 세 가지 사랑이 있습니다. ‘나’에 대한 사랑, ‘너’에 대한 사랑, 그리고 ‘우리’에 대한 사랑. ‘나’에 대한 사랑은 자기애일 테고, ‘너’에 대한 사랑은 사적인 사랑일 테고, '우리'에 대한 사랑은 공적 사랑일 겁니다. 이제 처음부터 다시 물어볼까요? 사랑은 정말 사라졌을까요? 아닙니다. 견고하고 강력하게 존재하는 사랑이 있죠. 바로 ‘나’에 대한 사랑입니다. 사라진 사랑은 ‘너’에 대한 사랑과 ‘우리’에 대한 사랑일 뿐입니다.

      

 정직하게 우리네 삶을 돌아볼까요? 우리가 공적인(‘우리’에 대한) 사랑 혹은 사적인(‘너’에 대한) 사랑을 할 수 없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요? 사랑을 방해하는 경쟁자 때문인가요? 혹은 먹고 살기 위해 경쟁해야 하는 경쟁자들 때문인가요? 둘 모두 아닙니다. ‘우리’에 대한 사랑, ‘너’에 대한 사랑이 사라진 이유는 바로 ‘나’에 대한 사랑, 즉 이기주의 때문입니다.      


 ‘나’의 사랑을 방해하는 경쟁자가 사랑을 앗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너’를 사랑하기보다 그 ‘너’를 경쟁자에게 빼앗기고 싶지 않다는 혹은 오직 ‘나’만 ‘너’를 소유하고 싶다는 이기주의(소유욕) 때문에 사랑이 파괴되는 것입니다. ‘소유욕’을 ‘사랑’으로 오해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던가요? ‘너’를 갖고 싶다는 것은 ‘소유욕’일 뿐,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은 소유가 아니라 존재이니까요. 아니 사랑은 소유할 수 없는 존재이니까요. 소유욕을 충족하려는 지독한 이기주의가 바로 사랑의 적입니다.


        

 생계를 위해 경쟁해야 하는 이들 때문에 사랑할 수 없는 것일까요? 이는 무지하거나 기만적인 변명이죠. 다른 사람보다 뒤처지고 싶지 않다는 혹은 다른 사람보다 앞서 나가고 싶다는 이기주의(탐욕) 때문에 사랑이 파괴되는 것입니다. 먹고 살기 어렵기 때문에 사랑할 수 없는 것이 아닙니다. 경쟁에서 도태되어 비난 받는 ‘나’를 견디기 어렵기 때문에 사랑할 수 없는 것이고, 경쟁에서 이겨서 관심 받는 ‘나’를 원하기에 사랑할 수 없게 되는 것이지요. 이처럼, ‘너’와 ‘우리’를 사랑할 수 없는 것은 지독한 이기주의(소유욕‧탐욕‧명예욕) 때문인 셈입니다.     


 역설적이게도 사랑을 교살하는 것은 사랑입니다. ‘우리’에 대한(공적) 사랑과 ‘너’에 대한(사적) 사랑을 교살하는 것은 바로 집요하고도 지독한 ‘나’에 대한 사랑입니다. 사랑의 적을 경쟁자라고 믿는 것은 환상입니다. 그 집요하고도 지독한 자기애를 가리는 환상. 진정한 행복을 바란다면, 결코 잊지 말아야 할 삶의 진실이 있습니다. 집요하고 지독한 자기애(이기주의)로 끝내 도달하는 곳은 홀로 남겨지는 외로움의 세계입니다. ‘너’와 ‘우리’에 대한 사랑이 끝내 도달하는 곳은 넘치는 함께 누릴 수 있는 기쁨의 세계입니다. 진정으로 우리네 삶을 기쁘게 해줄 사랑을 바란다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집요하고 지독한 자기애, 즉 이기주의를 버리는 일입니다. 



『철학자의 일상적 조언』


진정한 사랑이란 곧 자기부정의 사랑이다.” 사랑의 역사 키에르케고르


 사랑하고 싶나요? 자신을 사랑하지 마세요! “자신을 가장 사랑하세요!” 이는 삶의 진실을 보지 못한 어리석은 조언입니다. 인간은 혼자 살 수 없는 존재입니다, 누군가를 사랑하고 또 사랑받으며 살아야하는 존재입니다. 이는 선택 사항이 아닙니다. 인간의 실존적 조건입니다. 한 인간이 자신을 가장 사랑할 때 사적인 사랑과 공적인 사랑은 모두 불가능해집니다. ‘나’를 사랑하는 만큼, ‘너’와 ‘우리’에 대한 사랑은 줄어들게 되니까요. 

 그러니 자신을 가장 사랑하라는 말은 얼마나 위험하며 또 무책임한 말인가요? 이는 결과적으로 ‘너’와 ‘우리’에 대한 사랑을 증발시키는 일이고, 동시에 한 인간의 실존적 조건을 파괴하는 일에 다름 아니니까 말입니다. 

 한 인간이 살아가는데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진정한 사랑” 뿐입니다. 나머지 것(돈‧지식‧이념‧명예‧섹스…)들은 부차적이거나 진정한 사랑이 만들어내는 종속적인 것들일 뿐입니다. 물론 돈과 지식, 이념, 명예, 섹스는 우리네 삶에 중요한 것들입니다. 하지만 그것들의 중요성은 진정한 사랑으로 가기 위한 디딤돌로서의 중요성 이외에는 아무 가치도 없습니다. 

 사다리를 타고 원하는 곳에 올랐다면 이제 사다리는 필요 없습니다. 바로 이것이 “진정한 사랑이란 곧 자기부정의 사랑일 수밖에 없는 이유입니다. 우리에게는 저마다의 사다리(돈‧지식‧이념‧명예‧섹스…)가 필요합니다. 진정한 사랑에 올라야 하니까요. 하지만 진정한 사랑에 올라서려면 우리는 사다리(돈‧지식‧이념‧명예‧섹스…)에서 발을 떼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자기부정의 사랑일 겁니다. ‘내’가 번 돈, ‘내’가 쌓은 지식과 명예, ‘나’를 지탱하던 이념과 섹스를 모두 부정하는 일은 자기부정에 다름 아닐 테니까요. 진정한 사랑이란 바로 그 자기부정의 사랑으로서만 가능해질 겁니다. 삶의 진정한 기쁨이 진정한 사랑에서 온다면, 그 기쁨에 이르는 길은 자기사랑이 아니라 자기부정에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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