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무기력 : 기 드보르

왜 무기력해지는가?


구경꾼의 소외는 다음과 같이 표현된다. : 그가 넋을 놓고 바라보면 볼수록 삶의 영역은 축소되며그가 이러한 지배의 이미지들 속에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면 할수록 무엇이 진정으로 자신의 삶이고 욕망인지 알 수 없게 된다스펙타클의 사회』 기 드보르     



 월요일 아침 출근길에 사람들의 표정을 살핀 적이 있나요? 새로운 한주, 새로운 하루가 시작되는 시간이지만 활기는커녕 온통 어두운 무기력이 내려 앉아 있을 뿐입니다. 이것은 비단 어느 날 아침 출근길의 풍경만은 아닐 겁니다. 우리는 종종 무기력해집니다. 모든 것이 무의미하게 느껴져 아무 것도 하고 싶지 않아질 때가 수시로 찾아오지요. 이런 무기력은 대체 어떤 상태일까요? 그저 힘이 없는 상태일까요?


 세상 사람들은 ‘무기력’과 ‘피로’를 혼돈 하곤 합니다. 무기력과 피로는 다릅니다. 역설적이게도 ‘피로’는 ‘활력’입니다. 정확히 말해, ‘피로’와 ‘활력’은 동전의 앞뒤 같은 관계입니다. ‘피로’는 어떤 일에 집중(‘활력’)하느라 기력이 일시적으로 소진 상태입니다. 이런 ‘피로’ 상태는 잠시 휴식을 취하면 이내 다시 ‘활력’적인 상태가 됩니다. 하지만 ‘무기력’은 다르지요. 


 ‘무기력’은 만성적으로 지쳐 있는 상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는 휴식을 취한다고 해서 사라지지 않습니다. 흔히 ‘무기력’한 상태를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상태라고 생각합니다. 이는 무기력에 대한 대표적 오해입니다. ‘무기력’은 ‘휴식’과 ‘몰입’의 동시적 상태입니다. 즉, ‘무기력’한 이들은 이미-항상 ‘휴식’ 상태이며 동시에 이미-항상 ‘몰입’ 상태입니다. 



 주변에 무기력한 이들을 살펴보세요. 그들은 하나 같이 흔히 ‘휴식’이라고 여길만한 일(게임‧SNS‧짧고 자극적인 영상…)에 늘 ‘몰입’해있습니다. ‘무기력’한 이들은 모든 것이 무의미하게 느껴진 상태를 벗어나고자 다시 끊임없이 의미 없는 것들(게임‧영상…)을 채워 넣으려 하지요. 이 무의미와 무의미 사이를 동시적인 ‘휴식-몰입’으로 끊임없이 채워 넣는 악순환이 바로 ‘무기력’의 정체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무기력은 왜 발생하게 되는 걸까요?      

 

 드보르의 표현을 빌려 말하자면, “무엇이 진정으로 자신의 삶이고 욕망인지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무기력한 이들은 왜 활력이 없을까요? 그들은 왜 무의미한 게임‧드라마‧인스타그램‧유튜브에 빠져 지내는 것일까요? 그것은 자신의 삶이 무엇이고, 자신의 욕망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들이 자신의 삶이 무엇이고, 자신의 욕망이 무엇인지 명료하게 알게 되면 그들 역시 무기력이 아니라 활력적인 삶으로 나아 갈수 있을 겁니다.  

    

 그렇습니다. ‘무기력’은 자신의 삶과 욕망에 대한 인식의 부재로부터 옵니다. 그렇다면 ‘무기력’한 이들은 왜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자신의 삶과 욕망에 대해 알 수 없게 되었을까요? 무기력한 이들은 항상 “구경꾼”이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해 기 드보르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가 넋을 놓고 바라보면 볼수록 삶의 영역은 축소되며, 그가 이러한 지배의 이미지들 속에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면 할수록 무엇이 진정으로 자신의 삶이고 욕망인지 알 수 없게 된다.”



 구경꾼은 어떤 사람일까요? 자신 주위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 적극적으로 개입하지 않고 그저 “넋을 놓고 바라보는” 사람이지요. 이런 이들의 “삶의 영역은 축소”되는 것은 필연적인 결과입니다. ‘먹방’의 구경꾼들을 생각해볼까요? 이들은 다른 사람들이 먹는 모습을 “넋을 놓고 바라”봅니다. 이런 구경꾼들은 대리만족, 즉 다른 사람들이 먹는 것을 보는 것으로 이미 자신의 욕망이 어느 정도 해소되었다는 착시에 빠지게 됩니다.      


 이 착시는 우리네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될까요? 그것은 필연적으로 자신의 삶의 영역(자신이 직접 맛있는 음식을 만들고 먹는 일)을 축소시키게 됩니다. 그 과정에서 당연히 그들은 자신이 무슨 음식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점점 더 알지 못하게 되겠지요. 이처럼 “지배의 이미지(먹방)들 속에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면 할수록 무엇인 진정으로 자신의 삶이고 욕망인지에 대해서 알 수 없게” 됩니다.

       

 무기력은 ‘구경꾼’의 정서입니다. 주변의 무기력한 이들을 살펴보세요. 이들은 하나 같이 모두 ‘구경꾼’들입니다. 자신의 삶에 개입하지 않고 그저 관망하는 자리에서 멍하니 구경만 하는 이들은 필연적으로 무기력해집니다. 반대로 자신의 삶에 능동적이고 적극적으로 개입하려는 이들은 결코 무기력하지 않지요. ‘먹방’을 보는 대신 자신이 직접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먹는 이들의 삶은 어떨까요? 

     


 그들은 결코 무기력하지 않을 겁니다. 그들은 이런저런 재료를 통해 새로운 맛을 알게 될 테고 그로 인해 음식에 대한 호기심이 더욱 커질 겁니다. 또 그런 과정을 통해서 자신이 어떤 음식을 좋아하는지 알게 된 이들은 자신뿐만 아니라 타인을 위해서도 더욱 적극적으로 음식을 탐구해나갈 겁니다. 이처럼 삶에 능동적이고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이들은 언제나 삶에 활력이 넘칩니다. 오직 ’먹방‘을 넋을 놓고 구경하는 구경꾼만이 무기력할 뿐입니다.   

  

 무기력으로부터 벗어날 방법은 간명합니다. “구경꾼”이 아니라 ‘주인공’이 되는 겁니다. ‘객석’의 자리에서 박차고 나와 자신만의 ‘무대’ 위로 올라서는 일. 그것이 무기력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해법입니다. 물론 이것이 쉬운 일은 아닐 겁니다. 왜 많은 이들이 ‘주인공’이 아닌 ‘구경꾼’에 머물고 있을까요? 그것은 ‘구경꾼’의 삶은 안락하기 그지없고, ‘주인공’의 삶은 고되고 불편하게 짝이 없으니까요. 

     

 운전석과 조수석에 않은 두 사람을 생각해볼까요? 운전석(주인공)에 앉은 이는 신호를 보랴, 운전하랴, 길을 찾으랴 번거롭고 힘든 일이 한 두 가지가 아니지요. 반면 조수석 앉은 이들은 그저 안락한 자리에 앉아 멍하니 창밖만을 바라보면 됩니다. 바로 이것이 많은 이들이 ‘운전석’(주인공)이 아니라 ‘조수석’(구경꾼)에 앉으려는 이유일 겁니다. 하지만 잊지 말아야 삶의 진실이 하나 있습니다.

    


 ‘운전석’에 앉은 이는 ‘멀미’를 하지 않지만, ‘조수석’에 앉은 이는 ‘멀미’를 하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멀미’는 무기력한 삶이 촉발하는 삶의 혼란일 겁니다. 자신의 삶을 스스로 통제하지 못하는 이들은 언제나 머리가 어지럽고 속이 울렁거리게 마련입니다. 핸들을 잡은 ‘주인공’은 고되지만 활력적인 명료한 삶을 살지만, 조수석에 앉은 ‘구경꾼’은 편하지만 무기력하고 혼란스러운 삶에 이르게 되는 것은 필연적인 결과입니다. 

     

 어쩌면 우리네 삶은 둘 중의 선택일지모릅니다. “안락한 무기력이냐? 역동적인 활력이냐?” 따뜻한 욕조 안에 몸 누이는 것 같은 안락함을 원하나요? 그렇다면 결국 침잠된 무기력에 잠식당할 겁니다. 반대로 비바람이 치는 숲 속에서 서 있는 것 같은 역동성을 기꺼이 감당한다면 결국은 햇살이 비치는 활력이 가닿게 될 겁니다. 어떤 삶을 선택할 것인지는 각자의 몫입니다. 하지만 안락한 구경꾼의 삶은 불행할 것이며, 역동적인 주인공의 삶은 행복할 것이라는 삶의 진실만은 결코 변하지 않을 겁니다.   


   

『철학자의 일상적 조언』

     

특권적인 인간의 감각을 당연히 시각에서 찾는 경향이 있다하지만 다른 시대에 특권적인 인간의 감각은 촉각이었다스펙터클은 그것을 시각으로 대체한다스펙타클의 사회》 기 드보르     

 보지 말고 만지세요! ‘구경꾼’이 아닌 ‘주인공’으로 살아가는 일은 대단히 어렵거나 특별한 일이 아닙니다. 구경꾼과 주인공의 근본적인 차이는 무엇일까요? 시각적 차이일까요? 전혀 그렇지 않죠. ‘주인공’도 자신의 ‘삶’을 보고, ‘구경꾼’도 자신 앞에 있는 ‘화면’을 보고 있으니까요. 둘의 근본적인 차이는 시각이 아닌 촉각에 있습니다. 주인공은 ‘삶 안’에 있기에 보는 것뿐만 아니라 만질 수도 있지만, 구경꾼은 ‘화면 앞’에 있기에 볼 수 있을 뿐 만질 수 없죠. 

 지금 우리는 인간의 특권적인 감각을 시각에서 찾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는 삶의 진실을 모르는 이야기입니다. 인간의 유구한 문명 속에서 우리의 특권적인 감각은 언제나 촉각이었습니다. ‘보기’보다 ‘만짐’이 인간의 보편적인 감각이었습니다. 단지 우리 시대가 다른 시대보다 특정한 구경거리(스펙터클)인 화면(티비‧스크린‧컴퓨터‧스마트폰…)에 너무 길들여졌기 때문에 특권적인 감각을 시각이라고 오해하고 있는 것일 뿐입니다. 바로 이 오해가 우리를 점점 구경꾼으로 몰아가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무기력에서 벗어나고 활력 넘치는 삶으로 나아가고 싶나요? 시각적 경험을 줄이고 촉각적 경험을 늘려야 합니다. ‘먹방’을 끄고 직접 음식을 만들어 먹으세요. 축구 중계를 끄고 운동장으로 나가 공을 힘껏 차세요. ‘야동’ 혹은 사랑 영화‧드라마를 끄고 사랑하는 이와 포옹하고 키스를 하세요. 그때 우리는 객석의 무기력한 구경꾼에서 무대의 역동적인 주인공이 되어 있을 겁니다.      

이전 11화 생계 : 시몬 베유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