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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낯섦 : 자크 라캉

왜 내가 낯선가?

나는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생각하지 않는 곳에서 존재한다. 『에크리』 자크 라캉     



 누구나 자신이 낯설어지는 경험이 있습니다. 자신이 온화하다고 믿었던 이가 복싱의 거칠고 폭력적인 매력에 사로잡힌 경우가 있습니다. 자신이 정숙하다고 믿었던 이가 바차타(사교댄스의 한 종류)의 관능적이고 끈적한 매력에 빠져 버린 경우도 있습니다. 자신이 소심하다고 믿었던 이가 대중들 앞에서 연설을 하는 매력을 알게 되는 경우도 있지요. 이는 모두 자기낯섦의 경험입니다.   

   

 이런 자기낯섦, 즉 낯선 나를 만나게 되는 이런 기묘한 일들은 왜 벌어지는 것일까요?  먼저 라캉의 난해한 이야기를 살펴봅시다. "나는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생각한다그러므로 나는 생각하지 않는 곳에서 존재한다." 이 수수께기 같은 말은 어떤 의미일까요? 먼저 첫번째 문장부터 살펴봅시다. “나는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생각한다.” 이 황당한 말은 대체 어떤 말일까요? 


 한 남자가 어느 카페에서 차를 한 잔 마시고 있다고 해봅시다. 라캉에 말에 따르면, 그 남자는 그 카페가 아닌 곳에서 생각하고 있다는 말이 됩니다. 그 남자는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생각하고 있을 테니까요. 라캉의 말이 옳다면, 그 남자는 지금 앉아 있는 그 카페가 아니라 도대체 어디서 생각하고 있는 걸까요? 잠시 질문을 바꿔봅시다. 그 카페에 앉아 있는 그 남자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요? 그 남자는 카페 옆을 지나 잿빛 표정으로 학원으로 향하는 아이들을 보며 안쓰러워했다가 또 화를 내고 있습니다.



  이런 생각은 그 남자가 카페에 앉아서 한 생각이었을까요? 아닙니다. 어린 시절, 이유도 알지 못한 체 집과 학원만을 반복했던 자신의 과거 속에서 한 생각이었습니다. 그 남자가 카페 앞을 지나가는 아이들을 보며 안쓰러워했던 이유는 어린 시절의 자신을 다시 만났기 때문입니다. 그 남자가 그 아이들을 보며 화가 났던 건 다시 만난 과거의 자신을 여전히 아무도 도와주지 않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다시 물어볼까요? 지금 그 남자는 어디에 있는 걸까요? 카페일까요? 아닙니다. 이제 너무 희미하고 흐릿해져 불투명하고 혼란스러운 자신의 과거 기억 어디 즈음 속입니다. 라캉은 이 기억, 즉 희미하고 흐릿하며 불투명하고 혼란스러운 마음을 ‘무의식’이라고 합니다. 그 남자는 ‘카페’가 아니라 ‘무의식’ 속에서 생각하고 있었던 겁니다. 우리는 어떤 생각이나 행동을 할 때 그것을 ‘의식’하고 하는 것이라 여기지만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어떤 생각이나 행동을 하던지 그것은 모두 ‘무의식’ 속에서 이뤄집니다. 바로 이것이 라캉이 “나는 존재하지 않는 곳(무의식!)에서 생각한다.”고 말한 속내였습니다. 라캉의 말처럼, 우리는 정말 우리가 존재하지 않는 곳, 즉 ‘무의식’에서 생각하게 됩니다. 어느 정도 경제적 여유가 있지만 매일 돈을 벌 생각에 잠식당한 이들은 너무나 흔하게 만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정말 자신이 존재하는 곳에서 생각하고 있는 걸까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만약 그가 지금 존재하는 곳(부유한 자신의 삶)에서 ‘의식’적으로 생각‧행동한다면 늘 돈 벌 생각에 잠식당하는 일은 애초에 벌어질 수가 없습니다. 그가 지금 존재하는 곳은 ‘무의식’입니다. 그는 바로 그곳에서 생각‧행동하고 있는 겁니다. 그는 왜 충분한 돈이 있는데도 매일 돈을 아끼고 또 벌 궁리만 하고 사는 것일까요? 이는 어린 시절 가난 때문에 상처 받았던 ‘무의식’적 기억 속에서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혹시 여유를 즐기려고 떠난 여행지에서 조차 서둘러 일정을 진행하려 한 적이 있지 않았나요? 이는 ‘의식’적인 생각‧행동이 아니죠. 늘 바쁘게 살아야 한다는 ‘무의식’적 생각‧행동입니다. 매력적인 낯선 이를 만나게 될 때가 있죠. 하지만 그에게 다가가 선뜩 말을 걸지 못하지요. 이 역시 ‘의식’적인 생각‧행동이 아닐 겁니다. 언젠가 낯선 친구에게 다가서려다 상처 입었던 기억 저편에 있는 ‘무의식’ 때문일 겁니다. 이처럼, 우리는 명료하고 분명한 ‘의식’ 속에서 생각‧행동하기보다, 불투명하고 혼란스러운 ‘무의식’ 속에서 생각‧행동하게 됩니다.


 “나는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생각하지 않는 곳에서 존재한다.” 라캉의 이 난해한 말을 이제 더욱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실제로 무엇인가를 떠올리게(생각하게) 되는 곳은 ‘카페’(우리가 ‘의식’적으로 자각하고 있는 장소)가 아니라 ‘무의식’(내가 존재하지 않는 곳) 속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자신이 “존재하지 않는 곳(무의식)에서 생각”하게 되는 것이죠. 또한 우리가 어딘가에 존재한다면 그곳은 자신이 생각하지 않는 곳(무의식)일 겁니다. 그러니 우리는 자신이 “생각하지 않는 곳(무의식)에서 존재”하게 되는 셈이죠.     



 우리가 종종 자기낯섦을 경험하게 되는 이유를 알 것도 같습니다. 정작 우리가 존재하는 곳은 명료한 ‘의식’이 아니라 혼란한 ‘무의식’ 속입니다. 자신이 온화하다고 생각하는 이가 실제로 존재하는 곳은 선혈이 낭자한 폭력적인 ‘무의식’의 세계일 수 있습니다. 자신이 정숙하다고 생각하는 이가 실제로 존재하는 곳은 온갖 성적 욕망이 분출되는 관능적인 ‘무의식’의 세계일 수 있습니다. 자신이 소심하다고 믿는 이가 실제로 존재하는 곳은 세상의 관심을 독점하려는 ‘무의식’의 세계일 수 있습니다. 그 ‘무의식’ 속의 ‘나’가 진짜 ‘나’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이들은 명확한 ‘의식’의 세계 속 ‘나’가 진정한 ‘나’라고 믿으며 삽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삶에서 종종 자기낯섦을 만나게 되는 이유일 겁니다. 낯선 ‘나’를 만나게 되는 것은, ‘내’가 존재하지 않는 ‘의식’의 세계가 아니라 ‘내’가 실제로 존재하고 있는 ‘무의식’의 세계 속의 ‘나’를 만나는 일입니다. 어느 날, 문득 ‘나’ 자신이 낯설게 느껴졌다면, 불투명하고 혼란스러운 기억의 파편들인 ‘무의식’을 소홀히 대했기 때문입니다. ‘나’에 대해서 진정으로 알고 싶다면, 우리의 마음 속 깊은 감춰진 ‘무의식’을 차분하게 들여다보아야 할 겁니다.      


  

『철학자의 일상적 조언』


모든 것은 마치 우리의 기억들이 우리 과거 삶의 가능한 무수한 환원들 속에서 수 없이 반복되었던 것처럼 일어난다. 전체기억이 부분기억으로 좁혀질 때 평범한 모습을 띠고, 전체기억이 부분기억으로 넓혀질 때 개인적인 모습을 띠게 된다. 그렇게 해서 기억들은 무한한 수의 ‘체계화’를 이루기 시작한다. 『물질과 기억』 앙리 베르그손     


“과거는 잊어버리고 현재에 집중해야 돼” 흔히 듣게 되는 조언이지요? 이 조언은 틀렸습니다. 이보다 더 삶의 진실을 왜곡하는 조언도 없을 겁니다. 이 조언은 틀렸을 뿐만 아니라 유해하기까지 합니다. 현재는 과거의 분출입니다. 지금 내가 무엇인가를 하거나 혹은 하지 않는 것은 모두 자신의 지난 과거의 분출입니다. 


 지금 공부해야 한다는 것을 알지만 잘 되지 않지요? 지금 사랑을 고백해야 한다는 것을 알지만 잘 되지 않지요? 그것은 현재에 집중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지금 공부할 수 없게 만든, 지금 고백할 수 없게 만든 수없이 쌓인 과거를 충분히 조명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마음에 켜켜이 쌓인 그 과거들을 외면한 채 어떻게 현재에 집중할 수 있을까요? 이는 마치 어린 시절 큰 화재사고를 겪은 아이에게 지금 불 앞에서 침착하라고 외쳐대는 허망한 이야기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지금과는 다르게 행동해서 다른 삶을 살고 싶은 이들은 많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대체로 비슷하게 행동해서 유사한 삶에 머무르지요. 가난하게 살았던 이는 (실제로 가난에서 벗어났든 그렇지 않든) 대체로 가난하게 살았던 삶에 머무르게 됩니다. 소심하게 살았던 이는 대체로 소심한 삶을 이어갑니다. 다르게 행동해서 다르게 살고 싶지만 그것이 쉽지가 않습니다.  


 어떻게 지금 다르게 행동할 수 있을까요? 우리에게는 두 가지 기억이 있습니다. ‘전체기억’과 ‘부분기억’입니다. ‘전체기억’은 우리가 살아오면서 쌓인 기억 전부이고, ‘부분기억’은 기억은 그 전체기억 중 실제 우리 삶을 지배하는 부분적인 기억입니다. 화재를 당한 아이는 ‘전체기억’을 갖고 있겠지만, 그 아이의 삶을 지배하는 기억은 화재와 관련된 ‘부분기억’일 겁니다. 


 라캉 식으로 말하자면, ‘전체기억’은 ‘무의식’이고, ‘부분기억’은 ‘의식’에 해당될 겁니다. 다르게 행동하는 것은 바로 ‘전체기억(무의식)’의 확장을 의미합니다. 더 정확히 말해, ‘전체기억’(무의식) 중 유의미한 ‘부분기억’을 확장(‘의식’화)하는 일입니다. 즉, ‘무의식’에 갇혀 있는 ‘전체기억’을 기억해내려 해야 합니다. 그때 우리가 갖고 있는 ‘부분기억’이 넓어질 테고, 그 넓혀진 부분기억만큼 다르게 행동할 수 있게 됩니다.


 화재를 당한 아이는 어떻게 화재의 상흔 너머 다르게 행동하며 살아갈 수 있을까요? 불 때문에 불행했던 기억(부분기억)뿐만 아니라, 가족들과 함께 고기를 구워먹고 친구들과 캠프파이어를 하며 불 때문에 행복했던 기억(전체기억)마저 기억해낼 수 있다면, 그 아이는 분명 다른 행동으로 다른 삶을 살 수 있을 겁니다. 이처럼 기억은 이미 지나가버린 퇴행적 체계가 아니라 지금 우리네 삶을 바꿀 “무한한 수의 체계화”를 이루게 하는 도구입니다. 뒤집어진 조언을 바로 세울 시간입니다. “현재에 집중하기 위해서는 과거를 기억해야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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