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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 : 안셀 무스

왜 타인을 믿어야 하는가?

저는 믿기 위하여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이해하기 위해서 믿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만일 내가 믿지 않는다면, 이해할 수 없으리라’는 것 또한 믿기 때문입니다. 『프로슬로기온』 안셀무스     


믿지 않는 것을 사랑하거나 희망할 수는 없다. 따라서 인간 영혼은 최고본질과 그것을 사랑할 수 있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것을 믿는 것이 유익하다. 이로써 최고본질을 믿음에 따라 추구할 수 있게 된다. 『모놀로기온』 안셀무스     



 지금은 불신의 시대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타인을 쉽게 믿지 않습니다. “저 사람이 이런 말(행동)을 하는 저의가 뭐지?” 우리는 늘 이런 생각을 갖고 살죠. 적대감을 갖고 있는 상대들은 말할 것도 없고, 특별한 적대감을 갖지 않더라도 우리는 상대를 향한 크고 작은 의심을 멈추지 않습니다. 왜 이처럼 불신이 넘쳐나는 시대가 되었을까요? 이유는 전혀 어렵지 않습니다. 상대를 쉽게 믿지 않아야 자신을 지킬 수 있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이 업무는 네 경력에 도움이 될 거야” 상사의 이런 말을 쉽게 믿었다간 졸지에 원치 않는 야근에 내몰리게 됩니다. “지금 반값 세일 중이에요” 점원의 이런 말을 쉽게 믿었다간 졸지에 바가지를 쓰게 됩니다. 이처럼 타인의 말을 쉽게 믿었다가 크고 작은 피해를 본 경험은 누구에게 있습니다. 이것이 세상 사람들이 타인을 집요하게 의심하는 이유입니다. 크고 작은 상처(손해‧피해)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 우리는 상대를 집요하게 의심합니다. 

     

 우리는 주변의 거의 모든 타인들, 선배‧후배‧친구‧연인 심지어 가족들에게 까지 이런 의심의 태도로 대하곤 합니다. 상대를 믿지 않고 의심할 때 상대의 속내를 간파할 수 있고, 그렇게 해야 자신을 지킬 수 있다고 믿으니까요. 그런데 이는 지혜로운 생각일까요? 즉, 상대를 집요하게 의심할 때 우리는 자신을 지킬 수 있게 될까요? 이는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이에 대해 안셀무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저는 믿기 위하여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이해하기 위해서 믿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만일 내가 믿지 않는다면, 이해할 수 없으리라’는 것 또한 믿기 때문입니다.” 안셀무스는 ‘이해’와 ‘믿음’의 관계에 대해 우리와 전혀 다른 태도를 갖고 있습니다. 우리는 상대를 (의심을 통해 상대의 속내를) ‘이해’해야 ‘믿을’ 수 있다고 여깁니다. 하지만 안셀무스는 오히려 ‘이해’하기 위해서 ‘믿는’다고 말합니다. 즉, 우리에게는 (의심을 통한) ‘이해’가 ‘믿음’의 선행 조건인 반면, 안셀무스에게는 ‘믿음’이 ‘이해’의 선행 조건인 셈입니다.      

 

 누구의 말이 옳을까요? 의심의 여지없이 안셀무스의 말입니다. ‘이해’ 뒤에 ‘믿음’이 오는 것이 아니라 ‘믿음’ 뒤에 ‘이해’가 옵니다. 10년을 알고 지낸 ‘동료’와 만난 지 1년 된 ‘연인’을 생각해볼까요? 우리는 둘 중 누구를 더 잘 ‘이해’할까요? 아마 ‘연인’일 겁니다. 왜 그럴까요? ‘동료’보다 ‘연인’을 더 믿기 때문입니다. “요즘 나 좀 힘들다” 동료와 연인이 이와 같은 말을 했다고 해봅시다. 우리는 동료의 말에는 “업무를 도와달라는 건가?” “돈을 빌려달라는 건가?” 이러저런 의심을 하게 될 겁니다. 그래서 지금 동료가 처한 곤경과 그의 감정을 온전히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연인’은 다르죠, “요즘 힘들다” 연인의 이 말에 우리는 그가 처한 상황과 그의 감정을 더 잘 ‘이해’하게 됩니다. “부모님이 암에 걸리셨구나. 얼마나 마음이 아플까?” 이와 같은 ‘연인’에 대한 깊은 ‘이해’는 어디서 나온 것일까요? 바로 연인에 대한 깊은 ‘믿음’에서 나온 겁니다. “요즘 힘들다”는 연인에 말에서 어떤 의심을 하거나(저의를 파악하려 하지 않고), 그저 상대의 말을 있는 그대로 ‘믿었기’ 때문에 연인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즉, ‘믿을’ 수 있는 존재에게 의심은 들어설 여지가 없기에 그를 더 잘 ‘이해’하게 되는 것이죠.      



 이런 삶의 진실은 반대로 생각해보면 더욱 명확하게 드러납니다. 만약 ‘이해’ 뒤에 ‘믿음’이 온다면, 우리는 ‘연인’보다 ‘동료’를 더 굳게 믿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될 겁니다. 1년 된 ‘연인’보다 10년 된 ‘동료’를 더 잘 ‘이해’하고 있을 테니까요. 하지만 이런 일은 삶에서 좀처럼 일어나지 않지요. 이처럼, 한 사람을 ‘이해’해야 그를 ‘믿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먼저 한 사람을 ‘믿어’야지만 그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누군가를 이해(의심) 없이 믿는 일. 이것이 삶의 진실이라 하더라도, 이를 삶에서 실천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누군가를 믿는 것은 위험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한 사람을 의심 없이 선뜻 믿으려 했을 때, 우리는 크고 작은 상처를 감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어쩌면 이것이 세상 사람들이 ‘믿음→이해(믿기 때문에 이해한다)’라는 삶의 진실을 은폐하고, ‘이해→믿음(이해했기 때문에 믿는다)’이라는 허황된 오류를 쉽게 받아들이는 이유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믿음은 위험하니 믿지 않고, (의심해서) 이해하면 믿을 수 있다고 삶의 진실을 왜곡해버린 걸 겁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의 의문에 도달하게 됩니다. 믿음이 그리도 위험한 것이라면, 애초에 믿지 않으면 되는 것 아닐까요? 즉 주변의 모든 타인을 의심하는 삶을 이어가면 되는 것 아닐까요? 하지만 세상 사람들은 그러지 않지요? 세상 사람들이 타인을 끊임없이 의심하며 그의 속내를 간파해내려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건 결국 누군가를 믿기 위해서입니다. 정말 그렇지 않나요? 우리가 누군가를 집요하게 의심하는 이유는 그가 믿을만한 사람인지 아니지 확인하기 위해서 아니던가요? 또 그런 의심의 여정을 멈추지 않는 이유는 믿을만한 사람을 끝내 찾아내기 위해서 아니던가요?    


  

 왜 우리는 지독한 불신과 의심 속에서 끝내 믿음을 발견하려 하는 것일까요? 안셀무스는 이에 대해 이렇게 답합니다. “믿지 않는 것을 사랑하거나 희망할 수는 없다.” 안셀무스는 믿지 않는 것을 사랑하거나 희망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지독한 불신과 의심 속에서도 끝내 믿음을 찾으려는 이유입니다. 믿음이 있는 곳에 사랑과 희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필요성에 대해 안셀무스는 분명하게 말합니다. 

     

 “인간 영혼은 최고본질과 그것을 사랑할 수 있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것을 믿는 것이 유익하다. 이로써 최고본질을 믿음에 따라 추구할 수 있게 된다.” 안셀무스가 말하는 “최고본질”은 무엇일까요? (철학자이자 동시에 신학자였던 안셀무스에게 그것은 ‘신’이었지만, ‘신’을 믿지 않는 이들은) “최고본질”을 ‘행복’이라고 생각해도 좋습니다. 이제 안셀무스의 말은 이렇게 바꿔 말할 수 있습니다.      


 “인간이 행복을 추구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것을 믿는 것이 유익하다. 이로써 그 행복을 믿음에 따라 추구할 수 있게 된다.” 인간은 언제 행복하게 될까요? 그것은 누군가를 온 마음으로 믿을 때 일 겁니다. 소중한 사람들, 예컨대 친구‧연인‧부모가 우리에게 행복을 주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더 적게 의심하고 더 많이 믿기 때문일 겁니다. 그네들이 주는 행복의 크기는 믿음의 크기 만큼일 겁니다. 바로 이것이 믿음이 있는 곳에 사랑과 희망이 있는 이유입니다. 믿음은 이해를 낳고, 그 이해를 통해 사랑과 희망이 커져나갈 테니까요.



 물론 알고 있습니다. 지금은 얼마나 험한 세상인가요? 그러니 모든 사람을 믿을 수는 없을 겁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한 사람이라도 더 믿으려고 애를 써야 합니다. 동시에 얕은 믿음에서 조금 더 깊은 믿음으로 나아가려 애를 쓰며 살아야 합니다. 온 마음으로 믿어 버린 이가 한 사람이라도 늘어난다면, 얕았던 믿음이 조금 더 깊어진다면, 우리의 행복은 그만큼 더 커지게 될 테니까요.     

 

 이해해서 믿으려고 하지 마세요. 그런 일은 폭포가 아래서 위로 흘러간다는 말처럼 허황된 믿음일 뿐입니다. 먼저 한 사람을 믿으세요. 그 믿음으로 한 사람을 진정으로 이해하게 되었을 때, ‘사랑’이 시작될 겁니다. 그렇게 ‘사랑’이 시작되었을 때 우울하고 절망적인 마음에 ‘희망’이 차오를 겁니다. 그렇게 우리네 삶에 ‘행복’이 찾아올 겁니다. 왜 타인을 믿어야 하냐고요? ‘행복’은 ‘믿음’에서부터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철학자의 일상적 조언』

          

살토 모탈레Salto Mortale!”  

   

타인을 어떻게 믿을 수 있을까요? ‘살토 모탈레!’ 한 사람을 믿는 것을 어려워하는 이들이 마음에 새겨야 하는 문구입니다. ‘살토 모탈레’는 ‘목숨을 건 도약’이라는 의미입니다. 눈앞에 낭떠러지가 있습니다. 그 낭떠러지가 1미터일지 10미터일지 아니면 끝도 보이지 않을 천 길 낭떠러지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 낭떠러지 앞에서 두 눈을 질끈 감고 뛰어내리는 것. 바로 이것이 ‘목숨을 건 도약’입니다.


 한 사람을 진정으로 믿는다는 것은 바로 이런 ‘목숨을 건 도약’과 같을 겁니다. 진정한 믿음 은 ‘이해(의심) 뒤의 믿음’이 아니라 ‘이해(의심) 없는 믿음’입니다. 이는 얼마나 위험한가요? 누군지도 모르는 상대를 온전히 믿어버리는 일은 얼마나 위험한 일인가요? 그가 사기꾼일지? 사이비 종교인일지 알 수 없는 상태로 그를 믿어버리는 일은 얼마나 위험할까요? 


 믿음은 낭만적이지 않습니다. 믿음은 위험이라는 나무의 그림자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나무(위험)를 베어버린다면, 그림자(믿음) 역시 사라지게 됩니다. 우리는 위험을 감당하는 만큼만 믿음에 이를 수 있습니다. 크고 작은 위험을 감수하는 도약이 없다면 진정한 행복으로 가닿게 해줄 믿음은 애초에 요원할 겁니다. 하지만 이 위험한 도약은 결코 강압이 아닙니다. 


 위험한 도약은 공포만을 담고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아무 낭떠러지 앞에나 서지 않습니다. 그곳은 위험하기만 한 장소이니까요. 우리는 어떤 낭떠러지 앞에 서게 될까요? 우리를 매혹시키는 풍경이 펼쳐진 낭떠러지일 겁니다. 온 마음을 사로잡는 풍경을 따라 한 걸음씩 다가서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낭떠러지 앞에서 서게 됩니다. 그러니 ‘살토 모탈레’는 공포뿐만 아니라 매혹마저 담고 있는 도약인 셈입니다. 


 공포와 매혹! 거부와 끌림! 일상과 일탈! 그 치명적인 낭떠러지 앞에서의 도약. 바로 이것이 ‘살토 모탈레’의 진정한 의미입니다. 믿음은 어렵고 드문 일입니다. 믿음은 믿으라고 한다고 생기는 것이 아니니까요. 오직 매혹적인 풍경에 이끌려 낭떠러지 앞에 서게 되듯, 매혹적인 타자에 이끌려서만 위험천만한 절벽 앞에 서게 됩니다. 오직 그곳만이 목숨을 건 도약이 가능한 낭떠러지입니다. 아무 낭떠러지에서 뛰어내릴 필요도 없고, 그럴 수도 없을 겁니다. 흔한 낭떠러지는 그저 피하고 싶은 위험뿐인 장소이니까요. 


 우리가 뛰어내려야 하는 곳은 매혹적인 타자의 손짓에 이끌려 간 낭떠러지입니다. 그곳은 위험뿐만 아니라 묘한 기쁨마저 뒤엉킨 절벽일 겁니다. 바로 그곳이 우리가 용기를 두 눈을 질끈 감고 뛰어내려야하는 낭떠러지입니다. 위험하지만 매혹적인 타자가 나타났다면, 크고 작은 손해나 상처, 위험은 잊고 그에게 뛰어내리세요, 그 도약이 바로 진정한 믿음입니다. 그 도약을 해보면 알 게 될 겁니다. 절벽이 아니라 사랑, 희망, 행복이라는 새로운 세계가 있다는 것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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