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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 : 자유롭고 싶나요?

우리는 왜 자유롭지 못할까?     


자유롭게 살고 싶다. 이보다 간절한 소망이 또 있을까? 왜 그리도 대학에 가고 싶었을까? 왜 그리도 돈을 벌고 싶었을까? 왜 그리도 여행을 떠나고 싶었던 것일까? 많은 이유가 있겠지만 근본적인 이유는 하나다. 자유. 대학에 가면, 돈을 벌면, 여행을 떠나면 자유로운 삶이 펼쳐질 것 같기에 그 모든 것들을 갈망한다. 우리가 진정으로 원했던 것은 대학도, 돈도, 여행도 아니다. 그것들이 가져다줄 자유로움. 그것이 우리가 진정으로 원했던 것이다. 어찌 보면 우리네 삶 자체가 자유를 향한 발버둥 같기도 하다.


 자유가 무엇인가? 어떤 것에서도 얽매이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상태. 이 상태가 되었을 때 자유롭다고 느낀다. 구체적으로 말해, 자고 싶을 때 자고, 일어나고 싶을 때 일어나고, 직장에 가고 싶으면 가고 가기 싫으면 가지 않을 수 있는 상태. 즉 뭐든지 다 내 마음대로 할 수 상황을 자유롭다고 한다. 반대로 자신의 삶이 어딘가에 매여 있어서 자신 마음대로 할 수 없게 될 때 부자유하다고 말한다.      

 

 자유는 드물다. 자유를 원하지 않는 이는 없지만, 정작 자유로운 이들은 매우 드물다. 왜 그럴까? 자유롭지 못할 때, 흔히 그것을 자신의 역량 문제라고 여긴다. 쉽게 말해, 대학에 갈, 돈을 벌, 여행을 떠날 역량이 부족하기 때문에 자유롭지 못하다고 여긴다. 물론 그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자유의 부재, 그것은 ‘역량’의 문제가 아니라 ‘정의definition’의 문제인 것은 아닐까?      

 

 자유로울 수 있는 ‘역량’이 부족하기 때문이 아니라, 자유라는 것을 잘못 ‘정의’했기에 자유롭지 못한 것인지도 모른다. 마치 달릴 수 있는 역량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잘못된 곳을 향해 달렸기 때문에 목적지에 도달하지 못한 것처럼 말이다. 진정으로 자유를 원한다면, ‘역량’을 문제 삼기 전에 ‘정의’를 문제 삼아야 한다. ‘자유로울 역량이 있는가?’ 이 보다 먼저 해야 할 질문이 있다. ‘진정한 자유는 무엇인가?’       



스피노자의 ‘부자유’

 ‘자유’를 말하기 전에 먼저 ‘부자유’에 대해서 이야기해보자. 스피노자는 ‘부자유’를 어떻게 정의했을까?        

일정하고 결정된 방식으로 존재하고 작용하도록 다른 것에 의하여 결정되는 것을 우리는 필연적이라거나오히려 강제된다고 말한다. (에티카제 1정의 7)     


 스피노자에 따르면, ‘필연적’인 것은 부자유하다. ‘필연적’인 것이 무엇인가? “나는 필연적으로 가난해질 거야!” 이 말은 내가 어떤 일을 하더라도, 반드시 가난해질 거란 의미다. 즉, 자신의 자유의지로 어떤 일이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 외부적 원인에 의해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즉 강제되는 상태는 ‘필연적’이다. ‘필연적’인 것은 강제된다는 것이고, 이는 부자유를 의미한다. 난해한 이야기가 아니다. 길가에 핀 작은 꽃을 생각해보자. 그 꽃은 부자유하다. 왜 그 꽃들은 자유롭지 못할까?

      

 햇볕이 드는 쪽에 핀 꽃은 활짝 피지만, 그늘진 쪽에 핀 꽃은 그렇지 못하다. 또 햇볕이 드는 쪽에 핀 꽃이라 하더라도 바람이 거세게 부는 날이면 뿌리째 뽑혀 날아가 버릴지도 모른다. 그 꽃은 외부적 요소(햇볕·바람)에 의해 ‘필연적’으로 결정되기 때문이다. 즉 무언가에 의해 강제된다. 이렇듯 “일정하고 결정된 방식으로 존재하고 작용하도록 다른 것에 의해 결정되는 것”은 ‘필연적’인 것이며, 그것들은 모두 부자유하다.   

  

 비단 꽃의 이야기이겠는가? 우리 역시 마찬가지다. 우리는 언제나 부자유하다고 느낄까? ‘필연적’일 때다. 우리 자신이 “일정하고 결정된 방식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고, 또 그런 방식으로 살아나갈(작용) 수밖에 없을 때 우리는 부자유(강제된다)하다고 느낀다. 생각해보라.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필연적으로 가난한 삶으로 강제된다면, 우리네 삶을 얼마나 부자유하게 느껴지겠는가? 그렇다면 이제 묻게 된다. 무엇이 우리를 강제하는가?


      

‘규칙·체계·반복’을 벗어던지면 자유로워질까?


 바로 ‘규칙(법칙)’이다. ‘부자유’(혹은 자유)를 생각할 때 ‘규칙(법칙)’이란 개념을 빼놓고 생각할 수 없다. 직장·학교·군대가 대표적으로 부자유한 공간인 이유가 무엇인가? 그곳에는 따라야만 하는 ‘규칙’이 있기 때문이다. 그 ‘규칙’ 때문에 내 마음대로 할 수가 없다. 규칙은 단지 규칙으로 끝나지 않는다. 규칙은 체계를 만들고, 그 체계는 특정한 반복routine을 구성한다. 규칙, 체계, 반복routine은 한 묶음이다. 이 묶음에서 우리는 부자유를 느낀다.  

   

 ‘규칙’(9시 출근, 6시 퇴근)은 ‘체계’(직장생활)를 만들고, 그 ‘체계’를 통해 지루한 ‘반복’(직장인의 삶)이 만들어진다. 그 규칙·체계·반복으로 이뤄진 삶은 ‘필연적’인 삶이며 그곳에서 결코 자유를 느낄 수는 없다. 이것이 자유를 원하는 이들은 일탈을 꿈꾸고 감행하는 이유다. 그 일탈은 정확히, 규칙·체계·반복으로부터의 일탈이다. 그렇다면 묻자. 그런 일탈을 감행했을 때 우리는 자유를 얻게 될까? 

     

 직장·학교·군대를 벗어나 모든 규칙·체계·반복을 초월해버렸을 때 자유로움을 느낄 수 있을까? 쉽게 말해, 뭐든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상태가 되면 자유로움을 느낄까? 우리의 바람과 달리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어떤 규칙·체계·반복도 없는 삶은 자유가 아니라 기묘한 공허를 준다. 학교를 자퇴하고 자기 마음대로 하며 살았던 친구가 있었다. 그 어떤 규칙·체계·반복도 없이 몇 년을 지냈다. 그는 자유로웠을까? 그 친구에게 자유로운 이들 특유의 활력은 없었다. 오히려 어딘가에 갇힌 듯 우울하고 무기력해 보였다. 

     

 군대를 제대하고 몇 개월 동안 어떤 규칙도, 체계도, 반복도 없는 생활을 한 적이 있다. 그때 자퇴했던 그 친구가 왜 우울하고 무기력했는지 알게 되었다. 제대 후, 어떤 규칙·체계·반복도 없이 살던 나는 자유로웠을까? 아니다. 부자유했다. 무언가 텅 비어 버린 기분에 갇혀(부자유!) 버렸기 때문이다. 규칙-없음, 체계-없음, 반복-없음이 남기는 공허는 자유가 아니다. 텅 비어 버린 것 같은 기분에 갇혀 버리기 때문이다.


      

스피노자의 ‘자유’

 

 자유에 대한 가장 큰 오해가 이것이다.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모든 규칙·체계·반복을 벗어던지면 자유로워질 것이란 믿음. 이것이 ‘자유’에 대한 가장 큰 오해다. 이제 더욱 암울해진다. 우리를 구속하는 ‘규칙·체계·반복’을 벗어던져도 자유로울 수 없다면, 도대체 어떻게 자유로울 수 있을까? 진정한 자유가 무엇인지 물어야 한다. 진정한 자유는 어떤 것일까? 스피노자가 ‘자유’를 어떻게 정의했는지부터 알아보자.      


자신의 본성의 필연성에 의해서만 존재하며자기 자신에 의해서만 행동하도록 결정되는 것을 우리는 자유롭다고 말한다. (에티카제 1정의 7)     


 스피노자에 따르면, ‘필연성’은 자유다. ‘필연적’은 부자유이지만, ‘필연성’은 자유다. 거대한 폭포를 생각해보자. 그 폭로는 늘 위에서 아래로 거대한 물줄기를 떨어뜨리려는 본성을 갖고 있다. 그 거대한 폭포는 새들의 지저귐, 주변의 바위들, 뜨거운 햇볕, 거센 비바람 등 어떤 외부적 요소에도 영향을 받지 않는다. 그 폭포는 오로지 “자신의 본성의 필연성(아래로 떨어짐)에 의해서만 존재”한다.

      

 이처럼, “자기 자신에 의해서만 행동하도록 결정되는 것”, 즉 자신의 필연성에 의해 존재하는 이들은 자유롭다. 길가에 핀 꽃이 부자유한 이유는 외부적 원인에 의해 ‘필연적’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반면 ‘필연성’으로 존재하는 것은 자유롭다. 그 어떤 외부적 원인에도 영향받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실 엄밀히 말하자면, 아무리 거대한 폭포라도 해도 자유롭지 않다. 극심한 가뭄, 혹은 거대한 댐(외부원인)이 발생한다면 그 폭포 역시 멈춰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진정으로 자유로운 존재는 누구일까?


      

‘신’의 자유란 무엇인가?

     

신은 그 자신의 법칙에 의해서만 활동하고다른 어떤 것에 의해서도 강제되지 않는다. (에티카제 1정리 17)

     

 스피노자에 따르면, 진정으로 자유로운 존재는 ‘신’이다. ‘신’은 자유롭다. 오직 “그 자신의 법칙에 의해서만 활동”할 뿐, “다른 어떤 것에 의해서도 강제되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전지전능한 ‘신’이 존재한다면, 그 존재는 완전히 자유로운 존재일 수밖에 없다. 외부에 영향을 받아서 ‘필연적’으로 존재하게 되는 존재는 ‘신’이 아니니까. 쉽게 말해, 음식을 먹지 않으면 죽는 존재를 ‘신’이라 할 수 없지 않은가. 흥미로운 점은, 스피노자가 ‘신’의 자유가 어떤 것인지 구체적으로 이야기한 부분이다.

     

 세상 사람들은신의 본성에서 생긴다고 우리가 말한 것곧 신의 힘 안에 있는 것을 신 자신이 생성시키거나 또는 그들이 믿기에 신이 자신이 그것을 산출되지 않게 할 수 있으므로 신은 자유원인이라고 믿는다그러나 이것은 마치 신은 삼각형의 본성에서 세 각의 합이 2직각과 동일하다는 것을 생기지 않게 하거나 주어진 원인에서 아무런 결과도 생기지 않게 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과 똑같다이것은 부당하다. (에티카제 1정리 17, 주석

     

 스피노자는 세상 사람들이 ‘신’의 자유를 오해하고 있다고 말한다. 세상 사람들은 신에게 우주적 법칙을 초월할 수 있는 자유가 있다고 믿는다. 즉, ‘신’은 자신의 힘으로 무엇이든 제 마음대로 생성시키거나 생성시키지 않을 수 있기 때문에 ‘신’은 자유롭다고 믿는다. 예를 들어, ‘신’이 삼각형 세 내각의 합이 90 〫가 되게 만들 수 있다거나, 봄이 되었는데(주어진 원인) 꽃이 피지 않게(아무런 결과도 생기지 않게) 만들 수 있기 때문에 ‘신’이 자유롭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는 ‘신’이 아니라 신 할아버지가 와도 되지 않을 부당한 일이다. 

    

  스피노자가 말하는, ‘신’의 자유는 자연의 법칙을 초월한 자유가 아니다. 쉽게 말해, 모든 것을 제멋대로 할 수 있는 자유가 아니다. 그렇다면 ‘신’의 자유는 무엇인가? ‘신’ 자신의 본성(필연성)을 따르는 것이다. 스피노자의 ‘신’은 ‘자연’이다. ‘자연’을 ‘자연’되게 하는 법칙들 자체가 ‘신’이다. 자연의 법칙 자체가 ‘신’이기 때문에 신은 자유롭다. 신(=자연)은 그 어떤 외부 원인에도 영향을 받지 않고 자신(자연)의 본성을 따르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경우에도 삼각형 세 각의 합이 180 〫가 되게 하는 것. 어떤 경우에도 봄이 되면 꽃이 피게 하는 것. 그것이 바로 신(자연)의 자유로움이다.


       

자유롭게 사는 법


 이제 자유로워지는 법에 대해 말할 수 있다. 모든 규칙(법칙), 체계, 반복이 없는 상태로 존재하는 것은 자유가 아니라 망상이고 혼란이며 허무고 무기력이다. 그것은 지독한 부자유다. 망상과 혼란, 허무와 무기력에 갇힌 부자유. 진정한 자유를 원한다면 ‘신’의 자유를 본떠야 한다. 자신의 본성의 필연성을 따르는 삶. 달리 말해, 오직 자신이기에 따를 수밖에 없는 ‘규칙’을 발견하고 그에 따라 ‘체계’를 만들고, 그 체계를 유지할 수 있도록 ‘반복’하는 삶. 그것이 진정으로 자유로운 삶이다. 스피노자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것은올바른 생활 규칙이나 일정한 생활지침을 구상하고 이것을 기억에 남겨 인생에서 흔히 마주치는 개개의 경우에 끊임없이 그것을 적용하는 것이다. (에티카제 5정리 10, 주석)

     

 인간이 할 수 있는 최선의 것은 무엇인가? 기쁨이든 슬픔이든 가리지 않고 제멋대로 사는 일이 아니다. 진정한 기쁨을 주는 생활 규칙이나 생활지침을 마련하고 그것을 삶에서 부딪히는 개개의 경우에 적용하는 일이다. 즉, 자신의 삶에서 특정한 ‘규칙·체계·반복’을 관철하는 일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자유(기쁨)를 주는 ‘규칙·체계·반복’은 사회가 지정한 ‘규칙·체계·반복’은 결코 아니라는 사실이다.    

 

 직장을 충실히 다니는 사람을 생각해보자. ‘매일 아침 6시에 일어난다!’ 이 ‘규칙’에 의해 형성된 ‘체계’를 ‘반복’하는 삶을 산다. 그는 자유로운가? 아니다. 부자유하다. 왜 그런가? 그의 ‘규칙·체계·반복’은 사회가 지정한 것이기 때문이다. 글을 쓰기 위해 직장을 그만둔 사람을 생각해보자. ‘매일 아침 6시에 일어난다!’ 그 역시 이 ‘규칙’ 의해 형성된 ‘체계’를 ‘반복’하는 삶을 산다. 그렇다면 그 역시 부자유한가? 그렇지 않다. 그는 자유롭다.  


   

자유는 규칙 ‘밖’이 아니라 규칙 ‘안’에 있다.

      

 왜 그런가? 전날 과음을 했든, 몸이 아프든, 우울증이 발생하던, 어디론가 여행을 가던 “자신의 본성의 필연성에 의해서만 존재하며, 자기 자신에 의해서만 행동하도록 결정”하기 때문이다. 그의 본성적 필연성은 무엇인가? ‘쓴다’는 것이다. 폭포의 본성적 필연성이 ‘떨어짐’이라면, 그의 필연성은 ‘씀’이다. 그는 그 어떤 외부적 요소들에 영향받지 않고. 자신 본성의 필연성(씀)에 의해서만 행동하기 때문에 자유롭다. 

     

 우리를 부자유하게 하는 것은 ‘규칙·체계·반복’ 그 자체가 아니다. 자신의 본성의 필연성을 따르지 못하게 하는, 사회적·관습적인 ‘규칙·체계·반복’이 우리를 부자유하게 하는 것일 뿐이다. 우리에게 슬픔을 주었던 것은 ‘규칙·체계·반복’이 아니라 사회적·관습적 요구일 뿐이다.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것은 ‘규칙·체계·반복’이다. 우리 본성의 필연성을 따르는, 그래서 우리에게 기쁨을 주는 ‘법칙·체계·반복’      


  제 진정한 자유가 무엇인지에 명료하게 답할 수 있다. 모든 환경과 조건을 초월해서 제멋대로 하려는 것이 자유가 아니다. 그것은 우리네 삶을 부자유로 몰아넣을 방종일 뿐이다. 오직 자신이기에 따를 수밖에 없는 필연성의 ‘법칙’을 발견하고, 그 법칙에 따른 ‘체계’를 만들어 나가며, 그 ‘체계’를 유지하기 위해 묵묵히 ‘반복’하는 삶을 사는 것. 그것이 진정으로 자유로운 삶이다. 스피노자의 ‘신’이 ‘자연’ 밖에 아니라 ‘자연’ 안에 있는 것처럼, 진정한 ‘자유’는 ‘규칙’의 밖이 아니라 ‘규칙’ 안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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