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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성 : 지성인이 될 수 있을까요?

지식인과 지성인

 스님, 목사, 사업가, 정치인, 작가, 강사 등등. 한동안 멘토열풍이었다. 아니 지금도 그 열풍은 계속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영어 강사, 전공 교수는 멘토가 아니다. 그들은 특정한 지식을 갖고 있는 ‘지식인’이다. 그렇다면 멘토는 누구인가? 지혜를 갖고 있는 ‘지성인’에 가깝다. 왜 많은 이들이 ‘지식인’ 대신 ‘지성인’을 열풍처럼 쫓았던 걸까? 지식인은 지식을 전해줄 뿐, 불안하고 흔들리는 삶에 대해 해줄 말이 없다. 정작 자신의 삶이 불안하고 흔들리는 까닭이다.      


 섬세한 이들은 다 느낀다. 영어 강사, 전공 교수의 삶의 불안과 균열을. 영민한 이들은 다 안다. 영어 지식과 전공 지식이 내 삶의 불안과 균열을 잦아들게 하지 못할 것을. ‘지식을 열심히 쌓아봐야 내면의 불안과 우울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암울한 진단. ‘지혜를 얻으면 내면의 불안과 우울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적 전망. 이 암울한 진단과 희망적 전망이 바로 사람들이 멘토 혹은 지성인을 찾아 거리를 뛰어나온 이유였을 테다.  

멘토에 열광하는 이유

     

 멘토를 찾아 헤맸던 이들은 삶의 지혜를 얻었을까? 아마 그렇지 못한 모양이다. 그들은 멘토를 바꾸면서 끊임없이 멘토를 다시 찾고 있으니까 말이다. 멘토들의 잘못이었는지, 멘토를 찾았던 이들의 잘못이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이것만은 분명히 안다. 그들이 얻은 것은 ‘지혜’가 아니라 ‘의존’이었다. 왜 안 그랬을까? 멘토들이 그들에게 건넨 이야기는 너무나 달콤한 것이었다. 그 이야기가 따뜻한 위로였든 따끔한 독설이었든 마찬가지다.  

    

 위로·위안은 그것대로, 독설은 독설대로 달콤함의 기능을 했다. 점점 중독되는 달콤함. 자신을 정당화하고 싶은 이들에게 위로보다 달콤한 것이 없고, 자신을 파괴하고 싶은 이들에게 독설보다 달콤한 것이 없다. ‘지혜’를 찾고자 했던 처음의 의지는 온데간데없고, 위로·위안·독설에 중독되어 멘토에게 점점 ‘의존’하게 되었을 뿐이다. 우리는 지성인을 만나 지혜로운 사람이 되고자 했지만 그러지 못했다. 오히려 더 깊은 불안과 균열, 우울로 내몰렸을 뿐이다.


      

스피노자의 ‘지성’

     

 이제 멘토나 지성인을 찾을 시간이 지났다. 바로 우리가 당당하고 씩씩한 지성인이 될 시간이다. “어떻게 지성인이 될 수 있을까요?” 스피노자라면 이 질문에 어떻게 답할까? 지성인이 되기 위해서는 먼저 ‘지성’이 무엇인지부터 알아야 한다. ‘지성知性’의 사전적 의미는 ‘새로운 인식을 만드는 정신작용’이다. ‘지식’이 양적인 문제라면, ‘지성’은 질적인 문제다. ‘지식’은 앎을 더할 뿐이지만, ‘지성’은 앎의 방향을 바꾼다. 스피노자는 이 ‘지성’을 어떻게 정의하고 있는지부터 살펴보자.

      

현실적으로 유한하든 무한하든 간에 지성은 다른 무엇보다도 신의 속성과 변용을 파악하지 않으면 안 된다. (에티카, 1, 정리 30) 

    

 난해하다. 천천히 하나씩 설명해보자. 우선 스피노자는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지성’을 두 가지로 나눈다. ‘유한한 지성’과 ‘무한한 지성’이다. ‘유한한 지성’은 새로운 인식을 만들되, 그것을 만드는 정신작용이 특정한 한계를 갖는 지성이다. 이 ‘유한한 지성’은 인간의 지성이다. 그렇다면, ‘무한한 지성’은 무엇일까? 이는 새로운 인식을 만드는 정신작용에 한계가 없어서 그것이 무한히 확장되는 지성이다. 이 ‘무한한 지성’은 ‘신’의 지성이다.

      

 나비효과를 예로 들어보자. 나비효과는 나비의 작은 날갯짓이 어떠한 연쇄적 과정을 통해 지구 반대편에서 태풍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인간의 지성(유한한 지성)은 그 나비효과의 일부 과정까지는 새로운 인식을 만들 수 있다. 예컨대, 나비의 날갯짓이 그 주변의 작은 바람을 만들고, 그 바람은 그 주위에 바람에 합쳐져 조금 더 큰 바람이 되는 과정은 파악할 수 있다. 하지만 인간의 지성은 유한하기에 나비효과의 연쇄적 과정 전체를 파악할 수는 없다.

      

 그런데 이 나비효과의 연쇄적 과정 전체를 파악할 수 있는 지성이 있다. 바로 ‘신神’이다. 만약 ‘신’이 있다면, 신의 지성(무한한 지성)은 그 무한에 가까운 연쇄적 과정 전체를 파악할 수 있다. 스피노자의 ‘지성’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인간뿐만 아니라, ‘신’이 무엇인지도 파악할 수 있어야 한다. 무신론자라면, 벌써 거부감이 생길지도 모르겠다. 노파심에 미리 말해 둘 것은, 스피노자가 말하는 ‘신’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종교적(초월적) 신이 아니다.


    

신은 자연이다.


 스피노자의 철학적 업적 중 하나는 ‘신’ 존재 규명이다. ‘신’은 그저 ‘믿음’의 대상일 뿐, 결코 ‘규명’의 대상일 수 없었던 시대에, 스피노자는 과감하게 ‘신’이 어떤 존재인지를 규명한다. 스피노자는 빈틈없는 논리적 증명으로 ‘신’의 존재를 새롭게 밝혀낸다. 그 ‘신’은 바로 ‘자연’이다. 세상 ‘밖’에 초월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 ‘안’에 이미 존재하고 있으면서 세상만물을 만들어내는 자연. 스피노자는 ‘신’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자연이라는 것을 우리는 신이라고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 (에티카, 1, 정리 29, 주석)

     

 신은 ‘자연’이다. ‘자연’을 ‘자연’되게, ‘자연’스럽게 하는 어떤 힘. 그것이 스피노자의 ‘신’이다. ‘자연’을 생각해보라. 때가 되면 계절이 바뀌고, 봄이 오면 꽃이 피고, 겨울이 되면 눈이 내린다. 늘 어느 곳에나 바람이 불고, 크고 작은 파도가 치고, 새가 지저귀고, 셀 수도 없는 생명이 탄생한다. 그 모든 일들이 조화를 이루어 마치 아름다운 선율처럼 들리지 않는가? 모든 일을 전지전능한 ‘신’이 아니라면 누가 할 수 있단 말인가. ‘자연’은 ‘신’이다.

     

 낡은 유신론이 ‘신’이 ‘피조물(자연현상·자연물)’을 만든다고 삶의 진실을 기만할 때, 스피노자의 불경스러운 새로운 유신론은 ‘신’의 진짜 모습을 밝혀 삶의 진실을 드러낸다. 스피노자는 세상의 외부에 있는 어떤 초월적인 존재가 계절을 바꾸고, 꽃·눈·바람·파도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세상 안에 있는 ‘자연(신)’ 그 자체가 바로 자연현상(계절변화, 파도, 바람) 혹은 자연물(새, 꽃, 눈)들을 만든다.



‘자연’을 모르면 지성은 없다.

     

 이제 스피노자의 ‘지성’에 대해 이해할 수 있다. 스피노자에 따르면, 지성은 “자연(신)의 속성들과 변용(변화)들을 파악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한다. 즉, 자연이 무엇인지, 그것이 어떻게 변화하는지에 대해서 파악할 수 있어여 ‘지성’에 대해서 논할 수 있다는 말이다. 여기에 고민해 봐야 할 문제가 있다. 자연이 ‘신’이라면, 두 가지 ‘신’이 존재한다. 자연에는 두 가지 자연이 있기 때문이다.  

    

 ‘자연’은 ‘생산된(소산적) 자연’과 ‘생산하는(능산적) 자연’으로 구성된다. 꽃·바람·파도·새·눈·비 같은 개별적인 자연물이 있다. 이것은 ‘생산된 자연’이다. 하지만 그 꽃을 피게 하고, 바람을 불게 하고, 파도를 치게 하고, 새를 탄생시키고, 눈과 비를 내리게 하는 ‘자연’도 있다. 이것은 ‘생산하는 자연’이다. 스피노자의 ‘신’은 ‘생산하는 자연’이다. 신이 피조물을 만들듯, 이 ‘생산하는 자연’(자연 그 자체)은 모든 ‘생산된 자연’(자연물)을 만들어내니까 말이다.

     

 이제 우리의 질문으로 돌아가자. “어떻게 지성인이 될 수 있을까?” ‘생산하는 자연’이든, ‘생산된 자연’이든, ‘지성’은 ‘자연’에 관련된 문제다. 이는 ‘자연’을 모르면 지성인이 될 수 없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자연’을 안다는 것은 무엇인가? ‘자연’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즉, ‘자연’은 ‘있는 그대로’다. 하여, ‘자연을 안다’는 것은 ‘있는 그대로를 본다’는 말에 다름 아니다. 이것이 우리가 지성인이 되지 못한 이유다. 우리는 ‘있는 그대로’의 자연을 보지 못했기에 지성인이 되지 못했다.


‘자연’을 본다는 것

     

 의아할지 모르겠다. 있는 그대로의 ‘자연’을 보는 것이 뭐 그리 어려운 일이란 말인가? ‘생산된 자연’을 보는 것은 어렵지 않다. 산, 나무, 바다, 꽃, 부모, 친구, 연인처럼, ‘생산된 자연’들을 보는 것은 쉽다. 이것이 산이고, 저것이 바다라고 말하는 것처럼, 이 사람이 부모고, 이 사람은 친구라고 파악하는 것은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생산하는 자연’은 어떤가? 우리는 ‘생산하는 자연’을 볼 수 있을까? 즉 ‘자연’을 자연되게 하는 그 힘을 볼 수 있을까?

    

 ‘생산하는 자연’은 무엇인가? 그것은 무한한 연결이고 마주침이다. 그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우리가 나비효과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나비의 날갯짓이 만들어내는 무한한 연결과 마주침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생산된 자연’이 아니라 ‘생산하는 자연’을 보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산과 바다를 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어떤 연결과 과정을 통해 산과 바다가 되었는지 ‘있는 그대로’ 볼 수 있을까? 부모와 친구를 보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어떤 연결과 과정을 통해 그런 ‘부모’와 ‘친구’가 되었는지 ‘있는 그대로’ 볼 수 있을까? 쉽지 않은 일이다. 우리는 눈앞에 있는 ‘생산된 자연’만을 볼 뿐, 그 자연물들을 있게 한 ‘생산하는 자연’은 보지 못한다. 그 무한한 연결과 마주침의 과정을 우리는 보지 못한다.

     


자연과 진여眞如

     

불교에는 ‘진여眞如’라는 개념이 있다. ‘진여’는 ‘사물들의 있는 그대로 모습’을 의미한다. 즉 자연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다. 이는 스피노자의 ‘생산하는 자연’과 맞닿아 있다. ‘진여’는 불교의 궁극, 즉, 열반과 깨달음으로 인해 부처가 되는 길이다. ‘진여’(있는 그대로의 세상)를 보는 것은 어렵고 힘든 일이다. ‘진여’는, ‘생산된 자연’ 뿐만 아니라 ‘생산하는 자연’까지 ‘있는 그대로’ 본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자연 안에 있는 수많은 존재들의 연결과 마주침의 과정(생산하는 자연)을 파악하게 되는 것은 얼마나 어렵고 힘든 일인가.      


 ‘세상의 수많은 존재들의 연결과 마주침(생산하는 자연 혹은 진여)을 얼마나 파악할 수 있느냐?’ 이것이 지혜로운 지성인이 될 수 있는지 없는지를 가늠하는 질문이다. 흔한 지식인들은 ‘진여’를 보지 못한다. ‘생산된 자연’만 볼 뿐, ‘생산하는 자연’은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생산된 자연’으로서의 타인(노숙자, 성소수자, 장애인)을 볼뿐, 그 타인이 어떤 연결과 마주침의 과정을 통해 지금의 타인이 되었는지 보지 못한다.      


 이것이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 대한 감수성이 턱없이 부족한 지식인이 그리도 많은 이유다. 그들은 ‘지식’이 있을 뿐, ‘지성’은 없기 때문이다. ‘지성’이 결여된 지식인들은 ‘생산하는 자연’을 보지 못하고, 보려고 하지도 않는다. 그들은 그저 눈앞에 있는 ‘생산된 자연’만을 볼 뿐이다. 아니 그들은 눈앞에 있는 ‘생산된 자연’이 세상 전체라 믿는다. 스피노자는 많은 사람들이 지성인이 되지 못하는 이유에 대해 이렇게 진단한다.  



지성인이 되지 못하는 이유

     

자신들이 이해할 수 없는, 다른 불가사의한 것들 중 하나로 간주하고, 그에 따라 자신들의 타고난 무지를 상태를 유지하는 편이, 전체구조를 파괴하고 새로운 구조를 생각해내는 것보다 쉬웠기 때문이다. (에티카, 1, 정리 29, 부록) 

    

 누구나 자신들이 이해할 수 없는 사건과 마주칠 때가 있다. ‘게으르면 노숙자가 된다’고 믿는 이들이 있다. 하지만 그런 이들이 누구보다 열심히 살았지만 노숙자로 전락하게 된 이를 만나게 되면 어떨까? 그 이해할 수 없는 사건 앞에서 자신이 믿던 “전체구조(자신이 믿는 세상)를 파괴하고 새로운 구조를 생각”해내게 될까? 그런 일은 좀처럼 일어나지 않는다. 그들은 “무지 상태(노숙자는 게으르다)를 유지”할 뿐이다. 그것이 더 쉽기 때문이다.      


 오직 ‘무한한 지성’으로 나아가려는 지성적 노력을 멈추지 않는 이들만 ‘생산하는 자연’, 혹은 ‘진여’라는 새로운 구조를 생각해낼 수 있다. 지성인은 타인에 대한 섬세한 감수성이 있다. 그것은 윤리·도덕적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그건 지성적 차원의 문제다. 지성인들은 ‘생산하는 자연’ 혹은 ‘진여’를 보려는 지성적 노력, 즉 ‘무한한 지성’으로 나아가려는 노력을 멈추지 않는다. 이것이 지성인이 더 많은 이들의 아픔과 상처에 공감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지성인은 피해의식에 휩싸인 이, 분노를 조절하지 못하는 사람, 쇼핑에 중독된 사람, 돈밖에 모르는 사람. 더 나아가 노숙자, 장애인 같은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들의 아픔과 상처에 공감할 수밖에 없다. 지성인은 그네들이 모두 불운이라 할 만한 연결과 마주침의 과정으로 그렇게 된 것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또 누구에게나 그런 연결과 마주침이 닥쳐올 수 있다는 것 역시 알고 있기 때문이다. 지성인은 ‘있는 그대로의 세상’(생산하는 자연)을 보려는 하기 때문에 타인들에 대한 민감한 감수성을 가질 수밖에 없다.



아름답고 씩씩한 지성인을 위하여.

      

 ‘지성인’이 되고 싶다면 하나만 기억하면 된다. 있는 그대로의 세상을 볼 것! ‘생산하는 자연’ 혹은 ‘진여’를 보려고 노력하면 된다. ‘생산하는 자연’을 완전하게 인식하기는 어려울 테다. 세상의 모든 것의 연결과 마주침의 과정을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그것은 정말 ‘신’의 영역이니까. 하지만 ‘있는 그대로’의 타자와 세계를 보려고 노력할 수는 있다. 그 노력으로 우리는 씩씩하고 아름다운 지성인 될 수 있다.


 ‘지성인’은 씩씩하다. ‘생산하는 자연’ 혹은 ‘진여의 끄트머리라도 볼 수 있게 되었을 때, 달리 말해, 있는 그대로의 세상이 어떤 연결과 마주침의 과정을 통해 존재하게 되었는지 보이기 시작할 때 놀라운 깨달음에 도달한다. 가부장적 세계, 자본주의적 세계, 권위적 세계, 국가적 세계. 그 모든 것이 모두 허구였음을 깨닫게 된다. 그렇게 삶의 진실에 직면한 이는 씩씩하게 외칠 수밖에 없다. 이 세상은 잘못되었다고, 다른 세상이 가능하다고. 이렇게 누구도 말하지 않는 삶의 진실을 외치는 이는 얼마나 씩씩한가.


 ‘지성인’은 아름답다. 있는 그대로의 세상을 보게 되면 안다. 한 사람의 행복도 불행도 모두 우발적인 연결과 마주침의 결과라는 것을. 그렇게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통해 한 사람을 보게 된 이들에게는 따뜻한 미소와 눈물이 있다. 그들은 누군가의 행복을 보며 참 다행이라고 안도할 수 있다. 그들은 누군가의 불행을 보며 네 잘못이 아니라고 말하며 함께 아파할 수 있다. 삶의 진실에 이르러 자신의 행복과 불행 너머 타인의 행복과 불행에 미소 짓고 눈물 짖는 이는 얼마나 아름다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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