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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 : 나와 다른 사람이 왜 싫을까요?

다름과 틀림


“그는 나와 틀리게 생겼잖아” 잘못된 표현이다. “그는 나와 다르게 생겼잖아”가 올바른 표현이다. ‘틀림’은 특정한 기준으로 옳고 그름을 가름할 수 있을 때, ‘다름’은 그럴 수 없을 때 사용한다. 많은 이들이 ‘다름’과 ‘틀림’의 잘못된 사용을 민감하게 문제 삼는다. 그것은 단순히 언어의 올바른 사용을 원해서일까? 아니다. ‘다름’과 ‘틀림’을 문제 삼는 데는 조금 더 심층적인 논의가 내포되어 있다. 그것은 단독성과 다양성에 관한 논의다.   

   

 단독성은 개인마다 다른 독특한 개별적 특성이고, 그 단독성들이 모여 다양성을 만들어낸다. 인간 사회에서 이 단독성과 다양성을 긍정하고 존중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나와 틀리게 생겼잖아” 이 말에서 문법적 오류만을 파악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은근한 독선과 독단이 느껴지지 않는가? 자신의 생김새를 기준으로 삼아, 한국인처럼 생긴 것이 옳은 것이고 흑인이나 동남아인처럼 생긴 것은 그른 것이라는 생각이 언뜻 비치는 것 같지 않은가.   

  

 ‘다름’을 ‘틀림’으로 자주 말하는 이는 단독성과 다양성이라는 가치에 둔감한 사람일 개연성이 높다. 이는 과도한 해석이 아니다. ‘생각은 언어의 지배 받는다’ 이 구조 언어학적 통찰이 알려주는 바가 무엇인가? 무엇인가를 생각해서 그에 합당한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말하느냐가 그 사람의 생각을 결정한다는 것이다. 쉽게 말해, 한 사람의 언어는 그 사람의 생각을 드러낸다는 것이다.   

   

 즉, 특정한 언어를 자주 사용한다는 것은 그 언어에 합당한 생각을 갖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이 세상 사람들이 ‘다름’과 ‘틀림’을 잘못된 사용을 민감하게 문제 삼는 심층적인 이유일 테다. “나와 틀리게 생겼다”는 말에서 ‘잘못된 문법’이 아니라 ‘잘못된 마음’을 직감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다름’과 ‘틀림’을 잘 구분해서 사용하는 사람은 단독성과 다양성을 체화하고 있을까? ‘그렇다’고 단언하기 어렵다. 


    

위선을 넘어서 

 ‘다름’과 ‘틀림’을 명확하게 구분하여 사용한다. 그렇다면 나는 단독성과 다양성을 체화하고 있는 사람일까? 정직하게 말하자. 나와 ‘다른’ 생각, 취향, 외모를 갖고 있는 사람이 내심 불편했다. 나와 ‘다른’ 기준으로 살아가는 이들이 은근히 불쾌했다. 더 정직하게 말하자. 그네들이 싫었다. 군인이었을 때 신념적 병역거부자들이 싫었다. 직장인이었을 때는 게을러빠진 예술가들이 싫었다. 나와 다른 성적 취향을 갖고 있다는 이유로 성소수자들이 싫었다. 그네들에게 ‘다르다’가 아니라, ‘틀렸다’고 말하고 싶었다.    

 

 그렇다. 나의 ‘올바른 문법’은 ‘올바른 마음’의 표현이 아니라 ‘잘못된 마음’을 가리기 위한 위선이었던 셈이다. 폭력적인 독선과 독단을 비판하고, 단독성과 다양성을 존중해야 한다고 말한다. 분명 그런 ‘생각’을 갖고 있다. 하지만 우리의 ‘감성’은 다르다. 우리의 ‘감성’은 여전히 독선적이고 독단적이다. 자신과 다른 존재들이 불편하고 불쾌하다. 자신과 다른 기준으로 살아가는 이들이 싫다. 이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언제까지나 위선에 머물 수밖에 없다.


     


스피노자의 ‘목적원인’

     

 위선을 넘어 이질적 존재들과 함께 살아가기 위해서는 다시 질문해야 한다. “나와 다른 사람이 왜 싫을까?” 스피노자는 이 질문에 어떻게 답해줄까? 먼저, 스피노자가 ‘인간’이란 존재를 어떻게 파악하고 있는지부터 알아보자.      


인간은 항상 목적을 위해서즉 자신들이 추구하는 이익을 위해서 행동한다는 결론이 나온다그러므로 그들은 언제나 이루어진 것의 목적 원인만을 알려고 하며그것을 듣게 되었을 때 만족한다. (에티카제 1부록)     


 스피노자는 인간을 목적 달성을 위해 행동하는 존재로 규명한다. 즉, 인간은 어떠한 목적을 위해서 행동하는 존재다. 그래서 인간은 어떤 사물이나 성취가 있을 때 “목적 원인(목적을 이루게 한 원인)만을 알려고 하며 그것을 들었을 때만 만족”하게 된다. 그리고 그 목적은 “자신(인간)들이 추구하는 이익”이라고 진단하고 있다. 정확한 진단이다. 17세기 스피노자의 논의를 현재에도 적용할 수 있다. 

     

 지금은 자본주의의 시대다. 우리 시대의 거의 유일한 목적이 무엇인가? 돈이다. 거의 모든 이들이 돈이라는 목적을 위해서 행동한다. 어떤 행동을 하던 그것이 목적(돈)에 부합하는지 그렇지 않은지에 따라 행동한다. 쉽게 말해, 돈이 되는지 그렇지 않은지에 따라 행동한다. 그러니 당연히 세상 사람들의 관심은 온통 목적 원인, 즉 돈을 벌게 된 원인에 쏠려 있다. 그리고 그 ‘목적 원인’(공부·취업·코인·주식·사업…)을 듣게 되었을 때 만족한다.      


 다른 경우도 마찬가지다. 누군가 책을 읽고, 여행을 떠난다고 해보자. 그때 세상 사람들이 항상 묻는 질문이 무엇인가? 왜 책을 읽는가? 왜 여행을 떠나는가? 즉, 그 목적(지식·지혜)을 알려고 한다. 세상 사람들은 책·여행(목적 원인)을 통해 지식·지혜(목적)를 이루고자 한다는 사실을 들었을 때만 만족한다. 인간의 ‘목적 원인’에 대한 집착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스피노자에 따르면, 인간은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대상에게서 ‘목적 원인’을 찾으려고 한다. 



‘가치’의 기원     


사람들은 흔히모든 자연물이자신들처럼어떤 목적을 가지고 움직인다고 생각한다. (에티카제 1부록)     


 인간은 ‘목적 원인’을 자연물에게도 적용시키려 한다. 즉, 인간 자신들이 그런 것처럼, 모든 자연물 역시 어떤 목적을 가지고 움직일 것이라고 믿는다. 만약 그렇다면, 자연물의 ‘목적 원인’은 무엇일까?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이 있다. 스피노자 말하는 자연물이란, 비, 바람, 물, 바위, 나무, 개, 고양이 같은 ‘자연물’만을 말하는 게 아니다. 선/악, 질서/혼란, 아름다움/추함 같은 관념들도 ‘자연물’이다. 물질적인 것이든, 관념적(비물질적)인 것이든 세상에 존재하고 있다면 모두 자연물이다. 인간은 이런 자연물들의 목적을 어떻게 규정했을까? 

    

사람들은 존재하는 모든 것이 자신들을 위하여 만들어졌다고 여긴다그 후에 각각의 사물에 대하여 자신들에게 가장 유용한 것을 핵심이라고 판단하고자신들을 가장 많이 만족시키는 온갖 것을 가장 탁월한 것으로 평가하게 되었다그리하여 그들은 사물의 본성을 설명하기 위해서 선질서혼란따뜻함추움아름다움추함 등의 개념들을 형성하게 되었다. (에티카제 1부록)   

  

 스피노자에 따르면, 인간은 자연물의 목적(자연물의 존재 이유)을 인간 자신에게서 찾는다. 즉 모든 자연물이 인간을 위하여 만들어졌다고 믿는다. 쉽게 말해, 비도 인간을 위해 내리며, 바람도 인간을 위해 분다는 것이다. 이런 관점은, 인간이 자연물들 중 자신에게 유용한 것을 좋고 탁월한 것으로, 그렇지 못한 것을 나쁘고 열등한 것으로 평가하게 되는 기초가 된다. 햇볕과 비는 그냥 있을 뿐이다. 하지만 그것이 인간에게 유용할 때는 ‘햇살·단비’(선, 질서, 아름다움)가 되고, 유용하지 않을 때는 ‘가뭄·홍수’(악, 무질서, 추함)가 된다. 

    

 이 얼마나 자기중심적인 편협한 발상인가? ‘이것이 선(질서·아름다움·따뜻함)이고 이것은 악(무질서·추함·추움)이야!’ 이런 인간의 여러 가치 판단들은 지극히 인간을 중심으로 구성된 가치일 뿐이다. ‘선/악’ ‘질서/무질서’ ‘아름다움/추함’ ‘따뜻함/추움’ 같은 가치 평가 개념들은 객관적이거나 명백한 진리 같은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자연물의 본성을 인간 중심으로 설명하기 위해서 생겨난 오류들일 뿐이다. 인간에게 유용함이 어떤 자연물에게는 유해함이 될 수 있다.   

   


선악 개념은 인간중심주의 결과다.

    

건강과 신의 경배에 도움이 되는 모든 것을 사람들은 선이라고 하고그 반대를 악이라고 한다. (에티카제 1부록)

      

 ‘선’은 무엇이고 ‘악’은 무엇인가? 그것은 태초부터 정해진 고정불변의 진리인가? 전혀 그렇지 않다. 인간 자신에게 도움이 되는 것을 ‘선’이라고 하고, 그 반대를 ‘악’이라고 규정했을 뿐이다. 이것이 삶의 진실이다. ‘선’과 ‘악’은 언제나 모호하다. 상황과 조건에 따라 유익과 유해가 늘 바뀌기 때문이다.

      

 따뜻한 위로는 ‘선’인가? 그 위로가 특정한 인간을 해롭게 하면 그것은 ‘악’이 된다. 일상이 그것을 말해주지 않는가? 의존적인 이들에게 지속적인 위로는 자신의 의존성을 더욱 크게 하는 ‘악’일 뿐이다. 참혹 살인은 ‘악’인가? 아니다. 그 살인이 특정한 인간을 이롭게 하면 그것은 ‘선’이 된다. 역사가 그것을 말해주지 않던가? ‘이토 히로부미’는 우리에게는 ‘악’이지만 일본에서 ‘선’이다. 마찬가지로 ‘안중근’은 우리에게는 ‘선’이지만 일본에서는 ‘악’이다. ‘질서/무질서’라는 개념도 마찬가지다.      


사물이 우리의 감각을 통해 쉽게 떠올릴 수 있어서 쉽게 기억될 수 있다면우리는 그것을 훌륭하게 질서 지어져 있다고 말하고 그 반대의 경우는 나쁘게 질서 지어져 있다 또는 혼란스럽다고 말한다.” (에티카제 1부록) 

    

 ‘질서/무질서’는 객관적이고 가치중립적인 개념인가? 아니다. 스피노자에 따르면, 인간은 자신의 감각을 통해 쉽게 기억될 수 있는 것을 ‘질서’로, 그 반대를 ‘무질서’로 여긴다. 두 숫자의 나열이 있다. ‘1,2,3,4,5,6,7,8···’ ‘5,7,96,2,36,85···’ 어느 것이 더 질서 잡혀있다고 느낄까? 전자다. 이는 전자의 나열이 우리의 감각을 통해 쉽게 떠올려지고 쉽게 기억될 수 있기 때문이다. 후자는 그 반대이기에 무질서하게 느껴지는 것일 뿐이다. 스피노자의 이러한 통찰은 인간이 얼마나 자기중심적인지를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불편한 진실, 타인

     

 이제 질문으로 돌아가자. 우리는 왜 이질적인 존재가 싫을까? 한 존재의 단독성과 다양성을 존중해야 한다고 배웠고, 또 그래야 한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그게 잘 안된다. 왜 그런가? 인간이란 존재 자체가 모든 자연물을 ‘목적 원인’으로 보기 때문이다. 인간에게 자연물은 ‘인간의 이익’이라는 목적을 이루게 한 원인일 뿐이다. 물은 인간이 마시기 위해, 돼지는 인간이 먹기 위해 존재한다고 여길 수 있다. 비·햇볕·물·바람·돼지·새 등등의 자연물은 모두 인간의 이익을 위한 원인들일 뿐이다. 


 인간은 모든 자연물이 인간을 위해 존재한다고 여긴다. 모든 자연물에 타인도 포함된다. 이것이 문제다. 타인은 여타 자연물처럼 손쉽게 ‘목적 원인’으로 취급하기 어렵다. 타인은 나와 동등한 인격체니까. 이것이 타인이 불편하고 불쾌한 근본적인 이유다. 타인은 ‘인간(나)의 이익’이라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원인(수단)으로 여기기 어렵다. 타인은 ‘나’와 동등한 인간이기 때문이다. 


      

 ‘목적 원인’에 집착하는 인간은 지독히도 자기중심적이다. 그래서 자연물뿐만 아니라 ‘타인’마저 ‘나의 이익’을 위해 존재한다고 여기게 된다. 이것이 우리가 ‘나’와 유사한 타인들에게 ‘선’과 ‘질서’(익숙함·편안함)을, ‘나’와 다른 타인들에게 ‘악’과 ‘무질서’(불쾌함·불편함)을 느끼는 이유다. ‘나’와 유사한 타인은 나에게 유익할 것 같고, ‘나’와 다른 타인은 나에게 유해할 것 같기 때문이다.       

 

 나는 왜 신념적 병역거부자가 싫었을까? 그들은 내게는 ‘무질서’였기 때문이다. 신념적 병역거부자는 정말 무질서한 존재일까? 아니다. 그들은 종교적, 이념적으로 누구보다 ‘질서’ 있는 삶을 산다. 그 질서를 지키기 위해 병역을 거부하는 것이다. 다만 그들의 질서가 나의 질서로 환원될 수 없었던 것일 뿐이다. 나의 익숙한 질서와 그의 낯선 질서가 달랐기 때문에 그들이 불편하고 불쾌했던 것일 뿐이다. 마치 ‘5,7,96,2,36,85···’이 불편하고 불쾌한 무질서로 보였던 것처럼 말이다. 

    

 나는 왜 예술가들이 싫었던 걸까? 그들의 무책임과 게으름 때문이었다. 그것은 내게 불편하고 불쾌한 ‘무질서’였다. 하지만 그들은 무책임하지도 게으르지도 않다. 자신의 작품에 책임감을 갖고 있으며, 그 책임감만큼 성실하게 작품에 임한다. 예술가의 질서(책임감·성실함)가 나의 질서로 환원될 수 없어서 그들이 싫었던 것일 뿐이다. 지독히도 자기중심적인 인간은 자신과 다른 사람이 싫을 수밖에 없다. 그들은 모두 불쾌하고 불편한 무질서를 만들어내는 존재라 여기고 있기 때문이다. 



나와 다른 사람이 싫은 이유, 과잉된 자의식

      

 “나는 나와 다른 사람들을 존중해” 확신에 차서 말하는 이들이 있다. 이들의 확신은 아직 예외적인 이질성을 만나보지 못했기 때문일 뿐이다. 그들 역시 예외적인 이질적 존재들, 성소수자, 난민, 장애인, 이주노동자들 앞에서 기묘한 불편함과 불쾌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그 불편함과 불쾌함은 ‘나’의 이익에 부합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 ‘나’의 이익의 바닥에는 무엇이 있는가? 바로 자의식 과잉이다.

      

 ‘나’의 이익이 ‘이기심’으로 드러나는 것은 표면적 양상일 뿐이다. 그 바다에는 ‘자의식 과잉’이 도사리고 있다. 인간은 근본적으로 자의식이 과잉된 존재다. 스피노자의 말처럼, “사람들은 존재하는 모든 것이 자기들을 위하여 만들어졌다”고 믿을 만큼 과잉된 자의식을 갖고 있다. 물, 소, 산이 인간이 마시고, 먹고, 오르기 위해 존재하는 것으로 볼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인간의 과잉된 자의식으로 인해 그리 보는 것일 뿐이다.    

  

 세상에 존재하는 그 어떤 자연물도 ‘목적 원인’(목적을 이루게 한 원인)이 아니다. 모든 자연물은 그저 존재하는 것일 뿐이다. 타인 역시 마찬가지다. 타인은 여느 자연물(햇볕·비·바람·나무…)이 그런 것처럼, ‘나’의 이익과 아무 상관 없이 그저 존재할 뿐이다. 인간의 과잉된 자의식 때문에 그것을 보고 있지 못한 것일 뿐이다. 나와 다른 사람을 진정으로 긍정하고 싶은가? 타인의 단독성과 그 단독성이 만들어내는 다양성을 진정으로 체화하고 싶은가? 그렇다면 먼저 ‘타인’에게서 눈을 떼야 한다. 그리고 자신의 과잉된 자의식을 정면으로 응시해야 한다.  

    

 ‘나는 얼마나 세상을 나의 중심으로 바라보았는가?’ 아프게 성찰할 수 있어야 한다. 그 성찰을 통해, 자연이 나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자연의 일부라는 자명한 사실을 깨달을 수 있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 어느 선사의 말처럼, 세상의 모든 자연물이 어떤 것을 위해 존재하는 ‘목적 원인’이 아니라, 그냥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일 뿐이다. 과잉된 자의식을 조금씩 덜어가며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게 될 때, 타인 역시 있는 그대도 긍정할 수 있다. 그때 우리는 나와 다른 사람들을 위선 없이, 오롯이 긍정할 수 있다. 그때 진정한 의미의 단독성과 다양성을 머리가 아닌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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