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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부정 : 어떻게 나를 긍정할 수 있을까요?

우리 시대의 대표적 질병, ‘자기부정’      


 “나를 사랑하라!” 유행처럼 반복되고 있는 말이다. 한 시대의 슬로건은 그 시대의 결핍을 반영한다. ‘정직’이 슬로건인 시대는 비리가 난무하는 시대이고, ‘정숙’이 슬로건인 시대는 난잡한 욕망이 난무하는 시대다. 정직하게 말하자. 우리는 자신을 사랑하기는커녕 싫어한다. 자신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이들이 드물기 때문에 ‘자신을 사랑하라!’는 말이 그리도 유행처럼 번졌던 것일 테다. 지금은 자신을 싫어하는 마음, 자기부정이 넘쳐나는 시대다.        


 ‘자기부정’ 이는 우리 시대의 대표적인 정서적 상태다. 외모, 직장, 수입, 성격 등등 지금 나의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들이 넘쳐난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나름 똑똑하다고 하는 이들은 이를 자본주의 때문이라고 답한다. 이는 일정 정도 사실이다. 자기부정은 자본주의적 삶의 방식과 관계되어 있다. 자본주의는 자기부정을 양산mass production하는 측면이 있다. 자본주의는 어떻게 자기부정을 양산하는가? 완벽한 모델을 통해서다.     


 넘쳐나는 광고들을 보라. 아찔한 몸매에 외국어를 잘하며 명품을 두르고 다니는 완벽한 모델이 등장한다. 그때 시선을 돌려 거울에 비친 초라한 우리의 모습을 보며 자기부정에 빠지지 않던가. 자본주의는 완벽한 존재를 만듦으로 자기부정을 양산한다. 완벽한 존재(모델)에 매혹될 때 자기부정에 빠지지 않을 도리가 없다. 하지만 자본주의는 자기부정을 ‘양산’하지만 ‘탄생’시키지는 못한다. 아무리 전능한 자본이라 하더라도 애초에 없던 ‘자기부정’을 만들어낼 수는 없다.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충분히 긍정하는 이들은 완벽한 모델이 있다고 해도 현혹되지 않는다. 그러니 자기부정에 시달리는 이들이 근본적으로 문제 삼아야 할 대상은 자본주의가 아니다. 그들이 물어야 할 질문은 이것이다. 자기부정이 최초로 탄생하는 곳은 어디인가? 이 질문이 중요하다. 싫은 것들에 대해 이유를 묻지 않고 그냥 싫어하는 것은 우리의 오래된 습관 아니던가. 자기부정을 벗어나고 싶다면 ‘나’가 싫은 이유부터 물어야 한다. 그 최초의 이유를 물어야 한다. 그것이 자기부정을 벗어날 수 있는 첫 단추다.  


     

자기부정의 기원은 ‘완전성’

     

 ‘내’가 싫은 이유가 뭘까? 얼굴이 못생겨서? 키가 작아서, 뚱뚱해서, 성격이 모나서, 직장이 변변치 않아서, 돈이 없어서, 지적이지 못해서 등등. 이유는 차고 넘친다. 하지만 이는 본질적인 이유가 아니다. 자기부정의 본질적인 이유는 ‘완전성’에 있다. 구체적으로 언어화, 형상화 시켜놓지 않았더라도, 우리의 마음속에는 ‘완전성’이 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자신이 싫어진, 즉 자기부정의 근본적인 이유다.   


 얼굴이 못생겼다는 이유로 자기부정에 시달리는 이를 생각해보자. 그의 머릿속에는 ‘완전’히 아름다운 얼굴이 있다. 그 ‘완전성’에서 무엇인가 결핍되었기 때문에 자신이 싫은 것이다. 코 높이, 쌍꺼풀, 속눈썹 길이 등 그의 머릿속에는 아름다운 얼굴의 ‘완전성’이 있다. 그 ‘완전성’에서 자신의 코, 쌍꺼풀, 속눈썹은 뭔가 부족하다고 느끼기 때문에 자신이 못생겼다고 판단 내리게 된다. 이것이 자기부정이 형성되는 내적 원리다. 다른 자기부정의 사례들도 다 마찬가지다.   

        

 키가 작아서, 뚱뚱해서, 성격이 모나서, 직장이 변변치 않아서, 돈이 없어서, 지적이지 못해서 자신을 부정하는 사람을 생각해보자. 그들은 다들 (키, 몸매, 성격, 직장에 대한) 자신만의 ‘완전성’이 있다. 자신의 상태가 그 ‘완전성’에서 무엇인가가 어느 정도 결핍되어 있다고 여기기 때문에 자기부정이 생긴다. 개인마다 자기부정의 정도의 차이가 발생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완전성’에서 자신이 덜 결핍되어 있다고 여기는 이는 덜한 자기부정을, 더 결핍되어 있다고 여기는 이는 더한 자기부정에 시달리게 된다.



스피노자의 ‘완전성’

   

 자기부정은 ‘완전성’이라는 개념과 깊게 연루되어 있다. 이것이 ‘완전성’이라는 개념을 깊이 숙고해보아야 하는 이유다. 스피노자는 ‘완전성’에 대해 어떻게 이야기했는지 들어보자.


사물은 인간의 감각을 즐겁게 만들어주거나 불쾌하게  한다는 이유로혹은 인간의 본성에 부합하거나 거슬린다는 이유로 더 완전하거나 덜 완전하지 않다. (에티카 1부록)     

     

 스피노자는 어떤 사물이 인간의 감각을 즐겁게 혹은 불쾌하게 한다는 이유로 더 완전하거나 덜 완전하지 않다고 말한다. 하지만 우리는 자신의 감각을 즐겁게 하는 것을 더 ‘완전’한 것으로, 불쾌하게 하는 것을 덜 ‘완전’한 것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다. 이해가 어렵다면 스피노자의 ‘사물’을 ‘얼굴’로 바꿔 생각해보자. 스피노자의 말은 이렇게 바꿀 수 있다. “어떤 얼굴이 인간의 감각을 즐겁게 만들어주거나 불쾌하게 한다는 이유로 더 완전하거나 덜 완전한 것이 아니다.”  

   

 조각처럼 생긴 연예인들의 얼굴은 분명 우리의 감각을 즐겁게 해준다. 동시에 화상을 입은 사람들의 얼굴은 분명 우리의 감각을 불쾌하게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연예인들의 얼굴이 더 ‘완전’한 것이 아니며, 화상을 입은 사람의 얼굴이 덜 ‘완전’한 것도 아니다. 그냥 각자의 생김새가 있을 뿐, 거기에는 더 완전한 얼굴도, 덜 완전한 얼굴도 없다. 우리가 갖고 있는 다른 ‘완전성’의 개념들도 마찬가지다. 


 미생물, 물고기, 원숭이 중 우리는 어느 동물이 더 ‘완전’한 쪽에 가깝다고 여길까? 아마 많은 이들이 원숭이라고 답할 테다. 왜 그런가? 그건 단지 원숭이가 더 “인간의 본성에 부합”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인간의 본성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점을 제외하면, 물고기 아니, 미생물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결코 덜 완전하다고 말할 근거는 어디에도 없다. 그 모든 존재들은 각자 그 자체로 존재할 뿐이다. 더 ‘완전’한 생물도, 덜 ‘완전’한 생물도 없다.


      

실재성=완전성


 우리가 갖고 있는 ‘완전성’은 결코 완전하지 않다. 그것은 인간 중심적(물고기보다 인간이 완전하다)이거나 시대 중심적인(완전한 미의 기준은 시대마다 다르다) 개념일 뿐이다. 당연하지 않은가? 물고기보다 인간이 더 완전하다는 생각은 지극히 인간 중심적인 생각일 뿐이다. 하얀 사람이 아름답다고 느끼는 감성은 유럽 패권 시대의 감성일 뿐이다. 이처럼, ‘완전성’이라는 개념은 황당할 정도로 자의적이다. 우리의 ‘자기부정’은 이 황당한 ‘완전성’이라는 개념에 기초해 있다. 그렇다면, ‘완전성’이란 개념 자체가 허구인 걸까? ‘스피노자는 ‘완전성’을 이렇게 정의했다.      


사물의 완전성은 전적으로 그 사물의 본성과 능력에 의해서만 평가되어야 한다. (에티카 1부록)  

     

 ‘완전성’ 그 자체는 허구가 아니다. ‘완전성’은 있다. 하지만 그 완전성은 어떤 “사물의 본성과 능력”에 따라서 판단될 수 있다. 난해한 이야기다. 여기서 말하는 “사물의 본성과 능력”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스피노자의 이야기를 조금 더 들어보자.     


나는 실재성과 완전성을 동일한 것으로 이해한다. (에티카 2정의 6) 

    

 스피노자는 ‘실재성’과 ‘완전성’은 동일한 것이라고 말한다. ‘실재성’은 무엇일까? 쉽게 말해, 실재는 ‘있음’(존재)이다. “UFO가 실재하느냐?” 이 말은 “UFO가 있느냐?”라는 의미다. “실재성과 완전성이 동일”하다는 스피노자의 말은, ‘실재하는 것은 완전하다’는 의미다. 이는 우리의 감각이 즐겁든 불쾌하든 상관없이, 세상에 ‘있는’ 것들이면 모두 ‘완전’하다는 의미다. 이것은 흔한 싸구려 위로의 말이 아니다. 스피노자는 인간이란 존재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인간은 신의 본성을 어떤 일정하고 결정적인 방식으로 표현하는 변용 또는 양태이다. (에티카 2부 정리 11, 주석)


 스피노자에게 가장 완전한 존재는 자연(신)이다. 인간은 그 자연(신)의 변용(변화)이자 양태(변화된 것)다. 말하자면, 인간은 작은 자연(신)인 셈이다. 키가 큰 인간, 키가 작은 인간, 코가 높은 인간, 코가 낮은 인간. 피부가 검은 인간, 피부가 흰 인간이 있다. 인간들마다 분명 차이가 있다. 하지만 그 어떤 차이도 결코 우열의 차이가 아니다. 거대한 바다, 큰 호수, 작은 냇가 중 어느 더 완전하다거나 덜 완전하다고 말할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자연의 변용이자 양태로서 인간은 그 자체로 모두 완전하다.   

   

 ‘실재’(있음)하는 것은 그대로 ‘완전’하다. 어째서 그런가? 실재하는 것은 모두 그 나름의 “본성과 능력”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키가 작은 인간’ ‘돈이 없는 인간’ ‘피부가 검은 인간’이 덜(혹은 불)완전해 보인다면, 그것은 우리가 그것들의 “본성과 능력”을 보지 못하기 때문일 뿐이다. 그것들이 어떤 존재이고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보지 못하기에 불완전해 보이는 것일 뿐이다. 마찬가지로 우리 자신이 덜(혹은 불)완전해 보이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실재하는 우리의 “본성과 능력”을 보지 못하고 허구적 ‘완전성’의 시선으로 우리 자신을 바라보기 때문이다.  



자기부정에서 벗어나는 법


 자기부정에서 벗어나는 법을 알겠다. 그것은 우리의 자의적인 ‘완전성’ 개념을 해체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어떻게 해체할 수 있을까? 자연의 변용이자 양태로서의 ‘나’, 즉 자신의 “본성과 능력”을 보려고 애를 써야 한다. 즉, ‘나’라는 존재가 갖고 있는 고유한 성질(본성)과 오직 ‘나’이기에 할 수 있는 것(능력)을 파악해보려고 애써야 한다. 그때 ‘실재’하는 ‘나’를 보게 되고, 그때 이미 그 자체로 ‘완전’한 자신을 만날 수 있다.


 한동안 극심한 자기부정에서 시달렸다. 돈벌이도 시원찮고, 철학을 공부한답시고 골방에 앉아 글이나 쓰는 나 자신이 한없이 싫었던 적이 있다. 나 자신이 혐오스러웠다. 극심한 자기부정은 이내 우울증이 되었다. 나는 왜 내가 싫었던 걸까? 어른에 대한 ‘완전성’ 때문이었다. ‘완전’한 어른은 안정적인 수입과 사회적 인정을 성취해야 한다고 믿었다. 그 ‘완전성’에서 나는 한참이나 모자랐다. 그러니 당연히 나 자신이 혐오스러울 만큼 싫었을 수밖에 없었다.     

 

 자기부정과 우울증을 애써 누르며 꾸역꾸역 살아내고 있던 어느 날이었다. 아들이 숙제를 했다며, 삐뚤빼뚤한 글씨가 빼곡한 종이를 내밀며 말했다. “나도 아빠처럼, 글 쓰는 사람이 될 거야” 눈시울이 붉어지는 것을 꾹 참았던 그 순간, 나의 “본성과 역량”을 알게 되었다. 나는 철학을 사랑하고, 조금 더 인간다운 세상을 꿈꾸는 ‘본성’을 가지고 있으며, 그것들을 글로 쓸 수 있는 ‘역량’을 갖고 있었다. 아들의 편지로 그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나의 “본성과 역량”을 깨닫자, ‘실재’하는 나를 깨닫게 되었다. 그때 나는 자본주의적 모델(안정적인 수입, 사회적 인정)의 결핍과 관계없이 이미 ‘완전’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놀랍게도 그 깨달음은 나의 자기부정을 멈추게 했다. 철학을 공부하는 나 자신이, 집필실에서 글을 쓰고 있는 나 자신이 꽤 괜찮게 느껴졌다. 돈벌이가 시원찮고 딱히 사회적 인정이 없다는 사실은 여전히 그대로였는데 말이다.     

 

 누구라도, 자신의 “본성과 능력”을 깨닫게 되면 자기부정에서 벗어날 수 있다. 못생기고 어수룩한 아이가 음악의 기쁨을 알게 되는 순간, 가난하고 폭력적인 아이가 복싱으로 인정받는 순간, 그때가 최초로 자신의 “본성과 능력”을 깨닫게 되는 순간일 테다. 그렇게 “본성과 능력”을 깨달은 자들은 ‘실재’하는 자신을 만나게 된다. 실재하는 자신을 만난 사람은 알게 된다. 실재성을 가진 존재들 사이에 그 어떤 우열도 없다는 사실을. 그렇게 허구적 완전성은 해체되고 그와 동시에 저주처럼, 들러붙어 있던 자기부정 역시 조금씩 떨어져나가게 된다.


 그 집요한 자기부정의 상흔이 사라졌을 때 우리는 또 하나의 소중한 선물을 받게 된다. 그 선물은 삶의 진실을 보는 안목이다. 자기부정을 극복했을 때 우리는 삶의 진실을 볼 수 있다. 키가 크거나 작거나, 코가 높거나 낮거나, 피부가 희거나 검거나, 더 나아가 물고기이거나 미생물일지라도 모두 동등하게 완전한 존재로 볼 수 있다. 세상의 실재하는 모든 존재들이 “신의 본성을 어떤 일정하고 결정적인 방식으로 표현하는 변용 또는 양태”임을 볼 수 있는 안목이 생긴다. 자기부정에서 벗어난 이는 조금씩 더 아름다운 사람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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