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이성 : 감정적인 것은 미숙한 걸까요?

‘감정’적인 사람들

 “너 왜 그렇게 감정적이야?” 이 말의 의미를 우리는 다 안다. 그것은 긍정적인 말도, 가치중립적인 말도 아니다. 지극히 부정적인 말이다. 언성을 높일 때 “왜 그렇게 감정적이야?”라는 말은 “넌 차분하게 말할 줄 모르구나.”라는 의미다. 고백할 때 “왜 그렇게 감정적이야?”라는 말은 “넌 참 성급하구나.”라는 의미다. 영화·음악에 푹 빠졌을 때, “왜 그렇게 감정적이야?”라는 말은 “넌 해야 할 일을 하지 않는구나.”라는 의미다.      

 

 “그 사람은 이성적이지” 이 말 역시 부정적인 말도, 가치중립적인 말도 아니다. 지극히 긍정적인 말이다. 세상은 ‘감정적인 것=부정적인 것’으로, 동시에 ‘이성적인 것=긍정적인 것’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다. 흔히 말하는 ‘이성’적인 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감정’을 잘 통제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아무리 화가 나도 그 감정을 억누를 수 있는 사람, 누군가를 좋아하는 감정도, 싫어하는 감정도 효과적으로 통제할 수 있는 사람. 그런 사람을 ‘이성’적인 사람이라고 한다.     



감정적인 것은 나쁜 것일까?


 세상 사람들은 감정적인 이들을 그릇되고 미숙하다고, 이성적인 이들을 올바르며 성숙하다고 말한다. 그렇다. 우리는 이성을 긍정하며 감정을 부정하는 사회에 산다. 감정적인 삶을 부정하고, 이성적인 삶, 즉 감정을 억누르고 통제하는 것을 긍정한다. 그런데 의아하다. 우리 주위에 널린 그 감정적인(비이성적인) 사람들은 다 무엇이란 말인가? 사소한 일에도 짜증을 내고 미친 듯이 화를 내는 그 많은 사람들은 어디에서 왔을까? 감정을 억누르고 통제하는 것을 그토록 긍정하는데, 왜 감정에 휘둘리는 사람들이 그토록 많을까?

      

 ‘감정’을 낯설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우리가 불행해진 이유는 감정에 대해 숙고해보지 않았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행복과 불행이라는 것 자체가, 기쁨과 슬픔이라는 감정에서 비롯된 내면적 상태이니까. 사랑, 미움, 설렘, 분노 같은 감정에 충실하고 그것을 드러내는 삶은 정말 잘못된 것일까? 그리고 그런 ‘감정’들을 억누르고 통제하는 ‘이성’적 삶의 태도는 정말 올바르고 성숙한 것일까? 너무 늦지 않게 물어야 한다. “감정적인 것은 성숙하지 못한 것일까요?”


     

스피노자의 ‘감정’

 먼저, 스피노자가 ‘감정’이라는 것을 어떻게 정의했는지부터 살펴보자.

      

감정이란 신체의 활동 능력을 증대시키거나 감소시키며촉진하거나 억제하는 신체의 변용인 동시에 그러한 변용의 관념이라고 나는 이해한다. (에티카제 3정의 3)     


 스피노자는 감정이란 “신체의 변용(변화)”이자 동시에 “변용(변화)의 관념(의식)”이라고 말한다. ‘사랑’이라는 감정을 예로 들어보자. 사랑에 빠지면 가슴이 두근거리고, 자신이 그 사람 때문에 두근거리고 있다는 사실을 의식하게 된다. 즉, 가슴(신체)이 두근거리고(변용) 동시에 그 두근거림(변용)을 의식(관념)하게 되는 것이 바로 ‘사랑’(감정)이다. 스피노자의 정의는 적확하다. 어떤 감정이든, 감정은 신체적 변화와 동시에 그 변화의 의식을 나타낸다.   

  

 이는 뒤집어 말해, 신체적 변화와 그 변화의 의식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그것은 감정이 아니다. 가슴이 두근거리지 않고, 두근거리는 상태를 의식할 수 없다면 사랑이 아니다. 가슴이 두근거릴 만큼 매혹적이지 않는 상대와는 사랑에 빠질 수 없다. 또한 자신을 매혹 시키는 상대가 있다고 하더라도, 자신이 지금 상대로 인해 가슴이 두근거리고 있다는 사실을 의식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단순히 호구심일 뿐 사랑의 감정은 아니다.  

    

 스피노자는 감정에 대해서 덧붙인다. 감정은 신체의 활동능력을 증대시키거나 감소시킬 수도 있고, 촉진하거나 억제할 수도 있다. 감정은, 그 감정이 어떤 감정이냐에 따라, 신체의 활동 능력이 증대(촉진)되거나 감소(억제)되는 방향으로 신체의 변용이 일어날 수 있다. ‘사랑’과 ‘절망’이라는 감정을 예로 들어보자. 사랑이라는 감정이 찾아들 때 우리는 어떤가? 활기차고 의욕적이 된다. 즉, 사랑은 신체의 활동 능력을 증대·촉진시키는 신체의 변화를 만든다. 반면 절망은 우리를 위축되고 무기력하게 만든다. 즉 신체의 활동 능력을 감소·억제하는 신체적 변화를 만든다.  

    


감정은 ‘신체-정신’적인 것

    

 스피노자에 따르면, 감정은 ‘신체-정신’적이다. 감정은 “신체의 변용”인 동시에 그 “변용의 관념”인 까닭이다. 그리고 다양한 감정의 결에 따라, 그 신체의 활동 능력이 증대 혹은 감소되는 “신체의 변용”과 “변용의 관념”이 발생하게 된다. 여기서 감정에 대한 해묵은 오해 하나를 바로 잡을 수 있다. 흔히. 감정을 오직 정신적인 것이라 여긴다. 왜 안 그럴까? 감정은 느끼는 것이고 그것은 머릿속에 있는 관념적인 것이니까. 하지만 이는 명백히 틀렸다. 

     

 감정은 분명 관념이지만, 여느 관념과는 다르다. ‘이것은 저것보다 크다’라는 관념과 ‘나는 너를 사랑해’라는 관념은 분명 다르다. 무엇이 다른가? 전자는 ‘이성’적 관념이고 후자는 ‘감정’적 관념이다. 이 두 관념은 어떻게 구분할 수 있는가? 이성적 관념은 “신체의 변용”과 그 “변용의 관념”이 없고, 감정적 관념은 그것이 있다. 이성적 관념이 오직 ‘정신’적이라면, 감정적 관념은 ‘신체-정신’적이다. 이에 대해 스피노자는 이렇게 말한다.


인간의 신체는 우리가 그것을 느끼는 대로 존재한다. (에티카제 2정리 13. 보충)     


 우리의 신체는 우리가 생각(이성)하는 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신체는 우리가 느끼는(감정) 대로 존재한다. 감정은 분명 ‘신체(신체의 변용)-정신(변용의 관념)’적이지만, 신체가 더 근본적이다. 먼저 “신체적 변용”이 없다면, 그 “변용의 관념” 역시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결국 ‘감정’이 우리의 신체를 구성하며, 더 나아가 감정 자체가 바로 우리의 신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되면, 감정에 대한 많은 오해와 혼란을 해소할 수 있다.     


 사랑, 미움, 연민 등등의 감정에 대해 혼란스러울 때가 있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인지, 안쓰러워하는 것인지 잘 모를 때가 있다. 이때 ‘정신’이 아니라 ‘신체’에 집중하면 모든 것이 명징해진다. 사랑, 연민을 정신적으로 판단하지 말고, 신체적으로 판단하면 된다. 심장이 두근거리는지, 손을 떨리는지, 눈물이 나는지를 보면 된다. 그 신체적 변용에 집중하면 된다. 그것이 우리의 감정을 명료하게 알려준다. 감정은 ‘신체-정신’적이지만 ‘신체’가 더 근본적이니까. 


    

감정은 자연의 일부다.


 이제 우리의 질문으로 돌아오자. 감정은 부정적인 것이기에, 통제하고 억눌려야 하는 것일까? 스피노자는 감정이라는 것 자체를 어떻게 바라보았을까? 

    

자연 안에서는 자연의 결함 탓으로 여길 수 있는 어떠한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왜냐하면 자연은 항상 한결같으며자연의 힘과 활동 능력은 어디서나 동일하기 때문이다따라서 어떤 종류의 사물이든 그것의 본성을 인식하는 방법도 역시 동일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므로 증오분노질투 등의 감정도그 자체로 고찰한다면다른 개개의 사물들과 마찬가지로 자연의 필연성과 힘에서 생겨난다.” (에티카제 3서론


 자연은 그 자체로 자연스럽다. 거기에는 어떠한 가치판단도 없다. 그래서 “자연 안에서는 자연의 결함 탓으로 여길 수 있는 어떠한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왜 그런가? “자연은 항상 한결같으며, 자연의 힘과 활동 능력은 어디서나 동일하기 때문이다.” 자연은 그 자체로 완전하다. 가뭄, 태풍, 홍수, 폭설은 자연의 결함 탓이 아니다. 그것은 옳고 그른 문제가 아니다. 그저 ‘자연’스러운 일일 뿐이다. 지극히 인간 중심적인 관점으로 ‘자연’으로 해석하려 들 때만 그것이 ‘자연’의 결함처럼 보일 뿐이다.  

    

 스피노자에 따르면, 인간 역시 자연의 일부다. 인간의 정신과 신체 모두 자연의 일부다. 그러니 인간이라는 존재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 역시 옳고 그른 것이 없다. 모두 ‘자연’스러운 일일 뿐이다. ‘신체-정신’적인 감정 역시 ‘자연’의 일부다. 그러니 “증오, 분노, 질투 증의 감정도, 그 자체로 고찰한다면, 다른 사물들과 마찬가지로 자연의 필연성과 힘에서 생겨”나는 자연스러운 일일 뿐이다. 감정에 딱지를 붙여 옳고 그름을 예단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일 뿐이다. 지극히 인간 중심적인 관점으로 ‘감정’을 해석하려 들 때만 그것인 ‘인간’의 결함처럼 보일 뿐이다.  

    

 가뭄·태풍·폭설이 무언가 결여되었거나 잘못된 것(자연의 결함 탓)이 아니듯, 증오·분노·질투 역시 무언가 결여되었거나 잘못된 것(인간의 결함 탓)이 아니다. 그 모든 것은 그저 ‘자연’의 일부로서 존재하는 것이다. 감정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이것이 스피노자가 인간의 감정을 바라보는 관점이다. “감정적인 것은 나쁜 것이고 성숙하지 못한 것인가요?” 이 질문에 스피노자는 답 대신 우리에게 다시 물을 테다. “햇살이 비추고 바람이 불고 비가 오는 것은 나쁜 것이고 성숙하지 못한 것인가?” 


     


이성적인 사람은 완전한가?

      

 세상 사람들은 ‘감정’적인 사람을 무언가 결여된 존재로 보고, 이성적인 사람을 조금 더 완전한 존재로 보는 경향이 있다. 이는 정당한 시선일까? “이성적인 사람이 더 완전한 사람인가?” 스피노자는 이에 대해 이렇게 답했다.      


왜 신은 모든 인간을 전적으로 이성에 의해서만 지배되는 방식으로 창조하지 않았는가?’ 이런 질문을 하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답할 수밖에 없다신에게는 완전성의 최고 정도에서 최저 정도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창조할 재료가 결여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에티카, 1부록)     


 예나 지금이나 ‘감정’적인 사람들이 넘쳐나는 건 마찬가지였을 테다.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감정’적인 사람들은 무엇인가 결여된(완전하지 못한) 사람이었다. 전능한 신이 인간을 창조했다고 믿는 이들은 의아했을 테다. 왜 완전한 신이 모든 인간을 ‘전적으로 이성적인’, 즉 완전한 존재로 창조하지 않았을까? 왜 감정에 휘둘리는 불완전한 존재로 창조했을까? 이에 대해 스피노자는 번뜩이는 답을 한다. 

     

 스피노자에게 ‘신’은 자연이다. 신(자연)은 완전하다. 그 완전한 신에게 모든 것을 창조할 재료 중 결여된 것이 있을 리 없다. 역설적이게도. 스피노자는 신에게는 모든 것을 완전하게 창조할 재료가 있기 때문에 인간을 전적으로 이성적인 존재로 만들지 않았다고 말한다. 생각해보라. 자연(신)은 완전하다. 그러니 자연이 만든 인간 역시 작은 자연이다. 그러니 당연히 인간도 작은 완전성을 가져야 한다. 즉, 어떤 결여도 있어서는 안 된다. 이는 논리적으로 자명하다.  

    

 그런데 만약 자연(신)이 인간을 창조할 때 ‘이성’만을 주고 ‘감정’을 뺐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자연(신)이 만든 인간이 전적으로 ‘이성’적인 존재라면, 그 존재에게는 ‘감정’이 결여되어(불완전!) 있는 것 아닌가. 만약 인간이 전적으로 ‘이성’적이라면 그것은 역설적이게도 신의 전능이 아닌 무능을 입증하는 사례가 된다. 신은 모든 것을 창조할 재료가 있기 때문에 이성과 감정 중 어느 것도 빠트리지 않고 ‘완전한’ 인간을 창조한 것이다. 


 자연(인간) 안에는 이성과 감정이 모두 있다. 그러니 완전히 이성적인 사람이 있다면, 그는 매우 불완전한(부자연스러운) 사람일 수밖에 없다. ‘이성’적이기만 한 사람에게는 ‘감정’이 결여되어 있으니까 말이다. 인간이 전적으로 이성적인 존재이기를 바라는 것만큼 어리석고 부자연스러운 일도 없다. 그것은 마치 일 년 내내 햇볕(감정)은 없고, 비(이성)만 내리기만을 바라는 것과 같다. 자연은 햇볕과 비 중 어떤 것도 결여되어 있지 않아서 자연스러운 것이듯, 인간은 감정과 이성 중 어떤 것도 결여 되어 있지 않아서 인간다운(완전한, 자연스러운) 존재다.


    

감정을 긍정하고 표현하는 삶

 감정은 부정적인 것이 아니다. 그 자체로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러니 있는 그대로의 감정들을 받아들여야 한다. 기쁨이든, 슬픔이든, 욕망이든 어느 것 하나 부정적인 것이 없다. 수많은 감정들, 예컨대, 명예욕·탐욕·욕정·경쟁심·대담함·자비심·사랑·명예·호의·환희·희망·신뢰·미움·멸시·공포·질투·수치·절망. 그 어떤 감정이든 있는 그대로 긍정하는 연습이 필요하다. 그 모든 것이 다 우리(자연) 안에 있는 것들이니까.     

 

 감정에 관한 또 하나의 오해가 있다. 자신의 감정을 인정하고 드러내면 불행해질 것이란 믿음이다. 이것이 감정에 관한 가장 큰 오해다. 조금 긴 안목으로 인간사를 볼 수 있는 사람은 안다. 인간의 거의 모든 불행은, 감정 자체를 부정하고, 긴 시간 그 감정들을 억눌렸을 때 찾아온다는 사실을. 긴 호흡으로 보면, 자연을 억누르고 통제하려는 모든 시도가 더 큰 불행으로 다가오듯, 인간의 감정 역시 마찬가지다.    

  

 어떤 감정이든, 그 감정은 누른다고 눌러지는 것이 아니다. 기쁨이든, 슬픔이든, 욕망이든, 억압된 감정은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서 더 크게 터져 나온다. 그 사실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지 않은가. 사랑하는 감정을 눌러지던가? 증오하는 마음이 눌러지던가? 섹스하고 싶다는 욕망이 눌러지던가? 잠시는 누를 수 있다. 하지만 그 모든 감정은 누르면 누를수록 예상치 않은 곳에서 더 크게 터져 나오게 마련이다.     

 

 한 사람을 향한 사랑의 감정을 억눌렀기에 돈에 대한 집착이 더 크게 증폭되어 버린 사람이 한 둘이던가? 그뿐인가? 끔찍한 범죄는 대체로 한 사람에 대한 증오의 감정을 긴 시간 억압했던 결과다. 또한 왜곡되고 뒤틀린 성적 욕망은 섹스하고 싶다는 욕망을 긴 시간 강하게 억압했던 결과다. 이 모든 불행의 시작은 ‘감정은 부정적이기에 억누르고 통제해야 한다’는 어리석은 믿음에 기초해 있다.     


 “사랑해!” “싫어!” “섹스하고 싶어!” 감정을 긍정해야 한다. 감정이 과도하게 억압되기 전에 표현해야 한다. 그것이 우리의 삶을 더욱 풍요롭고 유쾌하게 한다. “사랑해!” 사랑이라는 감정을 긍정하고 표현할 때, 돈보다 소중한 것이 많다는 삶의 진실이 드러난다. “싫어요!” 한 사람을 미워하는 감정을 긍정하고 표현할 때, 그 미워하는 사람을 더 이상 미워하지 않을 수 있는 틈이 열린다. “섹스하고 싶어!” 욕정이라는 감정을 긍정하고 표현할 때, 섹스가 욕구의 해소가 아니라, 대화이고 교감이라는 삶의 진실을 볼 수 있다. 이처럼, 우리는 감정을 긍정하고 표현함으로써 풍요롭고 유쾌한 삶으로 나아갈 수 있다. 

이전 07화 마음 : 유리멘탈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