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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 : 부정적 감정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까요?

감정을 긍정하는 삶


 감정을 긍정하는 삶은 건강하다. 두말할 나위가 없다. 사랑, 희망, 환희 같은 감정을 긍정하는 삶은 얼마나 건강한가. “다시 사랑을 할 거야” “희망을 놓지 않아야지.” “환희의 순간을 만끽해야지” 반대로 피폐한 삶은 감정을 부정할 때 찾아온다. “사랑 같은 건 영화에만 있는 거야” “희망은 부질없는 거야” “환희는 순간적인 감정일 뿐이야” 이보다 피폐한 삶도 없다. 그런데 의문이 든다.      


 우리에게는 다양한 감정이 있지 않은가? 그 감정들 중에 도저히 긍정할 수 없을 것 같은 감정들이 있다. 증오, 절망, 복수심 같은 감정들 말이다. “김부장이 소름 끼치도록 싫다” “이번 생은 틀렀어” “그 새끼 죽여 버릴 거야” 이런 어두운 감정들은 긍정하면 할수록 삶은 점점 닮아버릴 것만 같지 않은가? 다양한 감정들 중에 긍정하고 표현할수록 삶이 더 피폐해질 것 같은 감정이 있다.     


 감정은 ‘자연’의 일부다. 즉, 감정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사랑, 희망, 환희 같은 기쁨의 감정만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다. 증오, 절망, 복수심 같은 슬픔의 감정도 ‘자연’스러운 것이다. 삶을 살아가며 자연스럽게 증오하고, 절망하고, 복수심에 휩싸이게 되지 않던가. 하지만 이런 감정들이 ‘자연’스럽다고 무작정 긍정할 수만은 없다. 그런 감정은 긍정할수록 삶의 활력이 점점 줄어들게 되니까 말이다.     

  


감정의 긍정은 수동적 수용이 아니라 능동적 수용이다.

      

 자연을 생각해보라. 햇볕과 단비야 그저 만끽하면 되는 자연이다. 그것은 우리네 삶을 기쁘게 하니까. 하지만 가뭄과 태풍은 어떤가? 가뭄과 태풍 역시 자연의 일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태풍과 가뭄 속에서 가만히 있어서는 안 된다. 그랬다간 우리네 삶이 점점 슬픔으로 점철되어 피폐해질 것이 분명하니까. 가뭄과 태풍을 잘 다룰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가뭄과 태풍 속에서도 조금 더 기쁘고 건강하게 살아갈 수 있으니까. 

     

 ‘자연을 긍정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주어지는 자연(햇볕·단비·가뭄·태풍…)을 그저 수동적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자연의 긍정’의 참된 의미는 주어진 자연을 능동적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을 의미한다. 어떤 자연이 주어지더라도, 그 속에서 조금 더 건강하고 활력적으로 살아가는 것. 그것이 자연을 긍정하는 것이다.

      

 감정도 마찬가지다. ‘감정의 긍정’은 주어지는 감정(사랑·희망·환희·증오·절망·복수심…)의 수동적 수용이 아니라, 능동적 수용이다. ‘자연의 긍정’이 기쁘고 건강한 삶을 위해 필요한 것이듯 ‘감정의 긍정’ 역시 마찬가지다. 그래서 다양한 감정들 중 우리네 삶의 활력을 떨어뜨리는 부정적인 감정에 대해 숙고해볼 필요가 있다. 감정을 긍정하려 할 때, 늘 문제가 되는 것은 긍정적인 감정이 아니라 부정적인 감정이니까 말이다. ‘감정의 긍정’에서 중요한 질문은 이것이다. “부정적(슬픔)인 감정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까요?”      



스피노자의 3가지 감정


 감정은 다종다양하며 변화무쌍하다. 우리는 이를 삶에서 직접 느낀다. 아침 출근길에 한없이 희망찼지만, 회의 시간에 분노에 휩싸이고, 업무를 하다 자괴감 빠지고, 퇴근길에 안도감을 느끼고, 잠들기 전에 내일 다시 회사를 가야 한다는 생각에 불안에 휩싸인다. 이처럼 짧은 하루에도 변화무쌍한 감정의 롤러코스터를 타게 되는 일은 흔하다. 그만큼이나 인간의 감정은 다양하다. 그 다양한 감정들을 스피노자는 어떻게 구분하고 분류했을까?       


나는 이 세 가지 감정(기쁨슬픔욕망이외의 다른 어떤 것도 기본적인 감정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에티카제 3정리 11, 주석)   

  

 스피노자는 인간의 감정은 세 가지뿐이라고 말한다. 기쁨, 슬픔, 욕망. 의아하다. 우리가 느끼는 감정이 정말 기쁘고, 슬프고, 욕망하는 것뿐일까? 우리는 그보다 더 다양한 감정을 느끼지 않는가. 스피노자는 ‘기쁨’ ‘슬픔’ ‘욕망’이라는 세 가지 감정이 인간의 “기본적인 감정”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즉, 우리가 느끼는 다양한 감정들은, 기쁨·슬픔·욕망이라는 근본적인 감정의 변주라는 의미다. 스피노자는 이 근본적 세 가지 감정(욕망·기쁨·슬픔)에 대해서 각각 이렇게 정의하고 있다.  

    

욕망이라는 명칭은 인간의 모든 노력욕구충동의욕으로 이해한다. (에티카제 3감정의 정의 1)

     

 ‘욕망’은 무엇인가? 무엇인가를 원하는 마음이다. 그 ‘욕망’은 신체적 ‘욕구’와 ‘충동’에 의해서 촉발되고, 그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 ‘의욕’적으로 ‘노력’하게 된다. 섹스를 ‘욕망’한다고 해보자. 그 ‘욕망’은 우선 신체적 ‘욕구’와 ‘충동’에 의해서 촉발된다. 하지만 그것이 끝이 아니다. 그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 ‘의욕’적으로 외모를 꾸미거나 돈을 버는 등 더 근사한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게 되는 경우가 있다. 이처럼, ‘욕망’이라는 것은 “인간의 모든 노력, 욕구, 충동, 의욕으로 이해”할 수 있다.  


    

기쁨이란 인간이 보다 작은 완전성에서 보다 큰 완전성으로 이행하는 것이다. (에티카제 3감정의 정의 2) 

    

 ‘기쁨’은 어떤 감정일까? 스피노자는 이 감정을 “보다 작은 완전성에서 보다 큰 완전성으로 이행하는 것”이라고 정의한다. 어려운 이야기가 아니다. 스피노자에게 ‘완전성’은 삶의 활력과 관계되어 있다. 즉, “더 큰 완전성으로 이행”한다는 말은 ‘더 활력적인 삶으로 이행’한다는 의미다. ‘기쁨’을 느꼈던 상황을 떠올려보면 이해가 된다. 사랑하는 이와 차를 마시고 이야기를 나누고 키스를 할 때 ‘기쁨’을 느낀다. 그때 우리는 좀 더 완전한 존재가 된 같은 충만감을 느끼고 동시에 삶을 좀 더 씩씩하게 살아낼 수 있는 활력을 얻게 되지 않았나. 이것이 스피노자의 기쁨이다.    

 

슬픔이란 인간이 보다 큰 완전성에서 보다 작은 완전성으로 이행하는 것이다. (에티카제 3감정의 정의 3)

     

 ‘슬픔’은 어떤 감정일까? ‘기쁨’의 반대다. 즉 “보다 큰 완전성에서 보다 작은 완전성 이행하는 것”이다. 이는 내 존재가 쪼그라들어 삶의 활력이 줄어든다는 의미다. 우리에게 슬픔을 주는 사람들과 만났을 때를 생각해보자. 업무를 닦달하고 눈치를 보게 만드는 직장 상사는 각가지 ‘슬픔’을 준다. 그때 어제 연인을 만나서 더 완전해진 것 같은 충만감은 조금씩 줄어들며 초라한 자신을 마주하게 된다. 이는 “더 큰 완전성에 더 작은 완전성으로 이행”하면서 삶의 활력이 줄어들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스피노자의 ‘슬픔’이다.


     

스피노자의 48가지 감정


 스피노자에 따르면, 인간의 변화무쌍한 다양한 감정들은 이 세 가지 근본적인 감정(욕망·기쁨·슬픔)을 통해 발생하게 된다. 스피노자의 이야기를 직접 들어보자.      


기쁨슬픔 및 욕망에는 … 그것들로 합성된 또는 (사랑증오희망공포 등과 같은그것들로부터 도출된 모든 감정에는 우리를 자극하여 변화시키는 대상의 종류만큼 많은 종류가 있다. (에티카제 3정리 56)     


 스피노자는 욕망·기쁨·슬픔, 이 세 가지 근본적인 감정을 중심에 두고 세부적인 감정들을 설명한다. 명예욕·탐욕·욕정·경쟁심·대담함·자비심과 같은 감정은 모두 ‘욕망’에 속한다. 이 세부적인 감정들은 모두 ‘욕망’에 관계되어 있다. 명예, 돈, 섹스에 대한 ‘욕망’이 바로 ‘명예욕’, ‘탐욕’, ‘욕정’이다. 다른 이들이 가진 것을 자신도 갖고 싶은 ‘욕망’, 비루함을 벗어나 용감해지고 싶은 ‘욕망’, 약자를 돕고자 하는 ‘욕망’이 바로 ‘경쟁심’, ‘대담함’, ‘자비심’이다.  

    

 사랑·명예·호의·환희·희망·신뢰와 같은 감정은 모두 ‘기쁨’에 속한다. 이런 기쁨의 감정들은 우리를 더 완전한 존재로 만들어 활력 넘치게 한다. 증오·멸시·공포·질투·수치·절망과 같은 감정은 모두 ‘슬픔’에 속한다. 이런 슬픔의 감정은 우리를 덜 완전한 존재로 만들어 활력을 줄어들게 한다. 이렇게 스피노자는 ‘기쁨’, ‘슬픔’, ‘욕망’이라는 인간의 근본적인 세 가지 감정을 통해서 인간이 느끼는 48가지의 개별적인 감정을 정의했다. 


    


슬픔은 우리를 파괴하지 않는다.


 이제 우리의 질문으로 돌아가자. 부정적인(슬픔) 감정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까? ‘기쁨’의 감정이야 그렇다고 쳐도, ‘슬픔’의 감정은 때로 우리를 너무 힘들게 하지 않는가? 증오, 공포, 질투, 수치심, 절망감 때문에 우리는 얼마나 힘들고 괴로웠던가. ‘슬픔’이 극심해질 때 삶은 피폐해진다. 폭행, 강도, 강간, 살인 같은 참혹한 범죄들은 ‘슬픔’이라는 감정이 한 사람의 삶을 집어삼킨 결과들이다. 우리를 힘들고 괴롭게 하는 ‘슬픔’의 감정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까? 

     

 사물은 결코 자신이 파괴될 수 있는 어떤 것즉 자신의 존재를 제거하는 어떤 것을 자신 안에 가지고 있지 않다반대로 개별적 사물은 자신의 존재를 제거할 수 있는 모든 것에 대항한다. (에티카제 3정리6, 증명)

      

 스피노자에 따르면, 어떤 사물 안에는 그 자신을 파괴할 수 있는 어떤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 이는 인간에게도 그대로 적용된다. 인간은 그 자신 안에 자신을 파괴할 어떤 것도 가지고 있지 않다. 의아하다. 그렇다면, 증오·수치심·절망감·공포·질투 같은 감정은 대체 뭐란 말인가? 이런 ‘슬픔’의 감정들은 분명 우리 안에 있지 않은가? 그리고 그 슬픔의 감정들은 삶의 활력 점점 줄어들게 해서 우리를 서서히 혹은 급격하게 파괴하는 감정들 아닌가? 스피노자의 논의는 모순인 걸까? 그렇지 않다.     



 스피노자의 말은 전혀 모순이 아니다. ‘슬픔’의 대표적인 감정인 증오·공포·질투를 예로 들어보자. 우리는 왜 증오·공포·질투를 느낄까? “자신의 존재를 제거할 수 있는 모든 것에 대항”하기 위해서다. 직장 상사를 증오한다. 왜? 그가 우리를 인격적으로 대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증오라도 하는 것이다. 나를 지키기 위해서. 칼을 보며 공포를 느낀다. 왜? 칼이 우리를 해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두려워하는 것이다. 나를 지키기 위해서. 친구를 질투한다. 왜? 아무도 나를 봐줄 것 같지 않아서다. 그래서 질투라도 하는 것이다. 나를 지키기 위해서. 이제 난해한 스피노자의 이야기가 이해될 것도 같다.   

   

 만일 우리가 슬픔의 원인이라고 믿는 것즉 우리가 증오하는 것이 파괴되는 것을 우리가 표상한다면우리는 기쁨을 느낄 것이다따라서 우리는 그러한 것을 현존하는 것으로 생각하지 않도록 그것을 파괴하려고 노력하거나 그것을 우리로부터 멀리하려고 노력할 것이다. (에티카제 3정리 28, 증명)

     

 ‘슬픔’의 감정은 우리를 파괴하는 감정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가 파괴되지 않도록 막아주는 감정이다. 미움·멸시·공포·질투·수치·절망은 우리 안에 있다. 그 ‘슬픔’은 우리를 파괴하는 감정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가 파괴되는 것에 저항하는 감정이다. ‘슬픔’의 감정은 우리에게 슬픔을 주는 대상들을 “파괴하려고 노력하거나 그것을 우리로부터 멀리하려고 노력”하게 만들어준다. ‘복수는 나의 힘’이라는 시쳇말처럼, 공포도 미움도 질투도 수치도 나의 힘이다. 우리 안에 있는 ‘슬픔’의 감정은 우리를 지켜주는 일종의 방어기제인 셈이다. “어떤 사물 안에는 그 자신을 파괴할 수 있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스피노자의 말은 빈틈없이 정합적이다. 


     

감정을 다루는 법     


 하지만 의문은 사라지지 않는다.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보라. 각종 ‘슬픔’은 우리네 삶을 피폐하게 하지 않는가? 누군가를 증오하고, 질투하고, 두려워하는 감정 때문에 삶이 엉켜버린 경험이 없는 사람은 없다. ‘슬픔’은 우리를 지켜주는 방어기제인데, 왜 그 때문에 삶이 피폐해지는 걸까? 왜 이런 모순적인 일이 발생한 걸까? ‘슬픔’의 감정을 긴 시간 외면했기 때문이다. 폭행, 강도, 강간, 살인 같은 끔찍한 범죄들은 ‘슬픔’ 때문에 발생한 비극이다. 증오, 수치심, 질투, 절망 같은 ‘슬픔’들. 하지만 증오, 수치심, 질투, 절망을 느끼는 모든 사람이 그런 비극으로 치닫는 것은 아니다. 차이가 무엇일까?    

  

 ‘슬픔’이 자기 파괴적이 될 때가 분명 있다. 그것은 ‘슬픔’이라는 감정 자체가 원인이 아니다. ‘슬픔’의 감정을 긴 시간 외면하고 억압했던 것이 원인이다. 긴 시간 눌러진 ‘슬픔’의 감정이 순간적으로 터질 때 크고 작은 자기 파괴적인 비극이 발생하게 된다. ‘슬픔’의 감정이 들 때 그 감정을 차분히 응시하며 적절히 표현하는 이들이 있다. 그들은 ‘슬픔’의 감정이 쌓이게 두지 않는다. 

     

 증오심이 찾아들 때 자문한다. ‘나는 왜 부장을 증오하는가?’ 그리고 표현한다. “부장님, 그건 말씀이 좀 심하신 것 같네요” 수치심이 찾아 들 때 자문한다. ‘나는 왜 부끄러움을 느끼는가?’ 그리고 표현한다. “나 참, 부끄러운 짓을 했구나” 질투심이 찾아들 때 자문한다. ‘나는 왜 너를 질투하는가?’ 그리고 표현한다. “나, 너를 부러워하는 거 같아” 절망감이 찾아들 때 자문한다. ‘나는 왜 절망하고 있는가?’ 그리고 표현한다. “나, 지금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구나.”      


 이렇게 ‘슬픔’의 감정들을 차분히 응시하고 그것을 눌러두지 않고 표현하면 놀라운 일이 벌어진다. ‘슬픔’이 더 이상 ‘슬픔’이 아닌 모종의 ‘기쁨’이 된다. 증오, 수치심, 질투를 인정할 때, 그 ‘슬픔’들은 ‘기쁨’으로 되돌아온다. 누군가를 증오하고 질투하고 있음을 인정할 때 증오심과 질투심이 줄어들고, 그 줄어든 증오와 질투심만큼 ‘기쁨’이 차오른다. 수치심을 느꼈음을 인정할 때 다시는 치욕스러운 일 반복하지 않게 됨으로서 ‘기쁨’이 차오른다. 절망감을 느꼈음을 인정할 때, 절망으로부터 거리를 두게 되고 그로 인해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기쁨’이 차오른다.       


 ‘슬픔’의 감정을 다루는 법은 간명하다. ‘슬픔’의 감정을 차분히 응시할 것. 그리고 너무 오래 ‘슬픔’을 눌러두지 말고 적절하게 표현할 것. 그렇게 슬픔의 감정이 잘 흘러가도록 해야 한다. 그럴 수 있다면, ‘슬픔’은 자기 파괴적인 ‘슬픔’이 되지 않는다. 그때 ‘슬픔’의 감정은 우리를 지켜주는 튼튼한 울타리가 된다. 다른 감정도 마찬가지다. 기쁨이든, 슬픔이든 욕망이든, 감정이 ‘자연’스럽게 흘러가게 두는 것이 중요하다. 어떠한 감정이든 그것이 내면에 고여 쌓이지 않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감정을 긍정한다는 것은 그런 것이다. 하나의 감정에 고착되어 있지 않고 감정이 ‘자연’스럽게 흘러가게 하는 것. 흘러가는 물은 썩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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