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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 유리멘탈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유리멘탈, 기분에 지는 삶

     

 “오늘은 공부할 기분이 아니야” “오늘은 밖에 나갈 기분이 아니야.” 세상 사람들은 이런 말들을 배부른 투정이거나 핑계라고들 한다. 공부가 하기 싫어서 부리는 투정이나 밖에 나가기 귀찮아서 대는 핑계로 치부한다. 뭘 몰라서 하는 소리다. 이는 ‘하고 싶지 않음’이 아니라 ‘할 수 없음’의 문제다. 공부를 하고 싶지만 혹은 밖에 나가고 싶지만 도저히 그럴 수 없어서 ‘오늘은 공부할 기분이 아니야’ ‘오늘은 밖에 나갈 기분이 아니야’라고 말하게 되는 것이다.       


 그럼 이제 묻게 된다. ‘왜 도저히 그럴 수 없는가?’ 어제까지는 분명 ◯◯하면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하지만 오늘 아침에 눈을 뜨니 ◯◯해도 아무것도 달라질 것 같지 않다. 그래서 그 모든 일이 아무 의미도 없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은 흔한 일이다. “◯◯할 기분이 아니야”라는 말은 투정이나 핑계가 아니다. 다만, 기분에 지는 것이다. 기분에 지는 삶. 그것이 “도저히 ◯◯할 기분이 아니야”라고 말하는 이유다. 


 기분에 지는 삶은 어쩔 수 없는 것이다. 도저히 그럴 기분이 아니니까 말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마냥 기분에 지고 살 수는 없다. 야박한 삶은 우리의 기분을 기다려주지 않기 때문이다. 더 나은 삶으로 나아가려는 혹은 지금의 일상을 지키려는 절박한 이들에게 기분에 지는 삶은 치명적이다. “오늘은 그림을 그릴 기분이 아니에요.” 절박하게 화가의 삶을 꿈꾸는 이가 이렇게 말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오늘은 일할 기분이 아니에요” 각자의 일터에 이렇게 말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인간의 정신은 어떻게 생겨날까?

     

 ‘유리멘탈’은 기분에 지는 마음 상태다. 종잡을 수 없는 기분에 휩쓸려 삶이 조금씩 흔들리는 마음 상태 말이다. 기분에 지는 삶, 즉 유리멘탈의 삶은 필연적으로 우리를 불행의 나락으로 내몬다. 그러니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질문은 이것이다. “유리멘탈에서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까요?” 스피노자라면 이 질문에 어떻게 답해줄까? 먼저 스피노자의 ‘정신’에 대해서 살펴보아야 한다. 어찌 되었거나 ‘유리멘탈’은 정신에 관련된 문제니까.        

인간 정신의 현실적 유를 구성하는 최초의 것은 단지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어떤 개별 사물의 관념일 뿐이다. (에티카 2정리 11)

         

 스피노자에 따르면, 인간의 정신을 구성하는 최초의 것은 관념이다. 관념은 무엇일까? ‘필기구’를 생각해보자. ‘필기구’는 관념이다. 그런데 이 관념은 하늘에 뚝 떨어진 것이 아니다. 필기구(관념)는 연필, 볼펜, 지우개, 노트북 등등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어떤 개별 사물”이 있어야만 존재할 수 있다. 관념은 지각(시각·촉각·후각)된 것들의 개념화(혹은 추상화)라고 말할 수 있다.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어떤 개별 사물”들 때문에 생긴 관념이 바로 인간 정신을 구성하는 최초의 것이다.

      

 한 아이의 정신이 최초로 구성되는 과정을 생각해보자. 아이가 처음으로 연필, 볼펜, 지우개 등을 보고 만진다. 아이는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개별 사물(연필·볼펜·지우개)들을 신체로 지각한다. 이를 통해 ‘필기구’(쓸 수 있는 어떤 것)라는 관념을 생성한다. 그렇게 생성된 ‘필기구’라는 최초의 관념은 노트북 또한 일종의 ‘필기구’임을 파악할 수 있는 정신을 갖게 된다. 이런 과정을 통해 우리의 정신은 점점 확장되어 간다. 즉, 우리의 정신은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다양한 물체들을 온몸으로 겪어내면서 형성된 관념 복합체라고 말할 수 있다.



스피노자의 정신-신체


 스피노자는 ‘정신-신체’의 관계성에 대해서 조금 더 명료하게 이야기한다.  

    

우리는 인간의 정신이 신체와 하나로 결합되어 있음을 알 뿐만 아니라정신과 신체의 합일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에 대해서도 알게 된다그러나 누구든지 먼저 우리의 신체의 본성을 충분하게 인식하지 못한다면이 합을 충분하게 또는 명확하게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에티카제 2정리 13, 주석

     

 스피노자는 먼저 “정신과 신체가 하나로 결합되어” 있다고 말한다. 동시에 “신체의 본성을 충분하게 인식하지 못한다면, 이 합(정신+신체)을 충분하게 또는 명확하게 이해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한다. 즉, 정신과 신체는 하나로 결합되어 있지만, 둘 중 더 근본적인 것은 신체라는 의미다. 스피노자의 말은 옳다. 어떤 개별 사물을 지각할 수 있는 신체가 없다면 정신(관념)도 존재할 수 없다. 입력 장치가 없는 컴퓨터에는 어떤 정보도 존재할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분명 정신과 신체는 하나로 결합되어 있지만, 신체가 더욱 중요하다.

      

 이제 우리의 질문으로 돌아가자. 어떻게 유리멘탈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유리멘탈은 매번 기분에 진다. 왜 그럴까? 과잉된 정신작용 때문이다. 기분에 지는 과정을 살펴보자. 아침에 활기찬 기분으로 출근했다. 동료들에게 활기차게 인사를 했다. 그런데 동료들의 반응이 시큰둥하다. 이 사소하고 작은 일로부터 시작된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문다. ‘어제 내가 뭘 실수했나?’ ‘뭘 실수했지?’ ‘나를 따돌리는 건가?’ ‘직장생활 짜증나네.’ ‘그만둬야 하나?’ ‘그만두면 뭐 하지?’ ‘할 수 있는 게 없네’ ‘일은 해서 뭐하나? 답도 없는 우울한 인생인데’  

     

 이처럼, 작고 사소한 일로부터 시작된 정신작용이 멈추지 않고 과잉되는 상태, 그 상태가 지속되어 정신이 마비되는 것. 이것이 기분에 지는 마음 상태다. ‘이거 해봐야 무슨 의미가 있겠어.’ 이런 냉소주의적 혹은 허무주의적 마음은 그 정신적 마비 상태의 표현이다. 이 정신적 마비 상태 아래서 우리는 하던 일을 지속할 수도, 어떤 일을 새롭게 시작할 수도 없다. 도저히 그럴 기분이 아니니까 말이다. 어떻게 해야 할까? 스피노자의 해법은 이렇다.  

  


 유리멘탈에서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까?

     

정신의 본질을 구성하는 최초의 것은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신체의 관념이다그러니 우리 정신의 제일 중요한 노력은 우리 신체의 존재를 긍정하는 것이다. (에티카제 3정리 10, 증명)     


 신체의 존재를 긍정하며 그것에 충분히 집중해야 한다. 신체에 집중할 때, 정신에 대한 집착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달리 말해, 과잉된 정신작용을 멈출 수 있기 때문이다. 기분(정신)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정신에 집중하면 그 끝은 필연적으로 정신적 마비다. 어떤 방식으로든, 정신을 멈추고, 신체에 집중해야 한다. 이것이 기분에 지지 않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어느 날 아침 눈을 뜨면 글 써봐야 삶이 달라질 것 같지도 않고, 글 쓰는 것이 아무 의미 없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그 기분은 여전히 나를 찾아온다. 하지만 이제 기분에 지지 않는다. 기분에 질 것 같을 때 때, 바로 체육관으로 달려간다. ‘정신’없이 샌드백을 두들기고, 상대와 ‘정신’없이 치고 받는다. ‘정신’을 없애고 ‘신체’에 집중한다. 그 과정에서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의 고리를 끊어낼 수 있다.   

   

 정신에 대한 집착이 사라졌기에, 정신이 마비 상태에 이르는 것 역시 중단된다. 그때 정신이 건강한 방향으로 활성화된다. 신체를 펄떡이게 하는 만큼 정신은 차분해진다. 신체를 움직여 흠뻑 땀을 흘리고 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글을 쓰면 뭐라도 될 것 같고, 글을 쓰는 삶의 의미를 다시금 느끼게 된다. 이것이 내가 기분에 지지 않고 10년 넘게 글 쓰는 삶을 이어올 수 있었던 이유다. “정신의 제일 중요한 노력은 우리의 신체의 존재를 긍정하는 것”이라는 스피노자의 말을 삶에서 확인했다.  


    

강철멘탈을 갖는 법

     

 ‘어떻게 강철멘탈을 가질 수 있을까?’ 이 질문에도 이제 답할 수 있다. 강철멘탈은 말 그래도 강한 정신을 의미한다. 즉 더 유능한 정신이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지에 대해 스피노자는 이렇게 말한다.   

  

 어떤 신체가 동시에 많은 방식으로 작용을 하거나 작용을 받는 데에 다른 신체들보다 더 유능할수록그것의 정신도 동시에 많은 것을 지각하는 데 다른 정신들보다 그만큼 더 유능하다그리고 어떤 신체의 활동이 그 신체에만 의존하는 것이 많고다른 신체들(또는 물체들)이 함께 활동하는 것이 적으면 적을수록그것의 정신은 명확하게 이해하는 데 그만큼 유능하다. (에티카제 2정리 13, )      


 스피노자는 정신이 유능해지는데 두 가지 방법이 있다고 말한다. 첫째, 신체가 상호작용하는 대상들이 많을수록 정신이 유능해진다. 둘째, 신체가 상호작용하는 대상들이 적을수록 정신이 유능해진다. 이는 모순이 아니다. 첫째 경우부터 이야기해보자. A와 B라는 사람이 있다. A는 평생 공부만 한 사람이다. 그의 신체가 상호작용한 대상은 공부뿐이다. B는 공부도 하고, 운동도 해보고, 연애도 해보고, 직장도 다니고, 장사도 해본 사람이다. B는 A에 비해 다양한 대상들이 상호작용했다.          


 A와 B 중 누가 더 강한, 달리 말해 유능한 정신을 갖고 있을까? 단연 B다. A는 작은 변화나 시련에도 크게 흔들리는 약한(덜 유능한) 정신을 가질 개연성이 크다. 그의 신체가 만든 관념(정신)이 협소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B는 다르다. B의 신체는 산전수전을 다 겪으며 다양한 대상들과 상호작용했다. 그 과정에서 강한 정신을 갖게 되었을 개연성이 높다. 그의 신체가 만든 관념(정신)은 크고 넓기 때문이다. 누가 뭐래도, 인생은 실전이다. 얼마나 다양한 실존적인 경험을 해보았는지가 한 사람의 정신적 역량을 결정하게 마련이다. 


      

광장의 신체, 밀실의 신체

     

 이제 두번째 이야기를 해보자. 세상에는 수많은 B들이 있다. 산전수전을 온몸으로 겪으며 삶을 살아낸 이들은 많다. 그들은 정말 어느 순간에도 평온함과 정서적 안정을 유지하는 강한 정신을 갖고 있을까? 그렇지 않다. 세상의 수많은 B들 중 불안해하며 초조해하는 약한 정신을 갖고 있는 경우도 흔하다. 왜 그럴까? 그들은 세상과 부대꼈던 신체를 가지고 있을 뿐, 혼자인 신체를 가진 적이 없기 때문이다.   

   

 결국 중요한 것은 신체다. ‘정신-신체’는 어떤 경우에도 함께 가며, 정신보다 신체가 더 근본적이다. 하여, 신체의 유능함만큼의 정신의 유능함을 가질 수밖에 없다. 그런데 신체에는 두 신체가 있다. 최인훈 선생의 말을 빌리자면, ‘광장의 신체’와 ‘밀실의 신체’가 있다. 유능한 정신은 이 두 신체에서 온다. 다양한 대상들과 상호작용하는 ‘광장의 신체’뿐만 아니라, 상호작용하는 대상이 적은 ‘밀실의 신체’ 역시 중요하다. 

     

 달리 말해, 오롯이 자신의 신체만을 차분히 성찰해보는 것이 중요하다. 강한 정신은 ‘광장’과 ‘밀실’의 신체를 횡단하며 도달하게 된다. 세상의 타자들과 상호작용하는 광장의 신체, 그리고 그 모든 타자들과 단절하는 밀실의 신체. 두 신체를 가로지를 때 진정으로 강한 정신, 즉 강철멘탈을 갖게 된다. 당연하지 않은가? 저잣거리에서 세상 사람들과 부대끼기만할 뿐, 자신만의 방에서 오롯이 혼자인 시간을 갖지 않는 이들에게 유능한 정신은 요원하다.

        

 유리멘탈을 벗어나 강철멘탈이 되는 법은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일단 몸을 움직일 것. 그래서 정신으로 과도하게 쏠리려는 에너지를 신체로 돌려놓아야 한다. 둘째, 광장의 신체를 긍정할 것. 온몸으로 세상과 부딪히는 경험을 늘려가야 한다. 셋째 밀실의 신체를 긍정할 것. 차분하게 자신 몸의 속도와 리듬을 느끼는 경험을 늘려가야 한다. 그렇게 신체가 유능해지는 만큼 유능한 정신을 갖게 된다.   

   

 그런 강철멘탈을 갖게 되었을 때, 우울, 비관, 허무, 염세 같은 부정적이 기분에 더 이상지지 않게 된다. 기분에 지지 않기에 언제나 자신이 해야 할과 하고 싶은 일들을 흔들림 없이 해나갈 수 있다. 그렇게 우리는 어제보다 조금 더 기쁜 삶으로 다가설 수 있다. 우리에게 기쁜 삶을 열어줄 강한 정신은, ‘정신’이 아니라 ‘신체’에서 찾아야 한다. 정신의 문제를 정신(정신과, 종교, 명상 등등)으로 풀어가려는 이들은 나무에 올라 물고기를 잡으려는 이들이다. 정신의 문제를 정신으로 해결하려는 이들에게 스피노자는 단호하게 말한다.     

  

인간의 정신은 극히 많은 것을 지각할 수 있으며이러한 능력은 인간의 신체의 능력이 커짐에 따라 그만큼 커진다.” (에티카제 2정리 14, 증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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