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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악 : 착하게 살면 호구가 될까요?

착하게 살면 호구가 될까?

 “착하게 살아야 한다.” or “착하게 살면 호구 된다.”   

       

 삶이 혼란스러워질 때가 있다. 앎과 삶이 일치하지 않을 때다. ‘착하게 살아야 한다.’ 학교에서 배워서 안다. 하지만 현실은 어떤가? 착하게 살면 ‘호구’가 된다. 정말 그렇지 않은가. 학교에서 착한 아이는 만만한 친구가 되어 놀림감이 되거나 빵셔틀이 된다. 직장에서도 마찬가지다. 남을 먼저 배려하는 착한 직원은 만만한 동료가 되어 욕받이가 되거나 이일 저일 다 떠맡는 동네북이 된다. 그렇게 착한 이들은 매일 손해만 보는 ‘호구’가 된다.     


 착하게 사는 것에 대한 일정 정도의 거부감이 있다. 착하게 살고 싶다가도, 그렇게 살면 나만 손해 보는 것 같다. 또 그렇게 손해만 보는 삶이 계속되면 호구가 될 것 같다. 그래서 착하게 살고 싶다가도 자연스럽게 혹은 억지스럽게 악한 마음을 먹곤 하다. “착하게 살면 나만 호구되지 뭐” 문제는 그렇게 마음을 먹어도 찜찜한 기분이 남는다는 사실이다. 손해 보지 않기 위해 호구가 되지 않기 위해 착함을 미뤄두고 있지만 무엇인가 찜찜하다.   

   

  (착함을 포기한 이들은 혼란스럽지 않겠지만) 착함을 미뤄둔 이들은 혼란스럽다. 그들이 착함을 미뤄둔 이유는 조금이라도 더 (손해 보지 않는, 호구되지 않는) 기쁜 삶을 위해서였다. 하지만 착함을 미뤄두었지만 온전히 기쁘지만도 않다. 착함에서 멀어질수록 기묘한 슬픔이 따라온다. ‘이렇게 살아도 되는 것일까?’ ‘이렇게 사는 것이 정말 잘사는 것일까?’ 무엇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세상 사람들의 견고한 믿음을 뒤로 하고 처음부터 다시 물어야 한다. “착하게 살면 호구가 될까요?”  


   

스피노자의 ‘선’과 ‘악’


 흔히 말하는 착함은 무엇인가? ‘선善’이다. 그리고 그 반대 나쁨은 ‘악惡’이다. 그러니 ‘착하게 살면 호구가 되는 걸까?’라는 질문은 이렇게 구체화할 수 있다. ‘악’을 피하고 ‘선’을 따르며 살면 호구가 되는 것일까? 이 질문에 섣불리 답하기 전에 ‘선’과 ‘악’이 무엇인지부터 살펴볼 필요가 있다. 스피노자는 ‘선’과 ‘악’에 대해 어떻게 이야기했는지 들어보자.  


 나는 선을 모든 종류의 기쁨과 기쁨을 가져 오는 것그리고 특히 온갖 종류의 열망을 만족시키는 것으로 이해한다그리고 악을 모든 종류의 슬픔그리고 특히 열망을 좌절시키는 것으로 이해한다. (에티카 3정리 39, 주석)

          

 스피노자는 기쁨을 주는 것을 ‘선’, 슬픔을 주는 것을 ‘악’이라고 말한다. 스피노자의 이런 ‘선/악’ 개념은 파격적이다. 우리들의 일반적인 ‘선·악’ 개념은 어떤가? 그것은 ‘사회’적인 개념이다. 쉽게 말해, 선(good)은 사회적으로 옳은 것이고, 악(evil)은 사회적으로 그릇된 것이다. 예를 들어, 길거리의 쓰레기를 줍는 것은 ‘선’이고, 쓰레기를 버리는 것은 ‘악’이다. 왜 그런가? ‘사회’적 합의와 약속 때문이다.    


  하지만 스피노자의 ‘선·악’은 전혀 다르다. 스피노자의 ‘선’과 ‘악’은 ‘개별’적이다. 달리 말해, 일반적인 ‘선·악’ 개념이 ‘사회’적 문제라면, 스피노자의 ‘선·악’ 개념은 ‘개별(나!)’적 문제다. 즉 ‘나’가 기쁨을 느끼면 선(good), 슬픔을 느끼면 악(bad)이다. 스피노자의 ‘선/악’ 개념을 따르면 기묘한 반전이 일어난다. 쓰레기를 버리는 것이 ‘나’에게 기쁨을 준다면 그것은 ‘선’(good)이 된다. 또 쓰레기를 줍는 것이 ‘나’에게 슬픔을 준다면 그것은 ‘악’(bad)이 된다.

           


기쁨인 선, 슬픔이 악

     

 이 얼마나 파격적인 논의인가? ‘나’를 즐겁게 하는 것들이 ‘선(옳음)’이 되고, ‘나’를 우울하게 하는 것이 ‘악(그름)’이 되는 것이니까 말이다. 스피노자의 ‘선·악’ 개념은 분명 파격적이다. 하지만 그 파격은 ‘궤변의 파격’이 아니다. ‘진실의 파격’(혁명!)이다. 긴 시간 은폐해둔 삶의 진실을 드러내었기에 느껴지는 파격이다. 스피노자의 선·악 개념은 낯설지만 분명 옳다. 스피노자는 ‘선·악’이 왜 개별적인 단독자의 기쁨과 슬픔에 관계된 것인지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는 어떤 것을 선이라고 판단하기 때문에 그것을 지향하여 노력하고 원하고 추구하고 욕구하는 것이 아니다반대로 그 어떤 것을 지향하여 노력하고 원하고 추구하고 욕구하기 때문에 그것을 선이라고 판단한다. (에티카 3정리 9, 주석)   

        

 쓰레기를 줍는 행위를 생각해보자. 쓰레기 줍는 행위를 “선이라고 판단하기 때문에 그것을 지향하여 노력하고, 원하고, 추구하고, 욕구하는 것이 아니다.” 삶의 진실은 그 반대다. 먼저 쓰레기를 줍는 행위를 “지향하여 노력하고 원하고 추구하고 욕구하기 때문에 그것을 선이라고 판단”하는 것일 뿐이다. 쉽게 말해, 쓰레기를 줍는 행위가 ‘선’인 이유는 그것이 ‘옳기’ 때문이 아니라 세상 사람들이 그것을 ‘좋아’(원하고 추구하고 욕구)했기 때문이다. 


‘좋음’이 ‘옳음’을, ‘싫음’이 ‘그름’을 만든다.  


 스피노자는 ‘사회적 옳음’이 먼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개별적인 좋음’이 먼저 존재한다고 본다. 그 ‘개별적인 좋음’에 세상 사람들(사회)이 ‘선’(good)이라는 이름을 붙였기 때문에 ‘사회적 옳음’(선)이 탄생하게 된다. 다시 묻자. 쓰레기를 줍는 행위는 왜 ‘선’(사회적 옮음)인가? 사람들이 깨끗한 거리(개별적 좋음)에서 기쁨을 느꼈기 때문이다. 약자를 돕는 것이 왜 ‘선’이다. 사람들이 그 행위에서 기쁨을 느꼈기 때문이다. 즉 ‘사회적 선’(옳음)은 ‘개별적 선’(좋음)에 기초해 있다. 달리 말해, ‘사회적 옳음’은 ‘개별적 좋음’의 결과일 뿐이다. 


 ‘악’도 마찬가지다. 길거리에 쓰레기를 버리고 노상방뇨를 하는 것이 ‘악’(evil)인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이 ‘사회적 그름’에 해당하기 때문이 아니다. 그것이 “우리가 혐오하는 사물” 즉, 개별적 싫음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것을 ‘악’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쓰레기를 버리고 노상방뇨를 하는 것이 개별적 싫음(bad)이기 때문에 그것이 ‘사회적 그름’(evil)이 된다. 세상 사람들이 (결코 원하고 추구하고 욕구하지 않는) 혐오의 대상이라고 여기는 것은 여지없이 ‘악’이 된다. 이에 대해 스피노자는 분명히 말한다.

      

우리는 우리가 혐오하는 사물을 악이라고 부른다. (에티카 3정리 39, 주석)       


 스피노자의 말처럼, 우리는 단지 “우리가 혐오(싫음)하는 사물을 악이라고 부른다.” 시대마다 국가마다 선(good)·악(evil)의 구분이 다르다는 사실이 이를 방증하지 않는가? 시대마다 국가마다 구성원들의 좋음(good)·싫음(bad)이 다르다. 만약, 어느 시대 어느 지역의 사람들이 정돈되지 않은 거리를 ‘좋음’으로, 정돈된 거리를 ‘싫음’으로 느낀다면 어떨까? 그 사회에서는 쓰레기를 버리는 것이 ‘옮음’(선), 쓰레기 줍는 것이 ‘그름’(악)이 될지도 모를 일이다. 이런 가정이 황당한 망상이나 과도한 비약처럼 느껴지는가?    

  

 이성애와 동성애를 생각해보자. 지금은 이성애를 ‘선’(사회적 옳음)으로, 동성애를 ‘악’(사회적 그름)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다. 이는 ‘결혼’이라는 법적(사회적) 제도를 생각해보면 된다. 법적으로 결혼은 이성 간에만 허용된다. 법적으로 동성 결혼이 금지된 것은, 그것이 사회적 그름(악)으로 받아들여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고대 그리스 시대에는 달랐다. 놀랍게도, 고대 그리스는 ‘연애는 남자끼리, 결혼은 남녀끼리’라는 구호가 일반적인 사회였다. 


          

선·악의 상대성

     

 고대 그리스에서는 이성애를 ‘악’(사회적 그름, evil)이라고까지 여기지는 않았다. (어쩔 수 없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동성애를 ‘선’(사회적 옳음, good)으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지금과 고대 그리스 사이의 선(good)·악(evil)의 구분은 다르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던 걸까? 해당 구성원들의 ‘좋음’(good)과 ‘싫음’(bad)의 차이 때문이다. 지금 우리 사회에는 이성애를 ‘좋음’으로, 동성애를 ‘싫음’으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 우리 시대의 동성애는 적지 않은 이들에게 “혐오하는 사물”이다. 


 하지만 고대 그리스에서는 동성애는 세상 사람들이 원하고 추구하고 욕구하는 것이었다. 지혜로운 성인 남성이 미소년과 육체적 정서적 관계를 맺는 일은 권장할 만한 ‘좋은’ 일이었다. 이것이 지금 시대의 동성애는 ‘악’으로, 고대 그리스에서는 ‘선’으로 여겨지는 이유다. (원하고 추구하고 욕구하는) 기쁨을 주는 것은 ‘선’으로, (싫어하고 혐오하는) 슬픔을 주는 것은 ‘악’으로 판단하기 때문이다. 결국 ‘선’의 기원은 ‘좋음’이고, ‘악’의 기원은 ‘싫음’이다. 스피노자는 ‘선·악’이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 명시적으로 말한다. 

     

각자는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무엇이 더 좋은 것이고 무엇이 더 나쁜 것인지그리고 마지막으로 무엇이 가장 좋은 것이고 무엇이 가장 나쁜 것인지를 자신의 감정에 의하여 판단하거나 평가한다. (에티카 3정리 39, 주석

         

 ‘선·악’의 구분은 감정에서 온다. 우리에게 더 좋은 것(기쁨)은 무엇이고, 더 나쁜 것(슬픔)은 무엇인지를 판단하는 감정. 스피노자에게 ‘선’이란 기쁨을 가져주는 일이고, ‘악’이란 슬픔을 가져다주는 일이다. 사회적 선(악)이란, 어느 시대, 어느 사람에게 기쁨(슬픔)의 감정을 가져다주었던 일의 잠정적 결과일 뿐이다. 결국 중요한 ‘선’은 ‘사회적 옳음’(good)이 아니라 ‘개별적인 기쁨’(good)이고, ‘악’은 '사회적 그름'(evil)이 아니라 ‘개별적인 슬픔’(bad)이다. 그러니 선악의 판단 및 규정은 결코 절대적일 수 없고, 상대적일 수밖에 없다. 그것은 (주관적·개별적인) 감정에 근거하는 것이니 말이다.      



착하게 살아야 호구가 되지 않는다.

    

 이제 우리의 질문으로 돌아오자. ‘선’하게 살면 정말 호구가 되는 것일까? 아니다. 삶의 진실은 그 반대다. ‘선’하게 살아야 혹은 ‘악’하게 살지 않아야 호구가 되지 않는다. 물론 그 ‘선·악’은 스피노자의 ‘선·악’이다. 스피노자의 ‘선·악’이 무엇인가? 기쁨을 주는 것을 따르고, 슬픔을 주는 것을 거부하는 것 아닌가? 즉, 선을 행하고 악을 행하지 않고 산다는 것은 기쁨을 주는 일을 따르고 슬픔을 주는 일을 거부한다는 뜻이다. 그렇게 사는 이들은 결코 호구가 될 일이 없다.


 “이 업무는 김 대리가 해줘요.” 직장 동료의 요청이다. 하지만 ‘김 대리’는 이미 진행 중인 업무만으로도 며칠째 야근 중이다. 그리고 심지어 그 업무는 ‘김 대리’ 관련 업무도 아니다. ‘선’하게 살려는 김 대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네”라고 말해야 할까? 아니다. 그건 ‘악’한 행동이다. 그 업무를 맡았다간 더 큰 슬픔에 빠질 테니까. “싫어요. 그건 제 제 업무가 아니에요.” 이것이 ‘선’한 행동이다. 그렇게 부당한 업무를 거부할 때, 슬픔(업무)을 조금이라도 줄이고, 기쁨(칼퇴)을 조금이라도 늘려나갈 수 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여전히 답답하다. 누군들 기쁘게(선하게) 살고 싶지 않겠는가. 하지만 세상이 그리 호락호락하던가. 세상은 ‘선’을 행하려는 이들에게 갖가지 불이익을 준다. 그것이 걱정되고 두려워 ‘선’을 행하지 못하고 ‘악’을 행하며 산다. 직장에서 ‘선’(당당하게 할 말 다 하고, 추가업무를 거부하고, 칼퇴를 하면)을 행하면 불량직원으로 찍혀 불이익을 받을 것만 같다. 그 불이익이 두려워 여전히 ‘악’(억울하게 할 말 못하고, 추가업무를 하고, 야근을) 행하며 산다. 우리에게는 해결해야 할 현실적인 문제가 하나 더 남아 있다.  


    


‘선’을 행하다 불이익을 받으면 어쩌지?

     

 ‘기쁨(선)을 쫒다가 불이익을 받으면 어쩌지?’ 이 현실적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  기쁨과 슬픔의 크기를 비교하는 것으로 간명하게 해결할 수 있다. ‘선’을 행한다고 해서 그 결과가 모두 기쁨인 것은 아니다. ‘선’을 행하는 과정에서 슬픔이 있다. 마찬가지로, ‘악’을 행한다고 해서 그 결과 전부가 ‘슬픔’인 것은 아니다. 거기에도 ‘기쁨’이 있다. ‘선’과 ‘악’ 사이에서 고민하고 있다면, 둘 중 어떤 행동이 우리에게 더 큰 기쁨을 가져다줄 것인지에 대해 계산해보면 된다.      


 먼저 ‘악’을 행하는 경우부터 생각해보자. 억울하게 할 말 못하고 추가업무와 야근을 한다고 해보자. 이런 삶은 대부분 슬픔이다. 하지만 기쁨도 있다. 욕먹지 않는 기쁨, 그리고 직장생활을 조금 더 오래 할 수 있다는 안도감의 기쁨이다. 이제 ‘선’을 행하는 경우를 생각해보자. 당당하게 할 말을 하고 추가업무와 야근을 거부한다고 해보자. 이런 삶은 대부분 기쁨이다. 하지만 슬픔도 있다. 직장에서 왕따가 될 수 있는 슬픔, 직장생활을 오래 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의 슬픔이다.        


‘선’, 삶의 주인이 되는 수행

    

 두 경우의 기쁨-슬픔의 대차대조표는 각각 어떨까? ‘악’을 행했을 때, 기쁨-슬픔의 총합은 항상 마이너스다. ‘선’을 행했을 남겨지는 기쁨-슬픔의 총합은 항상 플러스다. 당연하지 않은가? ‘악’한 행동(할 말 못함, 추가업무, 야근)은 ‘노예’로 가는 길이고, ‘선’(할 말 함, 추가업무 거부, 칼퇴)한 행동은 삶의 ‘주인’으로 가는 길이니까 말이다.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노예가 아닌 ‘주인’으로 살아가야 한다.     

 

 물론 ‘노예’의 삶에도 기쁨은 있다. 하지만 그 기쁨은 슬픔에 비해 턱없이 부족한 기쁨이다. 당연히 ‘주인’의 삶에도 슬픔은 있다. 하지만 그 슬픔은 기쁨에 비한다면 사소한 슬픔이다. 그러니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겠는가? 조금의 기쁨이 있다고 해도, 악착같이 ‘악’을 거부하며 살아가야 한다. 또 남겨지는 슬픔이 있다고 해도, 당당하게 ‘선’을 행하며 살아가야 한다. 하지만 그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악’을 거부하고 ‘선’을 따르는 일은 ‘수행’이다. 삶의 주인이 되기 위한 지난하고 고된 수행. 많은 이들이 삶의 주인이 아니라 노예로 전락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작은 기쁨을 위해 ‘악’한 행동을 하기 때문 아닌가? 또 작은 슬픔 때문에 ‘선’한 행동을 포기하기 때문 아닌가? 사소한 기쁨을 포기하고, 사소한 슬픔을 감당하며 악을 거부하고 선을 행하려는 수행을 포기하지 않는 이들만이 삶의 주인이 된다. 하지만 이 수행은 단지 삶의 주인이 되는 수행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지혜롭게 주인이 되는 수행이기도 하다.    


  

단호한 수행과 유연한 수행

     

자연에 존재하는 것 중에서 악이라고 판단되는 온갖 것즉 우리가 존재하고 이성적 삶을 누릴 수 있는 것을 방해할 수 있는 온갖 것들을 우리는 가장 안전하다고 생각되는 방법으로 제거해도 좋다반면에 선이라고 판단되는 온갖 것즉 우리의 존재를 보존하고 이성적 삶을 누리는 데 유익하다고 판단되는 온갖 것들을 우리는 사용을 위해 취하고 적당한 방법으로 그것을 이용해도 좋다. (에티카제 4부록 8)     


 스피노자는 ‘악’을 거부하고 ‘선’을 취하라고 말한다. 그렇다. 우리는 삶의 주인이 되어 당당하게 삶의 기쁨을 좇아야 한다. 이는 결코 흔들려서는 안 될 삶의 지표이다. 하지만 이 확실한 삶의 지표를 따른다는 것은 실제 삶에서 결코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악’을 거부하고 ‘선’을 따르는 일이 수행이라면, 그 수행에는 그것을 현실 속에서 지혜롭게 적용할 수 있는 일까지 포함되어야 한다.     


 우리네 삶에서 ‘악’이라고 판단되는 일이 있더라도, 그것을 함부로 제거해서는 안 된다. ‘악’(직장)을 함부로 제거하는 것이 더 큰 ‘악’(빈곤)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악’을 제거할 때, “가장 안전하다고 생각되는 방법으로 제거”해야 한다. 반대로 ‘선’(섹스)이라고 판단되는 일이 있더라도 무작정 따라서는 안 된다. ‘선’(섹스)을 함부로 따르는 것이 오히려 ‘악’(폭력)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선’을 따를 때, “적당한 방법으로 그것을 이용”해야 한다. 기쁜 삶으로 나아가는 수행에는 두 가지 수행이 필요하다. 삶의 주인이 되려는 단호한 수행만큼이나, 지혜롭게 주인이 되려는 유연한 수행 또한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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