섹스의 즐거움
섹스는 기쁜 일이다. 욕구를 해소하는 일은 언제나 즐거운 일이니까. 그뿐인가? 금지된 일을 행하는 건 언제나 짜릿한 법이다. 그러니 섹스만큼 기쁜 일도 없다. 섹스는 욕구의 해소이면서 동시에 금지를 넘는 일이니까. 그런데 그것이 다일까? 단순히 금지된 성적 욕구를 해소하는 즐거움이 섹스가 주는 즐거움의 전부일까? 아니다. 섹스의 진정한 즐거움은 ‘대화’에 있다. 섹스는 서로의 실존을 온몸으로 껴안는 행위다.
‘실존을 껴안는다’는 건 어떤 의미인가? 누구에게도 내비치지 못했던 온전한 모습을 서로 오롯이 이해한다는 의미다. 서로 ‘대화’를 나누었기에 서로를 더 깊이 이해하게 된 것이다. 섹스라는 ‘대화’는 일상의 대화 다르다. 일상의 대화는 아무리 많이 떠들어봐야 존재 전체를 주고받는 느낌이 오지 않는다. 하지만 섹스라는 ‘대화’로는 그것이 가능하다. 섹스는 탈脫언어적 대화이기 때문이다.
일상의 대화는 대화가 아니라 오해에 가깝다. 직장, 친구, 가족 등 일상의 거의 모든 대화는 서로의 마음을 섬세히 살피기보다 자신이 듣고 싶은 대로 듣고 하고 싶은 말을 하기 바쁘니까 말이다. 온전한 대화는 언어적으로 이뤄질 수 없다. 그것은 언제나 탈脫언어적이다. 아무 말 하지 않아도 서로의 마음이 전달되는, 언어 너머의 대화가 진정한 대화다. 실존의 주고받음은 그런 대화를 통해서 가능하다.
섹스의 슬픔
섹스는 그런 대화를 가능케 할 문을 열어준다. 왜 안 그럴까? 온몸을 물고, 빨고, 껴안는 행위 안에서는 아무 말 없이 존재 자체를 서로 나누게 된다. 그때 온전히 누군가를 이해했다는, 누군가에게 이해받았다는 충만한 느낌이 든다. 그것이 섹스의 진정한 기쁨이다. 우리의 섹스로 돌아오자. 우리는 섹스의 기쁨을 충분히 느끼고 있을까? 섹스를 통해 억압된 성적 욕구를 해소했다. 하지만 기쁨보다는 기묘한 공허감과 허무함, 불안과 같은 슬픔을 느낄 때가 있다.
섹스의 기쁨을 알고 있는 이들에게 이 공허, 허무, 불안은 당황스러운 일이다. 이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불운하게 처음 몇 번의 섹스에서 이런 슬픔을 만나게 된 이들에게 찾아온다. 불운한 이들에게 섹스는 기쁨이 아니라 불편하고 불쾌한 그래서 피하고 싶은 어떤 것이 된다. 섹스는 분명 기쁨이다. 기쁨을 놓치고 사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삶의 기쁨을 누리고 살려는 이들에게 이 질문은 중요하다. “왜 섹스 뒤에 공허감과 허무함이 찾아올까요?”
스피노자의 섹스
스피노자는 섹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직접 들어보자.
욕정이란 성교에 대한 욕망과 사랑이다. (에티카, 제 3부, 감정의 정의 48)
우선 스피노자는 섹스하고 싶은 마음(욕정)을 ‘욕망’으로 정의하고 있다. 그렇다면 스피노자의 ‘욕망’은 무엇일까?
욕망은 충동에 대한 의식을 수반하는 충동으로 정의될 수 있다. (에티카, 제 3부, 정리 11, 주석)
욕망은 충동을 의식하고 있는 상태의 충동이다. 난해한 이야기가 아니다. 매혹적인 사람이 나타났다고 해보자. 그때 ‘저 사람과 섹스하고 싶어!’라는 마음에 휩싸일 수 있다. 그것은 충동이다. 또 그때 “나는 지금 ‘저 사람과 섹스를 하고 싶어!’(충동)라는 마음을 갖고 있구나!”라는 마음을 가질 수 있다. 이것이 욕망이다. 쉽게 말해, ‘섹스하고 싶다’는 마음에 휩쓸리는 건 충동이고, ‘섹스하고 싶다’는 마음을 의식하는 것이 욕망(욕정)이다. 여전히 난해하다면, ‘욕망=충동’으로 이해해도 좋다. ‘충동’에 대해 스피노자는 이렇게 말한다.
충동은 인간의 본질 자체일 뿐이며, 그것의 본성으로부터 필연적으로 인간의 보존에 기여하는 것들이 나온다. (에티카, 제 3부, 정리 9, 주석)
‘넌 왜 그리 충동적이니?’ 이 말에서 느끼듯, 우리에게 ‘충동’이란 단어는 부정적이다. 하지만 스피노자에게는 그렇지 않다. 스피노자는 충동을 “인간의 본질 자체”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 충동으로부터 “필연적으로 인간의 보존에 기여하는 것들이 나온다.”고 말한다. 이는 충동과 욕망이 없다면 인간은 존재할 수 없다는 의미다. 당연한 말이다. 목이 마를 때 마실 것을 욕망(충동)한다. 피곤할 때 자는 것을 욕망(충동)한다. 이 충동과 욕망이 있기에 우리는 살아갈 수 있는 것이고, 그것이 없다면 살아갈 수 없다. 스피노자에 따르면, 욕망(충동)을 따르는 삶을 살 때 삶의 활력이 커지고 그 반대일 때 삶의 활력이 줄어든다고 말한다.
이제 스피노자가 섹스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 알 수 있다. 스피노자에게 ‘욕정’은 ‘욕망’이다. 즉, 섹스를 하고 싶은 마음은 욕망이다. 이는 섹스를 하고 싶은 마음을 따를 때 삶의 활력은 커지고 그것을 억누를 때 삶의 활력은 줄어든다는 의미다. 우리네 삶이 이를 방증하지 않는가. 충분히 섹스를 하는 사람은 유쾌하고 활력 넘치는 일상을 산다. 반면 어떤 이유에서든, 충분히 섹스하지 못하는 사람은 매번 섹스 생각에 매여 삶 전반의 활력이 떨어진다. 섹스가 결여된 이들의 (자신도 모르는) 짜증과 불만은 삶의 활력이 떨어져서 생긴 반작용이다.
섹스가 주는 즐거움, ‘쾌감’과 ‘유쾌’
스피노자에게 섹스는 욕망(충동)이기에 그것을 따를 때 삶의 활력이 증대되고, 그것을 따르지 않을 때 삶의 활력은 줄어든다. 이것이 스피노자가 섹스를 바라보는 관점이다. 그렇다면, 섹스를 하기만 하면 삶의 활력이 커지는 것일까? 분명 그렇다. ‘욕정을 억압하는 삶’과 ‘욕정을 해소하는 삶’ 둘 중 하나만 선택해야 한다고 가정해보자. 분명 전자보다 후자가 더 큰 삶의 활력을 가져준다. 이제 우리의 질문으로 돌아갈 수 있다.
“왜 섹스 뒤에 공허감과 허무감이 찾아올까요?” 섹스를 하면 분명 삶의 활력이 커져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런데 실제 우리네 삶에서는 그렇지 않은 경우가 종종 있다. 마음속에 있는 욕정(욕망)을 따랐지만 때로 공허와 허무, 불안 같은 슬픔의 감정에 휩싸이곤 하지 않던가. 이런 공허와 허무의 감정을 삶의 활력이 증대된 것이라고 볼 수는 없지 않은가? 이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먼저 스피노자의 ‘쾌감’과 ‘유쾌’라는 두 감정을 알아보자.
‘정신과 신체에 동시에 관계된 기쁨의 감정’을 나는 쾌감 또는 유쾌라고 부른다. (에티카, 제 3부, 정리 11, 증명)
‘쾌감’과 ‘유쾌’라는 감정은 모두 기본적으로 기쁨이다. 삶의 활력을 높여주는 기쁨. 하지만 이 두 기쁨의 감정은 여느 기쁨의 감정과 다르다. 예를 들어, ‘희망’, ‘환희’와 같은 기쁨의 감정은 정신에만 관계되어 있다. 신체적 자극 없이도 ‘환희’와 ‘희망’을 느낄 수 있다. 하지만 ‘쾌감’과 ‘유쾌’는 다르다. 이 두 가지 기쁨의 감정은 “정신과 신체에 동시에 관계된 기쁨의 감정”이다. 섹스는 반드시 ‘쾌감’과 ‘유쾌’를 동반한다. 섹스는 정신적으로만 하는 것도 아니고 신체적으로만 하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정신과 신체의 비중의 차이는 있다고 할지라도, 어떤 섹스든 반드시 정신과 신체 모두 관계되어 있다. ‘원나잇’ 섹스를 생각해보자. 처음 만난 두 사람이 욕정을 해소하기 위해 섹스를 했다. 이는 육체적인 관계이기만 할까? 그렇지 않다. 그 섹스의 전, 후 그리고 섹스 자체를 통해 미묘한 정서적 교감이 일어난다. 몸을 섞으면서 정신적으로 전혀 섞이지 않는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 육체와 정신은 별도의 영역에서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로 연결(심신평행론)되어 있기 때문이다.
‘쾌감’은 자위, ‘유쾌’는 섹스
‘욕정을 억압하는 삶’보다 ‘욕정을 해소하는 삶’이 더 낫다. 욕정을 해소하는 삶은 반드시 삶의 활력을 크게 한다. ‘원나잇’ 섹스에 대한 윤리적 판단은 각자의 몫이다. 하지만 욕정을 억압하는 삶보다 욕정을 해소하는 삶이 더 기쁜 삶이라는 것만은 분명한 삶의 진실이다. 욕망(충동)을 따르는 삶이 더 기쁜 삶이다. 욕정을 해소하는 섹스는, 설사 그것이 ‘원나잇’ 섹스라 할지라도, ‘쾌감’과 ‘유쾌’라는 기쁨의 감정을 동반하는 까닭이다.
하지만 여기서 놓치지 말아야 중요한 질문이 있다. ‘욕정을 해소하는’ 기쁨은 모두 같은 기쁨일까? 쉽게 말해, 온 마음으로 사랑하는 이와의 섹스와 ‘원나잇’ 섹스의 기쁨은 같은 기쁨일까? 명백히 설명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그 둘의 기쁨이 무언가 분명 다르다는 사실을 직감적으로 알고 있다. 두 섹스가 주는 기쁨의 차이는 무엇일까? ‘욕정을 해소하는 삶’에는 다양한 결의 기쁨이 존재한다. 여기서 스피노자는 ‘쾌감’과 ‘유쾌’를 다시 구분한다.
쾌감…은 한 인간의 어떤 부분이 다른 부분보다 더 많이 자극받아 변화되는 때 인간에게 관계되지만, 유쾌…는 한 인간의 모든 부분이 똑같이 자극받아 변화되는 때 인간에게 관계된다. (에티카, 제 3부, 정리 11, 증명)
‘쾌감’도 기쁨이고, ‘유쾌’도 기쁨이다. 하지만 ‘쾌감’은 신체의 특정한 부분이 다른 부분보다 더 자극받게 될 때 느끼는 기쁨이다. 반면 ‘유쾌’는 신체의 모든 부분이 똑같이 자극받게 될 때 느끼는 기쁨이다. 조금 거칠게 비유하자면, ‘쾌감’은 ‘자위’고, ‘유쾌’는 ‘섹스’라고 말할 수 있다. ‘자위’는 성기라는 특정한 부분을 자극해서 기쁨을 느끼는 행위고, ‘섹스’는 상대를 껴안고 키스하는 행위를 통해 신체 모든 부분을 자극해서 기쁨을 얻는 행위니까 말이다.
‘쾌감’의 섹스 너머 ‘유쾌’한 섹스로
이제 섹스 뒤에 찾아오는 슬픔(공허·허무·불안…)에 대해 말할 수 있다. 섹스 뒤에 찾아오는 슬픔은 기묘하다. 왜 기묘한가? 그 슬픔(공허·허무·불안…)에는 모종의 기쁨이 항상 엉켜있기 때문이다. 예외적인 경우가 아니라면, ‘원나잇’ 섹스는 공허하고 허무하며 불안하다. 이는 섹스 자체는 분명 기쁨을 주지만, 그 기쁨에 무엇인가가 결여되었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무엇인가 충만함을 기대했는데 그만큼 채워지지 않았을 때 우리는 공허와 허무, 불안을 느끼게 되지 않던가. 그렇다면 그 결여된 것은 무엇일까?
스피노자식으로 말하자면, 섹스 뒤의 슬픔은 섹스를 통해 ‘쾌감’을 느꼈지만 ‘유쾌’를 느끼지 못했기에 발생한 정서다. 공허와 허무, 불안을 남기는 섹스는 서로가 상대를 성기로만 대하는 섹스다. ‘쾌감’만 있는 섹스. “인간의 어떤 부분이 다른 부분보다 더 많이 자극받아 변화”되는 기쁨만을 주는 섹스. 이는 마치 상대의 성기를 통해 자위를 하려는 섹스와 같다. ‘쾌감’만 있을 뿐, ‘유쾌’가 결여된 섹스는 잠시의 기쁨 뒤에 이내 깊은 공허와 허무에 빠뜨린다. 이것이 기쁜 섹스 뒤에 온갖 슬픔을 느끼게 되는 이유다.
섹스 뒤의 슬픔으로부터 벗어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다시 ‘욕망’(충동)을 따르면 된다. 어떤 욕망인가? 섹스가 주는 온전한 기쁨을 향한 ‘욕망’(충동)이다. 섹스가 주는 온전한 기쁨은 무엇인가? ‘유쾌’다. “인간의 모든 부분이 똑같이 자극받아 변화되는” 섹스의 기쁨을 만끽하면 된다. 특정한 부분이 아니라 모든 부분을 자극받아 변화되는 섹스를 하면 된다. 성기에만 집중하는 섹스가 아니라, 온몸을 만지고 애무해주고 껴안아주는 섹스를 하면 된다.
‘유쾌’한 섹스, 마음의 애무
여기서 스피노자가 심신평행론자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스피노자는 신체와 정신은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고 말한다. 그러니 “인간의 모든 부분이 자극받아 변화되는” 섹스는 비단 신체적 부분 너머까지 확장되어야 한다. 정신적인 부분까지 자극받아 변화되는 섹스로 나아가야 한다. 온몸을 정성스럽게 애무해주는 것처럼, 온 마음을 정성스럽게 애무해 줄 때 진정한 ‘유쾌’를 느낄 수 있다. 온몸을 아무리 열심히 애무해준다고 ‘유쾌’가 되지는 않는다. ‘마음의 애무’가 없다면 ‘온몸의 애무’ 역시 자위일 수밖에 없다.
‘마음의 애무’가 무엇일까? 사랑하는 이가 좋아하는 소설과 음악, 영화, 그림을 함께 하며 이야기를 나누는 일. 사랑하는 이의 내밀한 아픔과 상처를 나누는 일. 사랑하는 이의 소중한 꿈을 함께 나누는 일. 그렇게 사랑하는 이의 삶의 지평을 함께 하는 일이다. 삶의 지평을 함께 하며 함께 울고 웃는 일, 그것이 바로 ‘마음의 애무’이다.
육체적으로 충분히 즐거웠다고 하더라도, ‘원나잇’ 섹스가 결국 슬픔일 수밖에 없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하룻밤은 신체를 애무해주기 충분할 뿐 ‘마음의 애무’를 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시간이기 때문이다. 육체적으로 아무리 즐거웠다고 하더라도, 삶의 지평이 다른 이와의 섹스는 결국 슬픔일 수밖에 없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는 이는 신체를 애무할 수 있을지 몰라도, 결코 마음을 애무해줄 수는 없으니까.
섹스가 주는 진정한 기쁨은 대화를 통해서다. 탈언어적 대화. 이 탈언어적 대화는 ‘온몸의 애무’ 너머 ‘마음의 애무’까지 확장된 섹스의 다른 이름이다. 신체를 넘어 마음마저 애무해주는 관계에서 언어적 대화는 필요 없다. 이런 탈언어적인 대화, 즉 ‘마음의 애무’까지 확장된 섹스는 결코 어떤 슬픔도 남기지 않는다. 그때 우리는 섹스라는 행위가 주는 기쁨의 정수精髓를 누릴 수 있다.
우리에게 남겨진 숙제는 분명하다. 섹스의 확장! 성기를 넘어 신체 전체로, 신체를 넘어 마음까지 오롯이 껴안는 섹스로 나아가야 한다. 그렇게 ‘쾌감’의 기쁨 너머의 ‘유쾌’의 기쁨이 가득한 섹스로 나아가야 한다. 섹스의 진정한 기쁨은 많은 이들과 많은 섹스를 통해 도달할 수 있는 지점이 아니다. 단 한 사람을 통해 도달할 수 있다. 언어 너머 서로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단 한 사람. 그 단 한 사람과의 단 한 번의 섹스로 섹스가 주는 진정한 기쁨에 이를 수 있다. 오직 그 사람만이 “한 인간의 모든 부분이 똑같이 자극받아 변화되는” 기적 같은 섹스(기쁨!)를 선물해줄 테니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