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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감 : 왜 이유 없이 누군가 싫어질까요?

자기 파괴적인 마음. ‘이유 없이 싫다.’
  

 꼴 보기 싫은 인간들. 여기에는 두 부류가 있다. 한 부류는 꼴 보기 싫은 이유가 있는 인간들이다. 사장, 팀장, 선배, 후배, 친구, 가족 등등. 우리에게 명백한 슬픔(분노·공포·위축감·치욕·질투…)을 주는 이들이 있다. 우리는 이들이 싫다. 아니 싫어할 수밖에 없다. 인간은 자연스럽게 슬픔을 멀리하고 기쁨을 가까이하는 존재 아닌가. 그러니 슬픔을 주는 인간들을 싫어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들을 싫어해야 슬픔을 멀리할 수 있으니까. 그들을 싫어하는 마음은 일종의 건강함이다. 슬픔을 멀리하고 기쁨을 가까이하려는 건강함.     


 문제는 두 번째 부류다. 그냥 꼴 보기 싫은 인간들이 있다. 딱히 이유가 없다. 그냥 싫다. 이것이 별문제가 아니라고 여길지도 모르겠다. 이유야 어찌 되었든 꼴 보기 싫으니 그냥 싫어하면 되는 것 아닌가? 문제가 그리 단순하지 않다. 이유 없이 싫은 사람들은 우리에게 직접적인 혹은 명백한 슬픔(분노·공포·위축감·치욕·질투…)을 주지 않는다. 심지어 우리에게 잘해주는 사람 중에 이유 없이 싫은 사람도 있지 않은가?      


 이런 이들을 싫어하는 마음을 갖게 되면 어떻게 될까? 달리 말해, 슬픔을 주지 않는 혹은 기쁨을 줄지도 모르는 이를 싫어하면 어떻게 될까? 더 큰 슬픔에 내몰리게 된다. 그것은 잠정적인 기쁨을 제거하고, 불필요한 슬픔을 만드는 일인 까닭이다. 그를 싫어하지 않았다면 그가 우리가 기쁨을 주었을지도 모르고, 우리가 그를 싫어하면 그 역시 우리를 싫어하게 될 테니까. 이유 없이 누군가를 싫어하면 더 큰 슬픔의 나락으로 떨어지게 되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싫어할 이유가 있는(슬픔을 주는) 이’들을 싫어하는 건 지혜로움이다. 하지만 ‘싫어할 이유가 없는(슬픔을 주지 않는, 어쩌면 기쁨을 줄 수도 있는) 이’들을 싫어하는 건 어리석음이다. 더 큰 슬픔을 쫓는 어리석음. 이유 없이 누군가를 싫어하는 이들이 혼자 남겨지는 건 우연이 아니다. 슬픔이 가득 찬 사람과 함께 하려는 이들은 없기 때문이다. 이유 없이 누군가를 싫어하는 마음은 자기 파괴적이다. 그러니 늦기 전에 물어야 한다. “왜 이유 없이 누군가가 싫어질까요?”     



스피노자의 ‘반감’

 이 질문에 스피노자라면 이리 답해줄 테다. “그것은 ‘반감’ 때문이라네.” 스피노자의 이야기를 직접 들어보자.     


반감이란 우연히 슬픔의 원인이 된 어떤 사물의 관념을 수반하는 슬픔이다. (에티카3감정의 정의 9)


 “부자들이 좀 더 배려심이 있지” 어느 친구의 이야기를 듣다가 ‘반감’이 들었다고 해보자. 이는 슬픔이 찾아왔다는 말이다. 어떤 슬픔일까? 그 친구의 주장(슬픔의 원인이 된 어떤 사물)을 생각(관념)할 때 우연히 찾아온 슬픔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우연히’다. 여기서 말하는 ‘우연히’는 내가 그 친구의 주장을 ‘우연히’ 듣게 되었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 친구의 주장에서 ‘반감’을 갖게 된 것이 ‘우연’이라는 말이다.     


 스피노자에 따르면, 모든 사물은 ‘우연’에 의해 기쁨이나 슬픔 또는 욕망의 원인이 될 수 있다. 기름진 음식은 허기진 이들에게는 기쁨이니 욕망의 원인이 될 수 있지만, 배탈이 난 이들에게는 슬픔의 원인이 된다. 이는 한 사람의 상태가 ‘우연히’ 허기졌느냐? 혹은 배탈이 났느냐에 따라 기름진 음식이 우리에게 전혀 다른 원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의미다. ‘반감’ 역시 이와 같은 작동원리를 따른다.    

     

 “부자들은 대체로 편법이나 불법을 저질러” “부자들은 가난한 사람들을 불편해해” “부자들의 부는 자식 세대까지 대물림 돼” 그 친구가 했던 많은 주장은 전혀 반감을 주지 않았다. 하지만 유독 한 주장(“부자들이 좀 더 배려심이 있지”)만 깊은 반감을 주었다. 이는 그 주장에서 ‘반감’을 느낄 내면적 상태가 ‘우연히’ 이미 형성되어 있었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다. 그렇다면 이제 다시 질문할 수 있다. 그 주장에서 반감을 느끼게 되는 내면적 상태는 어떤 ‘우연’에 의해서 형성된 것일까? 이에 대해 스피노자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어떤 것을 기쁨 또는 슬픔의 감정을 가지고 고찰했다는 것만으로도그 어떤 것 자체가 그러한 감정의 작용 원인이 아닌데도 그 어떤 것을 사랑하거나 증오할 수 있다. (에티카제 3정리 15, )

     

 야구 배트가 있다. ‘민준’은 야구 배트에서 사랑의 감정을, ‘성식’은 증오의 감정을 느낀다. 스피노자의 말처럼, 야구 배트 자체는 각자의 감정(사랑, 증오)을 불러일으킬 원인이 전혀 아니다. 야구 배트는 야구 배트일 뿐이다. 하지만 ‘민준’과 ‘성식’은 야구 배트를 사랑하거나 증오한다. 왜 그럴까? ‘민준’은 어린 시절 아버지와 야구 놀이를 하며 기쁨을 느꼈기 때문이고, ‘성식’은 어린 시절 아버지에게 야구 배트로 맞으면서 슬픔을 느꼈기 때문이다. 



반감, 우연한 사건의 결과

  

 이처럼, 우리는 ‘우연히’ 일어난 사건들(야구 놀이, 구타)로 인해 야구 배트를 사랑하거나 증오할 수 있다. 즉 “어떤 것(야구 배트)을 기쁨 또는 슬픔의 감정을 가지고 고찰(기억)했다는 것만으로, 그 어떤 것 자체가 그러한 감정의 작용 원인이 아닌데도 그 어떤 것을 사랑하거나 증오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반감’의 메커니즘이다. ‘반감’은 슬픔을 주었던 과거의 어떤 기억이 엉뚱하게 현재로 옮겨붙어 발생하는 슬픔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제 이유 없이 누군가 싫어지는 것이 왜 ‘반감’ 때문인지 알겠다.  

     

 직장을 다닐 때 김 대리, 박 과장, 문 부장이 싫었다. 이유가 없었다. 그들은 나를 싫어하지 않았고, 심지어 나에게 호의적이기까지 했다. 객관적으로 보면 딱히 싫어할 이유가 없는 이들이었지만 그냥 다 꼴 보기 싫었다. 대체 나는 왜 그랬던 걸까? 김 대리는 책임감 있고 성실했지만 능력이 없었다. 박 과장은 능력은 있었지만 불성실하며 책임감이 없었다. 문 부장은 책임감, 능력, 성실함을 다 갖췄지만 자존심이 강했다. 그래서 그네들이 싫었던 게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의아하다. 그들의 무능력, 무책임, 자존심은 나에게 어떠한 해악을 끼친 적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들이 싫었다. 즉, 그들이 이유 없이 싫었던 셈이다.    

 

 이유 없이 싫은 사람은 없다. 그 이유가 아주 은밀할 뿐이다. 김 대리, 박 과장, 문 부장이 싫었던 데는 이유가 있었다. 무책임·무능력·불성실·자존심이 그 이유였다. 하지만 나는 그들을 싫어할 때 그것이 그들이 싫은 이유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나는 그저 그들이 이유 없이 싫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왜 그랬을까? 무책임·무능력·불성실·자존심이 꼴 보기 싫다는 마음이 은밀하게 숨겨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바로 이것이 ‘반감’의 정체다. 누군가 싫은 이유가 너무 은밀하게 숨겨져 있어서 그것을 찾지 못할 때 찾아오는 감정이 ‘반감’이다. 김 대리, 박 과장, 문 부장은 그저 “우연히 슬픔의 원인”이 되었을 뿐이다. 그래서 이유 없이 싫은 이들은 끊임없이 대체되기 마련이다. 그네들보다 더 무능력하고, 더 불성실하고, 더 책임감 없고, 더 자존심이 강한 사람이 보이면 이제 그 사람이 이유 없이 싫어지게 마련이다.     



반감의 기원을 찾아서


 이제 남은 질문은 하나다. ‘반감’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 먼저 해야 할 질문이 있다. ‘반감의 기원은 어디인가?’ 즉, ‘반감’은 어디서 어떻게 시작되었을까? ‘반감’의 기원은 ‘증오’라는 감정이다. 달리 말해, ‘반감’은 ‘증오’라는 감정에 의해 형성된다. ‘반감’이라는 감정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증오’라는 감정을 동시에 살펴보아야 한다. 스피노자는 ‘증오’라는 감정을 이렇게 정의한다.  

    

증오란 외적 원인의 관념을 수반하는 슬픔이다. (에티카3감정의 정의 7)

     

 ‘반감’과 ‘증오’는 모두 슬픔이다. 하지만 둘 사이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반감’은 “우연히 슬픔의 원인이 된 어떤 사물”로 인해 발생한 슬픔이다. 반면 ‘증오’는 “외적 원인”으로 인해 발생한 슬픔이다. 여기서 말하는 “외적 원인”은 ‘필연적’임을 의미한다. ‘반감’이 ‘우연’적 감정이라면 ‘증오’는 ‘필연’적인 셈이다. 이 두 감정은 어떻게 구분할 수 있을까?

      

 대체 가능성 여부로 판단하면 된다. ‘반감’의 대상은 ‘우연’적이기에 얼마든지 대체 가능하다. 김 대리, 박 과장, 문 부장이 싫지만, 이들은 얼마든지 대체 가능하다. 내가 싫어했던 것은 김 대리, 박 과장, 문 부장이 아니라 무책임·무능력·불성실·자존심이었으니까 말이다. 반면 ‘증오’의 대상은 ‘필연’적이기 때문에 대체 불가능하다. ‘반감’의 대상은 우연히 바뀔 수 있지만, ‘증오’의 대상은 필연적이기에 결코 바뀔 수 없다.

      

 그렇다면 내게 ‘증오’의 대상은 누구였을까? 아버지였다. 어린 시절, 아버지를 무능하고 무책임하며 불성실한데 자존심만 강한 사람이라 여겼다. 나의 모든 슬픔(불행)이 아버지 때문이라고 여겼던 시절이 있었다. 아버지는 내게 슬픔(불행)을 주는 ‘외적 원인’이었다. 아버지는 필연적이었으며 대체 불가능한 존재였으니까. 아버지는 꽤 긴 시간 ‘증오’의 대상이었다. 이제 ‘반감’이 ‘증오’에 의해 형성된다는 말을 이해할 수 있다.   


   

‘반감’은 ‘증오’의 찌꺼기

     

 김 대리, 박 과장, 문 부장이 싫었던 것이 아니었다. 그들 속에 비친 아버지의 어느 속성(무책임·무능력·불성실·자존심)이 싫었던 것일 뿐이었다. 아버지에 대한 ‘증오’가 김 대리, 박 과장, 문 부장에 대한 ‘반감’을 불러일으킨 셈이었다. 이제 우리는 ‘반감’의 정체를 알게 된다. ‘반감’은 ‘증오’의 찌꺼기다. 누군가를 ‘증오’할 때 남겨지는 슬픔의 찌꺼기. 그것이 ‘반감’이다. 다른 ‘반감’ 역시 마찬가지다.


 ‘희연’은 옆 팀 팀장에게 ‘반감’을 가지고 있다. 팀도 다르고, 심지어 그 팀장은 그녀를 잘 챙겨주기까지 한다. 그녀가 그 팀장을 싫어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 팀장이 꼴 보기 싫었다. 그녀가 그 팀장이 싫은 은밀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자상한 간섭’ 때문이었다. 그 팀장은 자신의 팀원들에게 자상하고 꼼꼼하게 업무지시를 했다. 정작 옆 팀 팀원들은 팀장을 좋아했지만, ‘희연’은 그것에 ‘반감’이 들었다.      


 왜 그랬을까? 그녀의 엄마 때문이었다. 그녀의 엄마는 어린 시절부터 자상한 방식으로 끊임없이 간섭했다. “양치질은 했니? 밥 먹기 전에 물 먹는 거 아니야. 티비 보지 말고 숙제부터 해야지.” ‘희연’은 자상한 목소리도 끊임없이 간섭하는 어머니를 ‘증오’했다. 그 ‘증오’의 감정 때문에 자상하게 간섭하는(혹은 그렇게 보이는) 이들에게 ‘반감’을 가지게 된 것이었다. 이처럼 ‘반감’ 즉, 이유 없이 누군가 꼴 보기 싫다면, 그 이면에는 반드시 ‘증오’의 감정이 도사리고 있다.     



반감을 극복하는 법

1. ‘증오의 대상을 떠나보내기   

  

 반감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첫 번째 방법은 ‘증오’의 대상을 떠내보면 된다. ‘반감’은 ‘증오’의 찌꺼기 아닌가. 그러니 ‘증오’를 떠나보내면 ‘반감’은 애초에 생길 수 없다. 이것을 경험으로 알고 있다. 이제 세상의 수많은 ‘김 대리’ ‘박 과장’ ‘문 부장’에게 아무런 ‘반감’을 느끼지 않는다. 앞으로 만나게 될 수많은 ‘김 대리’ ‘박 과장’ ‘문 무장’에게도 어떠한 ‘반감’을 갖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더 이상 아버지를 ‘증오’하지 않기 때문이다.      


 무책임하고 무능력하고 불성실하고 자존심이 강했던 한 남자를 ‘증오’하지 않는다. 그 남자 역시 무겁고 고된 삶을 잘살아 보려 무던히 애를 썼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어느 순간, 아버지를 한 남자로서 이해하게 되었다. 나는 그렇게 ‘증오’의 대상 하나를 떠나보냈다. 이제 무책임·무능력·불성실·자존심이라는 그릇에 누가 담기더라도 그 사람에게 ‘반감’이 들지 않는다. ‘증오’의 대상을 하나 떠나보내며 ‘반감’이라는 수많은 찌꺼기 역시 떠나보냈다.

       

 ‘증오’의 대상을 떠나보내기! 이것이 가장 확실히 ‘반감’을 극복하는 방법이다. 하지만 이는 쉽지 않다. 사람마다 ‘증오’의 강도가 다르기 때문이다. 예컨대, 아버지를 극심하게 ‘증오’하는 이는 그 ‘증오’를 떠나보내기 쉽지 않다. 어쩌면 누군가에게 ‘증오’의 대상을 떠나보내는 것은 영원히 불가능한 일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면, ‘반감’ 역시 긴 시간 극복하지 못하거나 영원히 극복하지 못하게 되는 걸까? 그렇지 않다. 두 번째 방법이 있다.    


  

2. ‘반감은 증오의 찌꺼기라는 사실을 깨닫기     


 ‘희연’은 여전히 어머니를 증오한다. 하지만 더 이상 옆 팀장에게 반감을 갖지 않는다. 즉, ‘증오’의 대상을 떠나보내지 않고도 반감을 극복한 셈이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언젠가 ‘희연’과 속 깊은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     

 

“선생님, 저는 왜 옆 팀장이 이유 없이 싫을까요?”

“팀장을 안 보고, 거기서 엄마를 보니까 그렇지.”

“네? 아.... 그렇구나.”     


 ‘반감’은 일종의 환영이다. 어떤 대상에서 ‘증오’의 대상이 겹쳐 보이는 환영. 옆 팀장에 대한 ‘희연’의 ‘반감’은 환영이다. 그 팀장에게 엄마의 모습이 겹쳐 보이는 환영. 이 환영을 제거하면 반감은 사라진다. 어떻게 이 환영을 제거할 수 있을까? ‘반감은 증오에서 나왔다’는 깨달음 자체로 가능하다. 달리 말해, 자신의 ‘반감’이 ‘자상한 간섭’(엄마)에 대한 ‘증오’에서 나왔다는 사실을 깨달으면 된다.    

  

 ‘반감은 증오의 찌꺼기’라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엄마라는 ‘증오’의 대상을 떠나보내지 못했다 하더라도, 적어도 팀장에게 겹쳐있는 엄마의 잔상은 사라지게 된다. 그렇게 ‘반감’이라는 환영은 제거된다. 그때 있는 그대로의 팀장을 볼 수 있게 된다. 경멸이든 호감이든, 그 팀장에 대한 진짜 감정을 느낄 수 있다. ‘반감’을 극복하는 방법은 둘 중 하나다. ‘증오’ 대상을 떠나보내기. 그것이 어렵다면, ‘반감’은 ‘증오’의 찌꺼기라는 사실을 깨닫기. 이 두 가지 방법을 통해, 이유 없이 누군가를 싫어하며 스스로를 파괴하는 불행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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