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험담 : 뒷담화을 어떻게 멈출 수 있을까요?

뒷담화의 해로움

 “김 부장 발표할 때 봤냐? 혼자 세상 똑똑한 척하더니 버벅대더라. 존나 멍청하지 않냐?” 뒷담화다. 뒷담화가 무엇인가? 상대가 없을 때 그 사람을 헐뜯거나 깎아내리는 행위다.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이라면 뒷담화는 끊이지 않는다. 학교, 동호회, 종교모임, 심지어 가족끼리도 서로 뒷담화를 하는 일은 흔하다. 이 뒷담화만큼 해로운 것도 없다. 뒷담화는 ‘나’와 ‘너’, 그리고 ‘우리’ 모두에게 해롭다.     


 뒷담화의 대상이 되는 사람은 괴롭다. 내가 없는 곳에서 사람들이 나에 관한 험담을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견디기 힘들다. 어딜 가든 주눅이 들고 위축되니까. 뒷담화를 하는 사람도 괴롭기는 마찬가지다. 누군가의 뒷담화를 하는 사람은 늘 불안하다. 다른 사람들도 자신의 험담을 할 것이라고 은연중에 생각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뿐인가? 신나게 뒷담화를 하고 집으로 가는 길에는 기묘한 찜찜함을 피할 길이 없다.     


 뒷담화를 하고 또 당하는 곳에서는 끊임없이 서로 눈치 보고, 의심하고 경계하게 된다. 학교든, 동호회든, 종교모임이든, 가족이든, 뒷담화가 만연한 공동체는 그렇게 위축되고, 불안하며, 찜찜한 불신의 공동체가 되어 간다. 문제는, 많은 해로운 것들이 그렇듯, 이 뒷담화 역시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뒷담화가 난무하는 곳에서 사는 우리는 물어야 한다. “뒷담화를 어떻게 멈출 수 있을까요?”     



‘조롱’이라는 뒷담화


 뒷담화는 왜 그리 많은 것일까? 이 질문으로부터 시작하자. 이에 스피노자는 이렇게 답할 테다.    

 

 자기가 증오하는 것이 파괴되는 것을 표상하는 사람은 기쁨을 느낄 것이다. (에티카제 3정리 20)       

  

 스피노자에 따르면, 인간은 자기가 증오하는 대상이 파괴되는 것을 상상할 때 기쁨을 느끼는 존재다. 이것이 바로 세상 사람들이 뒷담화를 하는 이유다. 사람들은 누구의 뒷담화를 할까? 자신에게 슬픔을 주는 존재들이다. 예쁜 척하는 친구, 잘난 체하는 선배, 잔소리를 늘어놓는 선생과 부모, 권위적인 상사와 사장. 이들은 우리에게 갖가지 종류의 슬픔(미움·분노·시기·질투 등등)을 준다. 기쁨을 좇는 우리(인간)는 그 슬픔을 그대로 방치할 수 없다. 그래서 뒷담화를 하는 것이다.  

 

 뒷담화는 기쁨을 준다. 어떤 기쁨인가? 우리가 증오하는 것(친구·선배·선생·부모·상사·사장)이 파괴되는 것을 생각할 때 느껴지는 기쁨이다. 쉽게 말해, 뒷담화는 나에게 슬픔을 주는 인간들이 파괴되는 것을 상상이라도 해보려는 일이다. 그 상상으로 기쁨을 좇아가보려는 것이다. 뒷담화는 애절한 노력이다. 슬픔을 주는 존재들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 달리 말해 최소한의 기쁨이라도 유지해보려는 애절한 노력. 그것이 뒷담화의 본질이다.     


 뒷담화에는 두 종류가 있다. 비난과 조롱이다. “걔 완전 또라이야!” 이는 비난이다. “걔 졸라 웃기지 않냐?” 이는 조롱이다. 비난은 누군가를 근거 없이 깎아내리는 험담이고, 조롱은 누군가를 깔보면서 놀리는 험담이다. 뒷담화에는 비난보다 조롱이 더 효과적이다. 비난보다 조롱이 더 큰 기쁨을 주기 때문이다. 비난은 싫어하는 상대가 파괴되는 기쁨을 느낄 수 있지만, 그 파괴하는 방식이 슬픔(분노)이다. 반면 조롱은 싫어하는 상대를 파괴하는 기쁨을 느끼고, 동시에 그 파괴하는 방식 역시 기쁨(웃음)이다.      


 이것이 비난보다 조롱이 뒷담화로서 더 큰 파급력을 갖게 되는 이유다. 누군가를 원색적으로 비난하는 험담은 그다지 힘이 세지 않다. 비난하는 험담은 슬픔이기 때문에 오래 유지하기 어렵고, 세상 사람들 역시 자주 오래 동참하기 어렵다. 반면 누군가를 조롱하는 험담은 힘이 세다. 조롱하는 험담을 기쁨이기 때문에 자신 역시 오래 유지할 수 있고, 세상 사람들 역시 자주 오래 동참하게 된다.



스피노자의 ‘조롱’과 ‘경멸’

 우리는 심각한 문제에 봉착했다. 스피노자에 따르면, 인간은 어떠한 경우이든 기쁨을 좇는 존재 아닌가? 그렇다면 이제 인간은 조롱은 쫓으며 살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인간은 기쁨을 좇는 존재이니, 조롱이라는 뒷담화에서 벗어날 방법은 없는 것일까? 우선, 스피노자가 ‘조롱’이라는 감정을 어떻게 정의했는지부터 알아보자.  

    

 조롱이란 우리가 경멸하는 어떤 것이 우리가 증오하는 것 안에 있음을 표상할 때 발생하는 기쁨이다. (에티카제 3감정의 정의 11)      


 ‘조롱’은 기쁨이다. 어떤 기쁨일까? ‘경멸’하는 것이 ‘증오’하는 것 안에 있음을 상상(표상)할 때 느껴지는 기쁨이다. ‘조롱’이라는 감정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경멸’과 ‘증오’라는 감정을 알아야 한다. 먼저 ‘증오’는 “외적 원인의 관념을 동반하는 슬픔”의 감정이다. 선생·사장·상사·부모를 ‘증오’한다고 해보자. 이는 외적 원인(선생·사장·상사·부모)을 생각하면 각종 슬픔(분노· 복수심·치욕·공포…) 떠오른다는 의미다. 이것이 ‘증오’의 감정이다.      


 ‘경멸’은 무엇일까? 일상적인 언어적 쓰임으로 경멸은 누군가를 깔보고 업신여기는 것을 의미한다. 달리 말해, 경멸을 아주 강한 부정적 감정이라고 여긴다. 하지만 스피노자의 ‘경멸’은 이와 조금 다르다. 스피노자는 ‘경멸’의 감정을 이렇게 설명한다.      



 경멸이란 정신이 어떤 사물의 현존에 의하여 그 사물의 안에 있는 것보다 그 사물 안에 없는 것을 더 많이 표상하도록 움직여서 정신을 거의 동요시키지 못하게 하는 어떤 사물의 표상이다. (에티카제 3감정의 정의 5)       


 난해한 이야기가 아니다. ‘태호’는 돈만 밝히는 인간들을 ‘경멸’한다. 이는 ‘태호’의 정신이 “어떤 사물의 현존”(돈만 밝히는 인간들)을 보면서 “그 사물 안에 있는 것”(명품 시계와 가방, 고급 아파트와 자동차, 이기심…)보다 “그 사물 안에 없는 것”(철학, 시, 소설, 음악, 인간애)을 더 많이 상상하게 되는 것이다. 그 상상이 지속되면서 정신이 거의 아무런 동요도 없게 되는 감정 상태, 그것이 바로 ‘경멸’이다. 즉, ‘경멸’은 어떤 정신적 동요도 불러일으키지 않는 일종의 무감정 상태라고 말할 수 있다.      


 ‘경멸’하는 대상들을 생각해보라. 젊은이들에게 ‘꼰대’(권위적·보수적이며 자기주장만 내세우는 사람)는 ‘경멸’의 대상이다. 젊은이들이 ‘꼰대’들을 보면서 그네들이 갖고 있지 않은 것들(개방성·진보성·유연성·창의성)을 자꾸 떠올리게 된다. 그래서 젊은이들은 ‘꼰대’들을 보면서 어떤 정서적 동요(감동)도 느끼지 못하게 된 상태가 된다. 이 상태가 바로 ‘경멸’이다. 분명 젊은이들은 ‘꼰대’를 깔보고 업신여긴다. 하지만 이는 ‘경멸’의 결과일 뿐이다. 그들을 ‘경멸’하기 때문에, 즉 ‘꼰대’를 통해 무감정의 상태에 이르게 되었기 때문에 깔보고 업신여기게 되는 것일 뿐이다.    

  

조롱의 메커니즘

 이제 ‘조롱’이라는 감정을 보다 분명히 알 수 있다. 조롱은 ‘경멸’하는 것이 ‘증오’하는 것 안에 있음을 상상(표상)할 때 느껴지는 기쁨이다. ‘경멸’과 ‘증오’는 다르다. ‘경멸’은 어떤 사람을 보고 그 사람에게 없는 것을 자꾸만 상상하게 되는 감정이다. 반면 ‘증오’는 내게 실제로 슬픔을 준 사람에게 갖게 되는 감정이다. 쉽게 말해, ‘증오’의 대상(직장상사·군대고참·선생)은 확실히 싫어할 수 있지만, ‘경멸’의 대상(돈벌레·꼰대)은 확실히 싫어할 수 없다.      


 당연하지 않은가? ‘경멸’의 대상(돈벌레·꼰대)을 볼 때는 그들에게 없는 것들이 생각날 뿐, 그들이 우리에게 직접적으로 슬픔(피해)을 준 적은 없다. (만약 그들이 직접 슬픔을 주었다면 ‘증오’의 감정이 된다.) 그러니 엄밀히 말해, ‘경멸’의 대상을 파괴해서 없애 버리는 상상을 할 이유가 없다. 하지만 싫다. ‘경멸의 대상’(돈벌레·꼰대)은 기묘한 존재다. 직접 슬픔을 준 적이 없지만 싫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조롱’이 왜 기쁨을 주는지 알 수 있다. ‘조롱’은 ‘경멸’의 대상을 파괴해서 없애버릴 상상을 허락(정당화)하기 때문이다. ‘경멸’의 대상이 ‘증오’의 대상 안에 있다고 상상해보자. 그때 우리는 ‘경멸’의 대상을 마음 편히 파괴하고 없애는 상상을 할 수 있게 된다. 이것이 ‘조롱’이 기쁨인 이유다. 달리 말해, ‘조롱’은 ‘경멸’의 대상(돈벌레·꼰대)을 ‘증오’의 대상(파괴해서 없애버려야 할 대상)이라고 여길 때 느껴질 때 기쁨이다.  

    

 오직 일만 하며 일 생각밖에 없는 직장 동료가 있다고 해보자. 그 동료는 직접적으로 우리에게 슬픔(피해)을 준 적이 없다. 단지 그를 볼 때마다 그에게 없는 것(취미·연인·사적인 시간)이 상상될 뿐이다. 여기까지는 ‘경멸’이다. 하지만 그때 “그 일벌레 새끼, 팀장 새끼랑 똑같지 않냐?”라고 말하는 것은 ‘조롱’(기쁨)이다. ‘팀장’은 우리에게 명백히 슬픔을 주는 ‘증오’의 대상이니까. 즉, ‘경멸’의 대상(일벌레)이 ‘증오’의 대상(팀장) 안에 있다고 상상했기에 느껴지는 기쁨. 그것이 ‘조롱’이다.


     

조롱의 기쁨을 마음껏 누려도 될까?

 뒷담화는 기쁨을 준다. ‘조롱’의 뒷담화는 더욱 그렇다. 그런데 그 기쁨을 마음껏 누려도 될까? 스피노자에는 두 가지 기쁨이 있다. 마음껏 추구해도 계속 기쁨인 기쁨(기쁜 기쁨)과 마음껏 추구하면 어느 순간에 슬픔이 되는 기쁨(기쁜 슬픔). ‘조롱’이라는 기쁨은 명백히 후자다. 스피노자의 이야기를 직접 들어보자.   

   

 한 사람이 누군가를 조롱한다는 것은 증오한다는 것을 가정하고 있기 때문에이러한 기쁨은 지속성이 없다는 결론이 내려진다. (에티카제 3감정의 정의 11, 해명)     


 “팀장 그 새끼를 여자친구보다 더 많이 생각하는 것 같아.” 눈만 뜨면 팀장 뒷담화를 했던 동료가 어느 날.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했던 말이다. 그는 팀장을 ‘조롱’했다. ‘경멸’했던 팀장을 ‘증오’하며 기쁨을 누렸다. 그 기쁨에 취해 시도 때도 없이 팀장 뒷담화를 했다. 그러다 문득 깨달았다. ‘(사랑하는 그래서 기쁨을 주는) 여자친구보다 (증오하는 그래서 슬픔을 주는) 팀장 생각을 더 많이 하고 있구나!’ 정말 그랬다. 그는 하루종일 온통 팀장 생각만 했다. 어떻게 하면 그를 ‘조롱’할 수 있을까만 생각했으니까.   

       

 ‘조롱’은 기쁨이지만 지속성이 없다. ‘조롱’의 기쁨은 어느 순간 슬픔으로 되돌아오게 되는 까닭이다. 언제나 “조롱한다는 것은 증오한다는 것을 가정하고” 있다. ‘조롱’(기쁨)을 느끼려면 반드시 ‘증오’(슬픔)하는 대상을 먼저 떠올려야 한다. 즉, 한 사람을 더 많이 ‘조롱’하려면 반드시 ‘증오’의 대상을 더 많이 떠올려야 한다. 이는 필연적으로 슬픔의 나락으로 떨어지게 되는 길이다. 마치 술이 주는 기쁨을 멈추지 못해, 끝내는 머리가 깨질 것 같은 숙취의 슬픔의 느껴야 하는 것처럼 말이다.  

   


뒷담화를 멈추는 방법

     

 ‘조롱’의 뒷담화는 잠시의 기쁨 뒤에 더 큰 슬픔을 준다. 하지만 쉽사리 멈출 수 없다. 어떻게 해야 할까? ‘조롱’이 어디서 시작되었는지를 생각해보자. ‘조롱’은 ‘경멸’에서 시작된다. ‘조롱’은 ‘경멸’의 대상(구두쇠)을 ‘증오’ 대상(아버지)에 밀어 넣는 일이니까. ‘조롱’을 멈추고 싶다면 ‘경멸’의 감정을 멈추면 된다. ‘경멸’이 사라졌을 때 ‘조롱’ 역시 사라지게 된다. 그렇다면 어떻게 ‘경멸’이라는 감정을 없앨 수 있을까? 이에 대해 스피노자는 이렇게 말한다.     


 감정은 그것과 반대되는그리고 억제되어야 할 그 감정보다 더 강력한 어떤 감정에 의해서가 아니면억제될 수도 없고제거될 수도 없다. (에티카제 4정리 7)     


 스피노자에 따르면, 감정은 그 자체로 억제되거나 사라지지 않는다. 오직 반대되는 다른 감정에 의해서 억제되거나 사라질 수 있다. ‘사랑’과 ‘증오’를 생각해보면 된다. 예컨대, 누군가를 ‘증오’하는 마음은 그 자체로 억제되거나 사라지지 않는다. ‘증오’의 반대 감정인, ‘사랑’에 의해서만 억제되거나 제거된다. 미워하는 마음은 그 미워하는 마음만큼 누군가를 사랑하게 될 때 줄어들거나 사라지게 될 수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경멸’의 반대되는 감정은 무엇일까? ‘경탄’(놀라움)이다. 스피노자는 ‘경탄’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경탄(놀라움)이란 어떤 사물에 관한 표상이다이 특수한 표상은 다른 표상과는 아무런 연결이 없기 때문에 정신은 그 표상 안에 확고히 머무른다. (에티카제 3감정의 정의 4)     


 우리는 언제 ‘경탄’(놀라움)에 빠질까? 처음 바다를 보았을 때, 첫사랑을 만났을 때다. 어떤 사물(바다·그녀)을 만났고, 그에 관한 표상(이미지)가 생겼다. 그런데 그 이미지는 이전에 다른 이미지와 아무런 연결이 없는 이미지였다. 그래서 그 이미지는 내 마음에 확고히 머무르게 되었다. 바다와 첫사랑을 처음 만났을 때 ‘경탄’(놀라움)에 빠졌다. ‘경탄’은 ‘경멸’과 반대된다. 원이 하나 있다고 해보자. 그 원 안에 각각 ‘경멸’의 대상(일벌레)과 ‘경탄’의 대상(첫사랑)이 있다고 해보자. ‘경멸’은 그 원 밖에 있는 것(음악·소설·영화·여행·철학·연애…)에 시선이 머무는 감정 상태(감정적 동요 없음)이고, ‘경탄’은 그 원 안에 있는 것(하얀 피부·긴 머리·눈웃음…)에 시선이 머무는 감정 상태(감정적 동요)다.       



경탄의 대상을 찾아 나서기

 ‘경멸’은 ‘경탄’으로 억제되거나 사라진다. 오직 ‘경탄’의 대상을 찾았을 때만 ‘경멸’의 대상으로부터 눈을 떼게 된다. 세상에는 우리를 ‘경탄’하게 할 많은 것들이 있다. 그것들을 찾았을 때, ‘경멸’은 억제되거나 사라진다. 이제 왜 냉소적인 사람들이 더 자주 ‘조롱’을 일삼는지도 알 수 있다. 냉소적인 이들은 어떤 것에도 크게 감동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네들은 세상에 존재하는 놀라운 대상들 앞에서도 ‘경탄’하지 않는다. 그래서 더 자주 ‘경멸’의 감정에 휩싸이게 된다. 이것이 냉소적인 이들이 더 쉽게 ‘조롱’이라는 감정에 휩싸이게 되는 이유다.      


 조롱 혹은 뒷담화를 멈추는 방법은 어렵지 않다. ‘경탄’의 대상을 찾으면 된다. 음악, 미술, 소설, 영화, 책, 사람, 사랑, 철학, 여행 등등. 세상에는 우리를 크게 감동시킬 만한 ‘경탄’의 대상이 많이 있다. 그 ‘경탄’의 대상들을 하나씩 찾아가면 된다. 온 마음을 뒤흔들 대상, 그 대상을 만나 터져 나오는 미소와 눈물! 그 ‘경탄’의 미소와 눈물이 있는 곳에 경멸의 대상은 사라지게 마련이다.      


 왜 안 그럴까?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미소 지어지고 눈물이 날 정도로 감동적인 영화와 음악, 놀라 입을 다물지 못할 여행(풍경)과 사람과 마주할 때, 돈벌레나 꼰대 같은 경멸의 대상은 이미 나의 시야에서 사라져버렸을 테니까 말이다. 그렇게 우리는 조롱과 뒷담화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조롱’을 일삼는 냉소적인 이들은 어리석다. 작은 기쁨을 누리려다 큰 슬픔에 빠져버리는 것이니까 말이다. ‘경탄’을 찾아 나서는 열정적인 이들은 지혜롭다. 작은 기쁨을 쌓아 큰 기쁨을 나아가려는 것이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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