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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 왜 사랑이 금방 식을까요?

인스턴트 사랑은 나쁜가?

 바야흐로, ‘인스턴트’의 시대다. 음식, 만남, 지식, 예술 등등 그 대상이 무엇이든 필요한 것들을 ‘인스턴트’(즉각·순간적)하게 얻으려고 하는 시대다. 사랑마저 ‘인스턴트’해진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사랑. 이보다 더 필요한 것도 없으니까 말이다. ‘인스턴트’ 사랑은 흔하다. 너무 쉽게 시작되고, 너무 빨리 끝나버리는 ‘인스턴트’ 사랑. 세상 사람들은 이 ‘인스턴트’ 사랑이 잘못된 사랑이라고 비판하고 비난한다. 이는 반만 옳은 이야기다.     


 ‘인스턴트’하지 못한 사랑이 잘못된 사랑이다. 적어도 ‘사랑의 시작’에서는 분명 그렇다. 사랑은 언제나 ‘인스턴트’하게 시작된다. 진정한 사랑은 한눈에 빠지는 사랑 아닌가. 이것저것 잴 것 없이 즉각적, 순간적으로 그 사람에게 매혹되어버리는 것. 이것이 진정한 사랑이 시작되려 할 때의 모습 아닌가. ‘사랑의 시작’이 ‘인스턴트’하지 않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모종의 거래일 가능성이 높다. 천천히, 지속적으로 상대의 외모와 배경과 환경을 파악하고, 그것을 다른 이와 비교한 뒤에 시작되는 사랑에는 이미 거래적 속성이 개입되어 있다.


      

인스턴트하게 끝나는 사랑

 

하지만 ‘인스턴트’ 사랑에는 치명적 문제가 있다. ‘사랑의 끝’에서 문제가 된다. ‘인스턴트’ 사랑은 너무 빨리 끝나버린다. 사랑이 주는 다종다양한 기쁨과 슬픔을 온전히 느끼지 못한 채 너무 빨리 끝나버린다. 그래서 사랑을 냉소하게 만든다. “사랑, 별거 아니잖아.” 이런 냉소는 사랑 자체를 무의미한 것으로 만든다. 사랑이 너무 빨리 끝나버리기에 사랑의 기쁨도 이별의 슬픔도 제대로 알지 못한다. 그래서 사랑은 무의미하다고 너무 쉽게 치부하게 된다.      


 사랑을 냉소하는 이들의 공통점이 있다. 너무 쉽게, 너무 빨리 끝나버린 사랑. 그 때문에 사랑의 의미를 놓치게 된다. 그래서 그들은 다시 사랑하기 어렵다. 이것이 ‘인스턴트’ 사랑의 치명적 문제다. 사랑과 삶은 동의어다. 살아간다는 것은 사랑한다는 것이고, 사랑한다는 것은 살아간다는 것이다. 사랑을 무의미하게 여기는 이들은 무의미한 삶 속에 놓이게 된다. 그러나 사랑하려는 아니 살아가려는 이들이 가장 먼저 해야 할 질문은 이것이다. “왜 사랑이 금방 식어버릴까요?”   


   

스피노자의 ‘사랑’ 

    

 우선, 스피노자는 ‘사랑’을 어떻게 정의했는지부터 알아보자.      


사랑이란 외적 원인의 관념을 수반하는 기쁨이다. (에티카3감정의 정의)     


 먼저, 스피노자의 사랑은 기쁨이다. 외적 원인(한 사람)의 관념(생각)을 떠올렸을 때 생기는 기쁨. 그 사람과 직접 만났을 때뿐만 아니라 그 사람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기쁨이 생긴다면 사랑이다. 직장 동료나 친구들 중에 직접 만났을 때 기쁨을 주는 이들은 많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그들 중 단지 그들을 머릿속에 떠올리는 일만으로 기쁨을 주는 이는 드물다. 그 드문 경우, 즉 직접 만났을 때뿐만 아니라 목소리와 미소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기쁨을 주는 상대가 있을 수 있다. 그 상대를 향한 감정이 바로 ‘사랑’이다.      


 여기서 우리는 ‘우정’과 ‘사랑’을 구분할 수 있다. 만났을 때 기쁘지만 떠올렸을 때는 기쁘지 않다면 ‘우정’에 가깝고, 만났을 때 기쁜 동시에 떠올렸을 때조차 기쁘다면 ‘사랑’에 가깝다. 왜냐하면 ‘사랑’은 “외적 원인의 관념을 수반하는 기쁨”인 까닭이다. 스피노자의 ‘사랑’은 어떤 존재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기쁨을 느끼게 되는 감정이다. 이 얼마나 강력한 기쁨의 감정인가? ‘사랑’은 어떤 존재가 지금 내 옆에 실제로 없더라도, 즉 그 존재의 흔적(기억)만으로 나를 “보다 작은 완전성에서 보다 큰 완전성으로 이행”하게 해주는 감정이니까 말이다.

      


사랑은 의무인가?

     

 여기서 사랑에 관한 해묵은 오해 하나를 규명하자. 사랑을 의무라고 여기는 이들이 있다. 이들에게 “왜 사랑이 금방 식을까요?”라고 물으면 어떻게 답할까? 간명하다. 의지 부족이다. 사랑의 의무를 이행할 의지 부족. 이런 부류는 사랑이 금방 끝나버리는 이유를 깊게 고민하지 않는다. 아니 할 필요가 없다. ‘인스턴트’하게 끝나는 사랑은 철없는 아이들의 의지박약 즈음으로 치부해버리는 까닭이다.      


 사랑은 의무라고 믿는 이들에게 ‘인스턴트’하게 시작되는 사랑 역시 철딱서니 없기는 마찬가지다. 첫눈에 반하는 ‘인스턴트’한 사랑은 철없는 아이들의 무책임일 뿐이다. 이들에게 ‘인스턴트 사랑’은 ‘무책임’으로 시작해서 ‘의지 부족’으로 끝나는 미숙한 이들의 불장난일 뿐이다. 하지만 삶의 진실은 이와 다르다. 스피노자의 말처럼, ‘사랑’은 의무가 아니라 ‘기쁨’이다. 사랑이 빨리 끝나는 것에 대해 의지 부족이라고 진단하는 이들을 스피노자는 이렇게 꾸짖을 테다.     


 사랑을사랑하는 대상과 결합하려는 사랑하는 자의 의지로 정의한 저술가들이 있다이 정의는 사랑의 본질이 아니라 사랑의 어느 특성을 표현한다그 저술가들은 사랑의 본질을 충분히 명확하게 알지 못했기 때문에 사랑의 특성에 관해서 명료한 개념을 가지지 못했다. (에티카3감정의 정의 6, 해명)     




사랑의 의지는 사랑의 결과다.


 스피노자에 따르면, 사랑하는 대상과 결합하려는(함께 있으려는) 의지를 사랑으로 정의하는 일은 틀렸다. 쉽게 말해, 사랑하는 이와 함께 하려는 의지는 사랑이 아니다. 그런 의지는 ‘사랑’의 본질이 아니라 ‘사랑’을 하게 되었을 때 나타나는 한 특성(결과)이다. 스피노자는 사랑하는 이의 ‘의지’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나는 의지라는 것을 사랑하는 대상의 현존 때문에 사랑하는 이가 가지는 만족그것으로 인하여 사랑하는 이의 기쁨이 강화되며 적어도 촉진되는 만족으로 이해한다. (에티카3감정의 정의 6, 해명)     


 ‘사랑의 의지’는 ‘사랑’이 주는 만족의 결과이다. 사랑하는 이가 주는 만족감이 있다. 그가 멀리서 다가올 때의 설렘과 환희, 그와 손잡고 걸을 때의 따뜻함과 안정감, 그와 포옹하고 키스할 때의 황홀함과 유쾌함. 이 모든 만족감의 결과가 바로 ‘사랑의 의지’다. 그런 만족감을 주는 이와의 ‘사랑’은 목숨을 걸고 지킬 ‘의지’가 생길 수밖에 없으니까. 논리 구조상, ‘사랑’이 원인이고 (사랑을 유지하려는) ‘의지’는 결과인 셈이다.  

    

 이는 너무 자명하지 않은가? ‘사랑’을 해서 ‘사랑의 의지’가 생기는 것이지, ‘사랑’하지 않는데 어디서 ‘사랑의 의지’가 나온단 말인가. 이는 뒤집어 말해, ‘사랑’이 끝났다면 ‘사랑의 의지’ 역시 사라진다는 말이다. 그러니 의지 부족 때문에 사랑이 빨리 끝난다는 말은 얼마나 황당한 논의인가? 이는 원인과 결과를 뒤집어 말한 오류에 불과하다. ‘의지’가 부족해서 ‘사랑’이 끝난 것이 아니라, ‘사랑’이 끝나서 ‘의지’가 부족해진 것일 뿐이다. 그렇다면 사랑이 너무 빨리 끝나버리는 진짜 이유는 뭘까?     



기쁨은 때로 ‘유사 사랑’을 낳는다.


 스피노자에 따르면, 인간은 자연스럽게 기쁨을 좇는 존재다. 음악, 영화, 시, 소설, 철학 등등 세상에 왜 그리 많은 사랑 이야기가 있는지 알겠다. 사랑만큼 큰 기쁨을 주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사랑해본 사람은 다 안다. 사랑이 우리네 삶을 얼마나 기쁘게 하는지, 그래서 얼마나 삶의 활력을 크게 해주는지. 그래서 그들은 사랑하고 또 사랑받는 삶을 멈추려 하지 않는다. 이는 기쁨을 좇는 존재인 인간에게는 당연한 일이다. 기쁨을 좇는 인간은 사랑을 좇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기쁨을 가져오리라고 표상하는 온갖 것을 실현하려고 노력한다. (에티카제 3정리 28)     


 하지만 문제가 있다. 스피노자는 우리가 “기쁨을 가져오리라고 표상(상상)하는 온갖 것을 실현하려고 노력”한다고 말한다. 바로 이 ‘온갖 것’이 문제가 된다. 인간은 기쁨을 주는 ‘온갖 것’을 집요하게 좇는다. ‘사랑’은 분명 기쁨을 준다. 그래서 ‘사랑’을 좇는다. 그런데 인간은 ‘사랑’뿐만 아니라 기쁨을 주기만 하면 어떤 것이 좇는다. 바로 인간의 이런 특성 때문에 우리는 ‘유사 사랑’을 경험하게 된다.      


 ‘유사 사랑’이 무엇인가? ‘사랑’이 아닌 것을 사랑으로 오해한 감정이다. 이런 ‘유사 사랑’은 흔하다. ‘사랑’에서 기쁨을 느끼기도 하지만, 때로 어떤 대상이 기쁨을 주기 때문에 그 대상을 향한 감정이 ‘사랑’이라고 오해하게 되는 경우도 많다. 바로 이것이 ‘사랑’이 너무 쉽게, 너무 빨리 끝나 버리게 되는 이유다. ‘유사 사랑’을 ‘사랑’을 오해할 때, 사랑은 무의미한 것이라고 오해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이 ‘유사 사랑’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


     

‘끌림’(호감)은 ‘사랑’이 아니다.


끌림(호감)이란 우연히 기쁨의 원인이 된 어떤 사물의 관념을 수반하는 기쁨이다. (에티카3감정의 정의 8) 

    

 ‘끌림’은 대표적 ‘유사 사랑’이다. ‘끌림’은 ‘사랑’과 마찬가지로 기쁨을 준다. 그래서 끌리는 것이다. 하지만 ‘끌림’은 ‘사랑’이 아니다. 둘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 ‘우연이냐? 필연이냐?’의 차이다. 누군가를 만났을 때 발생한 기쁨이 우연적이면 ‘끌림’이고, 필연적이면 ‘사랑’이다. 여기서 ‘우연적’이라는 의미는 ‘대체 가능’으로, ‘필연적’이라는 의미는 ‘대체 불가능’으로 이해하면 된다.     


 우리는 어떤 이성에게 끌릴까? 아름다운 외모, 자상한 성격, 해박한 지식, 화려한 언변, 부유함 등에 끌린다. 이는 모두 우연적이다. 지금 내 눈앞에 있는 그 사람(끌림의 대상)은 중요하지 않다. 수많은 사람 중 우연히 그 사람이 ‘끌림’의 요소를 갖고 있었을 뿐이다. 그래서 그들은 모두 ‘대체 가능’하다. 지금 눈앞에 있는 사람보다 더 아름다운 외모, 더 해박한 지식, 더 화려한 언변, 더 부유함이 있는 사람이 나타나면 나의 끌림은 그 사람에게 옮겨갈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끌림’은 우연적 기쁨이다. 


 ‘사랑’은 이와 다르다. 사랑은 필연적이다. 그래서 진정한 사랑은 언제나 당혹감으로부터 시작된다. 그 사람에게 ‘끌림’의 요소가 전혀 없는데도 기쁨을 느끼게 되기 때문이다. 외모도, 직장도, 재력도, 성격도 평소 나의 이상형이 전혀 아닌데 매혹(기쁨)될 때가 있다. 그 사람은 어떤 누구와도 ‘대체 불가능’하다. 오직 그 사람이기 때문에 기쁨을 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랑’은 필연적 기쁨이다. 집요하게 기쁨을 좇느라, 우리는 그 기쁨이 우연인지 필연인지를 파악하지 못해 종종 ‘끌림’을 ‘사랑’으로 오해하곤 한다.      



‘욕정’은 ‘사랑’이 아니다.


욕정은 성교에 대한 욕망과 사랑이다. (에티카제 3감정의 정의) 

    

 ‘욕정’ 역시 강력한 ‘유사 사랑’이다. 섹스만큼 강력한 기쁨을 주는 일도 드물다. 그 기쁨을 좇으려는 이들은 종종 사랑의 무의미를 말하곤 한다. “사랑 그거 금방 끝나” 그들에게 이는 당연한 일이다. 누구도 만져주지 않는 내 몸을 누군가 만져주고 애무해 줄 때 느껴지는 만족감은 쉬이 포기할 수 있는 기쁨이 아니다. 그 억압된 성적 욕망이 분출될 때 느껴지는 그 강력한 기쁨은 너무 쉽게 ‘사랑’으로 오해되곤 한다.      

 

 뜨거운 섹스를 뜨거운 사랑으로 오해하는 이들은 흔하다. 이들의 ‘사랑’은 필연적으로 너무 쉽게, 너무 빨리 끝날 수밖에 없다. ‘욕정’은 애초에 ‘사랑’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랑’은 ‘너’에 대한 사랑이지만, ‘욕정’은 “성교에 대한 사랑”일 뿐이다. ‘욕정’은 ‘사랑’으로 오해될 가능성이 크다. 왜냐하면 내가 ‘사랑’하는 ‘섹스’를 할 대상이 바로 ‘너’이기 때문이다. ‘욕정’ 속에도 분명 ‘너’에 대한 애정이 있다. 하지만 그 애정은 ‘너’ 자체가 아니라 ‘나’의 욕정을 해소해 줄 ‘너’에 대한 것이다.      


 바로 이것이 ‘욕정’에 빠져 있으면서도 ‘사랑’하고 있다고 착각하게 되는 이유다. 물론 기쁜 섹스는 ‘사랑’일 수 있다. 관계의 시작이 ‘욕정’이라면 결코 ‘사랑’에 가닿지 못한다. ‘욕정’은 애초에 ‘너’가 아닌 ‘섹스’를 욕망하려는 마음이기 때문이다. ‘욕정’을 ‘사랑’으로 오해할 때. 모든 사랑은 ‘하룻밤’으로 끝날 수밖에 없다. 섹스의 쾌락을 사랑의 기쁨으로 오해할 때, ‘사랑’은 점점 멀어져갈 수밖에 없다.      



‘야심’은 ‘사랑’이 아니다.


 단지 사람들의 마음에 들기 위해서어떤 일을 행하거나 피하려는 노력은 야심이라고 불린다특히 우리 자신이나 타인에게 해로움에도 불구하고 어떤 일을 행하거나 피할 정도로 열심히 대중의 비위를 맞추려고 노력할 때 그렇게 불린다. (에티카제 3정리 29, 주석)     


 ‘야심’은 자신의 기쁨이 아니라, 타인의 기쁨을 좇으려는 감정이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타인의 기쁨을 좇을 때의 기쁨을 자신의 기쁨을 오해하는 것이다. 타인이 기쁨을 가지고 바라본다고 여기는 온갖 것들(명품백·외제차·신상품·날씬한 몸매 등등)을 가지려고 노력하려는 마음. 그것이 ‘야심’이다. 나의 기쁨이 아닌 세상 사람들의 기쁨을 좇으려는 인간은 ‘야심’에 휩싸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야심’에 휩싸인 이들은 세상 사람들의 마음에 들기 위해서 어떤 일을 하거나 혹은 하지 않는다. 돈에 대한 ‘야심’은 있어도, 가난함에 대한 ‘야심’이 없는 것도 그래서다. 세상 사람들은 돈에서 기쁨을 느끼고, 그 세상 사람들은 돈 많은 사람들을 기쁨을 가지고 바라보기 때문이다. 사람들의 마음에 들기 위해 돈을 벌려는 노력은 ‘야심’이다. 때로 이 ‘야심’은 ‘사랑’으로 오해되곤 한다. ‘야심’은 너무나 강력해서 한 사람에 대한 감정을 왜곡하기도 한다.      

 

 우리가 누군가에게 사랑한다고 말할 때 그것이 ‘야심’일 때가 있다. 근사한 외모를 가진 선배에게 사랑 고백을 할 때 그것은 ‘사랑’일까? 모를 일이다. 그것이 ‘야심’일 수도 있다. 그 선배와 사귀면 다른 사람들이 나를 부러워할 것이라는 ‘야심’. ‘야심’을 ‘사랑’으로 오해하는 것은 낯선 모습이 아니다. “나는 그를 사랑해” 너무 쉽게 말하지만, 실은 그가 부자이거나 안정적인 직업이 있어서 그와 만나는 경우는 너무 흔하지 않은가. 그것은 ‘사랑’이 아니다. 대중의 비위를 맞추려고 노력하는 ‘야심’일 뿐이다.     



사랑이 빨리 식어버리는 이유


 “왜 사랑이 금방 식어버릴까요?” 이제 답할 수 있다. 애초에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끌림’과 ‘욕정’ ‘야심’처럼, 애초에 ‘사랑’이 아니었지만, 그것이 기쁨을 주기에 ‘사랑’이라고 오해된 감정들이 있다. 오해된 감정은 머지않아 곧 자신의 원래 색깔을 드러낸다. ‘끌림’, ‘욕정’ ‘야심’은 모두 금방 식는다. 당연하지 않은가? 더 끌리는 요소를 가진 사람은 곧 나타나면 ‘끌림’은 사라지게 마련이다. 아무리 들끓는 ‘욕정’이라도 ‘하룻밤’이면 끝나게 마련이다. ‘야심’ 역시 그렇다. ‘야심’은 대중의 비위를 맞추는 일 아닌가? 그런데 대중들만큼 변덕이 죽 끓듯 하는 이들도 없다. 그러니 ‘야심’은 얼마나 빨리 변하겠는가?        


 ‘끌림’ ‘욕정’ ‘야심’이라는 감정이 제 색깔을 드러내어도 우리는 그것이 ‘사랑’이 아니었음을 파악하지 못한다. 아니 하지 않으려 한다. 그를 ‘사랑’한 것이 아니라 첫사랑을 닮아서 ‘끌렸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없다. 그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욕정’을 해소한 것이란 사실을 인정할 수 없다. 그를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의 돈으로 ‘야심’을 채우고 싶었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없다. 자신을 아름답게 덧칠하려는 것은 우리의 오래된 습관이니까. 이것이 ‘사랑’이 금방 식어버렸다고 우기게 되는 이유다.      


 우리(인간)는 항상 기쁨을 좇아 살 수밖에 없다. 하여, 우리의 복잡다양한 감정들을 잘 파악할 수 있어야 한다. 특히나 ‘끌림·욕정·야심’을 ‘사랑’과 구별하는 일은 중요하다. ‘끌림·욕정·야심’은 순간적일지라도 분명 기쁨을 준다. 하지만 이런 ‘유사 사랑’을 ‘사랑’이라 여기게 되면, 기쁨은 이내 더 큰 슬픔으로 되돌아온다. ‘끌림·욕정·야심’과 ‘사랑’을 헷갈린 죄로, 다시 ‘사랑’할 수 없게 되는 상태에 떨어지게 된다. 이보다 더 큰 슬픔이 어디 있을까. ‘사랑의 냉소’와 ‘사랑의 무의미’는 유사 사랑을 사랑으로 오해해서 일어난 불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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