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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심 : 소심함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요?

“그때 왜 아무 말도 못 했을까?”

 직장 상사의 무대뽀 업무 지시. 머리카락이 담긴 음식을 내놓는 식당. 염치없는 인간들의 새치기. 살다 보면 이런저런 부당한 일을 당할 때가 있다. 그때 그 일이 얼마나 부당한지 합리적으로 따져 물어야 한다. 그럴 수 없다면, 하다못해 화라도 내야 한다.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종종 혹은 자주 그 당연한 일을 하지 못하는 이들이 있다. 소심한 이들이다. 그들은 종종 말한다. “좋은 게 좋은 거야”


 어찌 보면, 소심함은 배려 있고 지혜로운 태도처럼 보이기도 한다. 삶에서 발생할 수밖에 없는 크고 작은 소모적인 다툼과 갈등 최소화하려는 배려 있고 지혜로운 태도 말이다. 하지만 소심한 이들은 누구보다 잘 안다. 자신의 배려심과 지혜가 사실은 서글픈 자기합리화라는 사실을. “상대를 배려해서 참은 거야” “따진다고 달라지는 게 있겠어.” “화내봐야 감정 낭비야” 이런 자기합리화의 끝에는 언제나 씁쓸한 자책감이 밀려온다. “그때 왜 아무 말도 못 했을까?”     



소심한 삶은 우울하고 침잠된 삶


 소심함은 배려심도 합리성도 아니다. 소심함은 슬픔이다. “그때 왜 아무 말도 못 했을까?”라는 자책감을 남기는 슬픔. 소심하면 분명 크고 작은 다툼과 마찰을 피할 수 있다. 하지만 그 대가는 치명적이다. 그 대가는 무엇인가? 소심했기 때문에 피할 수 없었던 정서적·경제적 불이익인가? 아니다. 소심함의 근본적인 문제는 자기부정이다. 소심하면 끝내는 자신이 싫어진다. 이것이 소심함의 가장 근본적인 동시에 가장 치명적인 문제다.


 소심한 삶은 크고 작은 상처(다툼·갈등)를 피하려 자신을 부정하게 되는 삶이다. 소심한 이들은 필연적으로 우울하고 침잠된 삶을 이어갈 수밖에 없다. 자신이 싫은 이들은 항상 우울하고 침잠될 수밖에 없으니까. 우울하고 침잠된 삶에서 벗어나, 유쾌하고 건강한 삶을 원하는 이들에게 남겨진 질문이 있다. “소심함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요?”         



스피노자의 ‘소심’


 먼저, 스피노자가 소심을 어떻게 정의했는지부터 알아보자.     

 

인간으로서 원하는 것을 원하지 않게 하거나원하지 않는 것을 원하도록 하는 감정을 소심이라고 한다그러므로 소심은 인간으로 하여금앞으로 다가올 해악을 더 작은 해악으로 피하게 하는 한에 있어서의 공포일뿐이다. (에티카제 3정리39, 주석     


 스피노자에 따르면, ‘소심’은 원하는 것을 원하지 않게 되는, 혹은 원하지 않는 것을 원하게 되는 기묘한 감정이다. 죽고 죽이는 전장에서 전투 중인 병사가 있다고 해보자. 그는 살고 싶고 죽고 싶지 않다. 그가 원하는 것은 삶이고, 원하지 않는 것은 죽음이다. 하지만 그 병사는 자살해버렸다. 자신이 ‘원하지 않는 것’(죽음)을 원하게 되는, ‘자신이 원하는 것’(삶)을 원하지 않게 되는 감정에 휩싸였기 때문이다. 그 병사의 내면을 조금 더 깊이 들여다보자.       


 스피노자는 소심함을 ‘공포’라고 정의한다. 어떤 ‘공포’일까? “앞으로 다가올 해악을 더 작은 해악으로 피하게” 하는 ‘공포’다. 이제 우리는 자살해버린 그 병사의 내면 상태를 조금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그 병사는 지금 저 멀리서 다가오는 살기 가득한 눈빛의 적들(앞으로 다가올 해악) 앞에 서 있다. 그는 다가오는 적들을 향해 총부리를 겨누고 있다. 하지만 적들이 점차 다가오자 그 총부리를 적이 아니라 자신의 목젖에 대고 방아쇠를 당겨버렸다.      


 그 병사는 ‘소심’하다. 광기 어린 얼굴로 다가오는 적들은 ‘앞으로 다가올 해악’이다. 그 병사에게 그것은 너무나 큰 ‘공포’다. 그 ‘공포’를 감당하지 못해 그 ‘공포’를 ‘더 작은 해악’(자살)으로 피해버린 것이다. ‘더 작은 해악’(자살)으로 ‘미래의 해악’(죽음)을 피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는 ‘소심’하다. 그래서 자살해버린 것이다. 그 병사는 ‘소심’했기에 원하지 않는 것(죽음)을 원하고, 원하는 것(삶)을 원하지 않게 되어버렸다. 이런 ‘소심’은 참혹한 전장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소심함, 큰 공포를 작은 공포로 피하고 싶은 마음


 부모에게 혼날까 봐 가출해버리는 학생. 친구들에게 비난받을까 봐 스스로를 비난해버리는 아이. 업무의 중압감에 짓눌려 사표를 던져버리는 직장인. 이들은 모두 ‘소심’하다. 이들의 정서 상태는 ‘공포’에 질려 자살해버린 병사와 정확히 같다. ‘앞으로 다가올 해악’(부모의 꾸중, 친구의 비난, 업무의 중압감)의 ‘공포’를 감당하지 못해, ‘더 작은 해악’(가출, 자기 비난, 사표)으로 도망친 것이니까. 그들은 소심해서 ‘원하지 않는 것’(가출, 자기 비난, 사표)을 원하고, ‘원하는 것’(귀가, 자기 긍정, 월급)을 원하지 않게 되었다. 

     

 “그때 왜 아무 말도 못 했을까?” 이처럼 자책하게 되는 갖가지 소심함 역시 마찬가지다. 모든 소심함은 ‘앞으로 다가올 해악’의 공포를 감당하지 못해 ‘더 작은 해악’으로 피하고 싶어서 발생하는 사달이다. 직장 상사에게, 음식점 주인에게, 염치없는 인간들에게 하고 싶은 말을 못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앞으로 다가올 해악’(크고 작은 다툼과 갈등)을 두려워하기 때문 아닌가. 그 공포를 감당하지 못해, 늘 ‘더 작은 해악’(침묵, 억울함, 답답함)으로 도망치는 것이다. 그렇게 그들은 역시 자신이 원하는 것들을 원하지 않게 되고, 원치 않는 것을 원하게 된다. 이 얼마나 소심한 일인가?     



‘소심’은 ‘공황’의 씨앗

     

 ‘소심함’은 삶에서 크고 작은 문제를 발생시킨다. 그 문제 중 치명적인 것이 있다. ‘소심’은 때로 ‘공황’을 번질 수 있다는 점이다. 스피노자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만일 앞으로 다가올 해악을 피하려는 욕망이 다른 해악에 대한 공포에 의해 방해받아 그가 스스로 무엇을 택해야 할지 모른다면그 경우의 공포는 공황(당황)consternatio으로 불리는데특히 그가 두려워하는 두 해악이 극심할 경우 그러하다. (에티카제 3정리39, 주석     


 부모의 꾸중(미래의 해악)이 두려워 가출(다른 해악)하려는 것은 ‘소심’이다. 즉, ‘공포’ 때문에, ‘미래(큰)의 해악’을 ‘다른(작은) 해악’으로 피하려는 것이 소심함이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소심’은 선택한다는 사실이다. ‘소심’은 ‘미래 해악’에 맞서기보다 ‘다른 해악’으로 피하려는 것이기에 지혜롭다고 말할 순 없어도, 어찌 되었든 ‘다른 해악’을 선택한 것 아닌가?   

  

 하지만 어떤 상황에서는 ‘미래의 해악’과 ‘다른 해악’ 사이에서 아무것도 선택하지 못할 때가 있다. 밤길을 걷고 있는데, 누군가 갑자기 목에 칼을 들이밀었다고 해보자. 그때 우리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몸이 굳어버릴 수 있다. 왜 몸이 굳게 되었을까? 도망치려는 욕망, 즉 ‘미래의 해악’(죽을 수도 있다)을 피하려는 욕망이 ‘다른 해악’(칼)에 의해 방해받아 무엇을 택해야 할지 모르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공황’이라는 감정이다. ‘미래의 해악’과 ‘다른 해악’이 모두 극심하게 두려워 아무 선택할 수 없게 된 감정 상태. 이것이 바로 ‘공황’이라는 감정이다. ‘소심’이 ‘미래(큰)의 해악’ 앞에서 ‘다른(작은) 해악’이라도 선택하는 감정이라면, ‘공황’은 그 둘 사이 끼여서 아무 선택도 할 수 없게 되는 감정인 셈이다.   


   

‘공황’은 ‘소심’한 이들에게 찾아온다.
  

 ‘공황’과 ‘소심’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공황’은 ‘소심’한 이들이 불운한 상황에서 빠졌을 때 발생하는 감정이라고 할 수 있다. 달리 말해, ‘공황’은 ‘소심’한 사람들에게 찾아오는 감정이다. ‘소심’한 이들은 ‘미래의 해악’을 ‘다른 해악’으로 피하려고 한다. 하지만 그들이 피하고자 하는 ‘다른 해악’마저 너무나 두렵다면 ‘공황’에 빠지게 된다. 한없이 소심했던 직장인 시절, ‘공황’을 절절하게 경험한 적이 있다.      


 “앞으로 다가올 해악”과 “다른 해악”의 공포에 사로잡혀 어떤 선택도 할 수 없었던 시절이었다. “앞으로 다가올 해악”은 가난한 노년, 무능력한 가장이었고, “다른 해악”은 매일 아침 눈 뜨기도 싫을 정도로 고통스러운 직장생활이었다. 직장인이었던 시절, 이 두 해악에 대한 ‘공포’가 극심했다. 가난한 노년, 무능력한 가장이 되는 것도 극심한 ‘공포’였고, 직장을 다니는 것 역시 극심한 ‘공포’였다. 그 양쪽 ‘공포’에 짓눌려 직장을 그만둘 수도, 다닐 수도 없었다.      


 ‘소심’했던 나는, 둘 중 어느 해악도 감당할 수가 없었다. 극심한 ‘공포’를 주는 두 해악 사이에서 무엇을 선택해야 할지 모르는 상태가 지속되었다. 그때 나는 이유 없이 심장이 빨리 뛰고 호흡이 가빠지기도 하고 근거 없는 불안에 휩싸이곤 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그건 전형적인 ‘공황’장애 증상이었다. ‘소심’한 이들은 언제든 ‘공황’에 빠질 가능성을 안고 있는 이들이다. 이것이 소심함을 단순한 기질이나 성격 정도로 치부할 수 없는 이유다.      



소심함을 극복하는 법


어떻게 소심함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대담해지면 된다. 그렇다면 ‘대담함’이란 무엇일까? 

      

대담함은 동료가 맞서기를 두려워하는 위험을 무릅쓰고 어떤 일을 하도록 자극되는 욕망이다. (에티카제 3감정의 정의 40)     


 스피노자는 ‘대담함’을 세상 사람들이 맞서기를 두려워하는 위험을 맞서는 욕망이라고 말한다. 세상 사람들이 맞서기 두려워하는 것이 무엇일까? ‘미래의 해악’, 즉 앞으로 다가올 해악들이다. 세상 사람들은 아직 다가오지 않았기에, 일어날지 일어나지 않을지는 시간이 지나 봐야 알 수 있는 것들을 지독히도 두려워한다. 그 두려움에 사로잡혀 더 작은 해악으로 도망쳐버리는 것은 익숙한 풍경 아니던가. 그러니 대담한 이들은 앞으로 다가올 해악에 당당히 맞서는 사람인 셈이다.     


 사고를 친 학생의 ‘미래의 해악’은 무엇인가? 부모에게 혼나는 것이다. 애정이 결핍된 아이의 ‘미래의 해악’은 무엇인가? 친구들의 비난이다. 불안한 직장인의 ‘미래의 해악’은 무엇인가? 업무의 중압감이다. 병사의 ‘미래의 해악’은 무엇인가? 다가오는 적들이다. 그 모든 ‘미래의 해악’에 당당하게 맞서면 대담해질 수 있다. ‘대담함’은 거창한 것이 아니다. 일단 집에 들어 가보는 것. 일단 친구들에게 말을 걸어보는 것. 일단 업무를 해보는 것. 일단 적들을 향해 총부리를 겨누는 것.   

  

 이 모든 일은 ‘미래의 해악’에 맞서는 마음, 즉 ‘대담함’이다. ‘대담함’은 대단히 거창한 일이 아니라 지극히 합리적인 일이다. 혼날지 아닐지는 집에 들어가 봐야 아는 것 아닌가? 친구들이 비난할지 아닐지는 이야기를 나눠봐야 아는 것 아닌가? 업무가 과중할지 아닐지는 업무를 해봐야 아는 것 아닌가? 죽을지 살지는 싸워봐야 아닌가? 미래의 일이 두렵지만, 그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일단 시도해보는 것. 그것이 ‘대담함’의 시작이다.


       

대담함은 겸허해지는 것


 여기서 주의해야 할 점이 있다. 흔히, 사람들은 ‘미래의 해악’에 당당하게 맞서는 마음을 자신감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다. 자신감이 있어야 대담할 수 있다고 믿는다. 틀렸다. ‘미래의 해악’은 미래의 것 아닌가? 그것은 인간이 결코 자신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쉬이 해낼 자신이 있는 일들을 해내는 것은 전혀 대담함이 아니다. 자신감은 대담함과 아무 상관이 없다.      


 진정한 대담함은 겸허함에서 온다. ‘미래의 악’을 피하려고 노력하겠지만 그 ‘미래의 악’이 다가온다면 기꺼이 받아들이겠다는 겸허한 마음. 그 겸허한 마음이 없다면, ‘소심’으로부터 멀어질 수도, ‘대담’함에 가까워질 수도 없다. 나는 직장인이었던 시절보다 분명 더 대담해졌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직장을 그만둔 후, 가난한 노년이 찾아오지 않기 위해, 경제적으로 무능력한 가장(미래의 악)이 되지 않으려 최선을 다해 노력하며 살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미래의 악’이 찾아온다면 겸허히 받아들일 준비를 했다. 미래의 일은 내가 어찌할 수 없는 일이니, 겸허하게 받아들여야 한다고 매일 다짐했다. 그렇게 ‘대담함’에 조금 가까워졌고, 그만큼 ‘소심함’으로부터 멀어졌다. 그래서 이제 ‘공황’도 없다.    

  

 이제 모든 삶의 진실이 선명해진다. ‘대담함’은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일단 시도해보는 것으로 시작되고, 그 결과를 겸허히 받아들이는 것으로 완성된다. 직장을 다닌다고 해서 ‘미래의 해악’이 찾아오지 않는 것도 아니고, 직장을 그만둔다고 해서 ‘미래의 해악’이 반드시 찾아오는 것도 아니다. 미래의 일은 미래의 일이다. 나는 지금 하고 싶은 일들과 지금 할 수 있는 일들을 해나가며 살고 있다. 그 나머지, 즉 앞으로 다가올 해악은 겸허한 마음으로 당당하게 맞설 준비를 할 뿐이다. 긴 여정 끝에, ‘공황’을 지나 ‘소심’을 넘어 ‘대담함’까지 온 셈이다.      


 세 가지 삶의 형태가 있다. ‘공황’(아무것도 선택하지 못함)-‘소심’(슬픔 선택)-‘대담함’(기쁨 선택) 지금 우리는 어디에 있을까? 우리가 어디에 있든, ‘대담함’을 향한 발걸음을 멈춰서는 안 된다. 우리를 우울하고 침잠되게 하는 것은 언제나 ‘공황’과 ‘소심’이다. 당연하지 않은가? 아무것도 선택하지 못하는 ‘공황’과 슬픔을 선택하려는 ‘소심’으로 얼룩진 삶이 어찌 유쾌하고 씩씩할 수 있단 말인가. 대담한 만큼 삶은 유쾌하고 씩씩해진다. 이것이 우리가 ‘대담함’을 향한 여정을 멈춰서는 안 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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