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신에 휘둘리는 사람들
“안 씻었어?”
“어, 씻으면 시험을 망치더라고”
‘소영’이는 시험 기간이면 씻지 않는다. 징크스다. 징크스는 미신이다. 미신이 무엇인가? 특정한 실증적인 근거 없이 두 사건 간의 인과적 연결을 맹목적으로 믿는 일이다. 이런 미신은 많다. ‘굿·점·사주’부터 ‘타로·별자리운세·오늘(신년)운세·궁합’까지. 우리는 크고 작은 미신들 속에서 살아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흥미로운 일이다. 요즘이 어떤 세상인가? 다들 자신이 합리적이라고 여기며 사는 세상 아닌가. 이런 세상에 미신이 이토록 널리 퍼져 있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이다. 미신은 ‘합리적 세상 안의 비합리성’이란 역설을 드러낸다.
이러한 미신을 그저 흥미로운 역설 정도로 치부할 수 없다. 미신은 우리에게 크고 작은 부정적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미신은 해롭다. 작은 미신은 작게, 큰 미신은 크게 해롭다. ‘물 건너는 것이 위험하다.’ 점쟁이의 말에 몇 달 전부터 준비한 여행을 취소하는 사람이 있다. ‘궁합이 나쁘다.’ 무당의 말에 사랑하는 이와 헤어지는 이도 있다. 심지어 미신 때문에 아픈 아이를 병원에 데려가기보다 굿을 하는 사람도 여전히 존재한다.
물론 이들이 얻는 것도 있다. 정서적 안정감이다. 미신을 신봉할 때, 불확실한 미래가 주는 불안감은 사라지게 마련이다. 하지만 그 대가로 더 큰 것을 잃게 마련이다. 삶을 유쾌하게 해줄 여행을 가지 못했고, 삶을 함께할 연인을 떠나보냈고, 아이의 건강을 악화시켰다. 정서적 안정감을 위해 더 소중한 것들을 잃는 삶. 그것은 결코 건강한 삶이 아니다. 다들 아닌 척 하지만, 우리는 크고 작은 미신에 휘둘리는 산다. 그러니 조금이라도 더 건강하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물어야 한다. “어떻게 미신에 휘둘리지 않을 수 있을까요?”
스피노자의 ‘미신’
스피노자는 미신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할까?
우연히 희망 또는 공포의 원인이 되는 사물은 좋은 징조 또는 불길한 징조라고 불린다. 그리고 이와 같은 징조들은 희망 또는 공포의 원인인 한에 있어서, 기쁨 또는 슬픔의 원인이다. (에티카, 제3부, 정리50, 주석)
스피노자에 따르면, 우연히 ‘희망’의 원인이 되는 사물은 좋은 징조가 되고, 우연히 ‘공포’의 원인이 되는 사물이 불길한 징조가 된다. ‘희망’과 ‘공포’가 무엇인가? ‘희망’은 미래에 다가올 불확실한 기쁨이고, ‘공포’는 미래에 다가올 불확실한 슬픔이다. 그 ‘희망’의 원인과 ‘공포’의 원인이 각각 좋은 징조, 불길한 징조가 된다. 이는 어렵지 않다. ‘돼지꿈’은 좋은 징조다. 왜 그런가? 그것은 ‘희망’, 즉 미래의 불확실한 기쁨(복권 당첨)을 주는 원인이기 때문이다. ‘까마귀 울음’은 불길한 징조다. 왜 그런가? 그것은 ‘공포’, 즉 미래의 불확실한 슬픔(재수 없는 일)을 주는 원인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미신 아닌가? 미신이 무엇인가? 징크스부터 굿·점·사주·타로·별자리운세·오늘(신년)운세·궁합에 이르기까지 그것은 모두 좋은 징조와 나쁜 징조를 구분하는 일이다. 그 모든 미신은 우연히 ‘희망’·‘공포’의 원인이 되었던 사물에 기원한다. 이것이 미신의 기원이다. 누군가 돼지꿈을 꾼 날 우연히 복권에 당첨되었고, 누군가 까마귀가 운 날 우연히 재수 없는 일이 벌어졌기 때문에 미신이 발생한다. 이러한 미신은 조금만 차분히 생각해보면 황당할 정도로 비논리·비합리·비과학적이다.
그런데 인간은 사유하는 동물 아닌가? 이러한 인간의 특성에도 불구하고 인간 사회에서 미신이 사라진 적이 없다. 유사 이래 인간의 삶을 보라. 토테미즘(동물이나 식물 같은 자연물을 숭배하는 것), 샤머니즘(초자연적인 존재와 직접적으로 소통하는 샤먼을 중심으로 하는 미신 형태)부터 지금의 기복신앙 및 일부 종교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역사가 생긴 이후로 다양한 각종 미신이 끊이지 않았다. 왜 인간의 역사에서 그 긴 시간 미신은 사라지지 않았던 걸까?
미신이 사라지지 않는 이유
인간이 어떤 존재일까? 인간은 기쁨을 추구하는 존재이며, 동시에 불확실한 미래 앞에 놓인 존재다. 즉, 인간은 불확실성 속에서 기쁨을 찾아야 하는 존재다. 인간의 사유성은 인간에게 주어진 이 두 가지 실존적 조건 아래서 작동하게 마련이다. 바로 이것이 인간사에서 미신이 사라지지 않았던 이유다. 인간의 사유가 때로 비논리·비합리·비과학적인 것도 그래서다. 인간은 분명 생각하는 존재이지만, 그 생각은 결국 불확실성 속에서 기쁨을 찾는 과정 아래서 너무 쉽게 왜곡되니까 말이다.
인간에게 미신은 너무나 매혹적이다. 왜 안 그럴까? 좋은 징조를 통해 ‘불확실한 기쁨’(희망)을 실현할 수 있고, 불길한 징조를 통해 ‘불확실한 슬픔’(공포)을 비껴갈 수 있을 테니까. 그 미신의 매혹이 논리·합리·과학적이어야 할 인간의 사유를 종종 비논리·비합리·비과학적인 것으로 만든다. 사유 능력이 있다고 하더라도, 인간이 쉬이 미신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 이유에 대해서 스피노자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그것들(좋은 징조, 불길한 징조)을 사랑하거나 증오하며, 또 그것들을 우리가 희망하는 사물을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려고 노력하거나, 장애 또는 공포의 원인을 제거하려고 노력한다. (에티카, 제3부, 정리50, 주석)
스피노자의 말처럼, 우리는 좋은 징조를 ‘사랑’하고, 불길한 징조를 ‘증오’한다. 그래서 우리는 미신(징크스·별자리·타로·점·사주 등등)을 “희망하는 사물(좋은 성적, 연애, 취업, 부자)을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려고 노력”하게 마련이다. 동시에 미신을 통해, “장애 또는 공포의 원인(나쁜 성적, 이별, 백수, 가난)을 제거하려고 노력”한다. 인간은 ‘기쁨(사랑)’을 가까이하고 ‘슬픔(증오)’을 멀리하려고 하려는 존재이니까. 어찌 보면, 인간이 가진 미신에 대한 저마다의 열망은 자연스러운 것이라 말할 수 있다. 불확실성 속에서 기쁨을 찾아야 하는 인간이 어찌 미신에 눈길을 주지 않을 수 있겠는가.
미신이 다양한 이유
‘왜 미신의 종류가 다양한가?’ 이제 우리는 이 질문에 대해서도 답할 수 있다. 모든 사람이 ‘희망’과 ‘공포’를 느낀다. 그 ‘희망’과 ‘공포’를 촉발하는 대상은 우연히 정해지게 마련이다. ‘소영’의 징크스는 씻지 않는 것이다. ‘대진’이는 그런 징크스가 없다. 하지만 ‘대진’이는 중요한 일이 있을 때면 ‘오늘의 운세’를 꼭 챙겨본다. 둘은 무슨 차이일까? ‘소영’은 씻지 않고 시험을 본 날 성적이 좋았다. 이는 우연이다. ‘씻지 않음’이 우연히 ‘희망’의 원인이 되었다. 이는 동시에 ‘씻음’은 우연히 공포의 원인이 됨을 의미한다. 이것이 ‘소영’이 믿는 미신의 기원이다.
‘대진’이도 마찬가지다. 중요한 미팅을 앞두고 우연히 읽은 ‘오늘의 운세’를 읽었다. ‘빨간색을 피하라!’는 말에 넥타이를 파란색으로 바꿔 맸다. 그날 미팅은 잘 풀려서 좋은 성과를 내었다. 이 역시 우연이다. ‘오늘의 운세’가 우연히 희망이 원인이 되었다. 이는 동시에 ‘오늘의 운세’를 읽지 않거나 그 운세를 따르지 않는 것이 우연히 공포의 원인이 됨을 의미한다. 이것이 ‘대진’이 믿는 미신의 기원이다. 이것이 미신이 다양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이에 대해 스피노자는 이렇게 말한다.
그 어떤 것이라도 우연히 희망 또는 공포의 원인이 될 수 있다. (에티카, 제3부, 정리50)
“어떤 것이라도 우연히 희망 또는 공포의 원인이 될 수 있다.” 그러니 미신 역시 다양할 수밖에 없다. 우연히 맺어진 ‘원인(씻지 않음, 오늘의 운세)-결과(좋은 성적, 미팅 성과)’에 의해 만들어진 ‘희망’과 ‘공포’가 미신을 탄생시키게 되는 까닭이다. 저마다 다양한 삶 안에서 ‘희망’과 ‘공포’에 관련된 원인-결과는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 ‘돼지꿈’과 ‘까마귀울음’이 각각 길조와 흉조가 된 것도 같은 방식에 의해서다. 다른 미신들도 마찬가지다.
굿, 점, 사주, 타로, 궁합, 별자리 등등. 그것이 무엇이든 우연한 인과관계에 의해 다양한 미신이 탄생하게 된다. 이것이 자신의 역시 미신(종교)에 빠져 있으면서 타인의 미신(타로)에 대해 어리석다고 쉽게 말하는 이유다. ‘오늘 운세를 봐야 일이 잘 풀린다.’는 타인의 믿음은 우연의 결과(미신)라고 쉽게 판단하지만, ‘씻지 않아 시험을 잘 본다.’는 자신의 믿음은 필연의 결과(합리적 판단)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미신은 불행이라는 토대 위에 쌓는 기쁨
미신은 슬픔을 가져오는 것을 선이라고, 그리고 기쁨을 가지고 오는 것을 악이라고 주장하는 것처럼 보인다. (에티카, 제 4부, 부록 31)
미신은 해롭다. 미신에 대한 열망이 자연스럽다고 할지라도 달라질 건 없다. 스피노자의 말처럼, 미신은 ‘슬픔’을 가져오는 것을 ‘선’(기쁨)으로, ‘기쁨’을 가져오는 것을 ‘악’(슬픔)이라고 믿게 만들기 때문이다. ‘씻지 않음’은 슬픔(불쾌함)을 촉발하는 ‘악’이지, 결코 기쁨(쾌적함)을 주는 ‘선’이 아니다. 오직 미신에 빠져 있을 때만 ‘씻지 않음’이 기쁨을 주는 ‘선’으로 둔갑하게 된다. 미신은 슬픔(불쾌함)을 가져오는 것을 ‘선’이라고, 기쁨(쾌적함)을 가져오는 것을 ‘악’이라고 믿게 만드는 내적 교란일 뿐이다. 이것이 삶의 진실이다.
이처럼 미신은 우리네 삶에서 유익보다 유해가 더 크다. 미신의 거의 유일한 유익은 ‘정서적 안정감’이다. 그런데 이 ‘정서적 안정감’(“안 씻으면 성적이 좋을 거야”)은 정말 유익한 걸까? 그렇지 않다. 미신의 유익(정서적 안정감)은 근본적으로 극심한 유해, 즉 ‘정서적 불안감’(“성적이 나쁘면 어쩌지”) 위에 존재하는 까닭이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미신을 통한 ‘정서적 안정감’을 느끼려면 먼저 ‘정서적 불안감’에 빠져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미신은 불행이라는 토대 위에서 작은 행복을 찾으려는 행위인 셈이다. 이는 달리 말해, 미신을 통해 점점 더 행복(안정)을 누리려고 하면 할수록 그보다 더 큰 불행(불안)에 휩싸일 수밖에 없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미신은 이토록 해롭다. 하지만 모든 해로운 것들이 그렇듯이, 미신 역시 좀처럼 벗어나기 어렵다. 우리에게 들러붙은 미신에 대한 욕망을 어떻게 떼어버릴 수 있을까? 스피노자의 이야기에서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미신에 휘둘리지 않는 법
우리는 희망하는 것을 쉽게 믿지만, 공포를 느끼는 것을 쉽사리 믿지 않도록 본질적으로 구성되어 있다. 또한 전자(좋은 징조)에 대해서는 적정 이상으로 후자(불길한 징조)에 대해서는 적정 이하로 평가하도록 본질적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것이 도처에서 인간을 괴롭히는 미신의 기원이다. (에티카, 제3부, 정리50, 주석)
스피노자는 인간을 희망하는 것을 쉽게 믿고, 공포를 느끼게 하는 것을 쉽사리 믿지 않는 존재라고 말한다. 하여, 인간은 좋은 징조는 적정 이상으로 평가하고, 불길한 징조는 적정 이하로 평가하게 마련이다. 쉽게 말해, 사주를 좋게 말해주는 점집은 더 자주 찾고, 사주를 나쁘게 말하는 점집은 덜 찾게 된다는 것이다. 스피노자는 바로 이것이 인간을 괴롭히는 미신의 기원이라고 말한다. 이 지점에서 미신에 휘둘리지 않고 강건하게 살아갈 방법을 하나 발견할 수 있다.
한때 갖가지 미신에 휘둘리며 살았다. 4시 44분 우연히 시계를 보게 되면 괜히 하루 종일 기분이 찝찝했다. 시험 치기 전에 미역국을 먹지 않았다. 어머니가 지갑에 넣어준 부적을 모른 척 갖고 다녔다. 여자 친구가 있을 때 덕수궁 돌담길은 걷지 않았다. 누군가 삼재三災라고 하면 운전할 때 더욱 조심하려 했다. 괜한 짓을 해서 불행해지고 싶지 않아서였다. 하지만 지금은 미신에 전혀 개의치 않는다. 갖가지 미신들이 넘쳐나는 시대이지만 그것은 내게 어떤 영향도 미치지 않는다.
나는 어떻게 미신에 휘둘리지 않게 되었을까? 미신의 기원을 뒤집어서 적용했다. 좋은 징조를 적정 이하로, 불길한 징조를 적정 이상으로 평가했다. 비유하자면, 사주를 나쁘게 말하는 점집을 집요하게 더 찾아다닌 셈이다. 정말로 그랬다. 의도적으로 4시 44분에 시계를 쳐다봤다. 시험 치기 전에 미역국을 두 그릇 먹었다. 어머니가 지갑에 넣어준 부적을 찢어버렸다. 여자 친구와 함께 덕수궁 돌담길을 걸었다. 삼재 때에 오토바이를 타고 도로를 질주했다.
물론 그럴 때마다 안 좋은 일이 생길까 봐 문득문득 두렵고 불안하기도 했다. 하지만 불길한 징조를 의도적으로 반복하면서 알게 되었다. 불길한 징조와 불행한 일 사이에는 그 어떤 상관관계도 없다는 사실을. 그리고 가끔 불길한 징조와 불행한 일이 연결되더라도 그것은 우연히 일어난 일일 뿐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그렇게 나는 미신으로부터 자유로워졌다.
백척간두진일보의 삶
백척간두百尺竿頭, 진일보시방세계현전신進一步十方世界現全身 『무문관』, 무문혜개無門慧開
선종(불교의 종파)의 유명한 말이다. “백 척(30미터)이나 되는 장대 위에서 한 걸음을 더 내디디면 세계 전체가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내보일 것이다.” 이는 생각만으로 아찔한 상황 아닌가. 30미터 장대 위에서 한 걸음 내디디면 죽을 것 같다. 하지만 그 불안하고 두려운 상황에서 한 걸음을 내디뎌 본 사람은 안다. 그때 공포와 불안으로 왜곡된 세계가 순식간에 사라지고, 있는 그대로의 세계가 드러난다는 사실을.
백척간두에서 한 걸음을 더 내딛는 삶. 그것은 불길한 징조 속으로 자신을 던지는 삶이다. 이는 내면적 나약함을 벗어나 강건하고 씩씩한 내면으로 향해 가는 과정이다. 근거 없는 미신에 휘둘리느니, 당당하게 불행을 맞이하겠다는 씩씩함. 그런 강건함은 백척간두 위에서의 한걸음이 없다면 얻을 수 없는 것들이다. 미신에 휘둘리고 있다면 과감하게 불길한 징조 속으로 뛰어들어야 한다. 죽을 것 같은 공포와 불안이 엄습해보겠지만 다른 길이 없다.
백척간두에서 한 걸음을 내딛는 과정을 반복하면 삶의 진실을 깨닫게 된다. 미신을 위반해도, 별일 안 일어난다는 삶의 진실. 그리고 설사 미신을 위반해서 안 좋은 일이 일어나더라도, 그것은 우연의 결과일 뿐, 불길한 징조와 그 어떤 상관관계도 없다는 삶의 진실을 알게 된다. 그렇게 미신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 때, 우리네 삶에서 진정으로 소중한 것들을 지켜낼 수 있는 강건함을 얻게 된다.
진정한 정서적 안정감은 바로 그때 찾아온다. 미신이 주었던 정서적 안정감은 정서적 불안정으로부터 파생된 것일 뿐이다. 그래서 이는 삶을 슬픔에 빠트리게 하는 정서적 안정감이다. “씻으면 안 돼!” “물 건너 여행 가면 안 돼!” “궁합이 안 맞는 사람은 안 돼!” 하지만 미신이 사라졌을 때 찾아오는 안정감은 삶을 더욱 기쁘게 하는 정서적 안정감이다. 씻고 싶을 때 씻고, 떠나고 싶을 때 여행 가고, 사랑하고 싶은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정서적 안정감. 이런 진짜 정서적 안정감은 반드시 더 기쁜 삶을 약속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