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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회 : 어떻게 후회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후회의 집요함

 “그때 그 대학에 갔어야 했는데.” “책을 좀 많이 읽을 걸” “그때 연애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그때 사업을 하지 말걸” “그때 집을 사놨어야 했는데” 갖가지 후회를 하며 산다. 후회만큼 삶을 피폐하게 만드는 감정도 없다. 건강한 삶은 ‘지금’을 사는 삶이다. 하지만 후회는 퇴행적이다. 자꾸만 ‘과거’에 머무르게 한다. 후회하면 할수록 과거에 얽매여 지금의 삶에 집중하지 못하게 된다. 후회는 그렇게 조금씩 우리네 삶을 피폐하게 한다.


 후회는 언제 하게 될까? 현재가 만족스럽지 못할 때(슬픔)다. 취업이 안 되고, 승진에 누락 되고, 사고(질병)를 당하거나, 사업이 어려워질 때다. 현재가 슬픔일 때, “그때 그걸 하지 말았어야(혹은 했었어야) 했는데”라며 지난 과거의 선택들이 후회된다. 이런 후회는 삶을 피폐하게 하지만 충분히 이해되는 마음이다. ‘죽은 아이 부랄 만지기’가 의미 없다는 것을 알지만 또 그렇게라도 할 수밖에 없는 것이 부모의 심정 아니겠는가.      


 후회라는 감정은 집요하다. 현재가 슬픔이 아니라 기쁨일 때조차 후회하게 되기 때문이다. 적지 않은 돈을 벌게 될 때, 혹은 삶을 바꿀 지혜나 지식을 얻을 때가 있다. 하지만 그때조차 “아, 이걸 조금 더 일찍 벌었어야(알았어야) 했는데”라며 후회한다. 후회는 필연적으로 우리를 슬픔을 밀어 넣는다. 삶이 슬플 때(만족스럽지 못할 때)도 후회하느라 더 큰 슬픔에 빠지고, 삶이 기쁠 때(만족스러울 때)도 후회하느라 기쁨을 잊고 슬픔에 빠지게 된다. 이처럼 후회는 필연적으로 슬픔을 불러온다.      


 유쾌하고 명랑한 삶을 원한다면 후회라는 감정을 잘 다룰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모든 감정이 그렇지만, 후회라는 감정의 가장 큰 문제 역시 마음대로 안 된다는 것이다. ‘후회하지 않아야지’ 마음먹는다고 후회하지 않게 되는 게 아니다. 후회는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불시에 우리를 덮쳐오니까. 후회하고 싶지 않은 이들이 해야 할 질문은 이것이다. “후회가 밀려들 때 어떻게 해야 할까요?”     



스피노자의 ‘후회’

     

 먼저 스피노자는 ‘후회’라는 감정을 어떻게 설명하는지 들어보자.      


후회란 우리의 정신이 자유롭게 결심해서 행동했다고 믿는 어떤 행위의 관념을 수반하는 슬픔이다. (에티카제 3감정의 정의 27)      


 스피노자에게 ‘후회’는 ‘슬픔’이다. 우리의 삶의 활력을 앗아가는 슬픔. 그렇다면, ‘후회’는 어떤 종류의 슬픔일까? 우리의 정신이 “자유롭게 결심”해서 행동하였다고 믿을 때 발생하는 슬픔이다. 난해하다. “자유롭게 결심”했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파악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스피노자의 ‘후회’라는 감정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스피노자의 ‘자유’ 개념을 파악해야 한다. 스피노자의 ‘자유’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인간이 자신을 자유롭다고 믿는 것(자신의 자유의지로 어떤 일을 할 수도 있고하지 않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릇된 일이다.  (에티카제 2정리35, 주석)     


 스피노자는 “인간이 자신을 자유롭다고 믿는 것”은 틀렸다고 말한다. 즉, 인간이 “자유의지로 어떤 일을 할 수 있고, 하지 않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릇된 일이다. 스피노자의 주장에 당혹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우리는 너무도 당연하게 자신이 자유로운 존재라고 여기고 있지 않은가? 우리는 자유롭게 어떤 일을 할 수 있고 또 하지 않을 수 있다고 믿는다. 이는 사실일까? 정말 우리는 자유로운 걸까? 


     

스피노자의 ‘자유’

    

 ‘성규’과 ‘혜주’이 있다. ‘성규’은 여행을 포기하고 취업을 준비하는 삶을 선택했다. ‘혜주’는 취업을 포기하고 여행을 다니는 삶을 선택했다. 둘은 모두 자유롭게 각자의 삶을 선택했다고 믿는다. 정말 그런가? ‘성규’는 왜 여행을 포기하고 취업을 준비하게 되었을까? 어린 시절, 아버지의 사업이 망해버렸기 때문이다. 돈을 없다는 것은 불편함을 넘어 비참함이라는 사실을 온몸으로 알고 있다. 그렇다고 돈을 벌기 위해 사업을 할 수는 없다. 그것은 너무 불안정해서 언제 다시 가난의 나락으로 떨어질지 모르는 삶임을 온몸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혜주’는 왜 취업을 포기하고 여행을 다니는 삶을 선택했을까? 프랑스에 사는 이모 때문이다. 이모를 보러 간 프랑스에서 돈보다 삶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녀는 프랑스에서 지내면서 만나게 된 친구들을 통해 취업 말고 다른 방식의 삶도 가능하다는 것 또한 알게 되었다. ‘성규’와 ‘혜주’의 삶은 각자가 자유의지를 갖고 자유롭게 선택한 삶이 아니다. ‘아버지의 부도’와 ‘프랑스에 사는 이모’라는 원인에 의해서 결정된 삶이다. 하지만 ‘성규’와 ‘혜주’는 자신들이 자유롭게 선택한 삶을 살고 있다고 믿는다. 그들은 왜 그런 생각을 갖게 되었을까?      

 

(인간이 자신은 자유롭다고 믿는그러한 의견은 단지 그들이 자신의 행동을 의식하지만 그들로 하여금 행동하게끔 결정하는 원인을 모르는데서 성립한다그러므로 그들의 자유 관념은 단지 자신들의 행동의 원인에 대한 무지일 뿐이다.  (에티카제 2정리35, 주석)     


 ‘성규’는 자신이 직장인이 되려는 “자신의 행동을 의식”하고 있다. 하지만 그런 “행동을 하게끔 결정하는 원인”(아버지의 부도, 가난, 경제적 불안정)은 모르고 있다. 이것이 그가 자유롭게 취업을 준비한다고 믿는 이유다. ‘혜주’도 마찬가지다. ‘혜주’는 여행을 떠나려는 “자신의 행동을 의식”하고 있다. 하지만 그런 “행동을 하게끔 결정하는 원인”(이모, 프랑스, 프랑스에 만난 친구들) 모르고 있다. 그런 원인들을 모르기 때문에 지금 자신의 삶이 자신이 자유롭게 한 선택의 결과라고 믿게 된 것일 뿐이다.     


 ‘성규’와 ‘혜주’가 스스로 자유의지를 가지고 각자의 삶을 선택했다고 믿는 것은 무지다. 자신들의 행동의 원인에 대한 무지. 그들의 자유 관념은 “단지 자신들의 행동의 원인에 대한 무지일 뿐이다.” 이처럼, 인간은 자유의지를 가지고 자신의 삶을 선택한다고 믿지만, 실제로는 자신이 어떤 선택을 하게 된 원인에 대해서 잘 모르는 것일 뿐이다. 이제 ‘후회’라는 감정이 무엇인지 조금 더 선명하게 알 수 있다. 스피노자는 ‘후회’라는 감정에 대해서 다시 이렇게 설명한다.      



후회의 원인, 과잉된 자의식

     

후회란 원인으로서의 자기 자신의 관념을 수반하는 슬픔이며 … 이러한 감정은 자기 자신을 자유롭다고 믿기 때문에 매우 강렬하다. (에티카제 3정리 51, 주석     


 ‘후회’는 “원인으로서 자기 자신의 관념을 수반하는 슬픔”이다. 쉽게 말해, ‘후회’는 자신이 한 어떤 행동이 안 좋은 결과의 원인이 되었을 때 찾아오는 슬픔이다. 원하는 대학에 가지 못한 ‘후회’를 생각해보자. 이는 ‘원인’(열심히 공부하지 않음)으로서의 자기 자신이 떠오를 때의 ‘슬픔’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이런 ‘후회’는 “자신이 자유롭다고 믿기 때문에 매우 강렬하다”고 말한 대목이다.     

 

 모든 사람들이 ‘후회’에 빠져 사는 것은 아니다. 분명 더 크게 더 자주 ‘후회’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에게는 하나의 공통점이 있다. 바로 과잉된 자의식이다. 과잉된 자의식이 뭔가? 세상의 중심이 자신이라고 믿는 정서 상태다. 마치 자신이 신이라도 되는 것처럼 느끼는 상태다. 타자와 세상은 간단히 무시해버리고 머릿속에 온통 자신에 관한 생각만 가득 찬 상태. 이들은 타자와 세상이 모두 ‘나’ 중심으로 돌아간다고 믿는다.

      

 그래서 이들은 타자와 세상의 문제를 모두 ‘나’의 문제로 부지불식간에 연결 짓는다. 그 연결은 긍정적인 일과 부정적인 일을 가리지 않는다. 자의식이 과잉된 이들을 살펴보라. 그들은 명백히 여럿이 함께 한 일임에도 불구하고 그 일이 잘되면 다 자신 덕분이라고 믿는다. 또 반대로 자의식 과잉된 이들은 누군가 수군거리면 그것이 모두 자신의 뒷담화라고 믿는다. 이는 자의식 과잉인 이들에게는 당연하다. 세상의 중심은 ‘나’니까.   

   

 이런 자의식이 과잉된 이들은 필연적으로 더욱 크게 더욱 자주 ‘후회’할 수밖에 없다. 자의식 과잉인 이들은 자신에게 무한한 자유가 있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항상 ‘후회’하며 사는 친구를 한 명 알고 있다. 그는 현재 상황이 만족스러울 때든 그렇지 않을 때든 항상 ‘후회’하며 산다. 돈이 없을 때면, “그때 직장을 그만두지 말았어야 했는데”라고 ‘후회’한다. 새로운 지식을 알게 되면, “좀 더 일찍 그걸 알았어야 했는데”라며 ‘후회’한다. 그는 왜 이렇게 크게 또 자주 후회하는 걸까? 스피노자의 말을 빌리자면, 과도하게 “자기 자신을 자유롭다고 믿기” 때문이다. 자신에게 무한한 자유가 있다는 그 과잉된 자의식이 바로 ‘후회’의 원인이다.       



후회는 오만함에서 온다.

     

 ‘후회’는 “정신이 자유롭게 결심해서 행동했다고 믿는 어떤 행위의 관념을 수반하는 슬픔”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정신이 자유롭게 결심해서 행동하였다고 믿는”에 있다. 정신의 자유로운 결심이 정말 가능할까? 그것이 가능하다면 전지전능한 신이다. 유한한 인간은 무엇인가를 온전히 자유롭게 결심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인간은 누구나 언제나 자신이 어떻게 할 수 없는 상황과 조건에 처해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정신은 온전히 자유로운 결심을 할 수 없다.     


 이제 ‘후회’라는 감정의 놀라운 진실을 하나 알게 된다. ‘후회’는 위축의 감정이 아니라 오만의 감정이다. ‘후회’는 신과 같은 강한(혹은 과잉된) 자의식을 가진 사람에게 자주 찾아오는 감정이기 때문이다. ‘후회’가 무엇인가? 자신이 처한 현재 상황에 이르게 된 원인을 모두 자신에게 돌릴 때 발생하는 감정 아닌가. 과도하게 ‘후회’하는 사람은 자신이 모든 불행을 직접적으로 초래했다고 믿는 사람이다. 즉, 자신의 선택이 절대적으로 자유로웠다고 믿는 사람이다. 이보다 더 오만한 사람이 어디 있을까.      


 ‘후회’는 과잉된 자의식이 만들어낸 오만함의 결과다. 항상 ‘후회’하는 친구 역시 마찬가지다. 그는 과잉된 자의식으로 인해 오만하다. 그에게 기쁨이 찾아올 때, 그 기쁨의 원인이 오로지 자신의 자유로운 선택과 노력이라고 믿는다. 그런 그에게 슬픔이 찾아온다면 어떻게 될까? 그 역시 오로지 자신의 자유로운 선택과 노력의 부재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그러니 어찌 후회하지 않을 수 있을까?      


후회하는 삶에서 벗어나는 법     


 후회가 밀려들 때 어떻게 해야 할까? 과잉된 자의식에서 벗어나면 된다. 세상의 중심이 ‘나’가 아니며 세상에는 ‘나’가 어찌할 수 없는 타자가 있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면 된다. 그때 우리는 삶의 진실을 볼 수 있다. 지금 ‘나’의 삶이 슬픔에 빠진 것은 오롯이 ‘나’의 자유의지에 따른 선택 때문만은 아니라는 삶의 진실. 지금 ‘나’의 슬픔은 일정 정도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어쩔 수 없이 세상에 내몰린 결과였다는 삶의 진실.      


 책을 많이 읽지 못한 것. 대학에 가지 못한 것. 연애를 많이 해보지 못한 것. 갖가지 후회가 있다. 하지만 이 모든 일들이 모두의 ‘나’의 잘못(원인)으로 일어난 일은 아니다. 책을 많이 읽을 수 없었던, 대학에 갈 수 없었던 것은 ‘나’의 노력 부족(원인) 때문만은 아니다. ‘나’의 노력 부족(원인)은, 불우한 가정형편이라는 더 근본적인 원인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연애를 많이 하지 못했던 것은 ‘나’의 용기 없음(원인) 때문만은 아니다. ‘나’의 용기 없음(원인)은, 지독히 안정 지향적인 부모라는 더 근본적인 원인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후회’를 잘 다룬다는 것은 어떤 후회도 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후회’할 수 있다. 하지만 그 후회는 내가 자유로웠던 만큼만 해야 한다. 내가 자유롭지 않은 부분이 있었다면 그만큼은 ‘후회’의 영역이 아니다. 불우한 가정형편이라는 조건 안에서 노력할 수 있는 틈(자유)이 있었다면, 그 틈만큼만 후회하면 된다. 안정 지향적인 부모라는 조건 안에서 용기를 가질 틈(자유)이 있었다면, 그 틈만큼만 후회하면 된다. 그만큼이 정당한 후회다.      


 삶의 진실에 입각해 ‘후회’를 고찰해보는 것. 이것이 ‘후회’를 잘 다루는 방법이다. 즉, ‘후회’를 잘 다루는 방법은 부당하게 ‘후회’하지 않고, 정당한 ‘후회’를 하는 것이다. ‘후회’라는 감정이 찾아왔는가? 그렇다면 먼저 자신의 삶을 있는 그대로 돌아보라. 지금 ‘후회’되는 그 일이 일어나기까지 자신에게 얼마만큼의 자유가 있었는가? 그 자유만큼만 ‘후회’하면 된다. 어떤 슬픔이 닥쳐왔을 때, 내가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었던 부분만큼만 ‘후회’하면 된다.     


 그렇게 정당한 ‘후회’를 하게 되면 알게 된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크게 ‘후회’할 일은 그리 많지 않다는 사실을 말이다. ‘후회’라는 감정을 잘 다룰 수 있게 되면 점차 슬픔은 걷히고 기쁨이 찾아온다. ‘후회’를 잘 다룰 수 있을 때 과거에 얽매이지 않고 지금에 충실한 삶을 이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을 사는 만큼, 슬픔은 작고 기쁨은 크다. 이것이 ‘후회’를 잘 다루게 되면 ‘과거’ 아닌 ‘지금’을 살 수 있게 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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