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의 구렁텅이, ‘내가 더 잘나고 싶은 마음’
“수향이 정말 예쁘지 않냐?”
“예쁘긴, 저거 다 수술한 거야”
나보다 더 아름다운 사람을 인정할 수 없다. 비단 외모에 관련된 이야기만이 아니다. 성적이든, 수입이든, 지식이든, 자신이 가장 낫다고 생각하는 지점이 있다. 그 지점에서 나보다 더 나은 사람이 나타났을 때 그 사실을 인정할 수가 없다. 달리 말해, 내가 더 잘나고 싶은 마음을 억누를 수가 없다. 그 마음을 억누를 수 없어서 두 가지 전략을 사용하게 된다. 외모를 기준으로 설명해보자.
첫째, 내가 더 예뻐지려는 전략이다. 더 예쁜 옷을 입거나 더 진한 화장을 하는 방법이다. 하지만 그조차도 여의치 않을 때가 있다. 그냥 존재만으로 빛나는 외모를 가진 아이가 등장해버릴 때 그렇다. 내가 어떤 노력을 해도 그 아이보다 아름다울 수 없다는 것을 자각하게 될 때가 있다. 그때 두 번째 전략을 취한다. 상대를 깎아내리려는 전략이다. “예쁘긴, 저거 다 수술한 거야” 상대의 단점을 애써 드러내거나 혹은 날조하는 방법이다. 그렇게라도, 내가 더 잘나고 싶은 마음을 유지하고 싶다.
이 두 가지 전략 모두 우리를 더 큰 슬픔을 내몬다. 내가 더 예뻐지려는 전략은 결국 공허하고 헛헛한 마음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더 예뻐지려는 이유에 ‘나’는 없고 ‘타인’만 있는 까닭이다. ‘나’는 왜 외모를 꾸미려고 했는가? 그 꾸밈은 애초에 ‘나’를 위한 것이 아니었다. 더 예쁜 ’그 아이’를 위한 것일 뿐이었다. 상대를 깎아내리려는 전략은 더 말할 필요도 없다. 그것은 결국 ‘나’보다 ‘그 아이’가 더 예쁘다는 것을 인정하는 일이다. 그리고 그 인정하는 방식이 ‘그 아이’를 깎아내리려는 방식이다. 이는 내가 외모뿐만 내면적으로도 덜 예쁜 사람이라는 사실을 확인하게 되는 일 아닌가. 이는 첫 번째 방법보다 더 큰 슬픔을 몰고 오는 일이다.
‘내가 더 잘나고 싶은 마음’은 우리를 더 큰 슬픔으로 내몬다. 하지만 부지불식간에 찾아오는 그 마음이 사라질 것 같지도 않다. 인간은 더 사랑받고 싶어서 ‘내가 더 잘나고 싶은 마음’이 가득한 존재다. 바로 그 마음 때문에 ‘나를 잃게’(화장) 되거나 ‘타인을 잃게’(험담) 되는 더 큰 슬픔으로 빠져버리게 된다. 그러니 ‘나’를 잃기 전에, ‘타인’을 잃기 전에 물어야 한다. “내가 더 잘 나고 싶은 마음을 어떻게 해야 할까요?”
‘질투’는 ‘증오’, ‘분노’, ‘복수심’과 다르다.
‘내가 더 잘나고 싶은 마음’을 스피노자는 어떻게 다루고 있을까? 스피노자는 그 마음을 ‘질투’와 ‘경쟁심’이라는 두 가지 감정으로 나누어 설명한다. 먼저 ‘질투’라는 감정에 대해서 이야기해보자.
질투란 타인의 행복을 슬퍼하며, 반대로 타인의 불행을 기뻐하도록 인간을 자극하여 변화시키는 한에 있어서의 미움(증오)이다. (에티카, 제 3부, 감정의 정의 23)
스피노자의 ‘질투’는 타인의 행복을 슬퍼하고 타인의 불행을 기뻐하는 감정이다. 즉, 우리가 누군가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며 슬픔을 느끼거나 혹은 누군가의 불행을 보며 기쁨을 느낀다면 ‘질투’라는 감정에 휩싸인 것이다. 이것이 바로 ‘내가 더 잘나고 싶은 마음’ 아닌가? 내가 더 잘나고 싶기 때문에 타인의 행복에서 슬픔을 느끼고, 타인의 불행에서 기쁨을 느끼게 된다. 의아한 점이 있다. 누군가의 행복에서 슬픔을, 불행에서 기쁨을 느끼는 감정이 ‘질투’라면, 이는 ‘증오’, ‘분노’, ‘복수심’ 등등 여타 다른 부정적 감정과 구분되지 않는 것 아닌가? ‘증오’ ‘분노’ ‘복수심’을 느낄 때도 상대의 행복에서 슬픔을, 불행에서 기쁨을 느끼게 되는 것 같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이는 우리의 마음을 내밀히 살펴보지 못해 발생한 오해일 뿐이다. ‘증오’ ‘분노’ ‘복수심’은 타인의 행복과 불행에서 슬픔과 기쁨을 느낄 수 없다. ‘증오’ ‘분노’ ‘복수심’의 대상이 있을 때, 우리는 그의 행복과 불행을 거리 둬서 지켜볼 수 없기 때문이다. 달리 말해, 상대의 행복과 불행을 보며 슬퍼하거나 기뻐할 여유가 없다. 우리는 직접적으로 그를 파괴할 욕망에 휩싸여 있을 테니까 말이다. 오직 ‘질투’라는 감정에 휩싸일 때만 우리는 상대와 어느 정도의 거리를 둬서 지켜보며 그의 행복과 불행에서 슬픔과 기쁨을 느끼게 된다.
스피노자의 ‘질투’
직장을 다녔을 시절, 이 ‘질투’라는 감정을 강렬하게 느껴본 적이 있다. 같은 팀에 후배가 한 명 있었다. 부유한 집안에서 자라 일찍 유학을 다녀온 친구였다. 그가 영어를 잘한다는 이유로 팀원으로부터 인정과 칭찬을 받아 행복해할 때 묘한 슬픔을 느꼈다. 동시에 그가 상사로부터 업무처리가 미흡하다고 비난과 질책을 받아 불행해할 때 묘한 기쁨을 느꼈다. 나는 후배를 ‘질투’했다. 이런 ‘질투’는 왜 발생하는 것일까? ‘질투’의 원인에 대해 스피노자는 이렇게 말한다.
오직 한 사람만이 소유할 수 있는 것을 어떤 사람이 갖고 싶어 한다는 것을 우리가 떠올릴 때, 우리는 그 사람이 그것을 소유하지 못하도록 노력할 것이다. (에티카, 제 3부, 정리32)
스피노자에 따르면, 오직 한 사람이 소유할 수 있는 것(한정적인 자원)을 누군가가 갖고 싶어 한다면 우리는 그것을 가만두고 볼 수 없다. 누군가 그것을 소유하지 못하도록 노력할 수밖에 없다. 만 원짜리 한 장이 떨어져 있다고 해보자. 그것은 오직 한 사람만이 소유할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옆에 있는 사람 또한 그것을 갖고 싶어 한다는 것을 안다. 그러니 만 원짜리 지폐를 슬며시 밟아 다른 사람이 그것을 소유하지 못하게 노력할 것이다. 만 원을 통해 오직 한 사람만이 소유할 수 있는 기쁨을 얻고 싶으니까.
인간의 이런 본성에서 ‘질투’라는 감정이 생겨난다. 나는 왜 그 후배를 ‘질투’했던 것일까? 내게 길바닥에 떨어진 만원은 ‘관심(인정)’이었다. ‘관심(인정)’은 대단히 한정적인 자원이다. 한 사람에게 ‘관심’을 가질 때, 자연스레 다른 이들에게는 무관심해질 수밖에 없다. 그 ‘관심’을 오직 나만이 소유할 수 있기를 바랐다. 하지만 외국에서 대학을 나왔고 영어를 잘한다는 이유로 그 후배가 팀의 ‘관심’을 모두 가져간 적이 많았다. 그래서 그 ‘관심’을 그 후배가 소유하지 못하도록 각가지 노력했다. 나는 그렇게 그 후배를 ‘질투’하게 되었다.
오직 나만 ‘관심’의 대상이 되고 싶은데, 그 ‘관심’을 후배가 모두 가져가는 것 같아서 질투심이 생겼던 게다. 그 후배가 나보다 먼저 승진하게 되었을 때 나의 ‘질투’가 정점을 찍었던 것도 그래서였다. 승진자 발표가 있던 날, 나는 구석에 찌그러진 엑스트라가 되었고, 그 후배는 모든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주연배우가 되었기 때문이다. 나에게 쏟아져야 할 ‘관심’이 그를 향하는 것을 견딜 수 없었다. 그래서 그 결과로 나는 후배의 행복을 슬퍼하고 후배의 불행을 기뻐하는 ‘질투’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스피노자의 ‘경쟁심’
‘내가 더 잘나고 싶은 마음’은 질투뿐일 걸까? 아니다. 스피노자에 따르면, ‘경쟁심’이라는 감정 역시 ‘내가 더 잘나고 싶은 마음’이다. 스피노자의 이야기를 직접 들어보자.
경쟁심aemulatio이란 다른 사람이 어떤 사물에 대한 욕망을 가지는 것을 우리가 떠올림으로 인하여 우리 안에 생기는 동일한 사물에 대한 욕망이다. (에티카, 제 3부, 감정의 정의33)
‘경쟁심’은 다른 사람들이 어떤 사물을 욕망할 때 우리 역시 그것을 욕망하게 되는 감정이다. ‘진환’과 ‘재익’은 어린 시절부터 함께 자란 친구다. 그런데 여름 방학 때부터 ‘진환’은 농구에 빠졌다. ‘진환’을 따라 농구를 하러 간 ‘재익’ 역시 농구에 빠졌다. 둘은 아침부터 해가 질 때까지 ‘경쟁’적으로 농구장에서 농구 연습을 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상대보다 농구를 더 잘하기 위해서였다.
“다른 사람(진환)이 어떤 사물(농구)에 대한 욕망을 가지는 것을 우리(재익)가 떠올림으로 인하여 우리(재익) 안에 생기는 동일한 사물(농구)에 대한 욕망” 이것이 경쟁심이다. 얼핏 보면, 이 ‘경쟁심’은 ‘질투’와 비슷해 보인다. 결국 ‘내가 더 잘하고 싶은 마음’ 아닌가? ‘진환’과 ‘재익’은 왜 그리 열심히 농구 연습을 했겠는가? 서로 상대보다 농구를 더 잘하고 싶어서였다. 하지만 ‘질투’와 ‘경쟁심’이란 두 감정은 전혀 다르다. 어떤 의미에서 ‘질투’와 ‘경쟁심’은 정반대의 감정이라고 할 수 있다. ‘경쟁심’이라는 감정이 어떻게 발생하게 되는지 살펴보면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감정의 모방이 … 욕망과 관계되어 있을 때에 경쟁심이라고 일컬어진다. … 경쟁심은 우리와 유사한 다른 사람이 어떤 것에 대한 욕망을 가지고 있다고 우리가 떠올리는 것으로 인하여 우리 안에 생기는 동일한 욕망에 지나지 않는다. (에티카, 제 3부, 정리 27, 주석)
‘경쟁심’은 ‘감정의 모방’이 ‘욕망’으로 나타나는 감정이다. 왜 ‘재익’은 ‘진환’에게 ‘경쟁심’을 느꼈을까? ‘재익’은 ‘진환’의 감정(농구에 대한 애정)을 모방했고, 그 ‘감정의 모방’이 ‘욕망’(농구에 대한 욕망)으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그래서 ‘경쟁심’에 불탔던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감정의 모방’이다. 우리는 누구의 감정을 모방할까? 우리는 불특정 다수 혹은 증오하거나 싫어하는 사람의 감정을 모방하지 않는다. 사랑하거나 혹은 좋아하는 사람의 감정만을 모방한다.
사랑을 통해 ‘경쟁심’을 느낀 적이 있다. 사랑했던 그녀는 음악과 미술을 좋아했다. 그녀를 만나면서 평생 가본 적 없는 전시회를 가게 되었고,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클래식 음악을 듣게 되었다. 그 뒤로 더 많은 음악과 미술 작품을 알고 싶어 열심히도 노력했다. 그녀보다 아니 적어도 그녀만큼이라도 미술과 음악에 대해 알고 싶었다. 그것은 분명 ‘경쟁심’이었다. 그 경쟁심은 그녀의 감정(음악과 미술에 대한 사랑)을 모방하고 싶은 욕망이었다. 그 ‘경쟁심’이 심해져 어느 날은, 주제넘게 그녀와 ‘재클린 뒤 프레’와 ‘마티스’를 두고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질투와 경쟁심
여기서 ‘경쟁심’과 ‘질투’의 차이가 드러난다. 질투는 ‘내가 더 잘나고 싶은 마음’이다. 그 마음의 속내는 이렇다. “내가 세상에서 제일 잘났으니까 다른 사람들은 찌그러져 있어!” ‘질투’는 자신과 타인을 모두 파괴한다. ‘질투’는 근본적으로 ‘미움’(증오)의 감정이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증오’하는 것은 양날의 칼로 상대를 찌르는 일이다. 상대를 깊게 찌르려고 할수록 내 손 역시 깊게 베이는 일이다. 후배를 ‘질투’하면 할수록 나는 내가 싫어졌다. 모든 행동에서 후배를 의식하는 내가 싫어졌고, 근거 없이 후배를 ‘증오’하는 나 자신은 더욱 싫어졌다. 그렇게 ‘질투’는 나를 조금씩 파괴해나갔다.
‘경쟁심’도 ‘내가 더 잘나고 싶은 마음’이다. 하지만 그 마음의 속내는 이렇다. “나도 이렇게 잘났으니까 나를 좀 더 좋아해 줘” 경쟁심은 아무것도 파괴하지 않는다. 오히려 사랑하거나 좋아하는 감정을 더욱 강화시킨다. ‘경쟁심’은 근본적으로 ‘욕망’이기 때문이다. ‘욕망’이 무엇인가? 스피노자는 ‘욕망’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욕망은 … 자기의 보존에 도움이 되는 것을 행하도록 결정되어 있는 한에 있어서 인간의 본질 자체라고 말했다. (에티카, 제 3부, 감정의 정의1, 해명)
‘욕망’은 우리 자신을 보존하게 해준다. 목이 마를 때 물에 대한 ‘욕망’으로 자신을 보존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경쟁심’은 사랑하는 이에게 사랑받는 존재가 됨으로써 자기를 더욱 잘 보존하려는 욕망이다. 그러니 ‘경쟁심’은 자신과 타인을 파괴하기는커녕 나와 타인의 관계를 더욱 깊고 단단하게 해준다. 그 ‘경쟁심’의 과정에서 크고 작은 마찰이 있다고 할지라도 결과는 달라지지 않는다.
‘재익’이 ‘진환’에게 ‘경쟁심’을 느꼈던 이유는 ‘진환’을 파괴하고(이기고) 싶어서가 아니다. “네가 좋아하는 농구를 나도 이렇게 잘해. 그러니 나를 더 좋아해 줘”라고 말하고 싶은 것이다. 나의 ‘경쟁심’도 그랬다. ‘재클린 뒤 프레’와 ‘마티스’를 두고 주제넘은 말싸움을 한 것도 그녀를 파괴하고(이기고) 싶어서가 아니었다. “네가 좋아하는 작품을 나도 이렇게 잘 알아. 그러니 나를 조금만 더 좋아해줘”라고 말하고 싶은 거였다.
질투를 잘 다루는 법
‘질투’라는 감정은 애정결핍에 기원해 있다. 사랑받은 기억이 모자란 사람일수록 아무 곳에서 자신이 주인공이 되고 싶다는 마음을 주체할 수 없다. 그 마음 때문에 조금이라도 자신이 조연이 된 것 같으면 주인공이 된 것 같은 사람을 ‘질투’하게 된다. 나는 왜 후배를 ‘질투’를 했을까? 충분히 사랑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 애정의 결핍을 직장의 관심으로 메워 넣으려 했다. 돌아보면, 나는 그 후배만을 ‘질투’했을까? 아니다. 나를 엑스트라 혹은 조연으로 만드는 모든 사람들을 ‘질투’했다. 그 시절의 나는 그만큼이나 애정결핍이었다.
‘질투’를 잘 다루는 방법은 ‘애정결핍을 어떻게 해소하느냐?’의 문제와 직결된다. 이제 질투심을 어떻게 극복해야 할지 알겠다. ‘경쟁심’을 통해 ‘질투’를 극복할 수 있다. ‘질투’와 ‘경쟁심’은 모두 사랑받고 싶은 마음이다. 사랑받고 싶기에 ‘내가 더 잘나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이다. 하지만 둘의 결정적 차이가 있다. ‘질투’가 불특정 다수에게 사랑받고 싶은 마음이라면, ‘경쟁심’은 단독적인 한 사람에게 사랑받고 싶은 마음이다.
“모두 나를 쳐다봐!” 이것이 질투의 정서라면, “너만 나를 봐주면 돼!” 이것은 경쟁심의 정서다. 애정결핍의 치유는 ‘사랑의 양’이 아니라 ‘사랑의 질’에 결부된 문제다. 불특정 다수에게 많은 양의 사랑을 받는다고 해서 애정결핍이 사라지지 않는다. 오히려 마치 바닷물을 들이켜는 것처럼 더 큰 애정결핍에 시달릴 뿐이다. 이는 많은 팬들에게 둘러싸인 연예인, 정치인들의 삶을 보면 알 수 있다. 대체로 그들은 애정결핍 덩어리들이고, 그래서 ‘질투’의 화신들이다. 자신과 타인을 모두 파괴하는 질투의 화신들.
애정결핍의 해소는 ‘사랑의 질’에 달려 있다. 오직 한 사람, 그 사람이지 않으면 안 되는 사람과의 깊은 사랑. 그것이 애정결핍을 해소해준다. 그런 사랑의 시작은 ‘경쟁심’으로 찾아온다. ‘재익’이가 ‘진환’이에게 잘 보이기 위해 농구를 했던 마음. 내가 그녀에게 잘 보이기 위해 음악과 미술 작품을 찾았던 마음. “너만 나를 봐주면 돼!”라는 그 간절한 마음이 만들어낸 경쟁심. 이것이 우리 속에 깊게 뿌리 내린 ‘질투’라는 파괴적 감정을 시들게 할 테다. ‘질투’는 “없으라!” 한다고 없어지지 않는다. ‘질투’는 ‘경쟁심’으로 점차 약해진다. ‘경쟁심’을 느끼면 느낄수록 우리는 더 깊은 사랑을 맞이하게 되는 것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