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해, 그 억울함에 대하여
“너 요즘 이직 준비 하냐?”
“네? 아니에요.”
“근데, 왜 요새 매일 일찍 퇴근하고, 또 일처리는 왜 그 따위야?”
그녀는 억울하다. 일찍 퇴근하고 일 처리가 미흡했던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건 이직 때문이 아니라 부모님 때문이었다. 두 분이 모두 편찮으셔서 매일 병원에 모셔다드려야 했다. 부모님 걱정, 경제적 문제로 정신이 없었다. 그런 사정도 모른 체, 팀장은 그녀를 오해했다. 그 오해가 서럽고 억울해서 화장실에서 한참을 울었다. 비단 그녀만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네 일상의 다른 오해들도 마찬가지다.
본적도 없는 물건을 훔쳤다고 오해받는 경우. 내가 하지 않았던 말이 내가 한 말처럼 되어 오해받는 경우. 좋아하는 사람에게 진심을 표현하려 했는데 스토커로 오해받는 경우. 동료의 업무 차질 때문에 내가 무능한 직원으로 질책받는 경우. 이처럼 오해를 받는 것은 어떤 경우라도 서럽고 화나고 억울한 일이다. 직장, 연애, 가족, 친구 등 우리 주의의 모든 관계에서 오해만큼 우리네 삶을 힘들게 하는 것도 없다.
더욱이 심각한 문제는 이 오해가 끊임없이 우리를 찾아온다는 사실이다. 오해는 특정한 사안이나 상황을 입체적으로 조망하지 않고 단편적으로 조망할 때 발생하는 편견이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특정한 사안·상황을 오직 자신의 관점에서 바라본다. 그러니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 할지라도 오해는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다. 오해는 끊이지 않을 것이며, 동시에 우리를 슬픔에 빠뜨린다. 이 피할 길 없어서 보이는 불행을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스피노자의 ‘멸시’
“오해를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 질문에 스피노자는 어떤 말을 해줄까? 스피노자는 ‘오해’에 대해서 직접적으로 말한 바가 없다. 오해는 어떤 상황이나 사람을 그릇되게 해석하고 이해하는 것이다. 이 정의에 비춰본다면, ‘오해’ 관한 스피노자의 견해를 추론해볼 수 있다. 오해는 스피노자의 ‘멸시’와 ‘과대평가’, ‘자기비하’와 ‘거만’이라는 네 가지 감정으로 ‘오해’를 설명할 수 있다. 하나씩 살펴보자.
멸시란 증오(미움) 때문에 어떤 사람에 대하여 적당한 것 이하로 하찮게 여기는 것이다. (에티카, 제 3부, 감정의 정의22)
‘멸시’는 오해다. 어떤 오해인가? 누군가를 미워하기 때문에 그 사람을 적정 이하로 하찮게 여기게 되는 오해다. 팀장은 그녀를 오해했다. 그녀가 이직을 하려고 매일 일찍 퇴근하고 일 처리가 미흡한 것이라 오해했다. 팀장은 왜 오해했을까? 자신의 관점에서 그녀를 보았기 때문일까? 달리 말해, 팀장 자신이 일찍 퇴근하고 일 처리가 미흡했을 때가 이직을 생각했을 때였기 때문일까? 그럴 수 있다. 하지만 석연치 않은 점이 있다. 팀장은 유사한 행동을 했던 다른 직원은 오해하지 않고 유독 그녀만을 오해했다.
팀장은 왜 그랬던 걸까? 그녀에 대한 팀장의 오해는 어디서 왔을까? ‘미움’이다. 그녀가 오해를 살 행동을 해서 팀장이 오해한 것이 아니다. 그녀가 미웠기 때문이다. 평소에 그녀를 향한 미움 때문에 그녀를 정당한 것(평소 열심히 일하고, 일 처리를 꼼꼼하게 했던 것) 이하로 하찮게 여겼던 게다. 팀장은 그녀를 ‘멸시’(오해)했다. 스피노자는 ‘멸시’의 메커니즘을 이렇게 밝히고 있다.
우리가 증오하는 것을 슬픔으로 자극하여 변화시키는 것이라고 우리가 떠올리는 모든 것을 긍정하려고 노력한다. 반대로 그것을 기쁨으로 자극하여 변화시키려는 것이라고 우리가 떠올리는 모든 것을 부정하려고 노력한다. (에티키, 제 3부, 정리26)
팀장의 ‘멸시’는 자연스럽다. 팀장은 그녀를 슬픔으로 몰아넣고 싶다. 그렇게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이라고 여겨지는 모든 생각을 긍정하려고 노력한다. 반대로 그녀가 기쁨을 느낄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그 모든 것을 부정하려고 노력한다. 팀장은 그녀를 미워하니까. 그러니 팀장이 그녀를 ‘멸시’(오해)하지 않는 것이 더 어려운 일이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다. 미워하는 사람을 슬프게 하는 것(비난·험담·악담·저주…)들을 가능한 긍정하려고 노력하고, 그를 기쁘게 하는 것(인정·칭찬·응원·축복…)을 가능한 부정하려고 노력하게 된다. 이것이 ‘멸시’라는 오해가 발생하는 메커니즘이다.
스피노자의 ‘과대평가’
오해에는 ‘멸시’만 있는 게 아니다. 그 반대도 있다. ‘과대평가’다. 이 과대평가에 대해 스피노자는 이렇게 말했다.
과대평가란 사랑 때문에 어떤 사람에 대하여 정당한 것 이상으로 대단하게 여기는 것이다. (에티카, 제 3부, 감정의 정의 21)
‘과대평가’ 역시 오해다. 어떤 오해인가? 누군가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 사람을 적정 이상으로 대단하게 여기는 게 되는 오해다. ‘민서’는 사랑에 빠졌다. “내 남자친구 너무 멋있어. 남자답게 덩치도 크고 먹는 모습도 너무 멋있어.” ‘민서’는 자신의 친구들을 만나 남자친구 자랑을 한참을 했다. 그 자리에 ‘민서’의 남자친구가 왔을 때 친구들은 긴 당황의 침묵을 견뎌야 했다. 덩치 좋은 남자 대신 배 나온 아저씨가 등장했고, 뭐든 잘 먹는 남자 대신 음식을 게걸스럽게 먹는 식충이가 등장했기 때문이었다.
‘민서’는 남자친구를 ‘과대평가’(오해)했다. 왜 그랬을까? ‘사랑’했기 때문이다. 그 남자를 ‘사랑’했기 때문에 그를 정당한 것(비만·과식) 이상으로 대단하게 여겼던 게다. 우리는 ‘증’오하는 사람을 오해(멸시)하기도 하지만, ‘사랑’하는 사람을 오해(과대평가)하기도 한다.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우리는 필연적으로 그 사람을 ‘과대평가’(오해) 하게 된다.
흔히 ‘과대평가’는 오해라고 생각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이는 ‘오해’라는 단어에는 부정적인 정서가 내포되어 있기 때문일 테다. 과대평가를 하고, 과대평가를 당하는 오해는 슬픔이 아니라 기쁨을 주기 때문에 이를 오해라고 여기기 어렵다. 하지만 어떤 사물이나 사람을 그릇되게 해석하고 이해하는 것 자체가 모두 오해다. 그러니 누군가를 정당한 이하로 하찮게 여기는 ‘멸시’ 뿐만 아니라, 누군가를 정당한 것 이상으로 대단하게 여기는 ‘과대평가’ 역시 오해다.
스피노자의 ‘자기비하’
‘오해에 대해 오해’하는 지점이 있다. 오해는 언제나 타자와 관련된 문제라는 생각이 바로 그 오해다. 타자와 관련된 오해만 오해일까? 아니다. 자기오해가 있다. ‘멸시’와 ‘과대평가’는 타인을 향해 있다. 그런데 이 두 감정이 ‘나’를 향할 때 어떤 일이 벌어질까? 자기오해가 발생한다. 스스로를 ‘멸시’하고 스스로 ‘과대평가’할 때, ‘나’를 오해하는 상태에 이르게 된다. 먼저, ‘멸시’가 자신을 향하게 되었을 때를 생각해보자.
자기비하(비루함)란 슬픔 때문에 자신에 대하여 정당한 것 이하로 하찮게 여기는 것이다. (에티카, 제 3부, 감정의 정의29)
‘멸시’가 자신을 향할 때 ‘자기비하’가 된다. “내 주제에 뭘 할 수 있겠어” ‘자기비하’의 상태다. 이런 ‘자기비하’는 오해다. ‘희선’은 늘 열심히 살았다. 어려운 가정 형편에도 불구하고 열심히 공부해서 직장을 얻었다. 하지만 그녀는 항상 새로운 상황을 맞이할 때마다 “내 주제에 뭘 할 수 있겠어”라며 ‘자기비하’에 빠지기 일쑤다. 즉, 그녀는 “슬픔 때문에 자기에 대하여 정당한 것(주어진 문제들을 힘껏 극복했던 ‘나’) 이하로 하찮게 여겼다.” 이는 오해다. 자기오해.
‘자기비하’라는 오해는 왜 발생할까? ‘자기비하’는 오해가 남긴 오해다. ‘멸시’라는 오해가 남긴 오해. “계집애 주제에 공부한다고 뭐가 달라질 것 같아” 유년 시절, 그녀의 아버지는 술만 먹으면 그녀를 ‘멸시’(오해)했다. 그녀의 ‘자기비하’(오해)는 아버지의 ‘멸시’(오해)가 남긴 상흔이다. ‘희선’은 아버지의 ‘멸시’(오해)가 남긴 “슬픔 때문에 자기에 대하여 정당한 것이 이하로 하찮게 여기는” ‘자기비하’(오해)에 빠졌다. 아버지의 오해(멸시) 때문에 그녀 자신도 스스로를 오해(자기비하)가 된 셈이다.
스피노자의 ‘거만’
거만이란 자신에 대한 사랑 때문에 자신에 대하여 정당한 것 이상으로 대단하게 여기는 것이다. (에티카, 제3부, 감정의 정의28)
‘과대평가’가 자신을 향할 때 ‘거만’이 된다. “내가 못 하는 건 없어!” 거만의 상태다. ‘거만’이라는 흔한 감정 역시 오해다. ‘민섭’은 공부, 운동, 연애 그것이 무엇이든지 진지하게 최선을 다해본 적이 없다. 하지만 그는 새로운 상황을 맞이할 때마다 “내가 못 하는 건 없어!”라며 ‘거만’에 빠진다. 즉, 그는 “자신에 대한 사랑 때문에 자신에 대하여 정당한 것(뭐든 제대로 해본 적 없는 ‘나’) 이상으로 대단하게 여겼다.” 이는 역시 오해다. 자기오해.
‘거만’이라는 오해는 왜 발생할까? ‘거만’은 유아적인 오해다. ‘자기비하’라는 오해가 외부에서 온다면, ‘거만’이라는 오해는 내부에서 온다. ‘민섭’은 어떻게 ‘거만’에 빠졌을까? 자신에 대한 과도한 사랑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는 어떻게 자신을 과도하게 사랑하게 되었을까? 외부로 나가지 않고 자신 안에만 머물렀기 때문이다. 그는 공부도, 운동도, 연애도 진지하게 하지 않았다. 그것은 ‘거만해서’ 아니라, ‘거만하기 위해서’였다.
‘민섭’의 과도한 자기애는 외부의 타자와 관계하지 않았기 때문에 만들어진 유아적인 자기애다. 세상에 자신 혼자뿐인 사람은 자신을 과도하게 사랑할 수밖에 없다. 세상에서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자신뿐이니까. 진지하게 타자(공부·운동·연애)를 만나면 알게 된다. 세상에 사랑받을 만한 사람이 너무 많다는 사실을. ‘거만’은 과도한 자기애로 “자신에 대해 정당한 것 이상으로 대단하게” 여기게 된 오해다. ‘거만’은 타자를 경험하지 못해 발생한 병리적 정서 상태다. 스피노자 역시 이런 ‘거만’을 광기의 일종으로 본다.
오해를 잘 다루는 법
이제 우리의 질문으로 돌아가자. “오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질문에 답하기 전에 먼저 오해는 필연적이며 영원하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즉 오해가 없는 순수한 세계를 꿈꾸지 않기. 이것이 오해를 잘 다루는 시작점이다.
1. 오해로 얼룩진 관계 떠나기
‘멸시’의 관점에서 오해를 다루는 법을 살펴보자. ‘멸시’는 오해다. 우리에게 슬픔을 주는 오해. 이런 오해(멸시)를 받을 때 우리는 그 오해를 풀려고 한다. “사실 부모님이 편찮으셔서 일찍 퇴근한 거에요.” 오해(멸시)가 풀릴까? 부질없는 짓이다. ‘멸시’는 논리적 오류가 아니라 감정적 오류이기 때문이다. 팀장은 논리적 이유로 그녀를 오해한 것이 아니다. 감정적 이유(미움)로 오해한 것이다. 그러니 논리적 오해는 풀려도 정서적 오해(멸시)는 계속된다.
‘멸시’를 다루는 원론적 방법은 간명하다. ‘멸시’(오해)하고 싶지 않다면 미워하지 않으면 되고, ‘멸시’(오해) 받고 싶지 않다면 미움의 대상이 되지 않으면 된다. ‘멸시’는 ‘미움’에서 오니까. 때로 원론적 이야기는 이토록 공허하다. 누군들 미워하고 싶어서 누군가를 미워할까. 또 누군들 누군가의 미움의 대상이 되고 싶겠는가. 우리네 현실에서는 불쑥 누군가가 미워지고,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내가 누군가의 미움의 대상이 되어버리지 않던가.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멸시’의 관계를 떠나야 한다. 오해(멸시)를 풀려고 할 필요 없다. 오해(멸시)를 풀려고 할 때 더 오해가 쌓이는 법이다. 오해(멸시)를 풀려면 오해(멸시)를 되새김해야 한다. 그 사이에 ‘미움’이 더 쌓이기 마련이다. 그 ‘미움’만큼 다시 ‘멸시’는 커진다. 이것이 오해(멸시)를 풀려고 하면 오해(멸시)가 더 쌓이는 이유다. 오해에서 벗어나고 싶다면, ‘멸시’의 관계를 떠나는 방법뿐이다. 그 떠남의 방법과 속도는 각자의 사정과 형편에 맞게 조절해야겠지만, 근본적인 방법은 떠남이다.
이는 ‘자기비하’를 막는 방법이기도 하다. ‘자기비하’가 무엇인가? 타인의 ‘멸시’의 시선이 내면화되어 나 자신을 ‘멸시’하게 되는 정서 상태 아닌가. 우리가 ‘멸시’의 관계를 떠나면 그 타인의 시선을 내면화할 일도 없다. 그러면 자연히 ‘자기비하’(자기오해)를 할 일도 현저히 줄어들게 된다. 타인의 ‘멸시’를 속에 있으면서 자신을 ‘멸시’하지 않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인간은 타자의 영향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는 존재니까 말이다. 그러니 ‘자기비하’에서 벗어나고 싶다면, 가장 먼저 ‘멸시’의 관계를 떠나야 한다.
2. 오해 속으로 뛰어들기
‘과대평가’라는 오해는 어떻게 할까? 이 오해는 우리에게 기쁨을 주는 오해다. 그래서 우리를 구원하는 오해다. 사랑에 빠졌을 때를 생각해 보라. 그때 얼마나 많은 오해를 하고 또 받았던가. 비만인 그를 듬직한 남자라고 오해해 주었고, 그녀의 까만 피부를 섹시함으로 오해해주지 않았던가. 이런 오해보다 더 큰 기쁨을 주는 일이 또 어디 있을까? 오해 속으로 자신을 던져야 한다. 과대평가하고 또 과대평가 받으려고 애를 써야 한다.
오해를 벗어나려는 것이 아니라 오해 속으로 뛰어들어야 한다. 놀랍게도, 이것이 오해를 잘 다루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우리는 ‘멸시·자기비하·과대평가·거만’이라는 네 가지 오해를 알고 있다. 이 중 세 가지, 즉 ‘멸시·자기비하·거만’은 우리를 슬픔으로 내모는 오해다. 슬픔을 유발하는 이 세 가지 오해는 모두 ‘과대평가’라는 오해를 통해서 극복될 수 있다.
‘과대평가’에 빠진 사람을 생각해 보라. 그 사람은 누군가를 ‘멸시’하지도 않고, 누군가의 ‘멸시’를 능히 견뎌낼 수 있다. 당연하지 않은가? ‘사랑’에 빠진 이는 누군가를 ‘증오’하지 않기 때문에 ‘멸시’하지 않는다. 또한 ‘사랑’에 빠진 이는 자신을 향한 누군가의 ‘멸시’ 정도는 웃으며 흘러버릴 수 있다. 그 ‘멸시’를 넘어설 정도로 이미 ‘과대평가’ 받고 있으니까.
‘자기비하’도 마찬가지다. 자신을 하찮은 사람으로 오해하는 사람이 있다. 이는 ‘과대평가’를 받아 본 적이 적기 때문이다. 깊은 사랑으로 ‘과대평가’ 받아 본 이들은 자신을 긍정할 수 있다. “태어나줘서 고마워!” 이런 엄청난 과대평가를 받아 본 사람에게 ‘자기비하’는 없다. “계집애 주제에 공부한다고 뭐가 달라질 것 같아” 아버지의 ‘멸시’가 남긴 ‘자기비하’도 눈 녹듯 사라진다. 그렇게 오해(자기비하)는 오해(과대평가)로 극복 가능하다.
‘거만’ 역시 마찬가지다. ‘거만’은 잠시의 기쁨 뒤에 파멸의 슬픔을 주는 감정이다. ‘거만’은 필연적으로 파멸로 치닫게 된다. ‘나보다 수영을 잘하는 사람은 없어’라고 확신하는 사람이 익사하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이런 ‘거만’ 역시 ‘과대평가’로 극복할 수 있다. 거만한 이들은 타자는 없고 자신만 존재하는 세계에 사는 자기성애자narcissist다.
이들은 언제 그 허황된 자기애를 멈출 수 있을까? 타자를 발견할 때다. 결코 내 마음대로 좌지우지할 수 없는 타자. ‘과대평가’할 수밖에 없는 ‘사랑’하는 타자. 그런 타자를 만나게 되었을 때, ‘거만’이라는 자기오해는 물거품처럼 순식간에 사라질 수밖에 없다. 진정한 타자, 혹은 진정한 사랑의 시작이 지독한 위축감으로 찾아오는 것도 그래서다. 하지만 위축감은 결코 슬픔이 아니다. 자신의 ‘거만’을 치유해줄 슬픈 기쁨이다.
‘오해’(멸시·자기비하·거만)는 ‘오해’(과대평가)로 극복할 수밖에 없다. 오해 때문에 삶이 힘들 때, 오해를 벗어나려고 해서는 안 된다. 그때 우리는 더 큰 오해에 휩싸이게 마련이다. 차라리 과감하게 오해 속으로 뛰어들어야 한다. ‘과대평가’라는 기쁨의 오해 속으로 말이다. 노파심에서 할 말이 있다. ‘사랑’이 끝나서 ‘과대평가’마저 끝나면 어쩌나 고민할 필요는 없다. 찬란했던 ‘과대평가’의 시간이 지났을 때 기적을 경험하게 된다. ‘과대평가’를 받았던 모습이 진짜 나의 모습이 되어 있는 기적. 하나의 ‘사랑’이 지나가면 우리는 더욱 아름다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