넘쳐나는 ‘자기애’는 ‘자기증오’이다.
“자신을 사랑할 줄 알아야 해” 지금은 자기애가 넘쳐나는 시대다. 섹시한 화장, 근사한 옷, 성형수술, 다이어트로 외모를 꾸미며 말한다. “나를 사랑하기 때문에 나를 꾸미는 거예요.” 외모만 그런가? 자상하고 세련된 화술, 근면하고 성실한 삶(오운완·미라클모닝)으로 일상을 꾸미며 말한다. “나를 사랑하기 때문에 내 일상을 가꾸는 거예요.” 이런 말보다 허황된 자기기만이 또 어디 있을까. 놀랍게 이들은 자신을 사랑하기보다 자신을 미워하는 쪽에 가깝다.
이들의 자기애는 왜 자기증오일까?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사랑하는 이들을 만난 적이 있는가? 그들은 외모와 일상에 집착하지 않는다. 그들은 화장, 옷, 성형수술, 다이어트에 별 관심이 없고, 자상하고 세련된 말투나 근면하고 성실한 삶에도 별 관심이 없다. 그들은 때로 후줄근하게 입고 다니며 다이어트 같은 것은 하지 않는다. 또 그들은 때로 무심하고 투박하게 말하고, 며칠 놀거나 낮잠을 자기도 한다.
그들은 어떻게 그럴 수 있는 걸까? 있는 그대로의 자신이 충분히 사랑스럽기 때문이다. 있는 그대로의 ‘나’가 충분히 만족스럽기 때문에 ‘나’의 외모나 일상에서 특별히 무엇인가를 더하거나 뺄 필요가 없다고 느끼는 것이다. 오직 있는 그대로의 ‘나’를 미워하는 이들만 ‘나’의 외모나 일상에서 자꾸만 무엇인가를 더하거나 빼려고 집착할 뿐이다.
역설적이게도, 넘쳐나는 자기애는 자기미움이다. 외모나 일상에 집착하는 이들이 끝내 행복이 아니라 불행에 이르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자기증오를 자기애로 오해한 필연적 결과다. ‘나’를 사랑하기에 외모와 일상을 가꾼다고 믿지만, 사실 그것은 ‘나’를 증오한 결과일 뿐이기 때문이다.
스피노자의 ‘자기애’와 ‘자기만족’
“자신을 사랑할 줄 알아야 해” 이보다 더 옳은 말도 없지만, 동시에 이보다 더 공허한 말도 없다. 누군들 ‘나’를 사랑하고 싶지 않겠는가? 하지만 자꾸만 ‘나’의 밝음보다 어둠이 더 크게 보이는 것을 어쩌랴. 자기기만적 자기애를 넘어 진정한 자기애를 위해 물어야 한다. “어떻게 나를 사랑할 수 있을까요?” 먼저 스피노자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자신을 고찰함으로써 생기는 기쁨은 자기애 또는 자기만족이라고 불린다. (에티카, 제 3부, 정리 55, 주석)
스피노자는 ‘나’를 고찰하면서 생기는 기쁨을 ‘자기애’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 ‘자기애’는 ‘자기만족’의 다른 이름이라고 말한다. 즉, ‘나에 대해 만족하는 마음’(자기만족)이 ‘나를 사랑하는 마음’(자기애)이라는 말이다. 일견 옳은 말이다. 자신에 대해서 만족하는 사람이 자신을 사랑하지 않을 리 없다. 자신의 외모(나)에 만족하는 사람이 자신을 사랑하지 않을 리 없다. 자신의 일상(나)에 만족하는 사람이 자신을 사랑하지 않을 리 없다. 그 모습이 무엇이든, ‘나’에 대해서 만족하는 사람은 자신을 사랑하게 된다. 스피노자는 이 ‘자기만족’을 이렇게 정의한다.
자기만족이란 인간이 자신과 자신의 활동능력을 고찰하는 것에서 생기는 기쁨이다. (에티카, 제 3부, 감정의 정의 25)
‘자기만족’은 ‘나’(자신과 자신의 활동능력)에 대해 알아가면서 느끼게 되는 기쁨이다. 쉽게 말해,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역량)과 자신이 할 수 없는 것(무능)에 대해서 알아가면서 느끼는 기쁨이 바로 ‘자기만족’이다. 이 기쁨을 누리는 만큼 자신을 사랑(자기애)하게 된다. 스피노자의 논의는 이렇게 도식화할 수 있다. ‘자기이해=자기만족=자기애’ 즉, ‘나’에 대해 잘 이해하고 있는 사람은, ‘나’에 대해서 만족하고, 그러한 ‘나’는 자신을 사랑할 수 있다.
‘자기만족’이 어려운 이유
자기 기만적 자기애가 아닌, 진정한 ‘자기애’는 ‘자기만족’이다. 바로 여기서 우리는 자기 기만적 자기애가 왜 그리 흔한지, 그리고 동시에 진정한 ‘자기애(자기만족)’가 왜 그토록 어렵고 드문지에 대해서 알 수 있다. 스피노자는 ‘자기만족’과 ‘자기애’에 관련하여 이렇게 말했다.
정신은 자기 자신 및 자신의 활동 능력을 고찰할 때, 기쁨을 느낀다. 그리고 정신이 자기 자신 및 자신의 활동능력을 보다 명확하게 표상할수록 그만큼 큰 기쁨을 느낀다. (에티카, 제 3부, 정리 53)
우리는 자신의 활동능력을 고찰할 때, 즉 자신을 이해할 때 기쁨을 느낀다. 하지만 그건 내가 할 수 있는 것에 관해서일 때만 그렇다. 운동을 잘하는 나. 공부를 잘하는 나. 노래를 잘하는 나. 옷을 잘 입는 나. 날씬 나. ‘나’의 이러한 활동능력, 즉 ‘나’의 역량을 고찰할 때만 기쁨을 느낀다. 하지만 반대로, 운동을 못하는 나. 공부를 못하는 나. 노래를 못하는 나. 옷을 못 입는 나. 뚱뚱한 나. 이런 ‘나’의 이러한 활동능력, 즉 ‘나’의 무능을 고찰할 때는 기쁨은 고사하고 온갖 슬픔에 빠져들게 된다.
스피노자의 ‘자기애(자기만족)’은, 쉽게 말해 주제파악(자기이해)을 하면서 느끼는 기쁨이다. 우리는 자신의 ‘밝음’(장점·역량·아름다움)을 고찰할 때만 기쁨을 느낄 뿐, 자신의 ‘어둠’(단점· 무능·추함)을 고찰할 때는 슬픔을 느낀다. 그래서 주제파악을 하면 할수록 기쁨은커녕 점점 더 슬퍼진다. 바로 이것이 자기 기만적 자기애가 넘쳐나는 이유고, 동시에 진정한 자기애는 드문 이유다. 세상 사람들은 대부분 주제파악(자기이해)은 하고 싶지 않지만, 동시에 ‘나’를 사랑하고 싶기 때문이다.
‘자기애’가 없으면 ‘위축’된다.
‘자기 기만적 자기애가 무엇이 문제인가?’ 이렇게 물을 수 있다. 자신의 ‘어둠’만 보며 자신을 미워하는 것보다 자신의 ‘밝음’만 보며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 더 나은 것 아니냐고 항변할 수 있다. 얼핏 설득력 있어 보이지만, 문제는 그리 간단치 않다. ‘나’를 대하는 세 가지 태도가 있다. ‘자기증오’, ‘자기 기만적 자기애’, ‘자기애(자기만족)’. ‘자기증오’는 명백한 슬픔이고, ‘자기애’는 명백한 기쁨이다. 그런데 ‘자기 기만적 자기애’는 모호하다. ‘자신을 속이더라도, 자신을 사랑할 수만 있다면 좋은 것 아닌가?’라고 생각할 여지가 있다.
하지만 ‘자기애(자기만족)’가 아니라면, 즉 ‘자기증오’도, ‘자기 기만적 자기애’도 모두 슬픔이다. 왜 그런가? ‘자기애(자기만족)’이 없는 이들은 정서적으로 굉장히 취약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 정서적 취약함은 ‘위축’이라는 감정으로 찾아온다. 자기애(자기만족)이 없는 이들, 즉 자기증오나 자기 기만적 자기애에 빠져 있는 이들은 언젠가 닥칠 수밖에 없는 크고 작은 삶의 곤경 앞에서 쉽게 위축되곤 한다.
자기만족은 우리가 자기의 활동능력을 고찰하는 것에서 생기는 기쁨으로 해석되는 한에 있어서 겸손(위축감)과 대립된다. (에티카, 제 3부, 감정의 정의 26, 해명)
스피노자의 ‘겸손’은 예의나 배려 같은 긍정적인 의미가 아니다. 몸과 마음이 쪼그라드는 ‘위축감’이다. 스피노자에 따르면, ‘자기만족’과 ‘겸손(위축감)’은 반대 짝 감정이다. 즉, ‘자기애’(자기만족)가 얕은 사람은 쉽게 위축되고, ‘자기애’(자기만족)가 깊은 사람은 어떤 상황에서도 좀처럼 위축되지 않고 당당하다. 반면 ‘자기증오’에 빠진 사람은 늘 어딘지 모르게 주눅 들고 위축되어 있다. ‘자기 기만적 자기애’를 가진 이들은 얼핏 당당해 보이지만, 이는 마음 깊은 곳에 위축을 숨기고 있는 것일 뿐이다. 이는 스피노자가 말한 ‘겸손(위축감)’의 정의를 살펴보면 쉽게 이해된다.
겸손(위축감)이란 인간이 자신의 무능이나 무력함을 고찰하는 것에서 생기는 슬픔이다. (에티카, 제 3부, 감정의 정의 26)
‘자기애(자기만족)’가 있는 사람은 “자신의 활동능력을 고찰”하면서 자신의 ‘유능’뿐만 아니라 ‘무능·무력함’에서도 기쁨을 느낄 수 있다. 하지만 ‘자기애(자기만족)’가 없다면 “자신의 무능이나 무력함을 고찰”할 때 슬픔에 휩싸여 ‘위축감’(겸손)을 느낄 수밖에 없다. 이것이 ‘자기애(자기만족)’가 있는 이는 자신의 ‘어둠’을 턱턱 들어내지만, ‘자기증오’나 ‘자기 기만적 자기애’에 빠져 있는 이는 자신의 ‘어둠’을 감추려 전전긍긍하는 이유다. 그들은 늘 위축감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다.
‘자기증오’에 빠진 이들은 자신의 ‘어둠’에 잠식당한 이들이다. 그래서 위축된다. ‘자기 기만적 자기애’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애써 ‘어둠’을 억압(외면)하고 ‘밝음’ 뒤로 숨는 이들이다. 그래서 얼핏 당당한 것처럼 보이지만 이내 다시 위축될 수밖에 없다. 프로이트의 전언처럼, “억압된 것은 반드시 돌아오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자기애’가 있는 이들은 ‘어둠’에 잠식당하지도, ‘밝음’ 뒤로 숨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의 ‘어둠’과 ‘밝음’을 모두 공정하게 긍정한다. 이는 너무나 당연한 일 아닌가? 자신을 사랑하는(자기만족·자기애) 이들은 위축될 일이 없고,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는 이들은 쉽게 위축되니까.
‘자기만족’과 ‘자기애’는 칭찬에 달려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자기증오’ ‘자기 기만적 자기애’ 너머 ‘자기애(자기만족)’에 이를 수 있을까? ‘자기애’는 무엇인가? 자신의 ‘밝음(장점·역량·아름다움)’과 ‘어둠(단점·무능·추함)’을 모두 긍정하는 일이다. 달리 말해, 자신의 ‘밝음’과 ‘어둠’을 고찰하면서 기쁨을 느끼는 일이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밝음’이 아니라 ‘어둠’이다. 자신의 ‘밝음’에 대해서 긍정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다. 문제는 ‘어둠’ 아닌가? 자신의 ‘어둠’에 대해서 긍정하는 것은 좀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니 ‘자기애’에 이르는 길은 자신의 ‘어둠’의 긍정하는 일이라고 바꿔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이게 어디 쉬운 일이던가? 자신의 ‘어둠’을 고찰하면서 기쁨을 느끼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소심한 나. 돈 없는 나. 뚱뚱한 나. 이런 나를 떠올리면 어떻게 기쁨을 느낄 수 있겠는가? 한번도 자기애에 이르러 본 적 없는 이들에게 이는 불가능한 일처럼 보일지도 모르겠다. 스피노자는 ‘자기애(자기만족)’이라는 기쁨에 이르는 길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
이 기쁨(자기만족)은 인간이 타인으로부터 보다 많은 칭찬받는 것을 표상함에 따라 더욱더 강렬해진다. (에티카, 제 3부, 정리 53, 계)
스피노자에 따르면, 인간은 타인으로부터 칭찬받을 때 ‘자기애(자기만족)’가 점점 더 커진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우리를 좀처럼 칭찬하지 않는다. 드물게 칭찬하더라도, 우리의 ‘밝음’에 대해서만 칭찬하지 않던가. 우리의 ‘어둠’에 대해서는 칭찬하는 일은 거의 없다. “넌 소심해서 안 돼” “그 돈 벌어서 결혼도 못해” “못생겼으면 살이라도 빼” 우리의 ‘어둠’에 대해서는 칭찬은 고사하고 비난이 쏟아지기 일쑤다. 이것이 우리가 온전한 ‘자기애(자기만족)’에 도달하지 못하고, 너무 쉽게 ‘자기증오’, ‘자기 기만적 자기애’에 빠지게 되었던 이유 아니었던가.
어둠마저 밝히는 칭찬
그렇다면 ‘자기애(자기만족)’에 도달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일까? 세상에는 수많은 ‘타인’이 있다. 그들 중 대부분은 우리의 ‘어둠’에 대해서 비난하거나 우리의 ‘밝음’에 대해서 관심이 없다. 드물게 우리의 ‘밝음’에 칭찬하는 이들이 있다. 그보다 더 드물게 세상의 타인 중 우리의 ‘어둠’에 대해서 칭찬을 해주는 이가 있다. 그 타인은 누구일까? 우리를 사랑해주는 타인이다.
어린 나이에도 ‘자기애(자기만족)’에 이른 이들이 있다. 키도 작고, 공부도 못하고, 사교성도 없는 아이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기애(자기만족)’가 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아이의 부모가 항상 말해주었기 때문이다. “네 작은 키가 사랑스러워” “공부 좀 못하면 어때” “모든 친구들이랑 친해질 필요는 없어” 부모는 아이의 ‘어둠’까지 칭찬해주었다. 그 칭찬은 사랑이다.
‘밝음’에 대한 칭찬은 사랑이 아닐 수 있다. 하지만 ‘어둠’에 대한 칭찬은 반드시 사랑이다. 오직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할 때만 상대의 ‘어둠’마저 밝게 보이니까 말이다. ‘어둠마저 밝히는’ 칭찬을 듣고 자란 아이는 씩씩하게 말한다. “키가 작은 게 뭐 어때서” “공부 대신 좋아하는 일을 잘하면 되지” “친구는 마음이 통하는 한 둘이 면 충분해” ‘어둠마저 밝히는’ 칭찬을 흠뻑 맞고 자란 아이는 ‘자기애(자기만족)’를 갖고 있다.
이는 당연한 귀결이다. ‘어둠마저 밝히는’ 칭찬은 ‘자기이해’를 더 넓히고, 그렇게 넓혀진 ‘자기이해’는 ‘자기애(자기만족)’가 되기 때문이다. 이제 왜 우리에게 ‘자기애(자기만족)’가 없거나 작은지 알겠다. ‘어둠’에 대해서 칭찬받아본 적이 없거나 적어서다. 그래서 애써 자신의 ‘어둠’을 은폐하고 ‘밝음’만 보려고 애를 쓰며 살았던 것 아닌가? 그러니 ‘자기이해’가 넓어질 리가 없고 동시에 ‘자기애(자기만족)’ 역시 넓어질 수 없었던 것이다.
오직 ‘어둠마저 밝히는’ 칭찬만이 ‘자기애’를 깊고 크게 한다. 그 사랑이 가득한 칭찬만이 자신의 ‘어둠’마저 파악(자기이해!)할 수 있게 해주니까 말이다. 그 넓혀진 ‘자기이해’만큼, ‘자기만족’을 하게 되고, 그만큼 ‘자신을 사랑’하게 된다. 한 사람의 ‘자기애(자기만족)’은 그렇게 깊어지고 커진다. 하지만 우리는 여기서 다시 한번 좌절감을 느끼게 된다. 좋은 부모를 만나지 못했다면 ‘자기애’은 이미 물 건너간 것처럼 느껴지니까 말이다.
‘자기애’는 셀프가 아니다.
좋은 부모를 만나지 못했다고 해도 걱정할 것 없다. 우리의 ‘어둠’마저 칭찬해줄 사람을 지금 만나면 된다. 부모만큼, 혹은 부모처럼 우리를 사랑해줄 사람을 만나면 된다. 그때 우리는 그 사람에게서 칭찬받아 ‘자기이해’가 깊어지고, ‘자기만족’을 하게 되고, ‘자기애’가 깊어진다. 여드름과 축져진 뱃살 때문에 나 자신을 도저히 사랑할 수 없었던 시절이 있었다. 매일 아침 거울 보면 짜증이 났고, 길을 걷다 쇼윈도 비친 내 모습을 보면 한없이 위축되었다.
그렇게 ‘자기만족’은커녕 자기혐오에 빠져 있을 때, 한 친구를 만났다. 우리의 사랑이 깊어가던 어느 날이었다. 그녀가 거울 앞에서 잔뜩 찡그리고 있는 내 모습을 보았나보다. 그녀는 덕지덕지 난 여드름과 축져진 뱃살을 사랑스럽게 쓰다듬어 주며 말했다. “여드름 있는 네가 좋아. 뱃살도 사랑스러워.” 처음 들어 보는 말이었다. 먹먹해서 코끝이 찡했다. 정말 신기하게도 그날부터 여드름과 뱃살이 예전만큼 혐오스러워 보이지 않았다.
조금씩 기쁘게 주제파악(자기이해)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 나 자신이 조금씩 더 만족스러워졌고(자기만족), 그렇게 나는 나를 조금 더 사랑할 수 있게 되었다(자기애). 그녀의 어둠을 밝히는, 그 사랑 그득한 칭찬 덕분이었다. 이제 어떻게 자신을 사랑할 수 있는지 알겠다. ‘자기애’(자기만족)는 셀프가 아니다. 누군가의 사랑이 필요하다. 어둠을 밝히는 칭찬을 선물해줄 사랑. 그 선물을 받을 때만 우리는 ‘자기애’를 가질 수 있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 하물며 진정한 ‘자기애’라는 선물이 공짜일 리 없다. ‘나’의 ‘어둠’마저 칭찬해줄 ‘너’를 찾아 떠나야 한다. 그리고 그 ‘너’를 만난다면, ‘너’가 ‘나’의 어둠까지 밝혀줄 칭찬을 할 수밖에 없도록 만족시켜주어야 한다. ‘나’의 사랑에 만족한 ‘너’가 ‘자기만족’을 선물해준다. 역설적이게도. ‘자기만족(자기애)’은 타인만족에서 온다. 사랑받기 위해서는 사랑해야 한다. ‘자기만족’은 타인만족에서 오고, ‘자기애’는 타인에게 사랑받은 기억에서 온다. 자신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싶다면 방법은 하나뿐이다. ‘너’를 온몸과 온 마음을 다해 사랑할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