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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 : 지혜롭게 살 수 있을까요?

누가 세속적 성취가 의미 없다고 하는가?

삶에서 지혜로워지는 것보다 중요한 일은 없다. 지혜로운 자만이 진정한 행복이 무엇이며, 또 그 행복에 어떻게 이를 수 있는지 알게 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삶의 이치를 안다고 자부하는 이들은 종종 말한다. ‘세속적 성공은 무의미하다.’ 많은 돈을 벌어 명품을 두르고 좋은 차와 넓은 집을 갖는 것. 큰 명성을 얻어 가는 곳마다 선망의 시선과 환대를 받는 것. 이런 세속적인 성공은 무의미해서 피해야 할 것들이라고 말한다.


그들의 말은 옳은가? 그들은 삶의 진실을 반만 아는 헛똑똑이들이다. 세속적 성공은 필요하며 또 중요하다. 돈과 명예 그 자체 때문이 아니다. 세속적 성공 뒤에야 비로소 진정으로 지혜롭게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묻게 되기 때문이다. 세속적 성공은 지혜와 모순되는 것이 아니라, 지혜로 가는 과정의 일부다.


‘세속적 욕망→세속적 성취→지혜’ 예외적인 경우가 아니라면, 삶의 성숙은 이 과정을 겪는다. 세속적 성취가 없다면 세속적 욕망에 휩싸여 지혜롭게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물을 겨를조차 없다. 이것이 세속적 성취가 필요하며 중요한 이유다. 세속적인 성취 없이 추구하는 지혜로움은 대체로 (세속적 성공으로부터) 도피이거나 (세속적 성공 하지 못한) 자기합리화다. 크고 작은 세속적인 성취에 다다른 이들은 자연스럽게 지혜를 묻게 된다.


물론 세속적인 성취에 도달한다고 해서 모두 지혜로워지는 건 아니다. 세속적 성취는 지혜를 향한 시작일 뿐, 종착지가 아닌 까닭이다. 지혜에 도달하고 싶다면, 지혜 그 자체에 대해 고민해보아야 한다. 세속적 성공 너머 지혜로운 삶을 원한다면 이 질문은 중요하다. “지혜롭게 산다는 것은 어떻게 사는 것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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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피노자의 ‘지혜’


스피노자는 ‘지혜’를 어떻게 정의했을까?


각자가 자기의 이익을 추구하기 위하여, 즉 자신의 존재를 보존하기 위하여 더 많이 노력하고 그것을 더 많이 달성할수록 그만큼 더 유덕하다. (에티카, 제 4부, 정리 20)


스피노자가 말하는 ‘덕德·virtue’이 바로 ‘지혜’다. 즉, “유덕有德하다”는 ‘지혜가 있다’는 의미다. 이제 스피노자의 ‘지혜’가 어떤 것인지 알 수 있다. “각자가 자기의 이익을 추구”하고 “자신의 존재를 보존하기 위하여 더 노력하고 그것을 더 많이 달성할수록 그 만큼 더 유덕(지혜)하다” 당황스럽게도, 스피노자는 ‘지혜로움’이 ‘이기심利己心’이라고 말하는 셈이다. 흔히 생각하기에, 지혜로움은 이기심으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진 것 아닌가? 스피노자는 이기심이야말로 진정한 지혜로움이라고 단호하게 말한다.


자기를 보존하려는 노력은 덕의 제일의 유일한 기초다. (에티카, 제 4부, 정리 22, 계)


스피노자에 따르면, 자신의 이익을 추구해서 자신의 존재를 보존하려는 노력이 지혜로움(덕)이다. 그런 이기적 노력이 ‘덕’(지혜)의 제일 중요한 동시에 유일한 기초라고 말한다. 목이 마를 때 물을 마시고, 추울 때 따뜻한 곳에 가야 자신을 보존할 수 있다. 그러니 물을 마시려는, 따뜻한 곳을 찾으려는 노력이 스피노자의 지혜로움이다. 그렇다면,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는 ‘이기적’인 이들 역시 지혜롭다고 말할 수 있는 것 아닌가? 이 생경하고 의아한 논리를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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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롭게 사는 것은 이기적으로 사는 것이다.


‘재원’은 자수성가해서 많은 돈을 벌었다. 그는 돈이 되는 일이라면 다른 사람의 처지나 입장 같은 것은 전혀 고려하지 않고 돈을 벌었다. ‘재원’은 지혜로운가? 그렇다. 어떻게 그렇게 말할 수 있을까? ‘세속적 욕망→세속적 성취→지혜’ 삶의 성숙 과정을 생각해보라. 좋은 싫든, 돈을 벌고 싶은, 명예를 얻고 싶은, 유명해지고 싶은 등등의 세속적 욕망은 이미 우리 속에 들어와 있다. 그것이 우리 내면의 현실적 조건이다.


이 현실적 조건을 건너뛰고 뒤엉킨 내면을 정돈할 수는 없다. 세속적 성취가 없다면 드글거리는 세속적 욕망은 좀처럼 잔잔해지지 않는다. 오직 원하는 것을 얻을 때만 마음이 잔잔해지고 동시에 삶의 다음 문을 열 수 있다. 미친 듯이 갈증이 날 때 물을 마셔야 마음이 잔잔해지고, 동시에 다음에 할 것들이 떠오르는 것처럼 말이다. 뒤엉킨 내면을 정돈하지 못하면 지혜로움 애초에 없다. 돈을 벌려고 혈안이 된 이들은, 적어도 지혜로 가는 과정에 있다는 측면에서 지혜롭다고 말할 수 있다. 이에 대해 스피노자는 이렇게 말한다.


어떤 사람도 존재하고 행동하며 생활하는 것, 즉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것을 욕구하지 않고서는 행복하게 존재하고 선량하게 행동하며, 또한 선량하게 생활하기를 욕구할 수 없다. (에티카, 제 4부, 정리 21)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것(세속적 욕망)을 욕구하지 않고서” 행복할 수도 없고 선량하게 행동할 수도 없다. 또 그런 생활을 원할 수도 없다. 당연하지 않은가. 며칠을 굶은 사람이 행복할 리 없고, 그가 남을 돕는 행동을 할 수도 없고, 또 그런 행동을 하고 싶은 마음도 있을 리 없다. 돈과 명예를 바라는 이들은 누가 뭐래도, 일단 크고 작은 돈과 명예를 얻어야 한다. 인생은 야박하다. 어느 하나 건너뛸 수 있는 것이 없다. 지혜를 원한다면, 먼저 세속적 욕망을 충족시켜야 한다. “돈과 명예는 중요하지 않아!”라며 어설프게 지혜로운 척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지혜롭지 못한 행동이다. 그들은 계속 배고픈 상태이기 때문에 결코 다음 무대로 넘어갈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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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들 이기적으로 살면 세상이 엉망되지 않을까?


‘지혜롭게 산다’는 것은 ‘이기적으로 산다’는 것이다. 이 낯선 이야기를 논리적으로 수긍한다 해도 하나의 의구심이 더 남는다. ‘다들 이기적으로 살면 세상이 개판이 되지 않을까?’ 누군들 이기적으로 살고 싶지 않을까? 하지만 세상은 함께 사는 곳 아닌가? 그러니 다들 자신의 이기심만을 충족하려 했을 때 지혜로움은커녕, 세상은 아수라장이 될 것 같다. 이에 대해 스피노자는 뭐라고 답해줄까?


참으로 유덕하게 행동하는 것은, 우리에게 있어서는 - 자기의 이익을 추구하는 것을 기초로 하여- 이성의 지도에 따라서 행동하고 생활하고 자신의 존재를 보전하는 것일 뿐이다. (에티카, 제 4부, 정리 24)


스피노자에 따르면, 진정으로 지혜롭다는 것은 “자기의 이익을 추구하는 것을 기초”로 하여 “이성”의 지도”에 따르는 것이다. 쉽게 말해, 자기 이익을 추구하되, ‘이성’에 따라서 자기의 이익을 추구하는 것. 그것이 지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성’이다. ‘이성’을 따른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스피노자의 ‘이성’은 ‘생각하는 능력’ 그 자체를 의미하지 않는다. 생각하는 능력을 이용해 온전한 (혹은 더 큰) 기쁨(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것. 그것이 스피노자의 ‘이성’을 따르는 것이다.


덕을 따르는 사람은 누구나 자기를 위하여 추구하는 선을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도 욕구한다. (에티카, 제 4부, 정리 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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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지혜)을 따르는” 이는 “자기를 위하여 추구하는 선(기쁨)을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도 추구한다.” 왜 그런가? 스피노자에 따르면, 인간이라는 존재는 크게 두 가지 특징을 가진다. 첫째, 인간은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노력한다. 둘째, 인간은 감정의 동조 현상을 겪는다. 그래서 지혜로운 자는 이기적으로 살지만 동시에 타인에게 상처(해악)를 주지 않는다.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기 위해 주변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면, 그 타인은 슬픔에 빠질 것이고, 그 슬픔은 다시 자신에게 되돌아오게 된다. ‘이성’을 따르는 지혜로운 자들은 이 사실을 알고 있다.


우리 역시 이러한 삶의 진실을 이미 알고 있지 않은가? 돈은 우리를 이롭게 한다. 하지만 그 돈을 벌기 위해 연인에게 상처를 주고, 돈을 지키기 위해 아픈 부모를 외면할 때 우리는 기쁨을 느낄까? 즉 진정으로 이기심을 충족할 수 있을까? 결코 그렇지 않다. 연인·부모의 슬픔이 내게 전해져 자신을 이롭게 하기는커녕 더 큰 슬픔에 빠지게 될 뿐이다. 오직 지혜롭지 못한 이들만 자신의 이익을 위해 타인에게 상처를 준다. 이제 스피노자의 이 말을 이해할 수 있다.


이성에 근거하여 다른 사람들을 이끌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충동적으로가 아니라 인애적으로 및 선의적으로 행동하며, 그의 마음은 지극히 확고하다. (에티카, 제 4부, 정리 37, 주석)


‘이성’에 근거한 노력, 즉 온전한 (혹은 더 큰) 기쁨을 얻으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결코 충동적(깊이 생각하지 않음)으로 타인에게 상처 주지 않는다. 그들은 인간을 사랑하는 어질고 자비로운 마음을 갖고 선의로 행동하며, 그 마음은 결코 변하지 않는다. 지혜로운 자는 더 큰 이익이 무엇인지 분명히 알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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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로운 자의 삶 : 용기와 관용


‘재원’은 이제 더이상 돈벌레가 아니다. 자신의 주변 사람들에게 인애적이고 선의로 대한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조금 더 이기적인 사람이 되었기 때문이다. ‘재원’은 삶의 진실을 조금씩 알아가고 있다. 자신의 이익(기쁨)을 극대화하기 위해서는 타인들에게 기쁨을 주어야 한다는 삶의 진실을. ‘재원’은 지혜로워졌다. ‘재원’은 어떤 과정을 거쳐서 지혜로워진 것일까? 지혜로운 자의 삶을 엿봄으로써 지혜로움으로 가는 방법을 알아보자.


정신에 관계하는 감정에서 생기는 온갖 활동을 정신의 힘으로 간주하며, 그것을 용기와 관용(아량)으로 나눈다. (에티카, 제 3부, 정리 59, 주석)


지혜로운 자는 ‘정신의 힘’이 강하다. 스피노자는 지혜로운 자의 ‘정신의 힘’을 ‘용기’와 ‘관용’으로 나눈다. 즉, 지혜로운 자는 ‘용기’ 있으며 동시에 ‘관용’ 있는 사람이다. 스피노자의 ‘용기’과 ‘관용’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용기(과감성)와 관용(참을성)과는 조금 다르다. 지혜로운 자의 ‘용기’와 ‘관용’은 무엇일까?


용기란 각자가 이성의 지령에 따라만 자신의 유를 보존하려고 노력하는 욕망으로 이해한다. 관용이란 각자가 오직 이성의 지령에 따라서만 다른 사람들을 돕고 그들과 친교를 맺으려고 애쓰는 욕망으로 이해한다. 그러므로 행위자의 이익만을 의도하는 행동을 용기로, 다른 사람들의 이익도 의도하는 행동을 관용으로 여긴다. 절제, 금주, 위험에 처했을 때, 정신의 침착 등은 용기인 반면, 예의, 자비 등은 관용의 일종이다. (에티카, 제 3부, 정리 59, 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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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용기라는 말은 타인과 관계될 때 사용한다. 다른 사람이 시도하지 못 하는 일을 하는 사람을 용기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스피노자의 ‘용기’는 오직 자신과 관계된 정신의 힘이다. “행위자의 이익만을 의도하는 행동”이 ‘용기’다. 자신의 존재를 보존하려고 이기적 욕망을 만족하려는 정신의 힘이 ‘용기’다. 예를 들어, 지혜로운 자는 게임·술을 알맞게 즐기고, 집에 도둑이 들어도 침착함을 유지한다. 지혜로운 자는 ‘용기(자신을 보존하려는 욕망)’ 있기 때문이다. ‘용기’ 없는 자들만 게임과 술에 중독되고, 도둑이 들면 당황하여 어쩔 줄 모른다.


‘관용’은 무엇일까? 흔히, ‘관용을 가져’는 참을성을 가지라는 말이다. 스피노자의 ‘관용’은 이와 다르다. 그것은 “다른 사람들을 돕고 그들과 친교를 맺으려는 욕망”이다. ‘관용’은 “다른 사람의 이익을 의도하는 행동”이다. 그렇다면 스피노자의 ‘관용’은 ‘이기심’이 아니라 ‘이타심’일까? 그렇지 않다. ‘관용’은 “이성의 지령”에 따라 “다른 사람의 이익을 의도하는 행동”인 까닭이다. 힘들게 번 돈으로 부모님 여행을 보내주는 것. 일을 줄이고 연인을 만나는 것. 친구를 위해 돈을 빌려주는 것. 사회적 약자들을 위해 기부하는 것. 이런 행동이 ‘관용’이다. ‘관용’ 역시 이기심이다. 기뻐하는 부모, 연인, 친구, 사회적 약자들을 보며 자신 역시 기쁨을 느끼게 되기 때문이다.


지혜로운 삶은 ‘용기’와 ‘관용’이 있는 삶이다. 지혜로워지는 방법론도 이제 알 수 있다. ‘용기’를 갖고 ‘관용’적으로 살려고 노력하면 된다. 일차적으로 ‘용기’를 가지고 ‘나’의 기쁨을 크게 하면 된다. 그리고 더 나아가 ‘관용’을 가지고 다른 사람들에게 슬픔을 주지고 않고 기쁨을 나눠주면 된다. 그렇게 ‘나’에게 되돌아올 기쁨을 크게 하면 된다. 진정으로 이기적으로 살려고 노력할 때 지혜로운 삶에 도달할 수 있다. ‘함께 사는 세상이기에 이기적으로 살면 안 된다’는 말은 무지다. 함께 사는 세상이기에, 더욱 이기적으로 살아야 한다. 진정한 이기심이 바로 지혜로움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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