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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행 : 닥쳐올 불행을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요?

불행은 폭탄이다.

“우리 그만 헤어지자” “권고사직 대상이세요.” “엄마가 많이 아프셔” “암 말기입니다.”


불행은 폭탄이다. 두 가지 폭탄이 있다. 콩알탄과 수류탄. 어떤 폭탄은 콩알탄처럼 따끔할 뿐이지만, 어떤 폭탄은 수류탄처럼 치명적이다. 우리의 불행이 그렇지 않은가? 감당할 수 있는 불행이 있고, 감당하기 어려운 불행이 있다.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는 경우, 아침 출근길에 버스가 오지 않는 경우, 커피를 엎질러 옷이 더럽혀지는 경우. 이것은 불행이지만 콩알탄같은 불행이기에 누구나 능히 감당할 수 있다.


하지만 수류탄처럼 쉬이 감당하기 어려운 불행도 있다. 갑작스러운 이별 통보나 권고사직, 부모의 별세, 시한부 판정. 이런 불행은 우리네 삶을 멈출 정도로 치명적이다. 우리는 이런 불행들을 피하고 싶다. 사랑하는 이와 헤어지고 싶지 않고, 안정적인 직장을 계속 다니고 싶고, 부모는 영원히 내 곁에 있기를 바라며, 건강한 삶이 유지되기를 바란다.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이것이 우리네 마음 깊은 곳에 자리 잡은 불안의 원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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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견된 불행, 불안의 원인


“이유 없이 불안하다.” 흔히 말한다. 틀렸다. 이유 없는 불안은 없다. 이유를 숨겨두었기에 불안한 것일 뿐이다. 세상의 모든 불행은 예견된 불행이다. 불행은 그냥 폭탄이 아니다. 시한폭탄이다. 언제 터질지 모를 뿐, 언젠가는 터진다는 것을 우리는 이미 다 안다. 다만 다가올 불행이 콩알탄인지 수류탄인지, 그 타이머에 시간이 얼마나 남았는지를 모를 뿐이다. 이는 얼마나 두려운 일인가?


불행이 언젠가는 터질 것이라는 사실을 아는 것은 두려운 일이다. 그것이 너무 두렵기에 우리는 그 예정된 불행을 억지스럽게 외면한다. 이것이 우리네 삶이 불안한 근본적인 이유다. 두려움과 불안의 차이는 무엇인가? 대상이 명확할 때는 두려움을 느끼고, 대상이 명확하지 않을 때 불안을 느끼게 된다. 맹수는 두려움의 대상이지만, 가난은 불안의 대상인 것도 그래서다. 우리의 불안은 두려움의 대상(예견된 불행)을 긴 시간 외면(회피)했기에 발생한 마음이다.


예견된, 하지만 닥쳐올 시기와 크기를 가늠할 수 없는 불행은 우리의 불안이 된다. 어쩌면, 우리네 삶의 가장 큰 불행은 바로 이 불안인지도 모른다. 닥쳐올 사건(이별·해고·사고·질병·사별…)으로 인한 불행은 삶의 어느 순간을 어둡게 채색하지만, (닥쳐올 불행한 사건을 외면해서 발생한) 불안은 삶 전체를 지독한 어둠으로 채색하기 때문이다. 시한폭탄을 품은 우리네 삶은 고해苦海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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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피노자의 불행 대처법


사건으로서의 불행이든, 불안으로서의 불행이든, 우리는 늘 불행에 노출된 존재다. 이는 인간이 피할 수 없는 삶의 조건이다. 그러니 불행에 대한 고찰 없이 진정으로 삶을 잘 살아내기는 요원한 일이다. 불행이 오기 전에 불행에 대해 고찰해야 한다. “예견된 불행 앞에서 어떻게 해야 할까요?” 스피노자의 이야기를 직접 들어보자.


극단적인 불법 때문에 생기는 분노는 그다지 쉽게 정복되지는 않을지라도, 비록 약간의 동요는 있겠지만, 그러한 것을 미리 숙고하지 않을 경우보다 훨씬 짧은 시간 안에 정복될 것이다. (에티카, 제 5부, 정리 10, 주석)


스피노자는 “극단적인 불법 때문에 생기는 분노”에 대하여 말한다. 이는 분명 불행의 한 종류다. 10년 동안 저축했던 돈을 어느 날 밤에 도둑맞았다고 해보자. 그때 치미는 분노는 쉽게 정복될 수준의 분노가 아니다. 스피노자는 그 분노를 다루는 방법을 제시한다. 분노하게 만들었던 상황을 미리 숙고하라는 것. 그러면 그 분노가 “훨씬 짧은 시간에 그 정복될 것”이라고 말한다. 스피노자는 두려움이라는 불행 역시 이런 방식으로 잘 다룰 수 있다고 다음과 같이 말한다.


두려움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우리는 같은 방식으로 용기에 대하여 생각해야 한다. 즉 흔히 발생하는 삶의 위험들을 헤아리고 자주 표상하여, 침착함과 정신의 강함으로써 그것들을 가장 잘 회피하고 극복할 수 있는 방법들을 생각해두어야 한다. (에티카, 제 5부, 정리 10, 주석)


이별, 교통사고, 권고사직, 부모의 별세, 시한부 판정. 이같이 갑작스럽게 터진 불행은 우리를 두려움에 몰아넣는다. 그 두려움에 사로잡혀 무엇을 어떻게 할지 갈피조차 잡을 수 없게 된다. 스피노자에 따르면, 이 “두려움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미리 “용기에 대하여 생각해야 한다.” 스피노자가 말하는 용기란 무엇인가? “흔히 발생하는 삶의 위험들을 헤아리고 자주 표상(생각)하여, 침착함과 정신의 강함으로써 그것들을 가장 잘 회피하고 극복할 수 있는 방법들을 생각”해두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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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행의 시뮬레이션

스피노자의 예견된 불행에 대처하는 방법은 간명하다. 자주 “용기에 대하여 생각”하면 된다. 이는 쉽게 말해, ‘불행의 시뮬레이션(모의실험)’이다. 즉, 예견된 불행(흔히 발생하는 삶의 위험)을 미리 시뮬레이션(헤아리고 자주 표상)해보는 일이다. 그 시뮬레이션 과정을 통해, “침착함과 정신적 강함”이 마련되고, 또한 예견된 불행을 “가장 잘 회피하고 잘 극복할 수 있는 방법”들도 마련되기 때문이다. 이는 실제 우리네 삶에서도 그대로 적용된다.


운동선수들의 훈련법 중 ‘이미지 트레이닝’이라는 것이 있다. 중요한 시합을 앞두고 그 시합 내용을 머릿속으로 떠올려보는 일이다. 닥쳐올 고난과 돌발적인 위기 순간을 반복적으로 떠올려보는 것이다. 이런 훈련을 한 선수와 그렇지 않은 선수는 실제로 시합에서 큰 차이를 보인다. 정신과 신체는 동시적(심신평행론!)이기 때문에 머릿속으로 떠올린 일들은 일정 정도 몸의 반응 촉발하기 때문이다.


이 ‘이미지 트레이닝’이 바로 스피노자의 표현을 빌리자면, “용기에 대하여 생각”하는 일, 즉 ‘불행의 시뮬레이션’인 셈이다. 이는 운동선수들에게만 해당되는 일일까? 그렇지 않다. 예견된 불행(권고사직·부모의 별세·시한부 판정)을 자주 생각해본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다고 해보자. 그 둘이 예견된 불행을 대처하는 데는 현격한 차이가 있다. 불행이 자신만은 피해 갈 것처럼, 그 예견된 불행을 외면(회피)했던 이는 실제로 불행이 닥쳤을 때 삶을 주체할 수 없을 정도의 큰 혼란에 빠진다.


하지만 예견된 불행을 자주 시뮬레이션해 본 이는 다르다. 그는 실제로 불행이 닥쳐와도 혼란스러운 감정을 비교적 짧은 시간에 극복할 수 있다. 그 ‘불행의 시뮬레이션’ 과정에서 침착함과 정신력, 그리고 그 불행에 대처하는 구체적인 방법들이 충분히 마련되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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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행의 시뮬레이션’이 잘 안되는 이유

우리는 이제 불행에 대처하는 이론적 방법을 알았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불행을 잘 극복할 수 있을까? 쉽게 답할 수 없다. 왜 그런가? ‘불행의 시뮬레이션’은 그리 쉬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불행의 시뮬레이션’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고 해도, 실제로 그 시뮬레이션을 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감당할 수 있는 불행’ 예컨대, 길을 걷다 넘어지거나, 버스가 오지 않거나, 옷에 커피를 쏟는 불행이 별일 아닌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이 작은 불행이기 때문인가? 아니다. 이는 원인과 결과를 뒤집어 말하는 오류에 불과하다. 작은 불행이기에 감당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감당할 수 있기에 작은 불행이다. 그렇다면 어떤 불행이 ‘감당할 수 있는 불행’, 즉 작은 불행이 되는가?


‘감당할 수 있는 불행’은 비교적 손쉽게 자주 시뮬레이션할 수 있는 불행이다. 그래서 그것이 작은 불행일 수 있는 것이다. 아이가 넘어졌을 때 세상이 무너진 것처럼 우는 이유는 그 불행을 시뮬레이션해본 적이 적거나 없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감당할 수 없는 불행’이 큰일인 이유는 그것이 큰 불행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을 시뮬레이션해본 적이 없거나 적기 때문이다. ‘불행의 시뮬레이션을 통해 불행을 잘 극복할 수 있다’ 옳은 이야기다. 하지만 공허하다. 알지만 잘 안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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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행의 시뮬레이션’은 슬픔이다.


‘감당할 수 없는 불행’(이별·사고·권고사직·사별·시한부 판정)은 왜 손쉽게 자주 시뮬레이션하기 어려울까? 그 시뮬레이션은 하면 할수록 더 큰 슬픔에 빠져들기 때문이다. 연인에게 이별을 통보받고, 회사에서 잘리고, 부모가 죽고, 자신이 시한부 판정을 받는 생각을 거의 매일 한다고 해보자. 그의 정서 상태는 어떻게 될까? 슬픔에 빠져 극도로 침잠되거나 우울해질 것이 분명하다. 이는 자연스러운 일인가? 전혀 그렇지 않다.


스피노자에 따르면, 인간은 자연스럽게 기쁨을 가까이하고 슬픔을 멀리하려는 존재 아닌가? 그런 인간이 ‘감당할 수 없는 불행’을 미리 자주 시뮬레이션하는 것은 자연스럽지 않다. 오히려 그런 시뮬레이션은 하지 않는 것이 자연스럽다. 그 시뮬레이션을 할 때마다 기쁨(명랑·유쾌·활력)은 줄고 슬픔(좌절·침울·우울)에 빠질 테니까. 사람들이 ‘감당할 수 없는 불행’을 시뮬레이션하지 않는 데는 다 이유가 있었던 셈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감당할 수 없는 불행’은 그저 마음 깊은 곳 불안의 원인인 채로 남겨 두어야 할까? 스피노자는 ‘불행의 시뮬레이션’을 하면서 주의해야 할 점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다음과 같은 사실을 주의해야 한다. 우리의 사고와 심상들을 정리하는 데 있어서 항상 각 사물의 좋은 점들에 주의하여 우리가 항상 기쁨의 감정에 근거하여 행동하도록 결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에티카, 제 5부, 정리 10, 주석)


불행의 시뮬레이션은 중요하다. 하지만 잘 안된다. 그 시뮬레이션이 슬픔을 주기 때문이다. 이에 스피노자는 “흔히 발생하는 삶의 위험들을 헤아리고 자주 표상”하되, “각 사물의 좋은 점들에 주의하여 우리가 항상 기쁨의 감정에 근거하여 행동”하면 된다고 말한다. 쉽게 말해, “불행의 시뮬레이션을 기쁘게 하라!”는 것이다. 여기서 다시 의아함을 느끼게 된다. ‘불행의 시뮬레이션’을 어떻게 기쁘게 할 수 있다는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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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쁨의 시뮬레이션


스피노자가 말하는 기쁨의 시뮬레이션에 대해서 살펴보자.


어떤 사람이 자기가 지나치게 명예를 추구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면, 그는 명예의 올바른 이용에 대해 생각하고, 어떤 목적을 위하여 그것을 추구해야 하는지, 또한 어떤 수단으로 그것을 획득할 수 있는지에 대해 생각해야 한다. 그러나 명예의 악용과 허망함과 인간의 변덕, 또는 이런 종류의 다른 것들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는 게 좋다. (에티카, 제 5부, 정리 10, 주석)


지나치게 관심을 받으려는(명예를 추구하는) 이가 있다고 해보자. 그는 명예라는 기쁨을 얻기 위해 온갖 시뮬레이션을 할 것이다. 그런데 이 시뮬레이션에는 두 가지 방향이 있다. 첫째는 불특정 다수에게 관심을 받으려 발버둥 치는(관종의) 시뮬레이션이다. 이는 “명예의 악용과 허망함”(슬픔)을 주는 시뮬레이션이다. 스피노자의 말처럼, “명예의 악용과 허망함” 같은 것들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는 게 좋다. 그런 시뮬레이션은 슬픔만 크게 할 테니까. 그렇다면 어떻게 시뮬레이션해야 할까?


또 하나의 시뮬레이션 방향이 있다. “명예의 올바른 이용”(기쁨)을 통한 시뮬레이션이다. 이는 “어떤 목적을 위해 그것을 추구하는지, 또한 어떤 수단으로 그것을 획득할 수 있는지 생각”하며 명예를 추구하는 시뮬레이션이다. 이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는 것인가? 자신이 좋아하는 존재(일·사람)를 통해 관심을 받는 시뮬레이션을 하면 된다.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통해 사람들에게 관심을 받으려 하거나, 사랑하는 이들과의 관계에서 관심을 받으려는 시뮬레이션을 하면 된다.


이 역시 명예를 과도하게 추구하는 시뮬레이션이 될 수 있지만, 결코 슬픔을 크게 하는 시뮬레이션이 되지는 않는다. 오히려 기쁨을 크게 하는 시뮬레이션이다. 자신이 사랑하는 일을 하며 관심을 받고, 자신이 사랑하는 이들에게 관심받는 상상은 그 자체로 기쁨이니까 말이다. 이런 방식의 시뮬레이션은 기쁨을 주기 때문에 손쉽게 자주 할 수 있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불행(과도한 명예 추구)을 잘 극복할 수 있는 침착함과 정신적 강함을 얻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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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행의 시뮬레이션을 기쁘게 하라!

이 기쁨의 시뮬레이션 방식은 ‘불행의 시뮬레이션’에도 적용할 수 있다. 나는 예견된, 동시에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은 불행을 종종 생각한다. ‘나’의 죽음과 소중한 ‘너’의 죽음. 그것은 분명 슬픈 일이다. ‘나’라는 존재가 사라지는 것에 대한 두려운 일이다. 그리고 ‘나’의 죽음 뒤에 남겨진 이들이 겪을 아픔을 떠올려보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이다. 이는 누구에게나 쉬이 감당하기 어려운 슬픔이다. 이보다 더 두렵고 고통스러운 일이 있다.


소중한 ‘너’의 죽음이다. 소중한 이가 사라지는 것보다 큰 슬픔은 없다. 그리도 사랑하며 아꼈던 이의 부재, 그 지독한 상실감을 껴안고 하루를 또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보다 두렵고 고통스러운 일은 없다. 바로 이것이 세상 사람들이 ‘너의 죽음’과 ‘나의 죽음’에 대한 시뮬레이션을 금기처럼 여기는 이유일 테다. 그것을 시뮬레이션을 진지하게 반복했다가는 극심한 침잠과 절망, 우울에 빠져버릴 것을 직감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큰 불행마저 기쁘게 시뮬레이션할 수 있다.


어느 날, 시한부 선고를 받은 나를 떠올린다. 조용히 집으로 돌아와 집필하던 원고를 잘 마무리한다. 시간이 허락한다면, 사랑하는 이들과 조용한 곳으로 잠시 여행을 떠난다. 그리고 남겨진 시간이 있다면, 좌충우돌하며 살아온 내 곁을 긴 시간 지켜주었던 소중한 사람들을 떠올리며 그들에게 작은 편지를 한 통씩 쓰고 싶다. ‘나의 죽음’이 슬프지만은 않다. 깊고 차분한 기쁨이 있다. 큰 기쁨을 주었던 ‘소중한 이’와 ‘글쓰기’를 함께 떠올리며 나의 죽음을 시뮬레이션했기 때문이다.


어느 날 ‘소중한 너의 죽음’을 듣는 순간을 떠올린다. 한참을 운다. 한참을. 눈물이 마를 즈음, 집필실로 돌아와 ‘너’와 함께 했던 기쁜 순간들을 떠올린다. 그 순간들이 얼마나 소중했는지를 한 글자씩 한 글자씩 눌러가며 글을 쓴다. 한 권의 책이 될 때까지. ‘소중한 너의 죽음’이 슬프지만은 않다. 잔잔하고 먹먹한 기쁨이 있다. 큰 기쁨을 주었던 ‘소중한 너와의 기억’과 큰 기쁨을 주었던 ‘글쓰기’를 함께 떠올렸기 때문이다. 이것이 내가 ‘불행의 시뮬레이션’을 기쁘게 하는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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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이라는 불행에 대처하는 자세


인간의 정신은 신체와 함께 영원히 파괴될 수 없고, 오히려 그 중의 영원한 어떤 것이 존재한다. (에티카, 제 5부, 정리 23)


우리에게 예견된 불행 중 가장 큰 불행은 무엇인가? 바로 죽음이다. ‘나’의 죽음과 ‘너’의 죽음. 우리가 불행의 시뮬레이션을 기쁘게 할 수 있다면, 죽음이라는 가장 큰 불행마저 넘어설 수 있다. 스피노자의 말처럼, “인간의 정신은 신체와 함께 영원히 파괴될 수 없고”, “그중 영원한 어떤 것이 존재한다.” 우리가 불행의 시뮬레이션을 기쁘게 할 수 있게 될 때, 우리는 그 “영원한 어떤 것”이 무엇인지 깨닫게 된다. 그때 우리는 죽음이 결코 끝이 아니라는 삶의 진실에 이르게 된다.


물론 이런 ‘불행의 시뮬레이션’을 한다고 하더라도, 막상 지독한 불행(‘너’의 죽음·‘나’의 죽음)이 실제로 들이닥치면 생각처럼 평온하게 잘 대처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분명한 건, 예견된 ‘불행의 시뮬레이션’을 해 본 적이 적거나 없는 이들보다, 그것을 충분히 해 본 이들이 닥쳐온 불행 앞에서 더 차분하게 침착함을 유지하며 그 불행을 잘 극복해 나갈 수 있을 것이란 사실이다.


다른 예견된, 동시에 감당하기 어려운 불행 역시 마찬가지다. 퇴학, 이별, 실직, 이혼, 사고 등등. 그 불행을 기쁜 방식으로 시뮬레이션할 수 있으면 된다. 여기에 하나의 정답은 없다. 감당할 수 없는 불행도, 그것을 기쁜 방식으로 다루는 방식도 저마다 다 다를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에게는 모두 저마다의 불행과 기쁨이 있으니까 말이다. 그러니 ‘불행의 시뮬레이션’을 기쁘게 할 수 있는 자신만의 방법을 찾아 나가야 한다. 그때, 비로소 우리는 닥쳐올 불행에 잘 대처할 수 있을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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