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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 : 진정한 행복은 무엇일까요?

우리는 왜 행복하지 못할까?

“좋은 대학에 가고 싶어요.” “취업하고 싶어요.” “결혼하고 싶어요.” “여행을 가고 싶어요.” “돈을 많이 벌고 싶어요.” 사람들은 저마다 바라는 것이 있다. 하지만 그들이 바라는 것은 저마다가 아니다. 하나다. 행복이다. 대학, 취업, 결혼, 여행, 돈을 원하는 것은 모두 행복을 원해서다. 우리가 저마다 소망하는 모든 것들은 “행복해지고 싶어요.”의 변주일 뿐이다. 문제는 그 행복에 도달하기가 매우 어렵다는 데 있다.


거의 모든 사람이 행복을 바라지만 행복에 도달하는 이는 거의 없다. 왜 그런가? 욕망하는 것(대학·취업·결혼·여행·돈…)을 얻게 되는 이들이 적기 때문일까? 좋은 대학, 대기업, 세계 일주, 많은 돈 등등 간절히 소망했던 것들을 성취한 이들을 적지 않게 알고 있다. 그들 중 어느 하나 깊은 미소로 “나 지금 행복해”라고 말하는 이가 없었다. 그들은 모두 또 다음 성공을 위해 조급하게 움직일 뿐이었다.


왜 행복은 그리도 어렵고 드문가? ‘행복’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이다. 이것이 우리가 당장 눈앞에 있는 성취들에 목을 매는 이유이기도 하다. 행복이 무엇인지 모르기에, 대학만 가면, 취업만 하면, 결혼만 하면, 여행만 가면, 돈만 벌면 행복해질 것이라 오해하게 된다. 서글프게도 그 성취 끝에 도착하면 알게 된다. ‘이런 것들로는 행복해질 수 없구나.’ 그토록 간절히 욕망했던 것들을 모두 얻게 되었다고 해도, 그 끝에 행복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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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피노자의 ‘행복’


진정으로 행복을 바란다면 처음부터 다시 물어야 한다. “진정한 행복은 무엇일까요?” 스피노자는 ‘행복’에 대해 어떤 이야기를 해줄까? 스피노자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인생에 있어서 가장 유익한 것은 우리의 지성 또는 이성을 가능한 한 완전하게 회복하는 것이며, 오로지 이것에만 인간의 최고의 행복이 있다. (에티카, 제 4부, 부록 4)


스피노자에 따르면, “이성을 가능한 한 완전하게 회복하는 것”이 바로 ‘행복’이다. 이는 우리가 완전한 ‘이성’을 갖게 되면 행복해진다는 의미다. 여기서 스피노자가 말하는 ‘이성’은 무엇인가? 이는 분과학문에서 요구하는 논리·수리·추론·판단 능력이 아니다. 스피노자의 ‘이성’은 세계와 삶을 이해하는 지혜이다. 조금 더 정확히 말해, 세계와 삶 사이에서 ‘선’(기쁨)을 따르고 ‘악’(슬픔) 멀리하는 지성적 능력이다. 이 ‘이성’을 갖게 되면 행복에 이르게 될 것은 자명하다.


우리가 불행한 이유가 무엇인가? 복잡하고 혼란하며 모호한 세계와 삶 사이에서 무엇이 나에게 ‘기쁨’을 주고 ‘슬픔’을 주는 명확히 파악하지 못하기 때문 아닌가? ‘기쁨(돈·술)’을 준다고 믿고 따랐던 것이 ‘슬픔(탐욕·간암)’의 구렁텅이로 몰아넣고, ‘슬픔(운동·직언)’을 준다고 믿어서 피했던 것이 큰 ‘기쁨(건강·성숙)’을 준다는 사실을 때늦게 알게 되곤 한다. 그러니 완전한 ‘이성’(지혜)을 갖게 되면 ‘슬픔’은 없고 ‘기쁨’만 있는 상태, 즉 ‘행복’에 이르게 된다. 하지만 문제가 있다. “이성을 가능한 한 완전하게 회복하는 것”이 좀처럼 쉽지 않다는 것이다.


맛있는 음식을 먹는 ‘기쁨’(맛·향·포만감)을 생각해보자. 그것은 분명 ‘기쁨’이다. 하지만 그 ‘기쁨’이 계속되는 것은 아니다. 그 ‘기쁨’을 계속 누리다 보면, 어느 순간 ‘슬픔’(과식·소화불량·과체중)이 된다. 많은 이들은 ‘기쁨’맛·향·포만감)을 쫓다 ‘슬픔’(과식·소화불량·과체중)에 빠진다. 그들은 왜 ‘선’(기쁨)을 따르지 못하고 ‘악’(슬픔)에 빠진 것일까? ‘이성’(지혜)이 잘 작동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먹는 ‘기쁨’에 취해 점점 커지고 있는 ‘슬픔’(과식·소화불량·과체중)이 오는 것을 ‘이성’적으로 파악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성’이 잘 작동하는 이는 ‘기쁨’이 느낄 때까지 음식을 먹고, ‘슬픔’이 오기 전에 수저를 내려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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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피노자의 ‘제3종 인식’


그렇다면 이제 우리에게 남겨진 질문 이것이다. 잘 작동하지 않는 ‘이성’을 어떻게 회복할 수 있을까?


제3종 인식에서 존재할 수 있는 최고의 정신적 만족이 생긴다. (에티카, 제 5부, 정리 27)


스피노자에 따르면, 인간이 자신과 세상을 파악(인식)하는 지적 능력에는 네 단계(인식·제1종 인식·제2종 인식·제3종 인식)가 있다. 그중 가장 높은 차원의 지성적 능력이 ‘제3종 인식’이다. ‘제3종 인식’에 이르면 어떠한 혼란이나 오류 없이 ‘이성’이 온전하게 작동하게 된다. 즉, ‘제3종 인식’(이성)에 이르면 지혜로운(이성적인) 삶을 살게 된다는 의미다. 그래서 “제3종 인식에서 존재할 수 있는 최고의 정신적 만족(행복!)”이 생기는 것이다.


‘제3종 인식’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일까? 자연 전체가 모두 연결되어 있음을 알고, 그 연결들을 충분히 파악할 수 있는 상태다. 난해할 수 있으니 예를 들어보자. ‘나’와 친구는 연결(우정)되어 있다. 음악을 좋아하는 그 친구를 통해 ‘나’는 음악에 대해 알게 된다. 즉, 친구를 매개로 음악과 연결된다. 그리고 그 음악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다 사랑에 빠지게 된다. 즉, 그 음악을 매개로 연인과 연결된다. 또 그 연인을 매개로 꽃과 바다와 연결된다. (나-친구-음악-연인-꽃-바다…) 이러한 연결은 무한히 확장되며 끝내는 자연 전체에 이르게 된다.


스피노자가 말하는 ‘자연’은 바로 이러한 무한한 동시에 끊임없이 변화되는 연결 그 자체이다. 이 무한한 동시에 무상無常한 연결을 충분히 파악하게 되는 지성적 능력이 ‘제3종 인식’이며, 이것이 바로 스피노자가 말한 지혜로움(이성)이다. 이 ‘제3종 인식’은 쉬이 도달할 수 있는 지점이 아니다. 얼핏 이는 불가능한 일처럼 보이기도 한다. 무한히 연결되어 끊임없어 변화하고 있는 그 연결고리 전체(자연)를 어떻게 파악할 수 있단 말인가? 어떻게 이 불가능한 보이는 일, 즉, ‘제3종 인식’에 이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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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 공통개념의 확장


스피노자에 따르면 ‘공통개념’의 확장을 통해 ‘제3종 인식’에 있다. 이 ‘공통개념’은 무엇일까? 이는 쉽게 말해, ‘나’와 ‘타자’의 공통분모라고 할 수 있다. ‘나-친구’의 공통개념은 무엇일까? ‘같은 반’이다. 그 ‘공통개념’을 통해, ‘음악’이라는 새로운 공통개념이 생겼다. 또 그 ‘음악’이라는 공통개념을 통해, 사랑(연인)이라는 새로운 ‘공통개념’이 생기게 된다. 이렇게 ‘나’와 ‘타자’의 ‘공통개념’을 계속 확장해 나가면 어느 순간에 ‘제3종 인식’, 즉 지혜로움에 이르게 된다.


‘공통개념’이 더 크게 확장된 사람은 더 지혜로울 수밖에 없다. ‘공통개념’이 확장된 만큼, ‘나’의 확장으로서 ‘너’(세계)를 알아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의 확장이 아닌 상태로 ‘너’(세계)를 알아가는 것은 ‘지혜’가 아니라 ‘지식’이다. ‘지혜’와 ‘지식’의 차이가 무엇인가? ‘나’와 ‘너’가 연결되어 있다(나=너)는 사실을 깨달은 상태로 세상을 알아가는 것이 ‘지혜’이고, ‘나’와 ‘너’가 전혀 연결되어 있지 않다(나≠너)고 믿는 상태로 세상을 알아가는 것이 ‘지식’이다.


해양 생명학을 전공하는 두 사람이 있다. 한 명은 바다를 사랑했던 아버지를 따라 간 어느 노을 지는 바다에서 본 돌고래 떼를 잊지 못해서 그 전공을 선택했다. 또 한 명은 점수에 맞춰서 그 전공을 선택했다. 같은 공부를 하더라도, 전자는 ‘지혜’에 이르고, 후자는 ‘지식’만을 쌓게 된다. 왜 그런가? 전자는 나-아버지-바다-노을-돌고래…라는 ‘공통개념(나=너)’을 확장해 나갈 것이고, 후자는 그런 ‘공통개념’이 없기 때문이다.


‘지혜’로운 이는 타자(새계)와 기쁨과 슬픔을 나누지만, ‘지식’뿐인 자는 그러지 못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지혜’로운 이는 바다와 노을, 돌고래와 함께 웃고 울고, 또 그것들을 사랑하는 이들과도 기쁨과 슬픔을 나눈다. 하지만 ‘지식’만을 쌓은 이는 그럴 수 없다. 그에게 바다와 노을, 돌고래는 그저 학점을 위한 도구일 뿐이고, 그것들을 사랑하는 이는 자신과 아무 상관 없는 존재들일 뿐이기 때문이다. ‘나’와 세계는 연결되어 있으며, 그 연결들을 파악해가는 능력 바로 ‘제3종 인식’이며 ‘지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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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 전체의 공통개념으로 연결되어 있다.

자연 전체의 모든 존재는 ‘공통개념’을 매개로 모두 연결되어 있다. 다만 우리가 그 연결과 ‘공통개념’을 모를 뿐이다. 생각해보면 정말 그렇지 않은가? ‘나-너’는 ‘인간’이라는, ‘인간-원숭이’는 ‘직립보행’이라는, ‘동물-바다’는 ‘물’이라는 공통개념으로 연결되어 있다. ‘제3종 인식’은 ‘공통개념’을 확장해 나갈 때 도달하게 되는 지성적 능력이다. 그러니 ‘제3종 인식’에 가까워질수록 ‘공통개념’으로 이어진 자연 전체의 무한한 연결고리를 이해하게 된다.


‘나-너’의 ‘공통개념’(인간)에서, ‘인간(나·너)-원숭이’의 ‘공통개념’(직립보행)으로, 그리고 ‘동물(인간·원숭이)-소나무’의 ‘공통개념’(물·호흡)을 파악하게 된다. 더 나아가 ‘동식물(인간·원숭이·소나무)-자연물(비·바람·바다)’의 ‘공통개념’(탄소·산소·수소)을 파악할 수 있다. 이러한 파악을 무한히 이어 나갈 때, 궁극적인 지점에서 ‘자연 전체’(인간·원숭이·소나무·비·바람·바다…)의 ‘공통개념’(공空!·무상無常!·무아無我!)을 파악하게 된다.


이처럼, 자연 전체의 ‘공통개념’을 파악하여 자연 전체가 모두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과정에서 ‘제3종 인식’에 이르게 된다. 즉, ‘공통개념’을 확장하여 ‘자연물’들의 연결고리를 더 많이 파악하여 ‘자연’ 자체에 이르는 만큼 지혜에 가까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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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통개념’의 확장이 행복이다.


우리의 질문으로 돌아가자. 진정한 행복은 무엇일까? ‘제3종 인식’에 도달하는 것이다. 달리 말해, 자연 전체를 연결 짓는 ‘공통개념’을 확장해가는 것. 이것이 행복이다. 하지만 여전히 의아하다. ‘제3종 인식’이 실제 우리네 삶을 어떻게 행복하게 만들어 주는 것일까? 우선 스피노자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정신은 더 많은 것을 제2종 인식 및 제3종 인식을 써서 인식함에 따라서, 그만큼 나쁜 감정으로부터 작용을 받는 것이 덜하며, 또 그만큼 죽음을 덜 두려워한다. (에티카, 제 5부, 정리 38)


우리는 언제 행복하지 못한가? 탐식·분노·질투·증오·공포 같은 슬픔을 주는 “나쁜 감정”에 휩싸일 때다. 이때 ‘공통개념’을 확장하면 “그만큼 나쁜 감정으로부터 작용을 받는 것이 덜하게” 된다. 당연하지 않은가? 어떤 사람에게서 자신과 공통적인 면을 발견할 수 있는 사람은 그 사람으로 인해서 “나쁜 감정”(분노·질투·증오·공포)에 휩싸이지 않는다. 우리는 오직 자신과 그 어떤 공통적인 면도 발견할 수 없는 타자들로 인해, “나쁜 감정”에 휩싸이게 된다.


‘동환’과 ‘경재’가 있다. ‘동환’은 늘 평온하다. 그는 늘 음식을 적당히 먹는다. 또 갑자기 옆 차가 끼어들거나 직장 동료들의 무리한(혹은 무례한) 요구에도 평온한 미소를 유지한다. 반면 ‘경재’는 늘 분노와 짜증이 가득하다. 그는 항상 과식·폭식을 한다. 또 옆 차가 끼어들거나 직장 동료가 무리한(혹은 무례한) 요구를 하면 솟구쳐 오르는 분노와 짜증을 주체하지 못한다. 둘 중 누가 더 ‘행복’할까? 단연 ‘동환’이다. ‘경재’는 나쁜 감정(분노·짜증)에 더 크게 작용을 받아 하루를 망쳤다. 반면 ‘동환’은 ‘나쁜 감정’으로부터 덜 작용 받아서 자신이 원하는 일들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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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통개념’이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법


둘의 차이는 무엇일까? ‘공통개념’의 차이다. ‘동환’은 어떻게 항상 ‘기쁨’을 누릴 만큼만 음식을 먹을 수 있었을까? ‘음식(동물·식물)-나’ 사이의 ‘공통개념’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자신 역시 여러 종류의 기관(눈·코·입·심장·간…)으로 이뤄진 존재(동물)이고, 햇볕이 필요하고 호흡해야 하는 존재(식물)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동환’은 자연 안에서 ‘나-음식’이 ‘공통개념’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바로 이 때문에 필요 이상으로 음식을 먹지 않는다. 이것이 ‘동환’이 먹는 ‘기쁨’을 따르되, 과식의 ‘슬픔’을 피하는 행복한 상태에 있는 이유다.


‘동환’이 옆 차가 갑자기 끼어들어도, 동료들의 무리한(무례한) 요구에도 분노하지 않았던 이유도 마찬가지다. ‘나-운전자’, ‘나-동료’ 사이의 ‘공통개념’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동환’은 자신이 그렇듯 다른 운전자 역시 저마다 사정과 여건이 있을 수 있다는 것(공통개념)을 안다. 또 자신이 그렇듯 동료들 역시 고된 업무에 시달리는 노동자라는 것(공통개념)을 안다. 이런 ‘공통개념’을 더 많이 가진 이는 이해 못 할 일이 더 적기 때문에 ‘나쁜 감정’(탐식·짜증·분노·질투)에 덜 작용 받게 된다. 그래서 ‘행복’을 더 많이 누릴 수 있다.


‘경재’가 ‘불행’한 이유도 마찬가지다. ‘공통개념’을 형성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의 탐식, 분노, 짜증은 ‘공통개념’의 부재에서 기원했다. ‘나-음식’, ‘나-운전자’, ‘나-동료’ 사이에 공통개념이 없거나 현저히 적다. 쉽게 말해, 음식·운전자·동료는 자신과 아무 상관이 없는 존재라고 여기는 것이다. 바로 이 때문에 ‘경재’는 갖가지 ‘나쁜 감정’(탐식·짜증·분노·질투)에 휘둘리게 된 것이다. 당연하지 않은가? ‘자신’과 아무 상관 없다고 여기는 이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그의 삶은 탐식·짜증·분노·억울·질투·우울…같은 나쁜 감정에 더 많이 영향받게 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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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심을 줄여야 행복한 것이 아니라, 행복해야 욕심을 줄일 수 있다.

지혜로워진다는 것은, 더 타자들과 더 많은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이 스피노자가 말한 ‘이성’이며, 그 ‘이성’을 따를 더 큰 ‘행복’을 누릴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주의해야 할 점이 있다. 그것은 ‘욕심-행복’의 관계에 관한 것이다.


행복은 덕의 보수가 아니라 덕 그 자체이다. 우리는 욕심을 억제하기 때문에 행복을 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행복을 누리기 때문에 욕심을 억제할 수 있다. (에티카, 제 5부, 정리 42)


흔히 우리는 욕심을 억제해야 행복을 누릴 수 있다고 믿는다. ‘동환’이 행복한 이유를, 욕심을 억제했기 때문이라고 여긴다. 즉, 음식을 더 먹고 싶은 ‘욕심’, 목적지까지 빨리 가고 싶다는 ‘욕심’, 편하게 직장생활하고 싶다는 ‘욕심’을 억제했기 때문에 행복한 것이라 여긴다. 하지만 삶의 진실은 정반대다. ‘동환’은 행복하기 때문에 자연스레 욕심을 억제하게 된 것일 뿐이다. 이에 스피노자는 “행복은 덕의 보수가 아니라 덕 그 자체”라고 말한다.


‘덕’은 지혜다. 그러니 스피노자의 전언은 이렇게 바꿔 말할 수 있다. 점점 사라지는 지혜를 보수하려는 마음으로 행복해지는 것이 아니라, 지혜 자체가 이미 행복이다. 지혜로운 자는 ‘덕’(지혜=공통개념의 확장) 그 자체가 이미 행복임을 알고 있는 사람이다. 왜냐하면 지혜로운 자에게 ‘나’는 곧 ‘너’인 까닭이다. ‘남’을 따듯하게 대해주려는 마음이 곧 ‘나’를 따뜻하게 대하는 일임을 알고 있는 이가 지혜로운 자다.


그래서 지혜로운 자는 이미 충분히 ‘행복’하기에 애초에 과도한 ‘욕심’을 부릴 마음이 없다. 지혜로워질수록, 불필요한 욕심은 자연스레 줄어든다. 지혜로운 자는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지혜로운 자는 안다. ‘나’의 과도한 욕심으로 인해 발생한 타자들의 슬픔은 어떤 식으로든 ‘나’에게 되돌아올 것이란 사실을. 불필요한 욕심은 ‘지혜의 부재’의 결과일 뿐이다. ‘행복’을 원한다면, ‘욕심’을 줄이려고 하지 말고 매 순간 더 ‘지혜’로워지려고 노력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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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어디까지 ‘행복’해질 수 있을까?

‘공통개념의 확장→지혜(제3종 인식)→행복’ 이것이 스피노자가 말한 행복에 이르는 길이다. 이 길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뿐이다. 공통개념의 확장! ‘제3종 인식·지혜·행복’은 당장은 보이지 않는 지향점이다. 그 흐릿한 지향점을 향해 우리의 내디딜 한 걸음은 ‘공통개념의 확장’뿐이다. 지금 내 옆에 있는 존재들과의 ‘공통개념’을 발견하고, 그 ‘공통개념’을 조금씩 넓혀가는 것으로 ‘지혜’로워지고 그 지혜만큼 ‘행복’해질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디까지 행복해질 수 있을까?


스피노자에 따르면, ‘제3종 인식’의 궁극에 이르면 (인간에게 가장 나쁜 감정을 유발하는) 죽음마저도 덜 두려워하게 된다. 이것은 종교적인 허망한 이야기가 아니다. 스피노자의 논의를 따라가면, 적어도 논리적으로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더 많은 타자와 더 많은 공통개념을 발견하는 지혜는 어디까지 나아갈 수 있을까? 그 끝에는 필연적으로 자연 전체에 가닿을 수밖에 없다. 자연 전체(흙·물·바람·불 등)와 자신이 다르지 않다(공통개념!)는 것을 진정으로 깨달은 사람은 죽음이 두려울 리 없다.


‘제3종 인식=지혜=행복’이라는 삶의 진실을 깨달은 이는 집(자신과 다르지 않은 존재들이 사는 곳)으로 돌아가는 마음처럼 편안히 죽음을 맞이하게 될 테다. 자연 전체가 ‘공통개념’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삶의 진실을 진정으로 깨달은 이에게는 이해하지 못할, 받아들이지 못할 일은 없다. 이제 우리는 ‘행복’의 진실을 알게 되었다. 역설적이게도 그래서 ‘기쁨’보다 ‘슬픔’에 빠지게 될지도 모르겠다. 그 ‘행복’으로 가는 길이 얼마나 어렵고 고될지 직감하게 되기 때문이다.


더 많은 공통개념을 파악하는 일, 더 나아가 죽음마저 편안함으로 받아들이는 지혜를 얻는 과정은 얼마나 고되고 아픈 일이 될 것인가.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지 깨달은 자들은 그 삶의 진실 앞에 머뭇거릴 수밖에 없다. 진정한 ‘행복’을 깨달은 자는 필연적으로 절망적 직감을 마주할 수밖에 없는 까닭이다. 절망적 직감 앞에서 주저하고 있는 우리를 위해, 스피노자는 『에티카』를 끝내며 우리의 어깨를 두드려 준다. 나는 ‘행복’이 두려울 때, 스피노자의 이 말을 조용히 되뇐다.


이러한 목적지에 이르는, 내가 제시한 길은 몹시 험준하게 보인다. 하지만 그래도 발견될 수는 있다. 진실로, 이처럼 행복이 드물게 발견되는 것은 분명히 곤란한 일이다. 만일 행복(구원)이 눈앞에 있어서 큰 노력 없이도 발견될 수 있다면, 어떻게 거의 모든 사람이 그것을 등한시 할 수 있겠는가? 모든 고귀한 것은 어려울 뿐만 아니라 드물다. (에티카, 제 5부, 정리 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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