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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생 : 어떻게 희생하는 삶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희생을 강요하는 사회


“넌 하고 싶은 일만 하냐?” 우리가 자신의 욕망을 따르려 했을 때, 세상이 늘 던지는 질타다. 집, 학교, 직장 등 어디를 가더라도, 자신이 원하는 일을 하지 않기를 원하지 않는 일을 하기를 바라는 이들이 넘쳐난다. 이 질타는 ‘너는 왜 아무것도 희생하지 않느냐?’는 의미다. 희생이 무엇인가? 어떤 목적(혹은 사람)을 위하여 자신이 가진 (혹은 가질 수 있는) 것을 버리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 사회는 명백히 희생을 강요하는 사회다 ‘공부하라’ ‘군대 가라’ ‘취업하라’ ‘효도하라’ 이런 말들은 모두 희생의 강요다. 그 강요로 희생하며 살아본 이들은 안다. 희생하는 삶이 얼마나 불쾌하고 우울하고 절망스러운지. 몇몇 예외적인 경우가 아니라면, 공부하고, 입대하고, 취업하고, 효도하는 삶은 모두 희생하는 삶이다. 이런 희생하는 삶은 우리를 점점 더 불행의 나락으로 내몬다.


하지만 우리는 그런 희생을 단호하게 거부할 수도 없다. 희생을 거부하는 이들에게는 질타와 비난이 쏟아지고, 희생을 받아들이는 이들에게는 칭찬과 인정이 주어지기 때문이다. 그렇게 희생은 당연한 것을 넘어 훌륭한 것이 된다. 희생은 슬픔이고, 우리는 그 지독한 슬픔을 강요하는 사회에 산다. 그러니 지금 우리에게 중요한 질문이 하나 남겨진다. “어떻게 희생하는 삶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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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피노자의 ‘희생’


스피노자는 ‘희생’에 대해서 명시적으로 말한 바가 없다. 하지만 그의 사유체계를 통해서 ‘희생’에 관한 스피노자의 관점을 추론해볼 수 있다. 그 추론을 가능케 할 대목을 먼저 살펴보자.


정신은 자기의 능력이나 신체의 활동 능력을 감소시키거나 억제하는 사물을 표상할 때, 그러한 존재를 배제하는 사물을 가능한 마음에 떠올리려고 한다. (에티카, 제 3부, 정리 13)


인간은 자연스레 슬픔으로부터 멀어지고 기쁨으로 다가서려는 존재다. 그러니 인간의 정신은 자기의 능력이나 신체의 활동 능력을 감소·억제하는 사물을 생각할 때, 그 사물을 없애는 사물을 가능한 마음에 떠올리려고 한다. 즐겁게 게임 중인 있는 아이가 있다. “게임 그만하고 빨리 공부해!” 엄마가 말했다. 그때 그 아이는 엄마의 직장을 떠올리게 된다. 엄마가 빨리 직장으로 가기(존재의 배제)를 마음속으로 바라게 되기 때문이다. 이는 엄마의 잔소리가 아이의 신체 활동 능력을 감소·억제 시켰기 때문이다.


이제 스피노자가 희생을 어떻게 바라보았을지 추론할 수 있다. 희생은 기쁨에서 멀어지고 슬픔으로 다가서는 일 아닌가? 이는 스피노자가 바라보는 인간의 본성에 위배 된다. 스피노자에게 희생은 당연한 것도 훌륭한 것도 아니다. 희생은 지극히 부자연스러운 일이다. 오히려 희생하지 않는 것이 당연하며 자연스럽다. 우리의 정신은 신체 활동 능력을 감소·억제하는 사물(공부·군대·취업·효도)을 배제하는 쪽으로 자연스럽게 움직인다. 공부·군대·취업·효도를 생각할 때 온몸에 힘이 빠지지 않던가. 우리의 정신은 희생을 거부하는 쪽으로 쏠릴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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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생이 남기는 상흔, : 우울, 분노, 원망, 피해의식


희생하는 삶은 ‘자연’스럽지 않다. 그리고 ‘자연’을 거스르는 것(부자연스러운 것)은 반드시 문제가 된다. 즉, 희생하는 삶은 많은 문제를 불러일으킨다. 부모의 겁박으로 공부(희생)하는 아이는 어떻게 될까? 가장 먼저 그 공부하는 동안에 ‘우울’하다. 그런 희생이 지속될 때 ‘분노’와 ‘원망’이 쌓인다. “공부하라는 인간들 다 사라져버렸으면 좋겠어!” 인간은 자신이 원하는 일을 하지 못하고, 자신이 원하지 않는 일을 하게 될 때 ‘우울’, ‘분노’와 ‘원망’이 쌓일 수밖에 없다.


그뿐인가? 긴 시간 희생에 순응하느라 쌓인 ‘우울’, ‘분노’, ‘원망’이 뒤엉켜 시간이 지나면 터무니없는 ‘피해의식’이 된다. “공부(효도·군대·취업) 안 하는 인간들은 다 죽어야 돼!” 긴 시간 희생에 순응했던 이들은 희생하지 않는 이들 존재를 용납할 수 없다. 나만 억울하게 희생했다는 사실을 직감하게 될 때, 근거 없는 적개심에 사로잡히게 된다. 이는 희생이 남긴 ‘피해의식’ 때문이다. 긴 시간 희생하며 살았던 이의 내면이 흉측하게 뒤틀리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이처럼 희생은 다양한 방식으로 우리네 삶을 슬픔으로 몰아넣는다.


유쾌하고 명랑한 삶을 원한다면, 주어진 삶의 조건 아래서 최대한 희생을 거부하며 살아가야 한다. “희생하지 않아도 될까요?” 누군가 스피노자에게 묻는다면 그는 이렇게 답해줄 테다. “희생하지 말거라. 희생하는 삶은 우울하고 불쾌해서 한없이 슬픈 삶이다.” 하지만 의아한 지점이 있다. 때로 내 것을 기꺼이 내어놓으면서 유쾌하고 명랑해지는 기쁨의 경험을 해보지 않았던가. 우리에게 그런 경험이 없다고 하더라도, 분명 기쁜 마음으로 공부하고, 군대 가고, 취업하고, 효도하는 사람들도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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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피노자의 ‘헌신’


기쁜 마음으로 자신이 가진 (혹은 가질 수 있는) 것을 내어놓는 이들이 있다. 그리고 그들은 그것들을 내어놓은 이후에 더 큰 기쁨을 느낀다. 이런 이들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그들은 자신이 가진 (가질 수 있는) 것을 내놓지만 ‘희생’하는 것이 아니다. ‘헌신’하는 것이다. ‘희생’과 ‘헌신’은 어떻게 다른가? ‘자신 가진 혹은 가질 수 있는 것을 내어놓음’이라는 측면에서는 둘은 같다. 하지만 ‘희생’과 ‘헌신’은 근본적으로 다른 감정이다. 스피노자는 ‘헌신’을 어떻게 정의했는지 들어보자.


헌신이란 우리가 경탄(놀라움)하는 사람에 대한 사랑이다. (에티카, 제 3부, 감정의 정의 10)


‘희생’은 슬픔을 가져오지만, ‘헌신’은 기쁨을 가져온다. 왜냐하면, ‘헌신’은 ‘사랑(외적 원인의 관념을 수반하는 기쁨)’의 한 종류이기 때문이다. ‘헌신’은 어떤 종류의 ‘사랑’인가? 스피노자는 ‘헌신’을 ‘경탄’하는 이에 대한 ‘사랑’으로 정의한다. 도식화하자면, ‘헌신=경탄+사랑’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스피노자의 ‘헌신’은 우리가 알고 있는 헌신과 다른 것 같지 않은가? 스피노자의 ‘헌신’(경탄+사랑)이 우리의 ‘헌신’(기쁜 마음으로 자신이 가진 것을 내어놓음)과 어떤 관계가 있을까?


어느 직장인이 있다. 그는 회사에서 쉴 새 없이 일을 해야 한다. 커피 한 잔 마음 놓고 마실 시간도 여의치 않다. 그뿐인가? 이틀이 멀다하고 야근을 해야 한다. 직장에서 그의 얼굴에 잿빛 우울의 슬픔이 드리운다. 그렇게 고된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다. 하지만 그의 일은 끝나지 않았다. 이제 갓 돌을 넘긴 아이를 돌봐야 하기 때문이다. 먹이고 씻기고 재워야 한다. 아이가 수시로 자다가 깨느라 그는 밤에 제대로 잠을 잘 수도 없다. 하지만 그 고된 육아에도 그의 얼굴에는 환한 미소의 기쁨이 드리운다.


직장의 업무와 가정의 육아. 이 둘은 모두 자신이 가진 (혹은 가질 수 있는 것)을 심대하게 내어놓아야 하는 일이다. 하지만 이 둘이 모두 ‘희생’인 것은 아니다. 전자는 ‘희생’이지만, 후자는 ‘헌신’이다. 직장의 업무는 두말할 필요도 없이 ‘희생’이다. 하지만 육아는 ‘헌신’이다. 그것은 왜 ‘헌신’인가? 그에게는 아이는 ‘경탄’스러운 존재이며 동시에 ‘사랑’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는 아이가 태어났던 순간부터 ‘경탄’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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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라운 존재를 사랑할 때 ‘희생’은 ‘헌신’이 된다.


경탄(놀라움)이란 어떤 사물에 관한 표상인데, 이 특수한 표상은 다른 표상과는 아무런 연결고리가 없기 때문에 정신은 그 표상 안에서 확고히 머무른다. (에티카, 제 3부, 감정의 정의 4)


‘경탄’이 무엇인가? “다른 표상과는 아무런 연결이 없기 때문에 정신은 그 표상에 확고히 머무르는” 감정이다. 쉽게 말해, 난생처음 보는 것의 매혹에 빠져 버리는 것이다. 어느 조각가 심혈을 기울여 만든 것 같은 눈망울과 작은 입, 그 작은 입으로 젖꼭지를 오물거리며 빠는 모습, 고사리 같은 손가락이 꼬물꼬물 거리는 모습, 처음으로 뒤집기를 하던 모습. 처음으로 걸음마를 떼던 모습, 그 모든 순간이 ‘경탄’이었다. 그는 그 ‘경탄’의 대상을 누구보다 ‘사랑’했기에 ‘헌신’할 수 있었다.


육아는 직장의 업무만큼 아니 그보다 더 고된 일이다. ‘경탄’과 ‘사랑’이 없다면 결코 기쁨이 될 수 없는 일이다. ‘헌신’에서 ‘사랑’과 ‘경탄’ 중 어느 하나가 빠지면 ‘희생’이 된다. 그때 육아 역시 직장의 업무처럼 ‘희생’으로 전락하게 된다. 아이가 더 이상 놀랍지 않거나 혹은 아이가 예전만큼 사랑스럽지 않을 때, 육아는 지독한 슬픔을 주는 ‘희생’이 된다. 육아는 너무 많은 것들을 내어놓아야 하는 일인 까닭이다. 다른 ‘헌신’ 역시 마찬가지다.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의 총명, 근면 등에 대해 경탄하는 경우, 우리의 사랑은 그것에 의하여 더욱 커질 것이다. 그리고 경탄 또는 존경과 결합 된 이 사랑을 우리는 헌신이라고 부른다. (에티카, 제 3부, 정리 52, 주석)


‘사랑’하는 시인이 있다고 해보자. (여기서 ‘사랑’은 스피노자의 ‘사랑’ 즉, 외적 원인의 관념을 수반하는 기쁨이다.) 그 시인는 당연히 내게 기쁨을 준다. 하지만 그 시인을 위해 야근을 하고 내가 고되게 일해서 받은 월급을 나눠줄 순 없다. 만약 그렇게 해야 한다면, 그건 ‘희생’이지 ‘헌신’은 아니다. 하지만 어느 날, 그 시인을 직접 만나 그의 지혜(총명)와 성실함에 ‘경탄’하게 되었다면 어떻게 될까? 그 ‘경탄’에 의해 ‘사랑’은 더욱 커지게 된다. 그렇게 ‘경탄’과 결합해서 더 커진 ‘사랑’은 ‘헌신’이 된다. 그때 그 시인에게 도움이 되는 일이라면 야근이든, 월급을 주는 일이든 무엇이든 할 수 있게 된다. ‘헌신’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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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생하는 삶으로부터 벗어나는 법


“어떻게 희생하는 삶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이제 우리의 질문으로 돌아가자. ‘혜정’과 ‘영선’이 있다. ‘혜정’은 집요하게 효도를 강요받는 삶을 살았다. 그녀는 가고 싶은 학과에 진학하지도 못했고, 원치 않는 직장에 일찍 취업했다. 부모에게 효도하기 위해서였다. 직장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상사와 사장을 위해 늘 희생했다. ‘혜정’의 삶은 희생으로 점철된 삶이었다. 그래서 늘 우울하고, 분노했고, 원망했고, 피해의식에 빠져 살았다.


‘영선’은 ‘혜정’과 다르다. 악착같이 자신의 것을 지키려는 사람이다. ‘영선’은 결코 희생하지 않는다. 자신이 가진 (혹은 가질 수 있는) 것을 어떤 것도 내어놓지 않는다. 그래서 종종 ‘영선’은 ‘혜정’에게 말했다. “바보처럼 살지 마!” 그렇다면 ‘영선’은 정말 잘살고 있는 것일까? 확언할 수 없다. ‘영선’은 희생(슬픔)하지 않을 뿐, 딱히 기쁜 삶을 살고 있다고 말할 수 없는 까닭이다. ‘영선’은 지혜롭지 못하다.


참으로 지혜롭게 행동하는 것은, … 자기의 이익을 추구하는 것을 기초로 하여 … 행동하고, 판단하고, 자신의 존재를 보존하는 것이다. (에티카, 제 4부, 정리 24)


스피노자에 따르면, 지혜로운 자는 자기의 이익을 추구한다. 이는 단순히 자기 것을 악착같이 챙기라는 말이 아니다. 기쁨을 최대로 하고, 슬픔을 최소로 한다는 의미다. ‘영선’은 지혜롭지 못하다. 희생(슬픔)에서 벗어나는 삶에 급급해서 기쁨을 찾아 나서지 못했기 때문이다. 비단 ‘영선’만 그럴까? 악착같이 자신의 것을 지키려는 이들은 ‘희생’하지 않는 데만 급급할 뿐 진정으로 기쁨을 주는 것에는 관심이 없다.


“아빠, 이제 독립할게요. 이제 할 만큼 해드렸잖아요” ‘혜정’은 부모에게 말했다. ‘혜정’은 부모를 위해 ‘희생’하는 삶을 당연한 것으로 여겼다. 아니 희생하지 않는 삶을 상상조차 해본 적 없었다. 그런 그녀가 희생하는 삶에서 벗어났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한 사람을 만났기 때문이었다. 자신이 좋아했던 소설을 읽고, 좋아하는 음악을 듣는, 오월의 햇살만큼 밝은 미소를 가진 남자를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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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신’으로 희생을 넘어서기

‘혜정’은 ‘경탄’했다. 세상에 그런 남자가 있을 거라고 상상조차 해본 적이 없었으니까. 그리고 그 남자를 ‘사랑’하게 되었다. 혜정은 ‘경탄’스러운 존재를 ‘사랑’하게 되었다. 그렇게 ‘사랑’은 점점 커졌다. 그녀는 소설을 쓰고 싶다는 남자에게 ‘헌신’할 수밖에 없었다. ‘혜정’이 어떻게 희생에서 벗어났는지 알겠다. 그 남자에게 ‘헌신’하기 위해서 더 이상 부모를 위해 ‘희생’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헌신’으로 ‘희생’하는 삶에서 벗어났다. 이것이 지혜로운 행동이다. 진정으로 “자기의 이익을 추구하는 것을 기초로 행동”하는 지혜로운 행동.


‘희생’을 벗어나는 것을 목적으로 삼으면 겨우 ‘슬픔’을 줄이는 데서 멈춘다. 하지만 ‘헌신’하게 될 때 ‘슬픔’(희생)을 줄이고 동시에 ‘기쁨’(경탄+사랑)을 크게 한다. ‘헌신’보다 더 큰 자기 이익은 없다. 물론 ‘영선’에게 ‘혜정’의 삶은 전혀 달라지지 않은 것처럼 보일 테다. “부모에게 갖다 바치던 돈을 남자친구에게 갖다 바치는 것 아니냐?” 이런 ‘영선’의 생각은 무지의 소산이다. ‘영선’은 모른다. 혜정이 삶이 얼마나 바뀌었는지.


‘영선’처럼, 악착같이 자기 것만 지키려는 이들은 무지해서 안타까운 존재들이다. 슬픔을 줄이는 데 급급해서 큰 기쁨이 있는 곳으로 시선을 돌리지 못하는 존재들. 이것이 세상의 수많은 ‘영선’들이 ‘희생’과 함께 ‘헌신’마저 포기해버리게 된 이유다. 세상의 수많은 ‘영선’들은 ‘헌신’하는 삶이 얼마나 유쾌하고 기쁜 삶인지 결코 이해할 수 없다. “바보처럼 살지 마!” 이는 ‘혜정’이 ‘영선’에게 돌려주어야 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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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행복에 이르는 길, 자리이타

자리이타自利利他. 자신도 이롭게 하면서 타인도 이롭게 한다는 것이다. 불교의 오래된 가르침이다. 불교에서는 이 ‘자리이타’의 태도를 통해 궁극의 행복(해탈)에 이를 수 있다고 말한다. 자신만 기쁜 것도 진정한 행복이 아니고, 타인만 기쁜 것도 진정한 행복이 아니다. 진정한 행복은 ‘나’와 ‘너’의 기쁨이 동시적이어야 한다. 실제 우리네 삶에서 어떻게 ‘나’의 기쁨이 ‘너’의 기쁨이 될 수 있을까? 바로 ‘헌신’을 통해서다.


자리이타의 태도가 바로 ‘헌신’이라는 감정에 응축되어있지 않은가? ‘헌신’은 얼핏 타인을 이롭게 하는 일인 것 같지만, 실은 자신을 가장 먼저 이롭게(경탄과 사랑!) 하고 그로 인해 타인 역시 이롭게(헌신) 하기 때문이다. ‘헌신’은 ‘나’의 기쁨 그 자체가 ‘너’의 기쁨이 되는 기적적인 일을 가능케 해준다. ‘궁극의 행복은 헌신에 있다.’ 스피노자와 불교의 가르침을 횡단하며 깨달은 사실이다. ‘헌신’은 진정한 행복에 이르는 비밀을 알려 준다.


희생하는 삶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많다. 타인에게 무관심해져도 되고, 이기적으로 살아도 된다. 하지만 희생에서 벗어나 더 큰 기쁨으로 가는 방법은 하나뿐이다. 헌신하는 삶! 희생하는 삶을 제대로 끝내고 싶다면, 그리도 더 나아가 진정한 행복에 이르고 싶다면 경탄스러우면서 사랑하는 존재를 찾아야 한다. 마음을 요동치게 하는 ‘경탄’스러운 존재를 만나고 그 존재를 ‘사랑’하게 될 때, ‘희생’은 없다. 자리이타의 마음으로 ‘헌신’의 삶이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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