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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습'과 '해소'

1.

“옷을 많이 사서 환경을 얼마나 파괴되는지 줄 아세요?” 
“그래도 옷은 사야죠.” 
“그럼 환경은요?”
“그 문제는 또 그것대로 해결하려고 해야죠.”


 어디선가 지겹도록 들어본, 대화였다. 그런데 그 진부한 대화가 긴 시간 마음에서 떠나지 않았다. 아마 아직 답하지 못한 문제가 내 마음에 걸려있었기 때문이었을 테다. 철학을 직업으로 삼는 이상, 답하지 못해 마음에 걸린 문제를 너무 오래 방치 해두어서는 안 된다. 


 ‘인간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인간은 언제나 수많은 (개인적·사회적) 문제 속에 놓여 있어 왔다. 인간의 삶이란 그 문제가 촉발하는 긴장 상태의 연속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니 ‘인간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라는 질문은 ‘인간은 당면한 문제를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라는 질문과 같다. 여기에는 두 가지 답변이 있다. 


 ‘해소’와 ‘수습’  불필요하게 산 옷이 버려져서 환경은 심각하게 파괴된다. 이것이 지금 인간이 당면한 문제다. 이 문제를 ‘해소’할 수도 있고, ‘수습’할 수도 있다. ‘해소’는 무엇인가? 불필요한 옷을 사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버려지는 옷을 줄이는 일이다. 그러면 환경문제는 근본적으로 ‘해소’된다. 많은 환경 단체들은 이 ‘해소’의 방법으로 환경문제를 해결하려고 한다. 그런데 이 ‘해소’의 방법은 유효한가?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반증한다. 환경문제를 ‘해소’하려는 많은 이들의 회유와 협박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옷-쓰레기들이 산더미처럼 넘쳐난다.      


  ‘해소’의 방법으로 왜 문제는 해소되지 않는가? 인간에게 불필요한 ‘옷’을 사지 않는 삶은 가능한가? 소수의 이들에게는 가능할지 몰라도, 다수에게는 불가능한 일이다. ‘옷’을 왜 사는가? 입을 ‘옷’이 없어서다. 이는 진짜 ‘옷’이 하나도 없다는 뜻이 아니다. 지금 있는 ‘옷’이 자신 내면의 결핍을 충족 해주지 못한다는 의미다. 패션이 영원한 상품이 되는 이유는 불안 때문이다. 그러니 불필요한 ‘옷’을 사지 않는 방식의 ‘해소’는 불안에 휘둘리지 않는 소수에게만 가능한지 일일 뿐, 다수에게는 허망한 공염불이나 불필요한 죄책감마저 촉발하는 듣기 싫은 잔소리가 될 뿐이다. 그리고 그 공염불과 죄책감은 다시 기묘한 불안이 되어 쇼핑을 가속시킨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수습’으로 시선을 돌릴 수밖에 없다. ‘수습’은 무엇인가? ‘옷’은 ‘옷’대로 사고, 불필요하게 버려지는 ‘옷’들을 또 잘 처리할 수 있는 방식을 찾는 일이다. 이는 인간 내면의 욕구와 욕망 그로 인한 불안은 좀처럼 잦아들지 않기 때문에 ‘옷’을 살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일이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환경을 파괴하지 않을 방법을 모색하는 일이다. 이런 '수습'의 태도는 ‘해소’보다 더 나은 해법일까? 바로 이 질문이 지금 내 마음에 걸려 있는 곳이다.

    


2.

 내 삶은 ‘방치’에서 ‘해소’로 그리고 ‘수습’을 지나왔다. ‘옷’을 불필요하게 사다 모으며 그것이 나와 세계에 어떤 악영향을 미치게 될지 고민하지 않는 ‘방치’의 시기가 있었다. 철학을 시작하며, 그 악영향들을 명확하게 알게 되었고, 아프게 반성했다. 그렇게 나의 ‘해소’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옷’을 결코 사지 않았다. 그렇게 나와 세계가 당면한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소’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 ‘해소’의 시간 속에서 그것이 ‘방치’만큼이나 폭력적인 ‘문제’ 해결 방식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렇게 나는 마흔이 너머 겨우 ‘수습’하며 살게 되었다. ‘옷’은 옷대로 사되, 그 ‘옷’을 잘 처리할 수 있는 방식도 고민하게 되었다. 이 ‘수습’의 방법은 지혜로운가? 그렇지 않다. '수습'보다 더 지혜로운 방법을 찾지 못했을 뿐이었다. ‘수습’의 방식은 인간의 근원적인 욕구와 욕망, 불안을 있는 그대로 긍정하며 나와 세계를 변화시켜 나갈 수 있다는 측면에서 분명 지혜로운 측면이 있다. 하지만 그 역시 인간이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는 온전한 방법이 아니다. ‘해소’가 이상적이어서 근본적인 해법이라면, ‘수습’은 현실적이어서 임시적인 방편일 뿐이다. 


 ‘해소’가 해소 나름의 치명적인 반작용이 있다면, ‘수습’ 역시 마찬가지다. ‘수습’은 말 그대로 ‘수습’일 뿐이다. 일단 ‘옷’을 사고 그것으로 인해 발생한 문제는 또 그것대로 ‘수습’하는 방식으로는 결국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한다. 이는 인간과 세계 자체를 위협해 오고 있는 환경‘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는커녕, 해결하고 있다는 착시만을 불러일으켜 환경을 더 심각하게 파괴하게 만들지도 모를 일이다. 결국 끊임없이 ‘옷’은 사게 될 테고, 이를 처리하기 위한 노력 역시 또 다른 환경‘문제’를 촉발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과학기술 발전이 '문제'를 해결해주리라는 믿음은 환상일 뿐이다.)

    

 ‘해소’해야 하는가? ‘수습’해야 하는가? 이 질문에 이제 답할 수 있겠다. ‘수습’을 통해 ‘해소’해야 한다 (그 역은 불가하다.) ‘옷’은 사야 한다. 어쩔 수 없다. 인간은 불가피한 욕구와 그로 인해 결코 채워지지 않을 욕망에 휩싸인 존재다. 인간은 그런 존재이다. 그러니 ‘옷’은 살 수밖에 없다. 하지만 ‘옷’을 사서 생긴 ‘옷’-쓰레기 문제를 다시 처리하는 방식으로 ‘수습’하려 해서는 안 된다. '옷'을 사서 잠시지만 채워진 욕구와 욕망, 잠시지만 잠잠해진 불안의 틈 사이로 새로운 욕구와 욕망, 평온을 심어야 한다. 그렇게 그 ‘문제’를 '해소'하려고 해야 한다.     


 ‘옷’을 사고 싶었던 날, ‘옷’을 샀다. ‘옷’을 사지 않으면 문제가 더 심각해진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니까. 그 ‘옷’을 사고 나오면서 본, 아니 ‘옷’을 샀기에 보인 백화점 명품매장에 걸린 아름다운 ‘그림’을 본다. 이제 ‘옷’이 아닌 ‘그림’을 보고 싶다. 작은 나의 ‘문제’ 하나를 ‘수습’하며 ‘해소’했다. 요동치는 마음이 잔잔해졌다. “‘해소’해야 한다!”는 급진주의자들의 다그침에도, “‘수습’해야 한다!”는 현실주의자들의 회유에도 휘둘리지 않게 되었다. 다행이다. 이제 마음에 걸린 문제가 없다. 조금 더 큰 ‘문제’를 ‘수습’하며 ‘해소’하려 나아갈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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