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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다운 삶은 ‘애벌레-주체’ 속에 있다.

뇌는 어떤 기능을 하는가?

 우리 몸 중에서 뇌에 관해서 이야기해 봅시다. 베르그손은 뇌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요? 흔히, 뇌는 사유의 기관이기 때문에 무한한 상상, 복잡한 연산, 심층적인 사유를 가능케 하는 기능을 한다고 생각하죠. 이는 근대과학과 의학이 인간의 뇌를 다른 기관들에 비해 독점적인 위치로 올려놓았기 때문일 겁니다. 베르그손은 이런 입장에 대해서 반대합니다. 인간의 여러 기관 중에서 ‘뇌’는 분명 독특한 측면이 있기는 하지만 독점적인 기관이 아니라는 것이 베르그손의 기본 입장입니다.   

   

 뇌는 일종의 중앙전화국과 다르지 않다. 통화하게 해주거나(연락을 보내거나) 연결을 기다리게 하는 것이 그의 역할이다. 물질과 기억앙리 베르그손     


 베르그손에 따르면, ‘뇌’는 중앙전화국과 비슷한 역할을 합니다. 이는 우리가 지금 사용하는 전화의 의미를 생각하시면 안 돼요. 옛날 영화에서 수신자와 발신자 사이에서 전화를 연결해 주는 교환원을 본 적 있나요? 뇌는 바로 그 교환원 역할을 하는 겁니다. 즉 ‘뇌’의 역할은 특별한 게 아니라 그 교환원 역할, 즉 발신자와 수신자를 통화하게 해주거나(연락을 보내거나) 혹은 연결을 기다리게 하는 거예요.


 뇌의 역할이란 때로는 받아들인 운동을 선택된 반응 기관으로 인도하는 것이다. 또 때로는 그 운동에 운동할 수 있는 길 전체를 열어주어 거기서 자신을 채우고 있는 가능한 모든 반응을 그려보게 하고, 주의를 여러 갈래로 분산하여 자기 자신을 분석하게끔 한다. 다시 말해, 뇌는 받아들인 운동에 관련해서는 분석기관이고, 행사된 운동에 관련해서는 선택기관인 것처럼 보인다. 물질과 기억앙리 베르그손   



  

뇌는 분석기관이자, 선택기관이다.

 베르그손에 따르면, 뇌는 우리가 받아들인 운동(구심성 운동)에 대해서는 분석의 도구고, 행해진 운동(원심성 운동)에 대해서는 선택의 도구에요. 예를 하나 들어보죠. 저 멀리 빨간 물체가 하나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다고 해봐요. 이때 어느 순간 우리는 그것을 ‘사과’라고 인지하게 될 수 있죠. 이는 뇌의 역할이죠. 즉, 사과(진동)를 받아들인 운동을 눈(시신경)이라는 선택된 ‘반응기관’으로 인도하는 것이죠.      


 뇌의 역할은 여기서 끝나지 않죠. ‘사과’라고 파악되면 이제 뇌는 우리가 반응할 수 있는 가능한 행동들 중에서 특정한 행동을 선택하게 됩니다. 예컨대, 손(선택기관)으로 사과를 씻는다든지, 칼로 껍질을 깎는다든지, 입(선택기관)으로 사과를 먹는다든지 하는 행동을 선택하게 되겠죠. 즉, 뇌는 특정한 외부 대상(사과)에 대한 특정한 반응을 결정하는 ‘선택기관’인 겁니다. 이처럼 뇌는 근본적으로 분석기관과 선택기관이라는 두 가지 기능을 합니다.      


 즉 어떤 외부 대상이 나타났을 때 그것이 무엇인지 분석하고, 그 분석을 근거로 어떤 행동을 선택할 것인지를 판단하는 것이죠. 흔히 뇌의 기능이 무한한 상상, 복잡한 연산, 심층적인 사유에 있다고 여지만, 이는 뇌의 부가적인 기능일 뿐 근본적인 기능은 아닙니다. 뇌는 근본적으로 외부 대상을 ‘분석’하고 ‘선택’하는 기능을 하는 겁니다.      



뇌는 사유가 아니라 행동의 기관이다.

 

 여느 동물들의 뇌의 기능이 뭔가요? 먹이가 보이면 그것이 먹을 수 있는 것인지 아닌지 분석하고, 그 분석을 토대로 그것을 먹을 것인지 먹지 않을 것인지를 선택하는 것이죠. 인간 역시 마찬가지 아닌가요? 인간의 뇌는 외부 대상이 나타났을 때, 스피노자 표현을 빌리자면 ‘기쁨이냐, 슬픔이냐?’라는 감정으로 분석하는 거예요. 즉, ‘내 생의 활력을 크게 할 것인가, 약하게 할 것인가?’를 분석하죠. 그 분석을 토대로 그 대상을 취할지 말지 선택하는 거예요.      


 인간은 대단히 특별한 존재가 아닙니다. 수많은 생명 중 하나일 뿐입니다. 인간이 다른 동물들보다 대단히 특별한 존재라는 인식은 인간 뇌의 기능에 대한 과대한 인식의 결과일 뿐입니다. 동물의 뇌든, 인간의 뇌든, 뇌의 근본적인 역할은 분석과 선택, 이 2가지인 거예요. 무한한 상상, 복잡한 연산, 심층적인 사유 등등 인간 뇌의 독특한 기능은 뇌의 근본적인 두 기능을 더 잘 수행하기 위해서 진화한 부가적인 기능일 뿐인 겁니다.

     

 이 경우(분석기관)나 저 경우(선택기관)나 그 역할은 운동을 전달하고 나누는 데에서 그친다. 또 척수에서든 피질이라는 고위의 중심 지대에서든 신경 요소들은 결코 인식을 위해 일하는 것이 아니다. 단번에 여러 가능한 행동들의 윤곽을 잡거나 그들 중 하나를 조직할 뿐이다. 물질과 기억앙리 베르그손   

  

 지금 베르그손은 뇌의 근본적인 역할은 행동이라고 말하는 거예요. 뇌의 역할은 특정한 외부 대상이 출현했을 때, “단번에 여러 가능한 행동들의 윤곽을 잡거나 그들 중 하나를 조직”해 내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저 멀리서 무엇인가 날라오면, 뇌는 그것이 무엇인지 재빠르게 파악해 그것이 사과라면 잡거나 먹거나 씻거나 하는 등등의 행동 중에서 하나의 행동 선택하고, 그것이 돌멩이라면 쳐내거나 피하거나 뒤돌거나 하는 등등의 행동 중에서 하나의 행동을 선택하게 하는 것이 바로 뇌라는 것이죠.


     

우리는 왜 겁쟁이가 되었을까?

    

 베르그손의 이런 통찰을 통해 우리네 삶을 아프게 돌아보게 만듭니다. 인간답게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생각(사유)하는 것일까요? 행동(반응)하는 것일까요? 흔히 ‘생각(사유)’하는 것이 인간적인 일이며, ‘행동(반응)’하는 것은 동물적(비인간적!)인 일이라고 여깁니다. 쉽게 말해, 인간은 생각하는 존재라는 것이죠. 이것이 근대적 인간관입니다. 이는 근대의 시작을 알렸던 데카르트의 그 유명한 말이 잘 보여주고 있죠.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Cogito ergo sum)” 데카르트의 이 오래된 명제는 긴 시간 생각(사유)하는 뇌의 독점적 위치를 정당화해 왔죠. 이것이 인간의 뇌는 손·발·눈·심장·위 등등의 여느 기관과 근본적으로 다른 기관이라고 인식하게 된 이유일 겁니다. 그런데 이런 근대적 인간관은 터무니없는 편견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 터무니없는 편견은 우리네 삶을 불행하게 만든 측면이 있습니다.     


 근대적 인간관을 바탕으로 하는 근대 교육의 문제가 무엇인가요? 우리는 근대 교육 때문에 과도하게 고민만 하는 겁쟁이가 된 측면이 있습니다. 분류하고 분석하고 계산하고 체계화하는 등등의 ‘생각’(사유)은 분명 우리에게 필요하고 또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이 모든 ‘생각’은 왜 필요한 걸까요? 이는 근본적으로 ‘행동’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 아닌가요. 그런데 지금 우리네 삶의 모습은 어떠한가요? 오히려 ‘생각’ 때문에 ‘행동’하지 못하게 되는 경우가 더 많지 않나요? 심지어 ‘행동’하지 않기 위해서 ‘생각’하는 경우도 너무 많잖아요.     


 여행을 가거나 운동을 시작할 때를 생각해 볼까요? 우리는 여행과 운동을 시작하기 전에 많은 생각(고민)을 합니다. 여행지들 혹은 여러 운동들을 분류하고 분석하고 그것에 따른 위험과 효용, 비용을 계산하고 또 계획을 세우며 여행과 운동에 관해 체계화합니다. 그런데 그 고민을 하느라 힘을 다 써버려서 공항과 체육관에는 발도 못 디디게 되는 경우가 얼마나 많던가요? 심지어 공항과 체육관에 가는 행동을 차일피일 미루려 더 생각(고민)하게 되는 경우도 얼마나 많던가요?      



머리를 쓴다는 건, 몸을 쓴다는 것이다.

     

 ‘생각’은 인간다운 일이 아닙니다. ‘생각’만 하고(혹은 ‘생각’만 하느라)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고 ‘행동’하지 않는 것은 인간답지 못한 일입니다. 책상에 앉아서 책만 읽는다고 뇌를 쓰는 게 아니에요. 진짜로 뇌를 쓴다는 것은, 외부 대상들을 받아들이고 기쁨인지 슬픔인지를 분석하고, 이를 취할지 말지, 취한다면 어떤 방식으로 취할 것인지를 실존적으로 선택하는 거죠. 즉, 진정한 의미에서 머리(뇌)를 쓴다는 건, 몸을 쓴다는 것은 동시적인 일이라는 것이죠. 그것이 인간다운 거예요. 스마트폰 앞에서 쓸데없는 관념만 들어차서 ‘이거 하면 좋겠지, 저거 하면 좋겠지’ 하는 것은 뇌를 사용하는 것도 아니고 인간다운 일도 아닙니다.      

 

신경계통은 자극을 받아들이고 운동 장치를 조립하여 주어진 자극에 그런 장치를 가능한 한 가장 많이 내놓는 것을 그 기능으로 삼는다. 물질과 기억앙리 베르그손     


 베르그손은 인간의 뇌와 그것을 중심으로 하는 신경계의 역할에 대해 분명히 말합니다. 인간의 뇌와 신경계의 역할은 표상하고 상상하는 게 아니라는 거예요. 신경계는 자극을 받아들이고 운동 장치를 조립하여 주어진 자극에 그런 장치들을 가능한 한 많이 바깥으로 내놓는 거예요. 즉, ‘머리’(뇌+신경계)를 쓴다는 것은 헛된 망상이나 관념에 사로잡히는 것이 아니라, 내 몸을 특정한 자극에 잘 반응(행동)하는 운동 장치로 조립하는 것을 의미하는 겁니다.      


 그러니 ‘머리’를 잘 쓴다는 것은 다양한 외부 자극에 대해 우리의 몸이 가능한 많은 운동 장치로 변화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쉽게 말해, 책·복싱글러브·친구·연인 같은 외부 대상이 주어졌을 때, 우리의 몸이 ‘읽는’ 운동 장치, ‘때리는’ 운동 장치, ‘아껴주는’ 운동 장치, ‘사랑하는’ 운동 장치로서 그때그때 원활히 변화할 수 있는 것. 그것이 뇌와 신경계의 근본적인 기능인 겁니다.



‘애벌레-주체’는 무엇인가?

      

 베르그손의 사상을 이어받은, 서양 현대철학의 정점이라고 인정받고 있는 질 들뢰즈 역시 같은 입장을 취하고 있습니다. 들뢰즈는 데카르트의 ‘사유의 주체’를 비판하며 ‘애벌레-주체’를 말합니다. ‘애벌레-주체’는 무엇일까요? 들뢰즈의 이야기를 직접 들어봅시다.      


 왜 애벌레-주체인가? 이는 그들이 역동성의 지지대이거나 인내자이기 때문이다. 역동성은 오로지 생존 가능성의 극한에서만 체험될 수 있다. 훌륭하게 구성된 주체, 독립성과 능동성을 띤 모든 주체는 이런 체험 조건들을 만족시키지 못한다. 따라서 이 순수한 역동성을 통해 죽음에 이를 것이다. 차이와 반복질 들뢰즈      


 들뢰즈가 말한 “훌륭하게 구성된 주체, 독립성과 능동성을 띤 모든 주체”가 바로 ‘사유의 주체’입니다. 이와 대척점에 서 있는 주체가 바로 ‘애벌레 주체’입니다. ‘애벌레-주체’는 역동성을 떠받치고 그 사이에서 발생하는 고통을 인내하는 존재입니다. ‘사유의 주체’는 이 극한의 체험을 견뎌낼 수 없죠. 늘 생각(고민)만 하고 사는 ‘사유의 주체’는 여러 ‘행동’들에 의해 촉발되는 삶의 역동성을 견뎌내지 못해 죽음에 이를 뿐이죠.   

   

 어떤 운동들은 그저 견뎌낼 수밖에 없고, 따라서 그 앞에서는 누구나 수동적인 인내자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런 한에서 이 인내자는 다시 어떤 유충이거나 맹아일 수밖에 없다. 차이와 반복질 들뢰즈  

    

 인간(주체)은 어떤 행동을 하며 그에 따른 역동성을 견뎌내는 인내자일 수밖에 없죠. 그런 역동성의 지지자이거나 인내자로 살아가는 것이 바로 인간다운 삶이죠. ‘애벌레-주체’는 ‘유충’이죠. 하지만 이는 단순한 벌레가 아니라 ‘맹아萌芽’와 같은 거예요. 무엇이든 될 수 있는 새로운 싹인 거죠. ‘애벌레-주체’로서의 ‘나’는 뇌의 작동으로 기능하는 존재가 아니에요. ‘생각’이 아닌 ‘행동’을 통해, 기존의 ‘나’에게 또 다른 ‘나’들이 분화하여 새로운 ‘나’가 생성되고 있는 존재를 의미합니다.     


 이는 어려운 말이 아닙니다. 머리로는 아무리 계산해도 만나서 안 되는 사람이 있다고 해봅시다. 그런데 우연히 그와 손을 잡게 되었을 때 세포가 반응하며 그에게 끌리게 되는 경우가 있지요? 전자는 ‘사유의 주체’로서 반응(“저 사람은 내 스타일이 아니야”)이고, 후자는 ‘애벌레-주체’로서 반응(“어? 왜 자꾸만 끌리지?”)입니다. 후자의 반응은 ‘나’ 안에 있지만 ‘나’가 인지하지 못하고 있던 꿈틀대고 있는 ‘(아직 발현되지 않은 유충 혹은 맹아로서) 나’가 반응한 겁니다.      



인간다운 삶은 ‘애벌레-주체’ 속에 있다.

 인간은 ‘사유의 주체’에 가까울까요? ‘애벌레-주체’에 가까울까요? ‘사유의 주체’는 훈육의 결과이고, ‘애벌레 주체’는 자연의 결과에 가까울 겁니다. 우리는 부지불식 간에 자꾸만 머리로 계산하며 살아가려고 하죠. 이는 우리가 집과 학교, 직장에서 그렇게 훈육받았기 때문일 겁니다. 반면 살아가면 아주 가끔 강한 끌림에 의해 자기 자신도 낯선 선택을 하게 될 때가 있죠. 그것은 집요한 훈육 사이에 있는 작은 틈으로 ‘애벌레-주체’가 출현한 결과일 겁니다.      


 잊지 말아야 할 삶의 진실이 있습니다. 훈육받은 대로 사는 것은 당장은 조금 안락할 수 있으나, 끝내는 불행해지는 길입니다. 반면 자연스럽게 사는 것은 당장은 조금 위험할 수 있으니 끝내는 행복해지는 길입니다. ‘사유의 주체’가 반응한 ‘너’(부자, 준수한 외모, 무난한 성격)와 연애하는 사람과 ‘애벌레 주체’(시인, 꾸미지 않은 외모, 이해할 수 없는 성격)가 반응한 ‘너’와 연애하는 사람 중 누가 더 행복할까요?      


 전자는 잠시 안락한 연애는 가능할지 모르나 끝내는 헛헛한 마음에 우울한 삶이 이어지게 될 겁니다. 반면 후자는 잠시는 불편하고 위험한 연애처럼 보일 수 있으나 끝내는 역동이 넘치는 유쾌한 삶이 이어지게 될 겁니다. ‘애벌레주체’가 반응한 ‘너’는 ‘나’ 안에 꿈틀대고 있는 ‘나’와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그 관계 속에서 ‘나’ 속에서 새로운 ‘나’를 만들게 되는 까닭입니다. 진정한 유쾌한 삶이라는 것은 그런 것이죠. 늘 같은 ‘나’ 속에서 침잠된 삶이 아닌, 늘 새로운 ‘나’의 출현 속에서 역동 넘치는 삶을 이어가는 것이죠.      


 베르그손의 뇌에 대한 관점 그리고 들뢰즈의' 애벌레-주체'가 의미하는 바는 분명합니다. 인간은 ‘사유’가 아닌 ‘행동’하는 존재라는 사실이죠. 철학이든 뭐든 뭘 배우려고 한다면 그것을 삶에서 써먹기 위해서 배워야 합니다. 또 뭘 배웠으면 그것을 삶에 적용해서 써먹어야 하는 거예요. 이것저것 공부해서 머릿속에 무엇인가를 계속 입력하고 그것에 대해 ‘생각’하며 살더라도, 실제적이며 구체적인 ‘행동’이 없다면 그것은 ‘뇌’를 쓰고 있는 삶이 아닌 겁니다. 그것은 비인간적인 삶이며 기형적인 삶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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