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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해일’과 ‘퍼즐’ 사이에 있다.

‘물질’과 ‘지각’의 오래된 오해

 ‘물질’과 ‘지각’에 대해서 조금 더 알아봅시다. ‘물질’은 어떤 물체를 이루고 있는 재료를 의미합니다. 예컨대, 연필이라는 물체는 나무와 흑연이라는 물질로 이루어져 있지요. ‘지각’은 그 물질(나무·흑연)의 특성을 파악하는 것을 의미하죠. 이 ‘물질’과 ‘지각’에 대한 오래된 오해가 있습니다.


 ‘물질’에 대한 오해부터 살펴봅시다. 흔히 ‘물질’을 테두리를 가진 고정적 성질이라고 여기지요. 나무와 흑연은 분명 테두리를 가진 고정적 물질처럼 보입니다. 혹은 나무와 흑연을 더 쪼개서 원자 단위라고 생각하더라도 마찬가지죠. 하지만 이는 ‘물질’에 대한 오해입니다. ‘지각’에 대한 오해는 무엇일까요? 흔히 어떤 ‘물질’을 객관적으로 ‘지각’할 수 있다고 여깁니다. 즉, ‘나’와는 별개로 존재하는 나무와 흑연을 파악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요. 이것이 ‘지각’에 대한 오해입니다.      



‘물질’은 진동이다.

 그렇다면 삶의 진실로서 ‘물질’과 ‘지각’, 즉 있는 그대로의 ‘물질’과 ‘지각’은 어떤 것일까요?      


 상들의 총체를 물질이라 부른다그리고 그 상들이 내 몸이라는 어떤 특정한 상의 가능한 행동과 관계를 맺을 때 그것을 물질의 지각이라 부른다물질과 기억』 앙리 베르그손


 ‘물질’은 ‘상’들의 총체입니다. ‘상’은 무엇인가요? 바로 진동입니다. 그러니까 ‘물질’은 테두리를 가진 고정적 성질, 즉 고체(나무·흑연)적이거나 유체(물)적인 어떤 것이 아니라, 다수의 진동이 중첩되어 만들어내는 진동의 총체인 겁니다. 이는 명백한 과학적인 사실입니다. 어떤 ‘물질’(나무·흑연·물…)이든 그것을 원자 단위로 쪼개고 다시 그것을 전자 단위로 쪼개고 그 너머 쿼크 단위까지 쪼개면 그것은 모두 진동(파동)의 형태로 존재합니다. 즉, 테두리를 가진 어떤 ‘물질’이든, 미시 세계에서는 다 떨리고(진동) 있는 겁니다.      


 어떤 ‘물질’도 테두리(형태)를 가지는 존재가 아닙니다. 모든 ‘물질’은 다수의 진동이 겹쳐진 진동의 총체일 뿐입니다. 인간의 지각 능력 한계로 인해서 형태를 가진 나무·흑연·물처럼 보이는 것일 뿐인 겁니다. 이는 다수의 악기가 별도의 음(진동)을 연주하고 있지만, 우리는 그 모든 음이 어우러진 교향곡 전체(진동의 총체)를 파악할 수밖에 없는 것과 비슷할 겁니다. 우리가 ‘물질’이라 부르는 모든 것들은 바로 이 교향곡인 셈입니다. 이러한 삶의 진실은 미시 세계를 볼 수 있는 현미경이 있다면 직접적으로 확인가능할 겁니다.     


 


‘지각’은 ‘물질’의 진동을 느끼는 것

     

 그렇다면 ‘지각’은 무엇일까요? 세계에 존재하는 ‘상’(물질)들이 내 몸(이라는 ‘상’)과 관계 맺는 일입니다. 이에 대해 베르그손은 다음과 말합니다.     


 나의 지각은 분자 운동의 함수이며 그것에 종속한다물질과 기억』 앙리 베르그손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물질(나무·흑연·물…)은 모두 다 진동(상)입니다. 우리의 지각은 ‘물질(진동)’을 받아들여 뇌의 분자가 어떻게 운동(진동)하느냐로 구성됩니다. 쉽게 말해, 외부 물질이 갖는 진동의 크기가 신경 신호로 전달되어 중추신경의 뇌를 흔드는 것. 바로 이것이 ‘지각’입니다. 물병을 그냥 드는 것과 흔들어서 드는 것은 다르게 ‘지각’되죠. 왜 그럴까요? 그 둘이 뇌로 전달되는 진동이 다르기 때문이죠. 그 진동의 차이만큼 ‘지각’도 차이가 나는 거죠.      


 뇌만 그런 것이 아니죠. 신경 말단에서 뇌까지 오는 과정도 마찬가지죠. 신경 말단에 존재하는 뉴런과 뉴런 사이에 신경 전달 물질이 분비되어 전기적 신호가 전달되는 것도 모두 진동입니다. 우리는 나무와 물을 다르게 지각하죠. 이는 나무(진동)가 시신경을 통해 뇌로 전달되어 뇌 분자를 진동시키는 양상과 물(진동)이 시신경을 통해 뇌로 전달되어 뇌 분자를 진동시키는 양상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 분자 운동의 차이가 우리가 어떤 ‘물질’을 나무로 혹은 물로 ‘지각’하게 만드는 겁니다. 외부 대상(나무·물)도 진동이고, 그 외부 대상(진동)이 우리 몸(진동)으로 들어와서 중첩되어 만들어지는 진동이 바로 ‘지각’인 거죠. 즉, 우리의 ‘지각’은 뇌 분자 운동의 함수인 겁니다. 도식화하자면, ‘지각=f(뇌 분자 운동)’인 거죠.    



‘지각’은 ‘너(물질)’의 진동과 ‘나(몸)’의 진동이 더해지는 것

      

 우리는 ‘물질’의 ‘진동’을 통해서 발생한 뇌의 ‘진동’으로서 세계를 지각합니다. 그렇다면 지각은 단순히 외부의 진동에 의해서만 결정되는 것일까요? 즉, 어떤 ‘물질’이 나무라고 ‘지각’된다면 그것은 오직 나무가 갖는 진동 때문이기만 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의 지각이 단지 두뇌 덩어리의 분자적 운동들에만 의지한다고 말하지 말자지각이 분자 운동과 함께 변하기는 하지만 그런 운동 자체는 나머지 물질계와 불가분적으로 연결되어 있다고 말하자물질과 기억』 앙리 베르그손     


 물이 담긴 컵이 있다고 해 봅시다. 이는 진동을 가지고 있겠죠? 이 컵을 쥐었을 때 진동으로써 나의 몸에 들어오고, 그 진동의 떨림이 전기적 신호로 바뀌어 중추신경계를 거쳐 뇌를 진동시켜서 물이 담긴 컵을 ‘지각’하게 될 겁니다. 그렇다면 세계의 모든 ‘지각’은 뇌의 분자 운동의 함수로 번역가능할 겁니다. 하지만 실제 지각은 이렇게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우리의 ‘지각’은 단순히 외부 진동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에요.


 당연하지 않나요? 내가 컵을 잡는 순간 어느 정도의 세기와 강도로 잡았느냐에 따라서 그 진동이 이미 달라지는 거잖아요. 뇌 속에 있는 분자 운동의 함수만으로 세계가 파악되는 게 아니라는 거죠. 세계의 ‘지각’에는 반드시 ‘나의 몸’이 개입 해요. 외부 대상의 정보가 들어오는 것뿐만 아니라, 우리의 몸이 그 대상에게 특정한 행위를 내보내는 것까지가 세계의 ‘지각’인 거죠. 삶의 진실로서의 ‘지각’은 다음과 같이 도식화할 수 있습니다.     



‘물질’도, ‘지각’도 모두 ‘상’이다.

     

 ‘지각=f(물질(상)×몸(상)×행동(상))’ 


 즉, ‘지각’이라는 것은, 외부 물질(컵)이라는 진동과 그 진동에 반응(손으로 컵을 쥐는 강도)하는 진동과 그 두 진동을 받아들이는 우리 몸(신경계와 뇌)의 진동이 중첩되어 발생하는 사태인 거죠. 이러한 삶의 진실이 함의하는 바는 무엇일까요? 우리는 ‘물질’을 객관적으로 ‘지각’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우리는 방 안에 있는 연필을 언제 ‘지각’할까요? 방 안에 연필이 있을 때인가요? 그렇지 않죠. 방 안에 연필이 있더라도 그것을 ‘지각’하지 못하고 스쳐 지나가는 경우가 얼마나 많던가요? 그렇다면 언제 연필을 ‘지각’하게 될까요? 무엇인가 쓰려고 하거나 쓸 때 연필을 ‘지각’하게 됩니다. 즉 우리는 연필을 객관적으로 ‘지각’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필요나 사용을 통해 주관적으로 ‘지각’하는 겁니다.      


 ‘물질’(연필)과 내 ‘몸(뇌·신경계)’과 가능한 ‘행동’(씀)이 특정한 함수 관계로 결합 될 때 비로소 “연필이 저기 있구나”라고 ‘지각’하게 되는 거죠. 연필이 필요하지 않은 사람은 연필을 ‘지각’할 수 없고, 연필을 사용하더라도 그것의 주관적인 사용 따라 저마다의 연필을 ‘지각’을 하게 되는 겁니다. 누군가는 연필을 글 쓰는 도구로 ‘지각’하지만, 또 누군가에게는 그림을 그리는 ‘도구’로 ‘지각’하게 되는 것처럼 말입니다.     


 ‘물질’도 ‘상’이고, ‘지각’도 ‘상’일 뿐입니다. ‘물질’(연필)은 ‘상’들의 총체입니다. 연필을 구성하는 다수의 전자 혹은 쿼크가 만들어내는 진동의 결과입니다. 즉 ‘물질=f(상(쿼크)×상(쿼크)×상(쿼크))…’이라고 도식화할 수 있습니다. ‘지각’(연필이다) 역시 ‘상’들의 총체입니다. ‘지각=f(물질×몸×행동)’이니까요. ‘지각’은 ‘물질(연필)’이 구성하는 진동과 우리의 몸이 만들어내는 진동(심박수·움직임)이 결합하여 만들어내는 독특한(주관적!) 진동의 결과입니다.      



‘사랑’이라는 ‘지각’

 ‘너’를 ‘지각’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그저 세계 속에서 ‘물질’로 존재하는, ‘나’와 아무 상관 없는 ‘너’를 본다는 의미일까요? 바보 같은 소리죠. ‘너’를 지각한다는 것은, ‘물질’로서의 ‘너’와 그 ‘너’를 내가 어떻게 대할지(행동)와 그 과정을 통해 ‘나’의 몸이 어떻게 반응하는지가 총체적으로 함축된 사태인 거죠. 그러니 ‘너’가 어떻게 보이는지는 ‘너’에게만 한정된(객관적) 문제가 아닌 거죠. ‘너’와 ‘너’를 대하는 ‘나’의 행동 그리고 ‘나’의 몸이 반응하는 과정을 통해 ‘너’를 보게 되는 겁니다. 즉, ‘너’를 지각한다는 것은 주관적인 문제인 거죠.           


 이제 우리는 ‘사랑’이 무엇인지 대해 알 수 있지요. ‘사랑’은 ‘지각’이죠. ‘너’의 ‘지각’ 중 가장 강력하고 강렬한 ‘지각’이 바로 ‘사랑’일 겁니다. 사랑은 수동인가요? 능동인가요? 소극적 혹은 낭만적인 이들은 사랑을 수동이라고 말하죠. ‘사랑’을 마치 해일처럼 불가항력적으로 닥쳐오는 일이라고 믿는 이들이 있죠. 적극적 혹은 현실적인 이들은 사랑을 능동이라고 말하죠. ‘사랑’을 마치 퍼즐처럼 자신의 노력으로 만들 수 있는 일이라고 믿죠. 이러한 두 가지 관점 모두 사랑의 진실이 아닙니다.      


 ‘사랑’은 ‘해일’과 ‘퍼즐’ 그 사이이며, ‘객관’과 ‘주관’, ‘수동’과 ‘능동’ 사이의 중도中道입니다. 누군가를 사랑스럽게 ‘지각’한다는 것은 단지 상대만의 문제가 아니라, 상대(너)와 자신(나)의 총체적인 문제라고 볼 수 있을 겁니다. ‘사랑’은 사랑스러운 ‘너’를 만나지 못하면 일어날 수 없는 ‘지각’이죠. 하지만 ‘사랑’은 그런 ‘너’를 만나는 것만으로 결코 완성되지 않습니다. 사랑은, 사랑스러운 ‘너’를 만나 그 ‘너를 사랑스럽게 대하며, 그 과정에서 온몸으로 사랑을 느끼게 되는 ’지각‘의 과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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