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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는 ‘나’로 인해 변한다.

과학 너머의 철학

     

 ‘물질’이든 ‘지각’이든 그것은 모두 ‘상’, 즉 진동의 총체입니다. 이는 달리 말해, ‘물질(신체)’과 ‘정신(사유)’은 분명 별로도 존재하지만, 이는 동시에 하나인 거죠. 이는 자연 현상에서도 그대로 드러납니다. 빛은 입자(물질)일까요? 파동(정신)일까요? 빛은 상황과 조건에 의해 ‘입자’(물질)가 되기도 하고 ‘파동’(사유)이 되기도 합니다. 즉, 빛은 상황에 따라 ‘입자’ 혹은 ‘파동’인 상태로 별개로 존재하지만 동시에 하나인 겁니다. 바로 이것이 베르그손 형이상학의 독특한 점입니다.      


 베르그손의 형이상학은 실재론(물질)-관념론(정신) 혹은 유물론(물질)-유심론(마음)의 이분법을 넘어서는 형이상학입니다. 베르그손의 이런 철학은 과학이 보지 못하는 지점을 알려줍니다. 베르그손이 살았던 20세기 초반은 뇌 과학, 자연과학 분야가 완성되어 가는 시기였어요. 당시 과학자들은 ‘자연 현상은 뇌의 작용이다.’라고 단순히 말하곤 했습니다. 쉽게 말해, 뇌 안에 있는 분자들이 어떻게 운동하느냐에 따라 세계를 파악할 수 있다는 거죠.      


 당시 과학자들의 논리는 뇌 안의 분자 운동 함수관계에 따라 세계가 지각된다는 거였죠. 세계는 뇌에 어떤 물질 X라는 변수를 집어넣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함수관계일 뿐이라는 거죠. 이것이 어떤 의미인가요? ‘세계는 별거 없어. 뇌가 분자 운동을 일으키는 게 세계야.’ 베르그손은 이런 단순한 지적 체계와 관조적인 태도에 동의하지 않아요. ‘지각’의 진실에 대해 베르그손은 이렇게 말합니다.      



지각의 중심, 몸

 여기 세계에 대한 나의 지각이라 부르는 상들의 체계가 있다그것은 어떤 특별한 상즉 나의 몸이 조금만 변해도 밑바닥으로부터 꼭대기까지 완전히 뒤집어져 버린다그 특별한 상이 중심을 차지한다그것을 중심으로 모든 상들이 조절된다만화경을 돌린 것처럼 그것의 각 움직임에 따라 모든 것이 변한다물질과 기억』 앙리 베르그손     


 베르그손에 따르면, 세계에 대한 지각은 특별한 ‘상’, 즉 나의 몸에 큰 영향을 받습니다. 즉, 나의 몸이 조금만 변해도 밑바닥부터 꼭대기까지 완전히 뒤집혀버리죠. 그 특별한 ‘상’(몸)이 세계를 지각하는 중심인 겁니다. 이는 사실 어려운 말도 아니죠. 내가 기분 좋거나 컨디션이 좋으면 세상이 한없이 좋게 보이지만, 내가 기분이 안 좋거나 컨디션이 안 좋으면 세상이 다 어두워 보이잖아요.     


 “나의 지각이라고 부르는 상들의 체계”는 나의 몸이 조금만 변해도 밑바닥부터 꼭대기까지 싹 다 뒤집히는 거예요. 내(몸)가 어떤 상태이냐에 따라서 그 ‘상’(세계)들도 변하는 거예요. 나의 컨디션이 좋으면 상대방의 헛소리도 견딜 수 있지만, 나의 컨디션이 안 좋으면 상대방의 헛소리를 못 견디는 거예요. 세계란 것은 만화경을 돌린 것처럼 복잡하고 미묘하게 변화하며 포착되는데, 그 만화경의 돌리는 중추적인 것이 바로 우리의 몸이라는 것이죠.      


 하나의 예를 더 들어 볼까요? 사랑할 당시에는 그렇게 근사해 보였던 사람이 사랑이 끝나면 왜 그렇게 못나 보일까요? 그 사람이 갑자기 살이 찌거나 혹은 못생겨지는 수술을 한 게 아니잖아요. 그런데 왜 다르게 지각하게 될까요? 사랑 중이거나 사랑 끝났을 때도 그 사람이 구심신경을 통해 들어오는 분자 운동의 함수는 같을 수 있죠. 즉, 객관적인 입력값은 같을 수 있죠.     

 

 하지만 사랑이 끝난 후에는 내(몸)이 내보내는 진동(반응)은 달라질 수밖에 없잖아요. 그리고 그 반응(표정·말투)은 상대에게 영향을 미치게 되고, 상대 역시 어떠한 반응하게 되겠죠. 그 반응-영향-반응의 순환 속에서 발생하는 진동의 중첩을 통해서 그 사람을 지각하게 되는 거죠. 이것이 그렇게 근사해 보였던 사람이 사랑이 끝난 후에는 못나 보이는 이유죠. 나에게 들어오는 객관적인 입력값이 같더라도, 내가 내보내는 출력값이 매번 다르고, 그 출력값이 다시 세계에 영향을 미치는 총체적인 과정이 바로 세계의 지각인 거예요.    


 

나는 세계를 수용하며, 세계는 나의 개입이다.    


 세계를 단순히 우리 뇌에서 일어나는 반응이라고 생각하면 안 돼요. 실험실에 있는 과학자나 그렇게 이야기하는 거예요. 삶 중간에 서 있는 철학자는 그렇게 이야기하면 안 돼요. 그건 삶의 진실을 왜곡하는 거예요. 철학 없는 과학은 위험할 수 있어요. 만약에 20세기 뇌과학자가 말한 바가 옳다면, 우리는 세계에 결코 개입할 수 없어요. 어떻게 개입하나요? 세계는 뇌의 분자 운동으로 다 확정되는 건데.      


 세계는 그런 게 아니요. 세계는 우리가 개입할 수밖에 없고, 개입되는 그 자체인 거예요. 그래서 베르그손이 “우리의 지각이 단지 두뇌 덩어리의 분자적 운동들에만 의지한다고 말하지 말자. 지각이 분자 운동과 함께 변하기는 하지만 그런 운동 자체는 나머지 물질계와 불가분적으로 연결되어 있다”고 말하는 거예요. 내가 하나의 세계를 구심성 운동으로서 받아들이고, 다시 원심성 운동으로 내보내는 그 순간에 세계도 변하잖아요. 세계라는 것은 바로 그 받아들임과 내보냄의 순환 속에서 만들어지는 끊임없는 변화 그 자체라고 말할 수 있어요.      


 우리는 종종 냉소적인 삶의 태도를 갖게 될 때가 있죠. “내가 뭘 열심히 한다고 네(세상)가 바뀌겠어?” 스스로 똑똑하다고 믿는 이들일수록 더욱 쉽게 이런 태도를 취하곤 하죠. 베르그손의 철학을 이해하면 이런 냉소주의적 태도가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 분명하게 알게 됩니다. 세계는 객관적으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나’와 ‘너’가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일련의 과정 자체가 바로 세계니까요. 


 우리는 분명 세계를 수용하지만, 동시에 우리가 세계에 영향을 미칩니다. 세계는 그렇게 움직여요. 우리가 하나의 행동을 바꾸어서 세계에 영향을 미치면, 세계도 그 변화된 상태를 우리에게 다시 되돌려줍니다. 이는 우리의 인간관계에서 그대로 드러나지 않나요? 우리는 언제 가까웠던 사람과 멀어지나요? 작은 오해로 그 사람이 나한테 안 좋은 표정을 보내면 우리는 그걸 받아들이죠. 이전까지는 좋은 표정을 보여주었더라도, 이제 나의 표정이 안 좋아지겠죠. 그렇게 다시 그 사람도 나에게 안 좋은 표정을 보여주는 거죠. 그런 식으로 관계가 계속 변하는 거예요. 이것이 가까웠던 사람과 멀어지는 과정이잖아요.



세계는 ‘나’로 인해 변한다.


 무엇이 문제였던 걸까요? 세상 사람들은 ‘한 사람’을 ‘지각’할 때 구심신경만 쓴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죠. ‘저 사람은 나쁜(좋은) 사람이지.’ 하지만 삶의 진실은 ‘지각’할 때 원심신경도 사용되고 있다는 거예요. 그 사람이 나쁜(좋은) 사람인 이유에는 그 사람이 나쁜 부분도 있겠지만, 우리가 그 사람을 나쁘게 대했기 때문인 부분도 있는 거예요. 많은 이들이 자신은 마치 진공의 상태에 있는 것처럼 살아요. 세계(사람) 속에 존재하며 세계(사람)에 영향을 미치며 살면서도 자신은 그 세계와 아무 상관 없이 별도로 존재한다고 여기는 거죠.   

  

 ‘나는 문제가 없는데 세상이 문제야.’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던가요. 하지만 삶의 진실은 그렇지 않죠. 세상이 나쁘게 느껴진다면 그건 내가 세상을 나쁘게 대했기 때문인 부분도 있는 거예요. 처음엔 세상이 우리들에게도 좋은 세상이었을 수도 있었을 거예요. 하지만 작은 불운 때문에 구심성 운동으로 세상을 나쁘다고 받아들이고, 그와 동시에 원심성 운동으로 세상을 나쁘게 대했던 일들이 일어나죠.     

 

 주변 사람들이 늘 웃으며 대해주었는데, 어느 날 우리에게 욕을 하는 사람이 나타난 거죠. 그때 우리는 그 욕하는 사람만을 받아들인 게 아니죠. 동시에 우리 자신도 누군가에게 나쁜 마음을 갖게 또 그것을 표현하게 되잖아요. 이 전체 과정에서 구심성 운동(나쁜 사람)만을 인식하고 원심성 운동(나쁜 마음)은 인식하지 못하게 되는 경우가 있죠. 바로 이것이 자신은 아무 문제 없는데 세상이 문제라고 확신하게 되는 이유잖아요.  


    

행복한 자의 세계와 불행한 자의 세계는 다르다.

      

 항상 자신이 피해자라고 여기는 이들이 있죠. 이는 베르그손 입장에서 보면 황당한 거예요. 항상 일방적으로 피해만 당하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아요. 만약 그런 이가 있다면, 그는 원심성 신경은 다 잘려있고 구심성 신경만 있는 몸을 갖고 있는 존재라는 이야기잖아요. 하지만 그런 몸을 가진 이는 없죠. 우리는 모두 원심신경과 구심신경을 모두 갖고 있잖아요. 그러니 우리가 특정한 세계 속에서 산다면, 그것은 우리가 내보낸 행동 양식들의 결과이기도 한 거예요.      


 행복한 자의 세계는 불행한 자의 세계와는 다른 세계이다논리-철학 논고』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비트겐슈타인은 행복한 자의 세계와 불행한 자는 세계는 다르다고 말해요. 즉, 우리는 하나의 동일한 세계에서 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행복하거나 불행한 각자의 세계에서 살고 있다는 거에요. 이는 명백한 삶의 진실이죠. 우리는 구심신경으로 세계를 받아들이고 동시에 원심신경으로 세계를 구성하게 되기 때문이에요. 행복한 이들이 행복한 세계에서 사는 이유는 그들이 행복한 세계를 구성할 행동 양식을 내보냈기 때문이에요. 반대로 불행한 이들이 불행한 세계에서 사는 이유 역시 마찬가지죠. 그들이 불행한 세계를 구성할 행동 양식을 내보냈기 때문이죠.     


 우리는 동일한 세계에서 사는 게 아니에요. 각자의 세계에 살아요. 그리고 그 세계는 바로 우리 자신이 구성해 나가는 세계죠. 세계가 변하면 '나' 역시 분명 변하겠죠. 하지만 동시에 그 가능성만큼, ‘나’가 변하면 세계 역시 변하는 거예요. 이 삶의 진실에 이르면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불행한 세계 속에 있더라도, 애를 써서 자신의 기쁨을 발견하고 주변 사람들에게 기쁨을 나눠 주려고 해야죠. 그러면 그 주변 사람들이 ‘나’의 세계의 일부가 되겠죠. 그렇게 점점 '나'의 행복한 세계가 구성되는 거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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