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자유는 비결정성이다.

동물과 인간의 차이는 무엇인가?

 베르그손은 인간의 뇌와 신경계의 근본적 기능이 ‘생각’(사유)이 아니라 ‘행동’(반응)에 있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하나의 질문에 봉착하게 됩니다. ‘동물과 인간은 무엇이 다른가?’ 돼지는 먹이(혹은 위험)가 주어지면, 그것이 먹을 수 있는 것(혹은 위험)인지 아닌지를 구분(반응)하고, 그것이 먹을 수 있는 것(혹은 위험)이라면 어떻게 먹을(혹은 피할) 것인지 행동합니다. 그것이 돼지의 뇌와 신경계 기능입니다.     

 

 베르그손의 논의에 따르면 우리의 뇌·신경계 기능 역시 돼지의 그것과 근본적인 차이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인간은 돼지와 차이가 없는, 그저 동물적인 존재이기만 한 것일까요? 그렇지 않지요. 동물과 인간은 분명 다릅니다. 그 차이가 ‘생각’(사유)이 아니라면 무엇일까요? 어떤 지점이 인간과 동물의 차이를 구분 짓는 것일까요? 베르그손의 이야기를 들어봅시다.     



인간의 고유성, 뇌와 신경계의 발전

     

 신경계통이 발전할수록 더 수가 많고 더 멀리 떨어진 공간의 점들을 항상 더 복잡해지는 운동 장치와 관계 맺게 해준다물질과 기억』 앙리 베르그손     


 뇌와 그것에 연결된 신경계 전체가 발전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개와 인간을 예로 들어봅시다. 인간은 개보다 신경계가 발전했죠. 이는 인간이 개보다 더 멀리 떨어진 항과 더 많은 항을 연결 지을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즉, (그 항들을 연결할 수 있는) 더 복잡한 운동 장치로서의 몸을 갖고 있다는 것이지요. 개는 땅에 떨어진 물건이나 앞발을 들어서(혹은 뛰어올라서) 닿을 수 있는 공간에 있는 물건들만을 연결시킬 수 있죠. 하지만 인간은 다르죠.      


 인간은 자동차나 사다리를 통해 더 멀리 있는, 더 높이 있는 항들을 손쉽게 연결시킬 수 있습니다. 심지어 인간은 스마트폰을 통해 지구 반대편에 있는 이들과도 순식간에서 관계 맺을 수 있죠. 신경계가 극도로 발전한 인간은 “더 수가 많고 더 멀리 떨어진 공간의 점들을” 연결할 수 있는 복잡한 운동 장치로서의 몸을 갖고 있다는 것. 바로 이것이 인간과 동물의 차이인 겁니다.


 개는 (더 적은 항들을 연결할 수 있는) 단순한 운동 장치를 갖고, 인간은 (더 많은 항들을 연결할 수 있는) 복잡한 운동 차이를 갖고 있지요. 즉, 인간은 여타 동물에 비해 뇌와 신경계가 발전했고, 이는 운동 장치로서의 복잡성의 증가를 의미합니다. 뇌와 신경계가 발전할수록 운동 장치로서의 복잡성은 점점 커지게 되죠. 바로 이 운동 장치로서 복잡성의 정도 차이가 인간과 동물의 차이인 셈입니다. 그런데 이 차이는 단순히 물질적인 운동 장치(몸)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에는 더욱 심층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인간의 고유성은 ‘자유’에 있다.

        

 다시 처음 질문으로 돌아가 볼까요? 동물과 인간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바로 ‘자유’입니다. 동물에게는 ‘자유’가 없고, 인간에게는 ‘자유’가 있습니다. 더 멀리 있는, 더 많은 항들을 연결할 수 있는 복잡한 운동 장치를 갖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그것은 더 넓은 ‘선택의 폭latitude’을 갖는다는 것이죠. 더 넓은 선택의 폭을 갖는 것, 그것이 바로 ‘자유latitude’를 의미 하잖아요.      


 이렇게 하여 그것이 우리 행동에 남겨주는 자유latitude가 넓어진다신경계의 완벽성이 증가한다는 것은 바로 이러한 사실로 이루어진다물질과 기억』 앙리 베르그손     


 인간과 아메바(원생생물)로 설명해 볼게요. 인간이 아메바와 다른 점은 뇌와 신경계가 발전했다는 점이잖아요. 인간은 아메바보다 압도적으로 많은 수의 뉴런을 갖고 있습니다. 신경계가 발전할수록 더 멀리 떨어진 공간의 더 많은 수의 항들을 원활히 연결할 수 있는 복잡한 운동 장치를 갖게 되었죠. 바로 이것이 인간의 행동에 ‘자유’가 점점 더 넓어지게 되는 이유죠.      


 한 생명체(원생생물)가 고등동물로 진화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지각할 수 있는 공간의 범위가 넓어진다는 겁니다. 아메바는 먹이가 신체 표면에 붙어야만 지각할 수 있고, 개는 어느 정도 거리가 있을 때 냄새로 지각할 수 있고, 인간은 더 멀리 떨어져서 시각으로 지각할 수 있죠. 신경계의 발전, 즉 뉴런이 많아지면서 지각할 수 있는 공간의 폭이 커지는 거죠. 바로 이것이 ‘자유latitude’인 겁니다.     


 아메바나 개는 스마트폰을 갖고 선택할 수 있는 폭이 없지요. 하지만 인간은 스마트폰을 갖고 선택할 수 있는 폭이 넓습니다. 즉, ‘자유’(연결할 수 있는 선택의 폭)의 차이가 바로 동물과 인간을 구분 짓는 지점입니다. “신경계의 완벽성이 증가한다.” 이는 ‘자유’의 증가를 의미하는 것이죠. 신경계의 점점 더 완벽해질수록 점점 더 멀리 있는, 더 많은 항들을 연결시킬 수 있는 복잡한 몸(운동 장치)을 갖게 되기 때문이죠.      



신경계의 발전과 자유

 베르그손은 ‘자유’를 ‘freedom’이나 ‘liberty’가 아닌 ‘latitude’로 표현했어요 ‘Latitude’는 지리학에서 자주 쓰는 용어인데, 이것을 ‘자유’라고 표현한 것이 좋았어요. 이전에는 연결할 수 없었던 항들을 연결할 수 있게 되는 것이 바로 ‘자유’라고 말하는 거잖아요. 단순히 자신 마음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선택의 폭을 확장하는 것이 ‘자유’라고 말하는 것이 ‘자유’ 개념을 더 잘 표현했다고 생각했어요. 정말 그렇지 않나요? 인간이 아메바보다 자유로운 이유는 인간이 지각(연결)할 수 있는 대상의 공간이 더 넓기 때문이잖아요. 베르그손의 이러한 통찰을 통해 ‘자유’에 대한 오래된 오해를 바로잡을 수 있습니다.     


 신경계통이 동물 계열의 한쪽 끝에서 다른 쪽 끝까지 점점 필연성이 감소하는 행동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라면그것을 본받아 진보하는 지각 역시 그 전체가 순수 인식이 아니라 행동을 향한 것으로 생각해야 하지 않겠는가물질과 기억』 앙리 베르그손     


 동물들의 신경계 진화를 살펴봅시다. 아메바에서 인간까지 진화하는 과정을 생각해 볼까요? 편의를 위해 동물의 진화를 ‘아메바→개→인간’으로 단순화 봅시다. 아메바는 주변에 떠다니는 유기물을 만나면 섭취할지 말지 둘 중 하나를 필연적으로 선택해야 합니다. 반면 개는 후각을 통해 더 많은 먹이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신경계는 그보다 더 진화했기 때문에 아메바나 개보다 훨씬 더 다양한 선택지 중에 하나를 선택할 수 있죠.      


 이 진화 과정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요? 바로 필연성의 감소입니다. 선택지가 점점 넓어지기에 점점 필연적인(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행동이 줄어드는 것이죠. 신경계가 진화할수록 “점점 필연성이 감소하는 행동”이 가능해지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자유’입니다. 인간은 고등동물로 진화하면서 더 넓은 공간의 더 많은 항들을 연결할 수 있는 ‘자유latitude’를 갖게 됐죠? 이 ‘자유’가 커질 때 필연성이 줄어들 수밖에 없잖아요. 



‘자유’는 행동 가능한 선택 폭의 상승

  

 1평에 사는 사람은 ‘필연적’으로 팔굽혀펴기 운동만 할 수밖에 없어요. 반면 10,000평에 사는 사람은 팔굽혀펴기뿐만 아니라 축구, 농구, 복싱을 할 수 있죠. 즉 그만큼 ‘필연성’이 감소하는 것이죠. 우리가 더 넓은 공간에서 더 큰 ‘자유’를 느끼는 것은 더 넓은 공간에서 필연성이 그만큼 줄어들기 때문입니다.    

  

 아메바에서 인간(고등동물)으로 진화하는 과정을 ‘순수한 인식 능력의 상승’으로 봐야 할까요? 아니면 ‘행동 가능한 폭의 상승’이라고 봐야 할까요? 당연히 후자겠죠. “야, 이 아메바 같은 새끼야!” 누군가 이런 말을 했다고 해봅시다. 이는 “왜 그렇게 필연적으로 사는 거야!”라는 말이잖아요. 즉, 인간에게는 진화의 결과만큼의 ‘자유’가 주어져 있는데, 왜 아메바처럼 필연적(부자유)으로 사냐고 답답해하는 거잖아요.     


 신경계의 진화를 순수 인식의 관점으로 봐서는 안 돼요. 즉, 신경계의 발전을 외부 대상을 더 잘 인식하게 된다는 측면으로 이해서는 안 되는 거죠. 진화의 관점에서 신경계의 진화는 ‘행동의 진화’로 봐야 해요. 선택가능한 행동의 폭 확장으로 이해해야 돼요. 아메바보다 더 많은 행동들을 선택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필연적으로 사는 사람들이 있죠. “난 이렇게밖에 못 살아” “나 이것밖에 못 해”라고 하는 사람들요. 이들은 스스로 “나는 아메바야.”라고 이야기하는 것과 다름없어요.      



필연성의 증가는 부자유고, 비결정성의 증가는 자유다.

 지각이 증가하는 풍부함 자체도 단지 사물에 대한 행동에 대해서 생명체의 선택에 남겨진 비결정성의 증가분을 상징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물질과 기억』 앙리 베르그손     


 ‘지각知覺’은 ‘순수 인식’이 아니죠. ‘순수 인식’은 그저 머리로 아는 것이고, ‘지각’은 알아서知 깨닫는覺 것, 즉 잠재적 행동까지 포함되는 것이죠. 그래서 베르그손의 말처럼, ‘지각’이 증가해서 풍부해진다는 것은 행동의 비결정성(다양성)이 증가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지각의 증가는 어떠한 행동이 필연적으로 결정되지 않는 측면(다양성)이 증가한다는 말이죠. 이는 난해한 말이 아니에요.      


 세 사람이 있다고 해봅시다. A는 음식만을 지각하는 사람이고, B는 음식과 돈을 지각하는 사람이고, C는 음식과 돈, 사랑을 모두 지각하는 사람입니다. 이 셋 중 어떤 이의 삶(행동)이 가장 비결정적일까요? 당연히 C죠. A는 음식만 지각하기 때문에 그의 삶은 늘 먹는 것과 관련해서 결정될 겁니다.(낮은 비결정도) B는 음식과 돈만을 지각하죠, 이 때문에 그의 삶(행동)은 먹는 것과 돈을 벌고 쓰는 것과 관련해서 결정될 겁니다.(중간 비결정도) 하지만 C는 다르죠. 음식과 돈, 사랑 모두를 지각하는 그의 삶(행동)은 역동적이며 다양한 방식으로 결정될 겁니다. 즉 C의 삶은 높은 ‘비결정도’를 가질 겁니다.      


 이제 진정한 ‘자유’가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 ‘비결정성’ 즉, 특정한 행동이 필연적으로 결정되지 않음이 바로 ‘자유’입니다. ‘필연성(결정됨)’이 증가한다는 것은 ‘부자유’가 커진다는 의미고, ‘비결정도(결정되지 않음)’가 증가한다는 것은 바로 ‘자유latitude’가 커진다는 의미인 거죠. 베르그손의 논의는 이렇게 표현할 수도 있을 겁니다.      



 ‘자유’는 결정됨이 아니라 결정되지 않음이다.

    

 ‘고등동물로의 진화는 행동의 비결정성(자유)의 증가를 상징한다.’ 고등동물로 진화한다는 것은 그 자신의 삶(행동)이 특정한 상태로 결정되지 않는 영역들을 확보해 나간다는 뜻이에요. ‘아메바→개→인간’ 이러한 진화의 과정은 자신의 삶(행동)과 관련해서 결정되지 않은 영역들이 점점 커지는 과정과 동일합니다. 이는 ‘인간의 종’ 안에서도 적용될 수 있어요. 


 한 인간이 조금 더 나은 존재로 성숙해 나간다는 것은 어떤 의미겠어요? 자기에게 주어져 있는 삶 안에서의 ‘비결정도’을 증가시켜 간다는 거예요. 한 생명체가 고등생물로 진화한다는 것은 비결정성(자유)의 증가를 상징하듯, 한 인간이 좀 더 나은 존재로 성숙해 나간다는 것도 비결정성(자유)이 증가한다는 것을 의미할 겁니다.      


 이제 우리는 ‘자유’라는 개념을 얼마나 크게 오해해 왔는지 여실히 깨닫게 되죠. “자유롭게 살고 싶다” 세상 사람들은 흔히 말하죠. 그들은 언제 이런 말을 할까요? 세상만사 모든 일이 자신의 의지대로 풀리기를 바랄 때죠. 세상 사람들은 언제 ‘자유’를 외칠까요? 다이어트는 하고 싶은데 맛있는 음식을 참고 고통스럽게 운동하고 싶지 않을 때죠. 직장은 다니기 싫지만, 원하는 것들은 사고 싶을 때죠. 그때 그들은 “운동 안 하고 자유롭게 살고 싶다.” “일 안 하고 자유롭게 살고 싶다.”고 말하죠.      


 그들이 말하는 ‘자유’는 무엇인가요? 필연성(결정됨)의 증가입니다. 자신이 어떤 행동을 하든지 그와 상관없이 동일한(자신이 원하는) 결과가 필연적으로 결정되기를 바라는 거죠. 많이 먹든 말든, 운동을 하든 말든 살이 빠지기 바라는 것은 ‘자유’(비결정성)가 아니라 ‘부자유’(결정성)죠. 일을 하든 안 하든 돈이 많아지기를 바라는 것은 ‘자유’(비결정성)가 아니라 ‘부자유’(결정성)일 뿐입니다. 진정한 ‘자유’는 ‘결정성(필연성)’의 감소이고, ‘비결정도’의 증가입니다.     


 


자유, 다중체의 잠재성

 이는 들뢰즈의 ‘다중체multiplicity’ 개념과 연결됩니다. ‘다중체’는 어떤 존재이든 그것은 다중적인 ‘배치agencement’에 의해서 구성되어 있다는 걸 의미합니다. 이는 어떤 존재이든 기존 ‘배치agencement’의 항들이 자리를 바꾸거나 혹은 다른 항이 추가되거나 빠지게 되면 전혀 다른 존재로 변화(생성)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개념입니다. 수소(H) 원자가 두 개인 ‘배치’일 때는 그저 기체(H₂)이지만 여기에 산소 원자(O)가 추가될 때 액체(H₂O)가 되는 것으로 ‘다중체’를 설명할 수 있습니다.


 인간 역시 ‘다중체’이기에 우리 안에는 아직 실현되지 않은 수많은 잠재성이 있습니다. 기존의 ‘나’라는 ‘배치’(생활 습관)에서 아침에 일어나는 방식으로 ‘배치’를 바꿔본 적이 있나요? 혹은 기존의 ‘배치’는 그대로 둔 채 하나의 항(직장)을 빼거나 하나의 항(사랑)을 추가해 본 적이 있나요? 그때 우리는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나’를 만나게 됩니다. 이는 ‘배치’로 구성된 ‘다중체’는 항상 모종의 잠재성을 갖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이 잠재성이 바로 베르그손이 말한 ‘자유(비결정성!)’입니다.     


 “저에게는 OO할 자유가 없었어요” 크고 작은 불행에 휩싸여 있을 때 흔히 하는 말이죠. 이는 자신의 불행을 정당화하는 말일 수는 있어도 삶의 진실은 아니죠. 누구에게나 여분(여지)이 있어요. ‘비결정성’이 있어요. 베르그손의 말을 빌리면, 인간은 뇌와 신경계가 고도로 발전한 존재이기 때문에 언제나 ‘비결정성(자유!)’이 존재합니다. 들뢰즈의 말을 빌리면, 인간은 다중체이기 때문에 우리 안에 아직 실현되지 않은 수많은 ‘잠재성’(자유)이 있습니다. 


 누구에게나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의 삶을 바꿀 여분(여지)이 있어요. 누구에게나 ‘비결정성’과 ‘잠재성’이라는 ‘자유’가 있어요. 이 삶의 진실을 부정하면 안 돼요. 

이전 13화 인간다운 삶은 ‘애벌레-주체’ 속에 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