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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견=지각+기억

모든 ‘지각’은 ‘기억’이 스며든 ‘지각’이다.

 베르그손은 ‘지각’에 이어서 ‘기억’에 관한 논의를 이어갑니다. 이는 ‘지각’과 ‘기억’이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기 때문입니다. 먼저 베르그손의 이야기를 들어볼까요?      


사실상 기억이 스며들어 있지 않은 지각은 없다우리는 우리 감각에 현재 직접적으로 주어지는 것들에다 과거 경험의 무수한 세부들을 섞는다매우 자주 그 기억들은 실제 지각을 이동시키며그때 우리는 실제 지각에서 단지 몇몇 실마리즉 이전의 상들을 상기시킬 수 있는 단순한 기호들만을 취할 뿐이다물질과 기억』 앙리 베르그손     


 ‘지각’과 ‘기억’은 서로 상관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지금 내 눈앞에 있는 사과를 ‘지각’하는 것과 어린 시절 ‘기억’은 아무 상관 없는 것처럼 보이지요. 하지만 “사실상 기억이 스며들어 있지 않은 지각”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어떤 대상을 ‘감각’할 때, (그것을 있는 그대로 ‘지각’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무수한 경험들이 녹아든 채로 ‘지각’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는 우리네 일상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지요.     

 

 지금 눈앞에 우유가 한 잔 있다고 해봅시다. 우리는 그것을 하얀 액체로 분명히 ‘감각’할 수 있죠. 하지만 그 ‘감각’이 고소하고 영양가 있는 음료로 ‘지각’될지, 설사를 유발하는 유해한 음료로 ‘지각’될지는 사람마다 다 다릅니다. 왜 이런 ‘지각’의 차이가 발생하는 것일까요? “현재 직접적으로 주어진 것(우유)”을 ‘감각’할 때, “과거 경험의 무수한 세부들(우유를 먹고 건강해진 경험 혹은 우유를 먹고 배탈 난 경험)”이 섞이기 때문입니다. 즉, 우유와 관련된 ‘기억’에 따라 지금 내 눈앞에 있는 우유를 ‘지각’하는 방식은 저마다 달라지게 마련입니다.      


 이처럼, 어떤 ‘지각’이든 그 속에는 항상 특정한 ‘기억’이 스며들어 있습니다. 바로 그 때문에 “매우 자주 그 기억들은 실제 지각을 이동”시키게 됩니다. 이 지각의 이동, 즉 지각의 차이는 사람마다 다를 뿐만 아니라 한 사람에게도 발생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한 사람의 기억은 결코 고정되어 있지 않고 늘 변화하기 때문입니다. 어린 시절 우유를 먹고 배탈이 났던 기억이 있는 이가 군대 시절 우유를 너무나 맛있게 먹었다고 해봅시다. 그는 한때 우유를 설사를 유발하는 유해한 음료로 ‘지각’했지만, 그 ‘지각’은 곧 고소하고 영양가 있는 음료로 이동(차이)하게 될 겁니다.     


 편견은 ‘기억’이 스며든 ‘지각’이다.

   

 우리의 ‘지각’은 완전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오류투성이에 가까울 겁니다. ‘지각’에는 언제나 저마다의 ‘기억’이 스며들어 있으니까요. 우리의 실제 ‘지각’은 대상을 있는 그대로 ‘감각’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기억’에서 유래한 몇몇 실마리들이 불러일으키는 “단순한 기호들만 취하는” 것일 뿐입니다. 그렇게 ‘기억’은 실제 ‘지각’을 이동시키게 만듭니다. 바로 여기서 인간의 아주 오래된 문제인 편견에 관해 이야기할 수 있을 겁니다.


 편견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지각’입니다. 특정한 ‘기억’이 스며들어 있는 ‘지각’. 즉, 편견은 어떤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기억 때문에 그 대상을 총체적이고 입체적으로 파악하지 못하고 “단순한 기호들만”을 선별적으로 취해서 보는 상태입니다. 이 편견은 분명 우리네 삶에 유해합니다. 옷차림이나 표정 같은 “단순한 기호들만”으로 한 사람을 판단해 버리는 편견은 우리네 삶에 크고 작은 문제를 일으키게 마련입니다. 그런데 이 편견은 유해한 동시에 불가피한 문제입니다. 어째서 그런 것일까요? 베르그손의 이야기를 더 들어봅시다.


 지각의 편리함과 신속성은 그러한 대가를 치른 것이다그러나 거기서부터 또한 온갖 종류의 착각들이 생긴다물질과 기억』 앙리 베르그손 

    

 ‘지각’은 즉각적입니다. 눈앞의 우유를 ‘지각’할 때 고민하지 않지요. 보는 순간 그것을 ‘지각’(“어, 우유네”)하게 됩니다. 이를 베르그손은 이를 “지각의 편리함과 신속성”이라고 표현합니다. 이 “지각의 편리함과 신속성”은 어디서 오는 걸까요? 바로 ‘기억’입니다. 과거 우유와 관련된 ‘기억’이 있기 때문에 지금 내 눈앞에 있는 우유를 편리하고 신속하게 ‘지각’할 수 있는 거죠. 그런데 이 편리하고 신속한 ‘지각’이 가능하려면 반드시 하나의 대가를 치러야 합니다.

      


‘지각의 편리함과 신속성’은 단순화의 결과다.

      

 그 대가는 바로 단순화입니다. ‘기억’을 바탕으로 ‘지각’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그것은 복합적이고 복잡한 대상을 “단순한 기호들”의 형태로 단순화하여 ‘지각’한다는 의미입니다. 이는 과거의 ‘기억’을 바탕으로 우유를 “단순한 기호들”로 받아들이게 된다는 의미죠. 바로 그 때문에 “온갖 종류의 착각들이 생겨”나게 되죠. 그 온갖 종류의 착각들이 바로 우리가 말하는 편견일 겁니다. 이는 난해하거나 생경한 이야기 전혀 아닙니다.      


 어린 시절, 큰 교통사고를 당했던 한 아이가 있습니다. 그 아이는 자신을 둘러싼 수많은 대상(상) 중에서 유독 자동차를 강력(편리·신속)하게 지각할 겁니다. 즉, 자동차에 관련된 ‘지각’을 편리하고 신속하게 할 겁니다. 이는 아이에게 당연한 일이죠. 교통사고에 대한 ‘기억’이 있으니까요. 즉, 자동차를 위험으로 인식하고 그와 관련된 ‘지각’을 편리하고 신속하게 진행할 수밖에 없을 겁니다.      


 이 아이는 세계를 있는 그대로를 ‘지각’하고 있을까요? 그렇지 않죠. 그 아이는 자동차를 편리하고 신속하게 ‘지각’하느라, 나머지 대상들은 단순화시켜 버릴 겁니다. 그 단순화로 아이는 길가에 핀 꽃도, 그 옆을 지나가던 친구도 ‘지각’할 수 없게 될 겁니다. “집에 오는 길에 길가 핀 꽃과 친구를 보았니?” 누군가 아이에게 물으면 아이는 이렇게 답할 겁니다. “꽃과 친구는 없었어요.” 이것이 베르그손이 말한 “온갖 종류의 착각”들이고, 이것이 바로 우리의 편견의 정체입니다. 이에 대해 조금 더 알아봅시다.   


   

같은 영화, 다른 감상

     

내가 물질적 대상이라고 부르는 상이 있고나는 그것에 대해 표상을 가진다그것이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과 나에 대해 존재하는 바가 다르게 보이는 이유는 무엇인가그것은 다른 상들 전체와 연관되어 있는 현재 상이 앞선 상들로부터 연장된 것이듯이 그 자신은 뒤따르는 상들로 연속되기 때문이다물질과 기억』 앙리 베르그손     


 어떤 물질적 대상(상)이 있고, 우리는 그것을 ‘지각’(표상)합니다. 그런데 물질적 대상이 동일하다고 하더라도, 사람들이 그것을 ‘지각’하는 것은 모두 제각각이지요.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즉,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과 나에 대해 존재하는 바가 다르게 보이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를 잘 설명할 수 있는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하나 있습니다.      


 함께 영화를 보고 각자 감상을 이야기하는 자리에 간 적이 있었습니다. 그날 본 영화는『아무르』였습니다. 거기에는 사랑하는 노부부가 나와요. 어느 날 그 아내가 치매에 걸리게 돼요. 그런데 남편은 아내를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고통스러워하는 아내를 죽이게 됩니다. 그리고 남편은 흔적도 없이 어디론가 사라지는 장면으로 영화는 끝이 납니다.      


 저는 그 영화를 아름다운 사랑을 표현한 멜로영화라고 보았습니다. 그런데 함께 영화를 보았던 어떤 이는 그 영화를 독특한 스릴러 영화라고 말하더군요. 그때 소스라치게 놀랐던 기억이 납니다. 저와 그 사람은 똑같은 영화를 보고 전혀 다르게 ‘지각’한 겁니다.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영화)이 나와 그에게 존재하는 바(감상)가 전혀 다르게 보였던 거예요. 왜 이런 일이 벌어졌던 걸까요? 그것은 “현재 상이 앞선 상들로부터 연장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현재 상”을 『아무르』로, “앞선 상들”은 그 사람의 ‘기억’이라고 말할 수 있겠죠. 같은 영화를 다르게 본 것은 각자가 갖고 있는 ‘기억’을 연장한 채로 그 영화를 ‘지각’했기 때문입니다. “스릴러물을 참 잘 만들었네. 아름다운 음악으로 긴장감과 기괴함을 더욱 강조해서 연출했구나.” 누군가 이 영화를 이렇게 ‘지각’할 수 있죠. 이는 그 사람이 진정한 사랑을 해본 ‘기억’이 없거나 혹은 이해관계의 ‘기억’(을 사랑을 착각한 기억)만 있기 때문에 발생한 ‘지각’일 겁니다.      


 “이것이 진짜 사랑 이야기구나” 반면 누군가는 그 영화를 이렇게 지각할 수도 있겠죠. 진정한 사랑을 해본 이들은 알죠. 누군가를 진정으로 사랑할 때, 말하지 않아도 그 사람이 진정으로 바라는 것을 느낄 수 있다는 사실을요. 심지어 그 사람이 바라는 것이 죽음일지라도 기꺼이 그 무게를 짊어지며, 그 사람을 죽여줄 수도 있는 것이 진정한 사랑이죠. 진정한 사랑의 언저리에 가본 이들이라면 이 삶의 진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 ‘기억’을 갖고 있는 이들은 이 영화를 지독히도 아름다운 사랑 영화라고 ‘지각’할 수밖에 없을 겁니다.   


   

편견은 생존을 위한 진화의 부수적인 피해다.

    

 결국 이 모든 일은 ‘기억’이 ‘지각’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발생한 것이지요. 과거에 쌓았던 항(기억)들 때문에 우리가 ‘지각’할 수 있는 것과 ‘지각’할 수 없는 것들이 발생하게 됩니다. 또한 그 기억들 때문에 실제 ‘지각’이 아닌 왜곡된 ‘지각’의 형상들이 나타나게 됩니다. 이것이 우리네 삶에 편견이 발생하게 되는 근본적인 이유입니다.      


 편견은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는 상태입니다. 이는 우리네 삶의 필요악 같은 겁니다. 유해하기 때문에 없는 것이 좋지만, 어쩔 수 없이 필요한 어떤 것입니다. 편견은 인간에게 불가피한 일입니다. 인간은 생존을 위해 세상을 편리하고 신속하게 지각할 수밖에 진화했기 때문입니다. 즉각적인 위험(홍수)과 유익(사냥) 앞에서 그 대상을 어렵고 느리게 지각한다면 어떤 인간도 결코 생존할 수 없었을 겁니다. 이러한 지각의 방식은 여전히 우리에게도 남아 있습니다.      


 교통사고를 당한 기억이 있는 이가 ‘자동차=흉기’라고 ‘지각’하는 것은 분명 편견이지만 그것은 생존을 위해 어쩔 수 없는 일인 것처럼 말입니다. 『아무르』를 스릴러 영화라고 ‘지각’한 것 역시 마찬가지 일 겁니다. 그는 아마 먹고사는 문제(생존!) 때문에 한 사람을 진정으로 사랑할 수 없었던 것인지 모릅니다. 그 사랑의 ‘기억’이 없기 때문에 어느 노부부의 시리도록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를 그저 살인 사건 이야기로 ‘지각’할 수밖에 없었던 것일 테지요. 편견은 생존을 위한 진화의 부수적인 피해라고 정의 내릴 수 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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