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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상'을 본다는 것

세계는 ‘상’이고, 우리가 보는 것은 ‘표상’이다.

 세계는 ‘상’입니다. 우리는 있는 그대로의 ‘상’을 볼 수 없어요. 우리가 ‘상’(세계)을 본다는 것은 ‘표상’한다는 겁니다. 사과가 하나 있을 때 그것은 ‘상’으로 존재해요. 이때 우리는 있는 그대로의 실제 사과(‘상’)를 볼 수 없어요. 우리는 그 ‘상(실제사과)’을 ‘표상(빨갛고 둥근 물체)’으로서만 볼 수 있을 뿐이죠. 비유하자면, 우리는 실제 사과(상)를 볼 수 없고 그 실제 사과를 찍은 사진(표상)으로만 그 사과를 볼 수 있는 겁니다. 실제 사과(상)를 ‘빨갛고 둥근 물체(표상)’으로 본다는 것이 바로 인간의 ‘지각’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하나의 의문점이 생깁니다. 우리가 볼 수 없는 실제 사과 즉 ‘상’은 도대체 어떤 모습인 걸까요?     


 현재적 상이며 객관적 실재인 그 상을 표상된 상은 어떻게 구별되는가그것이 자신의 각 점들에 의해 다른 상들의 모든 점에 작용하고그것이 받아들인 모든 것을 전달하며각각의 작용에 대해 동등하고 반대되는 반작용으로 대응하고 마지막으로 광대한 우주로 퍼져나가는 변화들이 모든 방향으로 지나가는 길에 불과하게 되는 필연성이다물질과 기억』 앙리 베르그손     


 실제 사과는 “현재적 상이며 객관적인 실재인 그 상”입니다. 우리가 보는 빨갛고 둥근 모양의 사과는 “표상된 상”입니다. 베르그손은 이 둘을 구별하기 위해 ‘실제 사과’가 무엇인지에 대해 설명합니다. ‘실제 사과’는 사과 “자신의 각 점들에 의해 다른 상들의 모든 점에 작용하고, 그것이 받아들인 모든 것을 전달하며, 각각의 작용에 대해 동등하고 반대되는 반작용으로 대응하고 마지막으로 광대한 우주로 퍼져나가는 변화들”입니다. 이 복잡하고 난해한 이야기는 다음과 같이 함축할 수 있을 겁니다.     



모든 것은 연결되어 있기에 모든 것은 진동이다.

 “모든 것은 연결되어 있다.” 사과 하나는 결코 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죠. 사과나무에 사과가 하나 열려 있다고 해봐요. 그 사과는 사과나무의 줄기와 서로 작용하고 또 반작용합니다. 그리고 그 나무줄기는 땅에 연결되어 서로 작용을 주고받습니다. 이런 작용과 반작용은 ‘사과-줄기-땅’에서 멈추지 않죠. 그것은 다시 ‘사과-줄기-땅-공기-물-햇볕…’로 연결되어 광대한 우주로 퍼져나가는 변화를 촉발할 겁니다.      


 실제 사과는 이처럼 다른 상들(사과-줄기-땅-공기-물-햇볕…)과 끊임없이 대응(작용·반작용)하며 끝없이 광대한 우주로 퍼져 나가고 있는 상태입니다. 우리가 볼 수 없을 뿐, 실제 사과(상)는 이 무한한 연결고리 속에서 끊임없이 퍼져나가고 있는 변화들인 거죠. 그렇다면, ‘상’, 즉 광대한 우주로 끊임없이 퍼져나가고 있는 변화들은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인 걸까요?      


 바로 ‘진동’입니다. 베르그손이 말한 “현재적 상이며 객관적인 실재”는 전 우주적 연결고리에 의해 떨리고 있는 ‘진동’ 상태인 거죠. 즉, 모든 것이 연결된 채로 떨리고 있는 ‘진동’ 상태입니다. 인간은 감각 기관의 한계로 이 ‘진동’을 파악할 수 없기에 그저 고정된 사과(표상)의 형태로 지각하게 되는 겁니다. 우리가 빨갛고 둥근 물체를 보는 것은 그 광대한 연결 전체(진동)를 볼 수 없어서 특정한 부분 잘라내어서(고정시켜) 보는 상태인 겁니다.  


    

지각은 고립이다.

 내가 그 상을 고립시킬 수 있다면 특히 그것의 외피를 벗겨낼 수 있다면 나는 그것을 표상으로 전환 시킬 것이다물질과 기억』 앙리 베르그손     


 우리가 세계(사과)를 지각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는 ‘상’을 고립시킨다는 의미입니다. 실제 사과, 즉 있는 그대로의 사과는 세계 전체와 연결되어 ‘진동’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볼 수 없죠. 우리가 그것을 보려면 그 ‘진동’으로 감싸져 있는 전체 상태에서 외피를 벗겨내어 특정한 ‘상’으로 고립시켜야만 합니다. 그렇게 세계 전체(진동)에서 특정한 ‘상’을 고립시킬 때, 사과를 빨갛고 둥근 물체로 지각(표상)할 수 있게 되는 겁니다.          


 표상은 분명 거기에 있으나 현실로 이행하는 순간 다른 사물로 이어지고 스스로를 잃어버려야 한다는 의무에 의해 중화된 채로 항상 잠재적으로 있다물질과 기억』 앙리 베르그손   

  

 빨갛고 둥근 물체를 본다는 것은, 세계 전체와 공명하고 있는 상태 중 일부를 고립시킨다는 의미에요. 하지만 그 고립과 상관없이 ‘실제 사과’는 계속 떨리고 있죠. 우리가 사과를 보았을 때 빨갛고 둥근 “표상은 분명 거기에” 있죠. 하지만 그 표상이 “현실로 이행하는 순간”, 즉 세계 전체와 연결된 ‘진동’ 상태로 이행하는 순간, “다른 사물로 이어지고 스스로를 잃어”버리게 됩니다. 즉, 세계 전체와 연결된 사과는 빨갛고 둥근 사과로서의 자신을 잃어버리게 되는 거죠. 세계 전체와 연결된 사과는 진동상태이니까요.      


 진동 상태인 사과는 항상-이미 다른 상태로 전환될 수 있는 잠재적인 형태인 셈인거죠. 우리는 싱싱하고 빨간 둥근 물체를 보지만, 실제 사과 안에는 그것이 공기와 햇볕과 연결되어 ‘부식될 사과’, 토양과 연결되어 ‘썩어갈 사과’ 등등의 형태들이 항상-이미 잠재 되어있는 거예요. ‘상’(실재)를 본다는 것은 ‘진동’을 본다는 의미입니다. 이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본다는 것일까요? 사과를 ‘진동’으로 본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본다는 것일까요?      



‘상’을 본다는 것은 우주적 연결고리를 본다는 것이다.

 우주적 연결고리를 보는 거예요. 눈앞에 있는 ‘사과’를 보면서 그 사과를 존재하게 했던 그 사과나무를 보고, 더 나아가 그 사과나무가 심어진 흙부터 그 사과가 썩어서 다시 돌아갈 흙까지 다 보는 것이에요. 그리고 그 흙과 흙 사이에 다시 씨앗이 있고, 그것이 다시 사과나무가 되고, 거기서 열매가 열려 다시 사과가 되고, 그 사과가 갈변되고, 부식되고, 썩어가는 그 모든 순간까지 다 보는 거예요. 모든 존재들이 자연(세계)으로부터 나와 자연(세계)으로 돌아가는 전체 연결고리를 파악하는 것, 그것이 ‘상’, 즉 ‘진동’을 본다는 거예요.    

 

 그러한 전환을 얻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대상을 밝히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그것의 어떤 측면을 어둡게 하고 그것에 매우 많은 부분을 감소시켜 그 잔여물이 사물처럼 주변으로 끼어들어 가는 것이 아니라 그림처럼 거기서 떨어져 나오게 해야 한다물질과 기억』 앙리 베르그손     


 여기서 베르그손이 말하는 “그러한 전환”은 ‘상’을 ‘표상’으로 전환하는 거예요. 즉, 세계 전체와 연결되어 진동 상태(‘상’)인 그 무엇을 빨갛고 둥근 물체로 보게(‘표상’) 되는 전환을 의미하는 거에요. 쉽게 말해, “그러한 전환”은 우리가 세계를 보는 방식, 즉 ‘지각’이에요. 이 ‘지각’에 대해 베르그손은 이렇게 말해요. “우리가 본다는 것은 밝히는 것이 아니라 어두운 상태로 돌아가는 거야. 원래 있는 그대로를 보는 것이 아니라 전체 중에서 일부를 사진처럼 잘라내서 어두운 상태로 들어가니까 그걸 볼 수 있는 거야.”     


 한 사람을 만났다고 해 봐요. 그 사람을 좋은 사람으로 판단(표상)할 수도 있고, 나쁜 사람이라고 판단(표상)할 수도 있죠. 하지만 실제 그 사람(상)은 좋은 사람도 나쁜 사람도 아니에요. 회사에서 부장님은 진짜 나쁜 놈이죠. 하지만 그 사람도 집에서는 좋은 아버지일 수 있어요. 우리가 그 사람을 직장 상사로만 딱 잘라 놓고(고정시켜) 보기 때문에 쓰레기, 사이코패스로 ‘표상’되는 거죠. 직장이라는 관계 이외에 그 사람의 잔여물을 가족 혹은 다른 친구들과의 관계 속에 넣으면 그 부장님은 좋은 사람이 되는 거예요. 우리가 직장 상사를 나쁜 놈으로 보게 되는 건, 그 사람과 관계된 전체(상)를 잘라내고 일부만을 어둠 속에서 보기(표상) 때문이에요.


      

‘지각’은 밝음이 아니라 어둠이다.

    

  이제 우리가 ‘지각’에 대해 얼마나 큰 착각을 하고 있었는지 알 수 있어요. 우리가 무엇을 ‘본다(지각)’고 했을 때, 어둠(흐림)에서 밝음(선명)의 이행이라고 여기죠. 멀거나 혹은 어두워서 흐리게 보이던 어떤 대상을 ‘어, 사과네’라고 ‘지각’하게 되었을 때, 밝고 선명해졌다고 여기죠. 하지만 우리가 무엇인가를 ‘지각’한다는 것은 정확히 그 반대에요. 무엇인가를 지각한다는 것은 “대상을 밝히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그것의 어떤 측면을 어둡게”하는 거예요.      


 우리가 ‘본다’ 혹은 ‘지각’한다는 것은 밝은 게 아니라 어두운 상태에 있는 거예요. 있는 그대로의 사과를 보기 위해 사과와 연결된 존재(사과-줄기-땅-공기-물-햇볕…)들을 모두 밝게 드러내면 어떻게 될까요? 세계 전체와 진동하고 있는 상태가 드러나요. 하지만 우리는 이 상태를 ‘지각’할 수 없죠. 오히려 세계 전체와 연결된 ‘진동’ 상태를 어둡게(분절·고정) 만들어서 그 일부만 “그림처럼 거기서 떨어져 나오게” 해야 해요. 그때 비로소 우리는 빨갛고 둥근 물체를 ‘지각’할 수 있게 되는 거예요. 무엇인가를 ‘지각’한다는 것은 그런 것이죠.   

   

 베르그손의 이러한 논의는 우리네 삶을 아프게 성찰하게 만드는 측면이 있어요. 우리는 사랑하는 이(가족·친구·연인)를 볼 수 있고, ‘지각’할 수 있죠. 바로 이 때문에 우리는 너무 쉽게 사랑하는 이를 잘 알고 있다고 확신하게 되죠. 정말 그럴까요? 우리는 정말 사랑하는 ‘실제 그(그녀)’를 알고 있을까요? 아마 아닐 겁니다. 우리는 사랑하는 이를 ‘표상(판단)’할 수 있을 뿐, ‘실제 그(그녀)’의 모습을 알지 못해요. 베르그손의 말처럼, ‘지각’은 밝고 선명한 상태가 아니라 오히려 어둡고 흐린 상태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니까요. 


     

사랑은 ‘상’을 본다는 것

 사랑하는 이의 미소와 눈물을 ‘지각’하게 될 때가 있죠. 흐드러진 벚꽃을 보며 그(그녀)가 미소 짓는 모습을 ‘지각’합니다. 겨울 바다를 보며 그(그녀)가 눈물짓는 모습을 ‘지각’합니다. 그때 우리는 그(그녀)를 알게 되었다고 믿지요. 그(그녀)는 벚꽃을 좋아하며, 겨울 바다를 싫어한다고. 정말 그럴까요? 아닐 겁니다. 우리는 사랑하는 그(그녀)를 진짜로 본 적이 없을지도 몰라요. 그 모든 ‘지각’은 그(그녀)를 어둡고 흐린 상태로 본 것이니까요.      


 ‘지각’은 ‘표상’일 뿐, ‘상’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그(그녀)의 진짜 모습은 ‘상’입니다. 우리는 그(그녀)라는 ‘상’을 볼 수 없어서 ‘실제 그(그녀)’의 한 모습을 그림처럼 잘라내서 ‘지각’할 뿐이죠. 바로 여기서 바보 같은 일이 시작돼요. 그(그녀)를 다시 미소 짓게 하기 위해서는 벚꽃이 필 때까지 기다리면 되는 것일까요? 그(그녀)를 다시는 눈물짓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겨울 바다에 가지 않으면 슬픈 되는 것일까요? 이보다 바보 같은 일도 없을 거예요. 이런 바보 같은 일은 그(그녀)를 ‘지각’한 것으로 ‘실제 그(그녀)’를 알게 되었다고 확신했기 때문에 벌어진 일일 테지요.     


 ‘실제 그(그녀)’를 안다는 것은 ‘표상’이 아닌 ‘상’을 본다는 거예요. 그 ‘상’은 어떻게 볼 수 있을까요? 그(그녀)와 연결된 세계 전체를 섬세하게 살펴보는 것으로 가능할 거예요. 그(그녀)의 부모, 형제, 친구와 있었던 일들, 그(그녀)가 들었던 음악, 읽었던 책, 보았던 영화… 그(그녀)와 관계되어 함께 진동하고 있는 세계 전체를 더듬어나가려 애를 쓸 때 그(그녀)라는 ‘상’을 조금씩 더듬어 볼 수 있을 거예요.    


  

사랑은 어둠 속에서 ‘너’를 본다는 것

    

 그(그녀)라는 ‘상’을 조금씩 더듬어나갈 때 비로소 알게 될 거예요. 그(그녀)가 그날 미소 지었던 건 벚꽃 때문이 아니라 해군이었던 아버지와 함께 행복했던 계절이 떠올랐기 때문이라는 걸요. 그(그녀)가 그날 눈물지었던 건 겨울 바다 때문이 아니라 작년에 돌아가신 어머니의 ‘바다를 한 번만 더 보고 싶다’는 말이 기억나서였다는 걸요. 그(그녀)를 ‘지각’하는 것이 아니라 그(그녀)라는 ‘상’에 가닿으려는 노력으로 우리는 그(그녀)의 실제를 조금씩 더 알아가게 될 겁니다.     


 ‘진짜로 너를 본다’는 건, 밝음이 아니라 어둠 속에서 본다는 걸 의미해요. 흐릿하고 모호한 어둠 속에서만 ‘너’를 진짜로 볼 수 있어요. 한 사람을 만날 때 선명하게 보이잖아요? 그 모습은 거의 대부분 오해이거나 편견일 거예요. 흐릿하고 모호한 상태에서 한 사람이 보여야 해요. 그래서 성숙한 사람들은 한 사람을 만날 때 조심스러운 거예요. 밝지 않으니까요. 어두워서 더듬어서 가야 하니까요.     


 ‘표상’과 ‘지각’ 너머 ‘삶의 진실’(상)에 이르려면 섬세해질 수밖에 없어요. 섬세하지 않은 사람은 스스로 무슨 짓을 하는지도 모르고 얼음판 위를 쿵쿵거리며 걸어가는 거예요. 어두컴컴한 곳에서 어두운지도 모른 채 100미터 전력 질주를 하는 거예요. 그런 이들은 크게 다치고 나서 후회할 수밖에 없어요. ‘너의 진실’(상)을 모른 채로 사랑하면 필연적으로 상대에게 상처를 줄 수밖에 없고 그 상처는 결국 자신에게 되돌아오게 마련이니까요.     



‘상’을 본다는 것은 인간적인 시선으로 산다는 것이다.

      

 한 개인을 사랑하는 일만 그런 것이 아니죠. 사회적 문제 역시 마찬가지예요. 대표적인 사회적 ‘표상’과 ‘지각’이 바로 이데올로기에요. 진보주의, 보수주의, 혹은 자본주의, 공산주의 같은 이데올로기는 삶의 진실(상)이 아니라 ‘표상’이죠. 이데올로기는 모든 것이 서로 연결되어 진동하고 있는 세계 전체 중 일부를 떼어서 고정시켜서 세계를 파악하게 만드는 거죠. 그래서 이데올로기 빠져 있는 이들은 자신이 무슨 짓을 하는지도 모른 채로 후회할 짓들을 하며 살게 되는 거예요.      


 『수프와 이데올로기』라는 다큐멘터리 영화가 있어요. 4.3 항쟁으로 일본으로 피난을 갈 수밖에 없었던 할머니, 강정희씨의 이야기에요. 4.3항쟁은 ‘남’과 ‘북’이라는 이데올로기의 대립이 낳은 참혹한 살육 사건이에요. 할머니는 그 비극적인 사건 때문에 일본으로 건너갈 수밖에 없었던 거예요. 당연히 남한이 싫었기 때문에 북한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는 ‘조총련’(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 활동을 해요. 그 할머니의 유일한 취미 생활이 김정일 찬양가 부르는 거예요. 그런데 그 노래 역시 4.3 사건만큼이나 끔찍한 거잖아요.      


 놀라운 건, 그 노래를 부르는 할머니의 모습이 아름다워 보인다는 거예요. 그 끔찍한 노래가 아름답게 들렸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수프와 이데올로기』가 ‘이데올로기(표상)’ 너머 한 사람의 굴곡진 삶의 여정 자체(상!)를 보여주었기 때문이었을 거예요. 김정일 찬양가를 부르는 모습에 눈살이 찌푸려지기는커녕 먹먹한 아름다움이 스며 있었던 건, 그 영화가 삶의 진실을 보여주었기 때문이었을 거예요.      


 강정희 할머니의 삶과 연결된 그 모든 고통스러웠던 세계 전체의 진동을 느꼈던 거예요. 그 진동이 서럽게 아름다운 음악처럼 들렸던 거예요. ‘상’을 본다는 것은 있는 사람과 삶과 사랑의 아름다움을 본다는 말일 거예요. ‘표상’을 본다는 것은 그저 동물적인 시선으로 산다는 것이고, ‘상’을 본다는 것은, 동물적인 시선 넘어 인간적 시선으로 살아간다는 말일 겁니다. 이것이 우리가 쉬이 가닿을 수 없는 ‘상’의 세계를 더듬어보려고 애를 쓰며 살아야 하는 이유일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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