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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들리는 것은 바람도 깃발도 아닌 마음이다.

지각은 불필요하고 무관심한 것들을 배제한 결과다.
 

 '지각'은 선택 가능한 행동(자유)에 비례합니다. 즉, 우리는 각자가 할 수 있는 것들을 보게 되는 거죠. 이에 대해 베르그손은 이렇게 말합니다.  


물질에 대한 우리의 표상은 물체에 대한 우리의 가능한 행동의 척도이다그것은 우리의 필요그리고 더 일반적으로는 우리의 기능이 관심을 갖지 않는 것을 배제한 결과이다물질과 기억』 앙리 베르그손

     

 우리가 무엇인가를 표상(지각)한다는 것은 결국 “물체에 대한 우리의 가능한 행동의 척도”인 거예요. 꽃을 지각하는 사람(꽃이 있다)과 지각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죠(아무것도 없다). 또 지각하더라도 그것을 강하게 지각하는 사람(“이 꽃 참 예쁘구나”)이 있고, 약하게 지각하는 사람이 있죠(“뭐야, 꽃이네”). 이들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바로 그들의 가능한 행동의 척도에요. 


 ‘꽃이 있다’고 지각하는 이들이 있죠. 이는 그들이 꽃으로 할 수 있는 가능한 행동(음미·만지기·팔기)이 있기 때문인 거죠. 반면 꽃 옆을 지나가면서도 ‘아무것도 없다.’고 지각하는 이들이 있죠. 이는 그들이 꽃으로 할 수있는 행동이 전혀 없기 때문인 거죠. 마찬가지로 “이 꽃 참 예쁘구나”라고 꽃을 강하게 지각하는 이들은 그 꽃에 대해 가능한 행동, 즉 음미하려는 마음이 크기 때문입니다. 반면 “뭐야, 꽃이네”라고 꽃을 약하게 지각하는 이들은 그 꽃에 대한 가능한 행동의 크기가 작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삶의 진실이 의미하는 바가 뭘까요? 무엇인가를 지각한다는 것은 “우리의 필요, 그리고 더 일반적으로는 우리의 기능이 관심을 갖지 않는 것을 배제한 결과”라는 거죠. 꽃 옆을 지나면서도 꽃을 지각하지 못하는 건, 그가 ‘돈’(“우리의 필요”)만을 지각하느라 을 ‘꽃’(누군가의 필요) 배제했기 때문이죠. 반대 경우 역시 마찬가지죠. 꽃을 강하게 지각하는 사람은, '돈'(“우리의 필요”)을 배제헀기 때문이잖아요. 늘 돈돈돈거리는 이들에게 흐드러지게 핀 꽃이 보일리 없죠. 


 

흔들리는 것은 바람도 깃발도 아닌 마음이다.


 어떤 대상(꽃)을 지각한다는 것은 그 대상이 필요하기 때문에 관심을 갖는 것인 동시에 불필요하고 관심 없는 것들을 배제한다는 것이죠. 지각이란 그런 것이죠. 이와 관련된 불교의 흥미로운 화두가 하나 있어요.     


 어느 날 사찰 깃발이 바람에 나부끼고 있었다이 광경을 보고 두 스님이 서로 논쟁했다한 스님은 깃발이 움직인다라고 주장하고다른 스님은 바람이 움직인다라고 주장했다서로의 주장만 있을 뿐논쟁은 해결되지 않았다이때 육조 혜능이 말했다. “바람이 움직이는 것도깃발이 움직이는 것도 아닙니다그대들의 마음이 움직이고 있을 뿐입니다.” 그 말에 두 스님은 소스라치게 놀랄 수밖에 없었다무문관』 <제 29칙 비풍비번>     


 ‘시각’적으로 같은 현상(깃발의 나부낌)을 보고 한 스님은 깃발이 움직인다고 말하고, 또 한 스님은 바람이 움직인다고 주장합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진 걸까요? 바로 ‘지각’의 차이 때문입니다. 한 스님은 깃발에 온 관심이 쏠려 깃발을 ‘지각’한 것이고, 또 한 스님은 바람에 온 관심이 쏠려 바람을 ‘지각’한 것이죠. 그러니 둘의 논쟁은 결코 끝나지 않을 겁니다. 서로 각자의 ‘지각’ 속에 있을 테니까요.      


 그때 선종의 여섯 번째 스승(육조)인 혜능이 두 스님에게 말합니다. ‘바람이 움직이는 것도, 깃발이 움직이는 것도 아니다. 그대들의 마음이 움직이는 것이다.’ 이것이 어떤 의미이기에 두 스님이 소스라치게 놀랐던 걸까요? ‘지각’은 대상에 있지 않고, 각자의 마음, 즉 관심(필요와 배제)에 있다는 것을 단박에 깨치게 되었기 때문일 겁니다. 


 바람을 보았던 스님은 자신의 진정한 활동성(관심)이 자연과학적 영역에 쏠려 있었을 겁니다. 깃발을 보았던 스님은 자신의 진정한 활동성(관심)이 사찰의 명예에 쏠려 있었을 겁니다. 세계를 자연과학적으로 지각하는 이와 세계를 사찰의 명예로 지각하는 이는 분명 같은 것을 보면서도 결코 같은 것을 보고 있지 않지요. 그들은 각자의 관심에 의해 필요한 것을 보며 나머지 것들을 배제하고 있을 테니까요. 육조 혜능의 가르침은 단지 이것뿐이었을까요? 아닐 겁니다. 육조 혜능의 말에는 이런 의미도 있었을 겁니다. 


 ‘지금 자비에 관심을 기울야할 너희들이 기껏 깃발과 바람만을 보고 있으면 어떡하느냐? 중생들의 고통을 보고 있어야지. 지금 너희들의 마음은 어디에 가 있느냐? 너희들의 진정한 활동성의 중심은 어디에 가 있느냐? 왜 정작 중요한 것들 다 투과해 버리고 기껏 저 깃발과 바람 정도만 반사되어 너희들 마음에 돌아온 것이냐? 그러고도 너희가 부처가 되려는 스님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겠느냐?’ 혜능은 두 스님을 이렇게 꾸짖는 것이기도 했을 거예요. 바로 이것이 두 스님이 소스라치며 놀랄 수밖에 없는 이유였을 겁니다.      



지혜로워진다는 것은 ‘상’은 본다는 것


 베르그손의 철학과 선불교의 화두를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어요. 우리는 세계를 어떻게 '지각'하나요? 내가 관심을 갖는 것(돈)만 보이고, 관심이 없는 것(꽃)은 안 보이는 거예요. 이것이 우리가 '지각'하는 세계에요. ‘시각’적으로 같은 세계에 살더라도 우리는 전혀 다른 ‘지각’적 세계에 사는 거죠. 우리가 사는 세계는 ‘시각’적 세계가 아니라 ‘지각’적 세계죠. 우리는 그저 수동적으로 관망하는 세계가 아니라 능동적으로 개입하는 세계 속에서 살고 있으니까요.     


 ‘지각’은 방해받은 굴절로부터 오는 반사의 현상이에요. 신기루 효과 같은 거예요. 우리네 삶에 크고 작은 오해와 다툼이 끊이지 않는 것도 그래서죠. 각자 ‘바람이 움직인다 아니다 깃발이 움직인다.’ 혹은 ‘돈이 중요하다 아니다 꽃이 중요하다’고 말하며 오해하고 다투고 있는 거예요. 허망한 일이죠. 마음이 움직이는 것뿐이에요. 내 마음이 바뀌면, 베르그손의 표현을 빌리자면 '진정한 활동성'이 바뀌면,  다른 것들이 얼마든지 더 보여요. 아니 세계가 바뀌게 되는 거죠. 

     

 여기저기서 수업을 많이 해요. 하지만 그 수업 내용이 학생들에게 다 들어가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어요. 제 이야기를 진짜로 듣는 분들은 몇 명 없어요. 다 자기 듣고 싶은 대로 듣는 거죠. 다 신기루 같은 거예요. 다들 자기중심(자발적 활동성)에 반사되어 보는 세상만 보고 있는 거예요.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지각’하며 살아야 하는 걸까요? 자신의 '자발적인 활동성'의 중심을 넓히는 거예요.      


 지혜로워진다는 것, 성숙해진다는 것은 ‘표상’ 너머 ‘상’을 보는 일이에요. 미소가 아니라 미소 안에 담긴 세계 전체를 보는 일이에요. 그것은 어떻게 가능할까요? ‘표상’은 명확하게 보이지만 억지스럽게 잘라낸 세계의 조각일 뿐입니다. ‘상’은 모호하고 흐릿하지만 진동하는 세계 전체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그 모호하고 흐릿한 세계를 볼 수 있을까요? 자발적인 활동성의 중심을 넓히고 그 영역을 다양하게 해야 합니다.

      

 가급적 최대한 많은 세계의 조각들을 '지'각할 수 있어야 해요. 돈뿐만 아니라 꽃마저 지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더 나아가 사랑마저 '지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깃발 뿐만 아니라 바람도 지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자비마저' 지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우리의 '진정한 활동성'의 중심을 넓혀 더 많은 대상들을 지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점점 더 많은 대상들을 지각하게 될 때, 어느 순간 그 모든 것들이 모두 연결되어 있다는 삶의 진실을 깨닫게 될 겁니다. 바로 그때가 우리가 ‘상’에 한 걸음 더 다가선 순간일 겁니다. 그 순간에 이르면 비로소 그 소중한 사람의 미소 속에서 세계 전체를 볼 수 있게 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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