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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것을 다르게 보는 이유

‘지각’은 반쪽짜리다.

 베르그손은 종종 반反지성주의 철학자라고 불리곤 합니다. 이는 인간의 지성 그 자체를 반대했기 때문이 아니라, 생리학·심리학·과학 등등 당대 대표적인 지성(학문)들의 오류들을 비판했기 때문입니다. 이와 관련해서 베르그손이 대표적으로 비판하고 있는 대목이 바로 ‘지각’과 관련된 부분이에요.     


 당신은 외부 상들이 감각 기관에 이르러 신경에 변화를 가하고 뇌에 그 영향을 미치는 것을 보여주었다그런데 끝까지 가보라운동은 뇌수 물질을 통과하여 거기서 머무르나 싶더니 이제 의지적 행동으로 피어날 것이다바로 이것이 지각의 기제 전체이다물질과 기억』 앙리 베르그손     


 여기서 베르그손이 말하는 “당신은” 심리학자나 과학자들이에요. 심리학자나 과학자들은 지각을 어떻게 바라볼까요? 그들은 우리가 어떤 물체를 보거나 만지면 그 물체의 특성이 감각 신경을 타고 뇌의 분자 운동을 일으켜 그 물체를 ‘지각’하게 된다고 말하죠. 베르그손은 이런 주장이 지각의 반쪽일 뿐이라고 비판합니다. ‘지각’을 끝까지 보지 못한 거라는 거죠. 그래서 베르그손은 지각의 “끝까지 가보라”고 말하는 거예요. 

     

 그렇다면, ‘지각’을 끝까지 가서 본, 온전한 ‘지각’은 어떤 모습일까요? 자동차를 ‘지각’하는 상황을 생각해 보죠. 이는 그저 자동차를 보거나 만져서 그 특성이 시각적 혹은 촉각적 정보가 뇌에 영향을 미치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죠. 뇌에 전달된 그 분자적 운동은 “뇌수 물질을 통과하여 거기에 머무르는” 것 같지만, 이내 “의지적 행동으로 피어나게” 마련이죠. 쉽게 말해, 자동차를 보고 만지면 이 정보들이 뇌에 전달되지만, 이는 동시에 ‘저 차를 타고 싶다(혹은 갖고 싶다)’라는 의지적 행동이 출현하게 되죠. “바로 이것이 지각의 기제 전체”인 거예요.      



‘지각’은 의지를 피어나게 하는 것

     

 ‘지각’한다는 것은, 구심신경으로 받아들인 정보를 바탕으로 원심신경을 통해 특정한 의지(행동)를 내보낼 준비를 하는 거예요. 베르그손의 표현에 따르면, “의지적 행동으로 피어나게” 되는 거죠. 한 사람을 만나면 그의 ‘상’은 망막의 시신경에 맺혀서 뇌로 들어오겠죠? 동시에 이 ‘상’은 어떤 식으로든 의지적 행동으로 피어날 준비를 해요. 쉽게 말해, 받아들이고 동시에 내보낼 준비를 하는 일련의 과정, 이것이 ‘지각’의 전체 메커니즘이에요.      


 우리를 때리거나 비난하면서 계속 슬픔을 주는 사람이 있다고 해봐요. 그를 아무 생각 없이 멍때리면서 ‘지각’하게 될까요? 전혀 그렇지 않죠. 어떤 식으로든지 의지적 행동이 표출되죠. 도망을 치든, 숨든, 싸우든, 어떻게든 특정한 의지적 행동이 표출되게 마련이죠. 누군가 우리에게 기쁨으로 들어왔으면 기쁨의 의지적 행동(우정·사랑)으로 표출되고, 슬픔으로 들어왔으면 그에 상응하는 의지적 행동(증오·복수)이 표출되게 마련이에요. 이것이 ‘지각’인 거예요.     


 ‘지각은 순수 지각perception pure이 아니다’ 지각에 대한 베르그손의 근본적인 입장이에요. 베르그손의 의도는 분명해요. ‘지각’을 수동적인 상태로 바라보지 말라는 거예요. ‘지각’은 정보를 일방적으로 받아들이는 순수 지각perception pure이 아니라, 거기에는 언제나 특정한 의지가 포함되어 있어요. 물론 여기서 말하는 ‘의지’는 가치중립적이에요. 좋은 ‘의지’만 뜻하는 것이 아니에요. 즉 적극적 혹은 긍정적인 ‘의지’만이 있는 건 아니에요. 왕따를 당해서(세상을 위험으로 ‘지각’해서) 방 안에 갇혀 지내는 아이들 역시 의지가 있는 거에요. 세상 밖으로 나오지 않겠다는 ‘의지’ 말이에요.   


‘지각’에서 중요한 것은 ‘지각’되지 못한 것들이다.

  

 따라서 당신이 설명해야 하는 것은 어떻게 지각되는가 하는 물음이 아니라 어떻게 그것이 제한되는가 하는 물음이다왜냐하면 지각은 권리적으로는 전체의 상이지만사실적으로는 당신에게 관련된 것으로 환원되기 때문이다물질과 기억』 앙리 베르그손     


 우리는 주위에 있는 모든 삼라만상의 ‘상’을 ‘지각’할 권리가 있죠. 하지만 실제 우리의 ‘지각’은 어떻게 이루어지나요? 우리에게 관련된 것, 즉 관심을 가지는 것만 ‘지각’하게 되잖아요. 그러니 지각에서 정말 중요한 질문은 ‘어떻게 지각되느냐?’가 아니죠. ‘지각하지 못하고 빠져나가는 것은 무엇인가?’ 이것이 중요한 질문이죠. ‘지각’한 것은 ‘지각’됐기 때문에 의미가 없어요. 중요한 것은 내가 놓쳐버린 것들이에요.      


 ‘지각’은 ‘하는’ 게 아니라 ‘되는’ 거죠. 자신이 관심을 두는 영역만 ‘지각’되니까요. 명품 좋아하는 사람에겐 명품만 보이는 거 알죠? 그런데 그 사람의 관심 영역 밖에 있는 부분들, 예컨대 우정·사랑·꽃·구름·바다는 왜 지각되지 않고 빠져나갔냐는 거예요. 정작 그 사람에게 중요한 건 명품이 아니라 우정·사랑·꽃·구름·바다일 수 있잖아요. ‘지각’의 메커니즘에서 중요한 질문은 ‘어떻게 지각이 생기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제한되느냐’인 거예요.


 지각은 권리상으로는 무한하지만 사실상 당신이 당신의 몸이라 부르는 특수한 상의 행동 방식에 남겨진 비결정성의 부분을 그리는 것으로 한정된다물질과 기억』 앙리 베르그손    

 

 ‘지각’은 권리상으로는 무한해요. 우리는 모든 것들을 ‘지각’할 수 있는 권리를 갖고 있어요. 하지만 사실상 우리의 몸이 관심을 가지는 것만 ‘지각’할 수 있어요. 우리의 몸에는 특수한 행동 방식이 각인되어 있어요. 예를 들어, 우리의 몸에는 배가 고플 때 먹는 것을 찾는(관심을 갖는) 행동 방식이 각인되어 있죠.    


  

같은 것을 보고 다르게 지각하는 이유


 며칠을 굶은 상태라고 해봐요. 그때도 우리 주변에 책상·의자·노트북·책·볼펜·햄버거 등등 무한히 많은 세계의 대상들이 존재하겠죠. 우리는 ‘권리상’ 그 모든 것을 ‘지각’할 수 있죠. 하지만 ‘사실상’ 우리는 오직 햄버거만을 지각하게 될 거예요. 이는 햄버거만 ‘지각’ 가능한 대상으로 결정되고, 나머지(책상·의자·노트북·책·볼펜)는 그것이 무엇인지 결정되지 않은(지각되지 않은) 상태, 즉 비결정적 상태로 놓아두기 때문이에요.   

  

 ‘지각’한다는 것은 ‘관심 있는 것’(햄버거)이 선명해지는 것이 아니에요. ‘관심 없는 것’들(책상·의자·노트북·책·볼펜)이 흐릿해짐으로 ‘관심 있는 것’(햄버거)이 도드라지는 상태에 가까워요. 즉, 우리가 관심이 없는 것들을 “비결정성의 부분으로 한정”하면서 관심이 있는 것들만 ‘결정’된 상태로 남겨두는 과정인 거죠. 명품(음식)만 보이는 건, 그것에 관심을 갖고 싶어서 그런 게 아니잖아요. 그냥 마음이 쏠려 버리잖아요. 이는 배고픈 몸 상태일 때 먹을 수 없는 대상들을 모두 흐릿하게 처리 해버려 먹을 수 있는 것만 ‘지각’하게 되는 것과 같은 작동 원리죠.      


 이제 우리는 사람마다 왜 지각이 다른지도 이해할 수 있어요. 우리의 몸에 각인된 행동 방식에 본능적인 것(배고픔)들만 있는 건 아니잖아요. 사람마다 삶의 맥락 안에서 저마다 각인된 독특한 행동 방식이 있을 거예요. 누구는 명품을 좋아하고, 누구는 문학을 좋아하는 것처럼 말이죠. 그 특수한 행동 방식이 남겨진 몸이라는 조건 안에서 ‘지각’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제한되게 마련이에요. 그래서 사람마다 같은 것을 보고 다르게 지각하게 되는 상황이 벌어지게 되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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