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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는 것’이 아니라, ‘볼 수 있는 것’을 본다.

‘상’을 본다는 건, 어렵고 힘든 일이다.

 ‘상’을 본다는 것은 어렵고 힘든 일이에요. 세계 전체와 연결되어 진동하고 있는 대상을 본다는 것은 얼마나 어렵고 또 힘든 일이겠어요? 지금 내 앞에서 미소 짓고 있는 한 사람을 보는 것은 쉽죠. 하지만 그건 그 미소의 ‘표상’일 뿐, ‘상’은 아니죠. 한 사람의 미소는 그저 스쳐 지나가는 짧은 표정이 아니에요. 그 미소 속에는 그 사람이 만난 모든 순간이 담고 있고, 더 나아가 세계 전체가 담겨 있을 거예요.     


 ‘상’을 본다는 것은 찰나의 미소 속에서 그 사람뿐만 아니라 그 사람과 관계된 세계 전체를 보는 일일 거예요. 어쩌면 한 사람을 진정으로 이해한다는 것 달리 말해, 사랑한다는 것은 그 ‘상’을 보는 일이라고 말할 수 있을 거예요. 그래서 한 사람을 진정으로 이해한다는 것, 한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그리도 어렵고 힘든 일인 거겠죠.      


 그렇다면 ‘상’을 보는 일은 어떻게 가능할까요? ‘상’에 다가서기 위해서는 먼저 ‘표상’에 대해서 조금 더 세심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어요. 당장 할 수 없는 일은 당장 할 수 있는 일로부터 시작할 수밖에 없으니까요. ‘상’을 보는 것은 지금 당장 할 수 없지만, ‘표상’은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죠.     


 

‘자유’로운만큼 보인다.

 사물에 대한 우리의 표상은 결국 사물들이 우리의 자유에 반사되어 온다는 데서부터 발생할 것이다물질과 기억』 앙리 베르그손     


 베르그손은 “표상은 우리의 자유에 반사되어 온다”고 말해요. 여기서 ‘자유’를 선택 가능한 행동이라고 정의해봐요. 그러면 ‘표상’을 다시 이렇게 정의할 수 있겠죠. ‘표상은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행동에 반사되어 오는 것이다.’ 제 삶을 예로 들어볼게요. 복싱에 미쳐 있을 때가 있었어요. 매일 복싱 영상 찾아보고 온통 복싱 생각만 할 때였어요. 심지어 자려고 누우면 천장이 링처럼 보일 정도였어요.


 그 시절, 자동차를 타고 시속 60~70km로 앞만 보고 달리는데도 저 멀리에 ‘BOXING’라는 간판이 선명하게 보였어요. 그때 제 옆에 있었던 이는 그 간판을 보았을까요? 아마 못 봤을 거예요. 제게 ‘복싱’에 관한 ‘표상’이 가능했던 이유는 그 사물이 저의 ‘자유’에 반사되어 왔기 때문일 겁니다. 즉 ‘복싱’이 저의 선택 가능한 행동이었기 때문에 ‘복싱’과 관련된 대상들이 선명하게 ‘표상’되었던 것이죠. 반대로 ‘복싱’에 아무런 관심이 없는, 즉 그것이 전혀 선택 가능한 행동(자유)이 아닌 이들에게는 ‘BOXING’이라는 간판은 전혀 ‘표상’되지 않겠죠.


 이처럼 사물에 대한 ‘표상’은 우리의 ‘자유’에 의해서 반사되어 오는 거예요. 우리가 어떤 ‘자유’를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우리의 ‘표상’이 정해지는 거예요. 더 작은 ‘자유’를 갖고 있는 이들은 더 작은 세상을 ‘표상’(지각)할 수밖에 없고, 더 많은 ‘자유’를 갖고 있는 이들은 더 많은 세상을 ‘표상’(지각)할 수 있는 것도 그래서죠. 베르그손은 이러한 삶의 진실을 자연과학적 원리에 빗대어서 다시 설명해 줍니다.      



‘시각’의 작동 원리


 광선이 한 매질에서 다른 매질로 지나갈 때일반적으로 방향을 바꾸면서 통과한다그러나 두 매질의 상호 밀도가 어떤 입사각에서는 굴절이 불가능해질 수 있다그때 전면적인 반사가 일어난다이를테면 광선이 자기 갈 길을 계속 가는 것이 불가능함을 상징하는 잠재적인 상이 형성된다물질과 기억』 앙리 베르그손     


 베르그손은 ‘시각’, 즉 사물이 보인다는 것을 과학적으로 설명해요. ‘시각’의 작동 원리는 무엇일까요? ‘시각’, 즉 ‘보인다’는 것은 ‘빛→물체→빛 반사→망막’의 과정이에요. 텅 빈 방 안에 있는 꽃 한 송이가 보인다고 해봅시다. 우리는 어떻게 그 꽃을 볼 수 있는 걸까요? 방에 불을 켜서 빛이 꽃에 가닿고, 그 꽃에 부딪힌 빛이 반사되어 우리의 망막에 맺혔기 때문이에요. 이 ‘시각’의 작동 원리를 조금 더 엄밀히 말해볼까요?     


 텅 빈 방에는 두 가지 매질이 있어요. 공기와 꽃이죠. 빛은 그 방 전체를 지나가고 있죠. 그런데 빛은 공기라는 매질은 그냥 통과해 버리죠. 방향이 조금 바뀌긴 하겠지만 다시 망막으로 되돌아올 만큼의 각도로 방향이 바뀌진 않지요. 그런데 그 빛 중 “전면적인 반사”가 일어나 우리 눈으로 되돌아오는 지점이 있어요. 그 지점은 “광선(빛)이 한 매질(공기)에서 다른 매질(꽃)로 지나갈 때 … 굴절이 불가능”해지는 곳입니다.   

   

 그곳은 어디일까요? 바로 꽃이 존재하는 공간입니다. 공기라는 매질이 존재하는 공간에는 빛이 투과되지만(아무것도 보이지 않음), 꽃이라는 매질이 존재하는 공간에서는 빛이 반사되어 우리 눈으로 되돌아오게 됩니다. 그 빛(광선)의 전면적인 반사가 우리의 망막에 맺혀 비로소 우리는 꽃을 볼 수 있게 되는 거죠. 즉, ‘시각’(무엇인가 보인다)은 “광선이 자기 갈 길을 계속 가는 것이 불가능”하기에, 즉 반사되었기에 벌어지는 잠재적인 현상(상)인 셈이죠. “사물에 대한 표상이 자유에 반사되어” 가능한 것처럼, 꽃에 대한 시각(보임)은 광원이 반사되어 가능한 것이죠.     



‘시각’은 신기루다.

   

 ‘보는 것이 믿는 것이다.’ 서구의 격언처럼, 우리는 ‘시각’에 대한 과도한 확신이 있죠. 하지만 이는 아주 오래된 그리고 아주 큰 삶의 오해입니다. ‘표상’과 마찬가지로 ‘시각’ 역시 현실적인 대상을 보는 것이 아니라 잠재적인 현상(상!)을 보는 거예요. 무엇인가를 본다는 것은 명백히 존재하는 현실적 대상을 보는 것이 아니라, 흐릿하고 모호한 잠재적인 현상(상)을 보는 것일 뿐이에요. 이는 ‘신기루 현상’이 잘 보여주고 있지 않나요.


 사막을 지날 때, 존재하지 않는 오아시스를 보게 되는 것이 대표적 신기루 현상이죠. 이는 헛된 망상, 즉 ‘마음’의 문제일까요? 전혀 그렇지 않아요. 이는 명백히 ‘시각’의 문제입니다. 신기루 현상은 왜 생기는 걸까요? 신기루 현상은 빛의 굴절에 따른 착시 현상입니다. 한낮에 사막 지표면의 온도는 급격하게 올라가지요. 이 때문에 지표면 주변의 대기는 상층부에 있는 상대적으로 차가운 공기보다 밀도가 낮아지게 됩니다. 즉, 사막에서는 밀도 차에 의해 두 매질(지표면의 대기-상층부의 대기)이 분리되는 거죠. 그 경계면에서 빛의 굴절이 일어남으로써 발생하는 착시 현상이 바로 신기루 현상이에요.      


 이는 우리가 꽃을 보는 것과 정확히 똑같은 메커니즘입니다. 우리가 꽃을 보는 것도 광선이 한 매질(공기)에서 다른 매질(꽃)로 지나갈 때 방해받은 굴절로부터 오는 반사 현상이고, 신기루를 보는 것 역시 한 매질(더운 공기)에서 다른 매질(차가운 공기)로 지나갈 때 방해받은 굴절로부터 오는 반사 현상입니다. 이처럼 시각, 즉 무엇인가를 본다는 것은 명백히 존재하는 현실적 대상을 보는 것이 아니라, 늘 진동하기에 흐릿하고 모호할 수밖에 잠재적인 현상을 보는 신기루 같은 것일 뿐입니다.      



‘시각’과 지각’은 동일한 현상이다.

 이러한 ‘시각’은 ‘지각(표상)’과 동일한 현상입니다. 물론 ‘시각’과 ‘지각(표상)’은 다르지요. ‘시각’은 수동적 알아차림이고, ‘지각’은 능동적 알아차림이라고 말할 수 있으니까요. ‘너’를 ‘시각’적으로 알아차린다는 것은 ‘너’가 동양인이고, 키가 169cm이고, 몸무게가 51kg임을 파악하는 것이죠. 반면 ‘너’를 ‘지각’적으로 알아차린다는 것은 사랑하는 ‘너’, 꼭 안아주고 싶은 ‘너’로 파악하는 것이죠. 이처럼 ‘시각’과 ‘지각’은 명백히 다릅니다. 그런데 ‘시각’과 ‘지각’은 알아차림의 양상이 다른 것일 뿐, 그 작동 원리는 같습니다.      


 지각은 (시각과같은 종류의 현상이다주어진 것은 물질계의 상 전체와 그들의 내적인 요소들 전체이다그러나 진정한 활동성즉 자발적인 활동성의 중심들을 가정하면 거기에 도달한 광선 중에 그 활동성이 관심을 갖는 것은 통과하지 않고 그 광선을 보낸 대상의 윤곽을 그리기 위해 되돌아오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따라서 지각은 방해받은 굴절로부터 오는 반사의 현상을 상당히 닮았다그것은 마치 신기루 효과와 같다물질과 기억』 앙리 베르그손     


 ‘시각’, 즉 눈으로 본다는 것은 사물로부터 반사된 광원(빛)이 망막에 상을 맺고 시각세포를 자극하여 그 자극이 대뇌로 전달되어 사물을 볼 수 있게 되는 거잖아요. ‘지각’도 똑같아요. 다시 복싱 이야기로 돌아가 봐요. 저는 어떻게 차를 운전하면서 저 멀리 있는 ‘BOXING’ 간판을 볼 수 있었을까요? 그곳에 ‘BOXING’ 간판만 존재했기 때문일까요? 전혀 그렇지 않죠. 세계가 ‘복싱’으로만 이루어져 있나요? 아니잖아요.    

  

 세계는 “물질계 상 전체와 그들의 내적 요소들 전체”죠. 그런데 복싱에 미쳐 있던 그 시절에는 그 다양한 세계 전체 중에서 저의 “진정한 활동성, 즉 자발적인 활동성(복싱)”이 향하지 않은 것들은 다 투과해서 지나가 버린 거예요. ‘지각’은 자신의 “진정한 활동성”이 세계를 향하고 그중 투과하지 못하고 튕겨서 반사된 것만 알아차리게 되는 거예요.      


 ‘시각’이 특정한 대상(꽃)에 의해 방해받은 ‘빛’의 굴절로부터 오는 반사 현상이라면, ‘지각(표상)’은 특정한 대상(복싱)에 의해 방해받은 ‘관심’의 굴절로부터 오는 반사 현상이 거예요. ‘빛’이 공기의 영역은 투과하고 ‘꽃’의 영역에서 굴절되어 우리의 눈으로 되돌아와서 ‘꽃’을 보게 되는 것처럼, ‘관심’은 진정한 활동성을 촉발하지 못하는 영역은 투과하고 진정한 활동성의 영역(복싱과 관련된 대상)에서 굴절되어 우리의 마음으로 되돌아와 ‘복싱’을 ‘지각’하게 되는 거죠.    


‘보이는 것’이 아니라, ‘볼 수 있는 것’만 보인다.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어!” 늘 이렇게 말하는 이들이 있죠. 이들은 세계를 부정적으로 보거나 소심한 게 아니에요. 이들은 정말 할 수 있는 일이 없는 거예요. 그들에게는 ‘자유(선택 가능한 행동)’가 없거나 적기 때문에 그만큼 (반사되어) ‘표상’할 수 있는 세계 역시 없거나 적을 테니까요. ‘표상’(지각)되는 세계가 없거나 적은 이들에게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없거나 적은 것은 당연한 일이잖아요. 물고기에게 하늘은 존재하지 않는 세계죠. 이는 물고기는 그저 물속에서 헤엄칠 ‘자유’가 있을 뿐, 하늘에 관계된 일련의 행동들을 선택할 ‘자유’가 없기 때문이죠.     


 반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언제나 있어.” 이렇게 말하는 이들도 있죠. 이들은 세계를 과도하게 낙관적으로 보거나 허세를 부리는 게 아니에요. 이들은 큰 ‘자유’를 갖고 있는 거예요. (그만큼 반사되어) ‘표상’할 수 있는 세계가 크기 때문에 그 속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들을 얼마든지 발견할 수 있는 거죠. 인간에게 물과 땅, 하늘이 모두 존재하는 세계인 이유는 인간은 그와 관련된 행동(수영·달리기·비행기)을 선택할 ‘자유’가 있기 때문이에요.      


 결국 한 사람이 그 자신의 삶을 대하는 태도(비관주의·염세주의·냉소주의·낙관주의·행동주의·실존주의…)는 그가 갖고 있는 ‘자유(선택 가능한 행동)’의 크기게 달려 있는 셈이에요. 더 많은 ‘자유’를 갖고 있는 이들이 쉽게 좌절하거나 포기하지 않는 이유도 그래서죠. 그들은 더 큰 세계를 ‘표상’(지각)하기에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발견할 수 있으니까요. ‘시각’과 ‘지각(표상)’의 작동 원리가 말해주는 삶의 진실이 뭔가요? 우리네 삶은, ‘보이는 것’을 보는 게 아니라 ‘볼 수 있는 것’을 보는 거라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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