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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의 페르소나

이제 편안한 사랑을 하고 싶다고 말하는 이들에게

성숙함이라는 페르소나  

   

‘페르소나’는 그리스 어원으로 연극배우가 쓰는 ‘가면’을 뜻하는 말이다. 철학적으로는 외적 인격 또는 가면을 쓴 인격이라는 의미로 사용된다. 한 마디로 페르소나는 진짜 모습을 가린 가면이라는 의미다. 우리는 언제 가면을 쓸까? 그건 진짜 자신의 모습을 내보일 용기가 없을 때다. 누군가는 ‘돈’이라는 페르소나를 쓰고, 또 누군가는 ‘화장’이라는 페르소나를 쓴다. 이런 돈이나 화장은 비교적 쉽게 그것이 페르소나임을 간파할 수 있다. 돈이 사라지거나 화장이 지워진 맨얼굴은 쉽게 드러나는 법이니까.     


 문제는 눈에 보이지 않는 혹은 그럴듯한 페르소나다. 대표적인 것이 성숙함이다. 사람들은 대체로 나이가 들면 자신이 성숙한 사람임을 증명하려고 애를 쓴다. 하지만 그것 역시 페르소나일 뿐이다. 연애에서도 이런 성숙함이라는 페르소나가 있다. 연애도 꽤 해봤고, 나이도 좀 있는 사람들이 성숙한 체 하며 하는 말이 있다. “편안한 사람을 만나는 게 좋아. 나이가 들면 알 게 돼” 뭔가 세월의 흔적이 보이는 것도 같다. 그래서 성숙해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이런 성숙함은 맨얼굴을 보일 자신이 없는 사람들이 쓰는 페르소나일 뿐이다. 영국의 대표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이 「런던통신」에서 말한 따끔한 일침을 들어보자. “시간은 사람을 성숙하게 만든다고들 한다. 나는 그 말을 믿지 않는다. 시간은 사람을 두렵게 만들며, 두려움은 사람을 타협하게 만든다. 타협적으로 변했기에 남들 눈에 원숙해 보이려고 애를 쓰는 것이다.” 성숙함이라는 페르소나를 쓴 이들의 허위를 단박에 찢어버리는 이야기다. 


이제 편안한 사랑을 하고 싶다고 말하는 이에게


‘이제 편안한 사람을 만나고 싶다’는 말하는 건 나이가 들어서 성숙해졌기 때문이 아니다. 그건 몇 번의 연애가 남긴 상처가 너무 컸기에 뒤로 물러서려는 비겁함이다. 그런 자신의 비겁함을 가리기 위해 쓴 가면이 성숙함인 셈이다. 그래서 누군가를 만나 자신의 모든 것을 던질 용기가 없는 사람들은 이제 성숙함의 페르소나 뒤로 숨게 되는 것이다. 이 얼마 슬픈 일인가. 그리고 자신의 페르소나를 정당화하기 위해 주위 사람들에게 편한 연애를 성숙한 연애라고 홍보하고 다니는 건 또 얼마나 나쁜 일인가.


 러셀의 말처럼, 시간은 사람을 성숙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두렵게 만든다. 그래서 타협하는 것이며, 타협했기에 원숙하게라도 보이려 애를 쓰는 것이다. 연애라는 시간이 남긴 상처가 두렵기 때문에 타협하고 싶은 것이다. 그 타협이 바로 편안한 사람을 만나고 싶다는 이야기일 게다. 타협을 했기에 다른 사람에게 성숙하게 보이고 싶은 것이다. 성숙함이라는 페르소나는 그렇게 탄생했을 테다. 

   

 이제 편안한 사람을 만나고 싶다고 말하는 이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 “어떤 페르소나든 벗는 게 좋아요” 돈이라는 페르소나를 쓰고 있으면 행복할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화장이라는 페르소나를 쓰고 있으면 행복할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이미 알고 있지 않을까? 돈이 없으면 누구도 내게 관심 가져 주지 않을 거란, 화장을 지우면 누구도 날 사랑해주지 않을 거란, 결코 메워지지 않은 그 심연의 불안을. 그 심연의 불안은 페르소나를 벗지 않은 한 절대 사라지지 않는다.


 마찬가지다. 성숙함이란 페르소나를 벗지 않는다면 행복은커녕 심연의 불안 어디 즈음에서 영원히 헤매게 될 것이다. 사랑, 그것은 상대의 위성이 되는 것이다. 집요하게 유지하고 있던 내 중심을 버리고 상대의 중심에 몸을 맡긴 위성이 되는 것, 그게 사랑이다. 물론 안다. 그것이 얼마나 힘들고 많은 상처를 남기게 되는지. 잠시 주춤거리거나 두려워할 수 있다. 하지만 사랑 앞에서의 주춤거림과 두려움을 성숙함이라 포장하지는 말자. 정직하게 말하자. 이제 상처받고 싶지 않다고. 다시 사랑할 용기가 없다고. 그래서 나는 비겁하다고.    

     

연애세포가 죽어서 연애하기 힘들다고 말하는 이들에게     


사랑에 몇 번 상처 받고 솔로 생활을 이어가는 사람들 중에는 성숙함이라는 페르소나 대신 귀여운 변명을 하기도 한다. “저는 연애세포가 죽어서 연애가 힘들어요.” 이 말은 소극적이게는 ‘이제 어떻게 연애를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말이기도 하고, 적극적이게는 ‘사랑의 감정 자체를 느끼지 못하겠어요.’라는 말이기도 하다. 정말일까? 연애세포가 죽어서 사랑하지 못하는 것일까? 아니 정말 연애세포라는 것이 있는 것일까? 


 연애세포가 무엇일까? 당연히 생물학적인 것은 아닐 테고, 굳이 말하자면 연애를 하면서 생기는 이성을 대하는 감각이나 태도, 그리고 상대의 감정을 읽어내는 감수성 정도라도 말할 수 있지 않을까. 만약 그것이 연애세포라면, 연애세포는 결코 죽지 않는다. 단 한 번이라도 제대로 된 연애를 해본 적이 있다면 연애세포는 우리 온몸에 각인 되어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그러니 연애세포가 죽어서 연애가 힘들다는 말은 귀여운 페르소나다. 사랑 앞에서 주춤거리고 두려워하는 자신을 가리기 위한 페르소나.     


 그렇다면 대체 왜 그들은 다시 사랑하지 못하는 걸까? 죽은 것은 연애세포가 아니라 ‘용기세포’다. 사랑이 남긴 크고 작은 상처를 기억하기에 쉽사리 다시 사랑을 시작하지 못하는 것이다. 페르소나의 종류는 다르지만 페르소나를 쓰게 된 이유는 같다. 비겁하고 용기가 없어서다. 또 다시 자기중심을 버리고 타인의 중심으로 들어가는 위성이 된다는 두려움, 그 위성은 언젠가는 버려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그 두려움을 감당할 용기가 없어, 귀엽지만 비겁하게 말하는 것이다. “연애세포가 죽어서 사랑할 수 없어요.”         


한 번도 상처 받지 않은 것처럼 사랑할 수 있나요?     


페르소나를 벗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용기다. 돈이 없어도 떳떳할 수 있는 용기, 화장을 지운 맨얼굴로 집을 나설 수 있는 용기가 없다면, 우리는 언제나 돈과 화장의 노예일 수밖에 없다. 연애의 페르소나 역시 마찬가지다. 사랑 앞에서의 페르소나를 벗으려면 용기가 필요하다. 사랑 앞에 페르소나를 쓰고 있다면 스스로에게 묻자. “한 번도 상처 받지 않은 것처럼 사랑할 수 있을까??” 선뜻 답하기 어려운 이 질문에 ‘네’라고 답할 수 있을 때, 보석 같은 사랑이 다시 찾아오지 않을까? 


 분명 사랑은 어렵고 두렵다. 찐한 연애를 한 번이라도 해본 사람은 다 안다. 그래서 사랑 앞에서 주춤거리고 물러날 수도 있다. 당장 한 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사랑할 자신, 없을 수 있다. 그럴 수 있다. 하지만 적어도 페르소나만은 쓰지 말자. ‘내가 얼마나 비겁한가?’ ‘얼마나 용기 없는가?’를 있는 그대로, 아프지만 정확히 직면하자. 그 직면이 우리에게 다시 사랑으로 비상할 수 있는 용기를 줄 수 있을 테니까. 사랑 앞에서 주저하고 있다면, 하나씩 페르소나를 벗는 연습부터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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