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철학사>를 끝내며
1.
연기緣起, 무상無常, 무상無相, 공空, 무아無我, 열반涅槃. 모든 것은 상호의존해서만 존재하기에緣起, 모든 것은 항상 변하고無常, 고정된 형태를 갖지 않는다無相. 그러므로 모든 것은 텅 빔空으로서만 존재하기에 ‘나’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無我. 이 모든 삶의 진실을 깨닫게 될 때, 활활 타오르는 불처럼, 집착하던 마음이 고요해지게 된다涅槃.
이것이 제가 나름대로 불교를 하며 얻게 된 부처의 가르침이며, 불교가 우리를 구원하는 방식입니다. 그런데 이런 부처의 가르침과 불교적 구원을 알게 되었다고 해도, 삶은 좀처럼 변하지 않았습니다. 여전히 ‘열반’은커녕, ‘좋음貪’과 ‘싫음瞋’ 사이에서 ‘혼란痴’을 겪으며, 그로 인해 지독한 집착 속에서 몸과 마음이 타들어 가는 삶에 머무르고 있었습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던 걸까요?
부처의 가르침과 불교의 중심 개념(연기·무상·무상·공·무아·열반)들을 되짚어 보았습니다. 이것들은 제 삶에 어떤 역할을 하고 있었던 걸까요? ‘열반涅槃’은 목적지이며, 연기緣起’, ‘무상無常’, ‘무상無相’, ‘공空’, ‘무아無我’은 그곳으로 가는 길을 알려주는 지도였습니다. ‘열반(자유)’은 속박된 ‘나’가 이르러야 할 곳이었고, ‘연기·무상·무상·공·무아’는 그곳으로 가는 멀고 험난한 길을 알려주는 지도였습니다. (물론 여기는 ‘사성제四聖諦’와 ‘팔정도八正道’가 포함됩니다.)
이 모든 것들을 깨닫고 나서야 비로소 알게 되었습니다. 왜 불을 끄지 못하고, 여전히 몸과 마음이 타들어 가는 삶 속에 있었는지. ‘목적지’를 알고 그곳을 알려주는 ‘지도’만 있다면, 우리는 원하는 곳에 도착할 수 있을까요? 만약 그렇다고 말하는 이가 있다면, 그는 ‘도시’만을 여행한 자일 겁니다. 모든 것이 인위적으로 정돈된 ‘도시’는 ‘지도’만으로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자연’을 여행한다면 어떨까요? 깊은 숲속 혹은 사막을 여행하는 일은 어떤가요? ‘목적지’와 ‘지도’만으로 원하는 곳에 도착할 수 있을까요? 그렇지 않지요. 하나의 도구가 더 필요할 겁니다. ‘나침반’입니다. ‘자연’을 여행할 때는 한 걸음 한 걸음을 내딛는 순간마다 내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잡아주는 나침반이 필요할 겁니다. 우거진 숲속과 텅 빈 사막을 지날 때, 우리는 매 순간 방향을 잡아야 하니까요.
2.
불교의 ‘나침반’은 무엇일까요? 바로 ‘중도中道’입니다. 불교는 그 시작부터, 양극단을 피하고 그 사이에서 어떻게 균형을 잡을 것인지에 대한 고민에 답하는 거대한 이론 체계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는 부처가 ‘브라흐만교’와 ‘슈라마나’ 전통 사이에서 ‘불교’(중도!)를 기초 세웠다는 사실이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중도’는 불교적 태도인 셈입니다.
불교는 인식론, 존재론, 윤리론, 언어론적 차원에서 모두 ‘중도’적입니다. 인식론적 관점에서는 ‘절대론’과 ‘회의론’ 사이의 중도입니다. ‘절대불변하는(확실한) 존재(초월적 신)가 있다’는 방식으로 세계를 인식하는 ‘절대론’과 ‘그런 확실한 존재(초월적 신)는 없다’는 방식으로 세계를 인식하는 ‘회의론’ 사이의 중도적 관점을 취하죠. 존재론적 관점에서는 ‘영원론’과 ‘허무론(찰나론)’ 사이의 중도입니다. ‘돈은 영원한 거야’라고 영원한 존재를 긍정하는 ‘영원론’과 ‘그 모든 것은 다 사라져 버릴 것들이야’라고 보는 ‘허무론(찰나론)’ 사이의 중도적 관점을 취하죠.
윤리론적 측면에서는 ‘의무론’과 ‘정의情意론’(정서론)의 ‘중도’입니다. 삶을 주어진 의무를 충실히 따르는 것으로 보는 ‘의무론’과 삶은 변덕스러운 감정과 의지에 따라 사는 것이라고 보는 ‘정의론(정서론)’ 사이의 중도적 관점을 취하죠. 언어론적 관점에서는 ‘실재론’과 ‘유명론’ 사이의 중도입니다. ‘인간’이라는 추상적인 개념(인간)이 존재한다는 ‘실재론’과 ‘철수’, ‘영미’, ‘혜미’ 같은 개별자가 존재할 뿐, ‘인간’이라는 추상적인 개념은 이름뿐이라는 ‘유명론’ 사이의 중도적 관점을 취하죠.
3.
‘중도’는 중간(타협!)이 아닙니다. ‘균형’입니다. ‘균형’은 어떻게 잡을 수 있을까요? 양쪽에 두 물체가 달린 막대기를 손가락으로 ‘균형’을 잡는다고 해봅시다. 가장 먼저 해야 할 것은 양쪽에 달린 물체가 무엇인지 살펴봐야겠죠. 어느 쪽 더 무거운지에 따라 한쪽으로 기울 테니까요. 그다음에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왼쪽 더 무겁다면 손가락을 왼쪽으로 옮기고, 오른쪽이 더 무겁다면 손가락을 오른쪽으로 옮겨야겠죠. 그 미묘한 동시에 끊임없는 변화(움직임)의 과정으로 ‘균형’을 잡게 되는 거죠. 이것이 바로 ‘중도’입니다. (그래서 '중도'는 때로 '혁명'적일 수 있습니다.)
지나 보니 제 삶은 항상 양극단 사이에 서 있었습니다. '육체적 사랑'과 '정신적 사랑', ‘부유’와 ‘가난’, ‘독단’과 ‘모호’, ‘홀로’와 ‘함께’ 사이에 서 있었습니다. 한때는 '섹스'만이 진정한 사랑이라 여겼고, 또 한 때는 '대화'만이 진정한 사랑이라 여겼습니다. 한때는 ‘부유’함이 최고라고 여겼고, 또 한때는 ‘가난’이 삶의 최고 가치라고 여겼습니다. 한때는 '내 생각이 확실히 옳다'(독단)는 생각에 빠져 있었고, 또 한때는 '무엇이 옳은지 도저히 모르겠다'(모호)는 생각에 빠져 있었습니다. 한때는 항상 ‘홀로’ 있어야 한다고 여겼고, 또 한때는 무조건 ‘함께’ 있어야 한다고 여겼습니다.
이것이 제가 ‘목적지’를 알고, ‘지도’를 갖고서도 그곳에 이르지 못한 이유였습니다. 양극단에서 휘청거리기만 할 뿐, 제대로 ‘균형’ 잡지 못했으니까요. 이제야, 불교라는 것이 무엇인지 조금 알게 되었습니다. 불교적이라는 것은 자신만의 ‘중도’ 설정 지점을 발견하는 일입니다. ‘나는 지금 어디에 서 있는가?’를 매 순간 섬세하게 느낄 때라야, 비로소 미묘한 ‘균형(중도!)’ 감각을 갖게 됩니다. 그 '균형'감각을 통해서만 부처의 가르침에 이르게 될 겁니다.
‘부처’의 불교는 없습니다. ‘나’의 불교가 있을 뿐입니다. ‘중도(균형)’는 각자만의 상황에 따라 모두 다를 수밖에 없으니까요. 연기緣起, 무상無常, 무상無相, 공空, 무아無我, 열반涅槃. 이 모든 부처의 가르침은 결국 매 순간 바로 '나'의 '균형'을 통해 이를 수밖에 없습니다. ‘나’의 불교를 찾아가고 있습니다. '섹스'와 '대화'사이에서 ‘부유’와 ‘가난’ 사이에서, ‘독단’과 ‘모호’ 사이에서, ‘홀로’와 ‘함께’ 사이에서 매 순간 ‘균형’을 잡으며 앞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앞으로 만나게 될 삶 속에서도 매 순간 끊임없이 ‘나’만의 ‘중도’ 설정 지점을 발견하며 앞으로 나아가려고 합니다. ‘나’의 불교에 이를 때까지. 여러분도 여러분만의 불교에 이르게 되기를 바랍니다. 함께 ‘수행’처럼 ‘공부’하고, ‘공부’처럼 ‘수행’할 수 있어서 행복했습니다. '인연'이 되면 또 만납시다. 성불成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