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각'은 자극이다.
인간에게 ‘지각’은 중요하죠. 그런데 이 ‘지각’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또 있죠. 바로 ‘감정’입니다. ‘지각’과 ‘감정’에 관한 이야기를 해봅시다. ‘지각’과 ‘감정’은 다르죠. 꽃을 보고 붉은색이며 뿌리와 줄기로 구성되어 있다고 파악하는 것은 ‘지각’이죠. 반면 꽃을 보고 ‘참 아름답다’고 느끼는 것은 ‘감정’이잖아요. 이처럼, ‘지각’은 대상을 객관적으로 파악하는 것이고, 감정은 그 대상을 주관적으로 느끼는 거예요. 하지만 베르그손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베르그손은 이 ‘지각’과 ‘감정’을 어떻게 파악하고 있을까요?
우리의 신체에 대한 대상의 작용을 증가시킴으로서 정념이 되고, 더욱 특별하게는 고통이 될 수 없는 지각이란 거의 없다. 『물질과 기억』 앙리 베르그손
‘지각’은 뭘까요? “신체에 대한 대상의 작용”이죠. 즉, ‘지각’은 자극이죠. 꽃을 ‘지각’한다는 것은, 그 꽃이 우리의 신체에 대해서 작용, 즉 자극을 주는 거잖아요. 꽃의 빛깔, 촉감, 향기가 특정한 자극으로 우리의 신체에 대해서 작용하는 거잖아요. 베르그손은 그 작용이 증가될 때 정념(감정)이 된다고 말해요. 쉽게 말해, ‘지각’의 강도가 임계치를 넘어가면 ‘감정’이 되는 거예요.
수 없이 꽃을 ‘지각’했지만 아무런 ‘감정’도 느낄 수 없을 수도 있죠. 그런데 어느 날, 어떤 꽃 앞에서 걸음을 멈춰서 멍하니 바라보게 될 때가 있잖아요. 그건 그때 그 꽃을 '지각'한 강도가 임계치를 넘어가서 '감정'(“참 아름답구나”)이 되었기 때문이에요.
지각이 강해지면 감정이 된다.
정념과 지각 사이에는 분명 본성의 차이가 아니라 정도의 차이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물질과 기억』 앙리 베르그손
우리는 ‘정념(감정)’과 ‘지각’이 질적으로 다른 차원의 인식으로 이해하잖아요, 즉 감정과 지각 사이에는 어떤 “본성의 차이”가 있다고 생각하죠. 하지만 베르그손은 그 둘 사이에 “본성의 차이가 아니라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라고 말해요. 우리가 무엇을 ‘지각’한다는 것과 어떤 ‘감정’이 든다는 것은 본성적 차이가 아니라 정도, 즉 강도의 차이가 있다는 거예요. 왜냐하면 ‘지각’의 강도가 특정한 임계치를 넘으면 ‘감정’이 되기 때문이죠.
바늘을 지각하는 세 가지 양상을 생각해 봅시다. 바늘을 보는 것, 바늘을 몸에 갖다 대는 것, 바늘로 몸을 찌르는 것. 이는 모두 바늘을 ‘지각’하는 방식이잖아요. 다만, 바늘이라는 대상의 작용(자극)이 증가되는 것일 뿐이죠. 즉, ‘지각’의 정도(강도)가 증가되는 것이죠. 이렇게 ‘지각’의 정도가 증가되면 어떤 변화가 일어날까요? 바늘을 눈으로 볼 때는 ‘뾰족한 물건이구나’라고 ‘지각’할 뿐이죠. 또 바늘을 피부에 살짝 갖다 대면 ‘찌르면 통증 발생하겠구나’라고 지각할 뿐이죠. 그런데 바늘로 피부를 찌르면 어떨까요? ‘아프다’ 혹은 ‘짜증난다’라는 ‘감정(정념)’이 발생하겠죠.
이는 다른 일상적 상황들로도 얼마든지 확인해 볼 수 있어요. 내 눈앞에 세 명이 지나간다고 해봐요. 우리는 그 셋을 모두 ‘지각’하겠죠. 하지만 그 중 아주 매혹적인 사람이 있다면, 그를 아주 강하게 ‘지각’하겠죠. 그 강한 지각이 바로 설렘 혹은 끌림이라는 ‘감정’을 만들어내게 되잖아요. 반대로 나머지 둘 역시 ‘지각’했지만 아무런 ‘감정’도 들지 않았던 것도 그래서죠. 그 둘 역시 우리의 신체에 대해 작용(지각)했지만, 그 작용의 증가분이 ‘정념’이 될 만큼 크지 않았던 거예요.
이처럼 ‘지각’이 어느 정도의 강도를 넘어가면 ‘감정’이 되는 거예요. ‘지각’은 자극이기에 그 자극의 정도(강도)에 따라 ‘감정’의 촉발 유무가 결정되는 거예요. 또한 ‘지각’이 어떤 ‘감정’을 촉발하더라도, 그 ‘지각’의 강도만큼 촉발될 거예요. 이처럼 지각과 감정은 “본성적인 차이가 아니라 정도의 차이가 있는 것”일 뿐인 거예요.
지각은 고통이다.
“고통이 될 수 없는 지각이란 거의 없다.” 이는 ‘지각’과 ‘감정’에 관한 베르그손의 논의에서 놓쳐서는 안 될 부분이에요. 베르그손은 ‘지각’으로 인해 촉발된 거의 모든 ‘감정’이 고통이라고 말해요. 의아하죠. 바늘의 ‘지각’(찌름)은 고통이 되겠지만, 꽃의 ‘지각’은 그렇지 않은 것처럼 보이잖아요. 꽃의 ‘지각’을 통해 촉발된 그 감정(“참 예쁘구나”)이 고통이 아닌 것처럼 보이잖아요? 하지만 이는 우리가 삶의 진실을 잘 보지 못하는 거죠.
‘지각’은 근본적으로 고통이에요. ‘지각’은 자극이기 때문이에요. “고통이 될 수 없는 지각이란 거의” 없어요. 흔히 자극을 ‘역치(자극에 대한 반응을 일으키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자극의 세기)’와 ‘유쾌·불쾌’라는 두 가지 방식으로 구분하죠. 특정한 자극이 있을 때, 우리의 신체는 가장 먼저 그 자극이 ‘역치’ 이상인가 이하인가를 구분하죠. 만약 그 자극이 ‘역치’ 이하라면 그것은 자극이 아니라고 느끼죠.
그렇다면 자극이 ‘역치’ 이상이라면 어떨까요? 이제 그 자극이 유쾌한 자극인가? 불쾌한 자극인가로 구분하죠. 즉, 우리의 신체는 ‘역치’ 이상인 자극 중에서 불쾌한 자극만을 고통이라고 여기죠. 먼지가 누르는 것은 자극이 아니고, 쇳덩이가 누르는 것만을 자극이라고 여기죠. 그리고 그 쇳덩이가 누르더라도 그 자극이 ‘운동’(유쾌한 자극)이라면 고통이 아니라고 느끼고 ‘노동’(불쾌한 자극)일 때 고통이라고 느끼게 되잖아요.
하지만 사실 모든 자극은 고통이에요. 유쾌하든 불쾌하든, 모든 자극(지각)은 근본적으로 고통이에요. 진짜로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본 적이 있나요? 그런 사람을 만나면 심장이 진짜 빨리 뛰면서 호흡이 가빠져요. 사실 그건 고통스러운 일이잖아요. 심장이 비명을 지르고 있는 거예요. 음악도 그렇잖아요. 헤비메탈 좋아하는 사람들 있죠. 그 음악 들으면 고막이 찢어질 것 같거든요. 그걸 좋아한다고 듣지만 사실 그건 누군가에는 고막이 비명을 지르는 상황처럼 느껴질 거예요.
‘지각’, 즉 자극이 어떤 임계치를 넘어갈 때 감정이 되고, 그 감정은 거의 모두 고통이에요. 우리가 이러한 삶의 진실을 깨닫지 못하는 이유는, 우리가 ‘역치’ 이하의 자극을 고통으로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고, 또 유쾌한 자극은 고통으로 생각하지 않기 때문일 뿐이죠. ‘지각’에는 항상 고통이 뒤따라요. 아니 고통 그 자체가 ‘지각’인 거죠. 그러니 고통스럽지 않으면 우리는 아무것도 ‘지각’하지 않은 거예요. 심장이 비명을 지르지 않는다면 사랑을 ‘지각’하지 못한 것이고, 고막이 비명을 지르지 않는다면 헤비메탈을 ‘지각’하지 못한 거잖아요.
‘삶은 고해’의 진짜 의미
“삶은 고해苦海다” 부처의 이 말을 오해해서는 안 돼요. 삶이 고통의 바다라는 건, 산다는 것이 끝없는 괴로움의 연속이라는 단순한 의미만을 담고 있는 게 아니에요. “삶은 고해”라는 부처의 이 전언의 진짜 의미는 무엇일까요? 삶은 세계에 대한 끝없는 ‘지각’(자극)일 수밖에 없고, 또 그래야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을 거예요. 산다는 건 미처 ‘지각’하지 못했던 것들을 ‘지각’하는 과정(깨달음)이고, 잘 산다는 건 그 ‘지각’의 과정(깨달음)을 멈추지 않고 살아간다는 것이죠. 그 ‘지각’의 과정(깨달음) 끝에 저마다의 행복(해탈)에 이르러야 한다는 것이 중생을 향한 부처의 바람이었을 거예요.
물론 세계에 대한 ‘지각’(자극)이 괴로움(고통)으로 올 수도 있겠죠. 하지만 어떤 ‘지각’도 괴로움만 있는 건 아니에요. 괴롭기 때문에 즐거움도 있는 거예요. 사랑을 알게 되면 분명 괴로움도 있어요. 사랑하면 깨닫게 되죠. 가장 내 뜻대로 하고 싶은 타자를 가장 자유롭게 해주어야 한다는 사실을 말이죠. 그건 이루 다 말할 수 없는 큰 고통이죠. 하지만 그 고통을 주는 상대 덕분에 누구도 줄 수도 없는 삶의 기쁨과 환희를 느끼게 되잖아요.
사실 사랑까지 갈 필요 없어요. 배고픔을 ‘지각’하지 못한다면, 포만감 역시 지각할 수 없잖아요. 노동의 고됨을 ‘지각’하지 못한다면, 놀이의 기쁨 역시 지각할 수 없잖아요. 우리는 고통에 대해 너무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어요. 그럴 필요 없어요. 세계를 ‘지각’한다는 것 자체가 고통이고, 이는 우리를 더 큰 행복으로 가닿게 해줄 실마리이기도 하니까요.
무엇인가를 진짜로 안다는 것은 일정 정도 고통을 수반할 수밖에 없잖아요. 게으르게(이기적으로) 살면 불행해진다는 사실을 진짜 ‘지각’하게 되면 고통스럽죠. 언젠가는 죽는다는 사실을 진짜 ‘지각’하게 되면 죽을 것처럼 고통스럽죠. 하지만 바로 그 고통 때문에 진지하게 삶을 대할 수 있는 마음을 갖게 되잖아요.
가장 큰 행복은 지혜에요. 지혜로운 이들만 행복해요. 그 행복에 이르는 길은 오직 하나뿐이에요. ‘지각’이라는 고통을 견디는 마음. 삶의 진실(세계)을 깨닫게(지각) 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고통 앞에서 기꺼이 미소 지을 수 있는 마음. 오직 그 마음만이 진정한 행복에 이르는 유일한 길일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