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과 위험
‘지각’은 고통이죠. 그 고통을 긍정해야 할 필요가 있어요. 고통스러운 만큼 더 많은 것들을 ‘지각’할 수 있을 테니까요. 하지만 여기에는 현실적인 문제가 하나 있어요. 바로 ‘위험’이에요. 고통과 위험은 긴밀한 관계에 있죠. 고통은 위험의 시그널이잖아요. 칼에 베여서 고통스러운 것은 죽음(위험)을 알리는 시그널일 수 있잖아요. 그러니 마냥 고통을 긍정해야 한다고 말하기도 어려운 것이죠. 그러니 고통과 위험의 관계에 대해서 살펴봅시다. 베르그손은 이를 단세포 동물로부터 다세포 동물로 진화하는 과정을 통해서 설명합니다.
낯선 물체가 아메바의 위족 중의 하나를 건드릴 때, 그 위족은 움츠러든다. 따라서 원형질 덩어리의 각 부분은 동일하게 자극을 받고 그것에 대해 반응할 수 있다. 지각과 운동은 여기서 하나의 유일한 속성으로 뒤섞이며, 그 속성이 바로 수축성이다. 『물질과 기억』 앙리 베르그손
해파리나 불가사리 같은 거 툭 건드려 본 적 있어요? 툭 건드리는 순간 그 부분이 움츠러들어요. 아메바 역시 마찬가지에요. 위족을 건드리는 순간 수축반응이 일어나요. 이 수축반응은 ‘지각’과 ‘운동’이 뒤섞인 반응이에요. ‘지각’하는 순간 ‘운동’하는 거죠. 즉, ‘지각-운동’의 동시적 반응이 수축성으로 드러나는 거예요. 아메바와 같은 단세포 동물은 왜 이런 반응하게 되는 걸까요? 단세포 동물은 감각 기관(눈·코)과 운동 기관(팔·다리)의 구분이 없기 때문이에요.
아메바와 같은 단세포 동물은 몸 전체가 감각 기관인 동시에 운동 기관인 셈이죠. 그러니 외부 대상이 나타났을 때, ‘지각’(접촉)하는 순간, 동시에 ‘운동’(반응)할 수밖에 없는 거예요. 단세포 동물의 그 움츠림(수축성)은 순간적으로 ‘지각’한 동시에 ‘운동’하는 모습인 거죠. 이는 별다른 감각 기관이 없는 아메바 입장에서는 당연한 거예요.
아메바의 유일한 ‘지각’ 방법은 접촉이에요. 하지만 이는 사실 위험한 일이잖아요. 외부 대상이 자신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 미리 판단하지 못한 채 접촉해야 하니까요. 그래서 접촉(지각)하는 순간 일단 떨어지는(운동) 거예요. 즉, 움츠리는 거죠. 그게 가장 안전한 ‘지각’ 방식이니까요. 마치 우리가 눈을 가리고 컵의 온도를 파악하려 할 때 손을 순간적으로 붙였다 뗐다 하는 것처럼 말이에요. 그렇다면 단세포 동물(아메바)이 다세포 동물(인간)로 진화하면 상황은 어떻게 달라질까요?
진화할수록 기관들은 독립성을 잃는다.
유기체가 복잡해질수록 작업은 나누어지고, 기능은 분화되며, 이렇게 구성된 해부학적 요소들은 그들의 독립성을 잃는다. 『물질과 기억』 앙리 베르그손
아메바(단세포 동물)가 진화해서 인간(다세포 동물)이 되면, 즉, “유기체가 복잡해질수록 작업은 나누어지고, 기능은 분화”되겠죠? 몸 중에서 일부는 눈, 손, 뇌가 되어 그 각각은 보고, 만지고, 판단하는 기능을 갖게 될 테니까요. 베르그손은 이렇게 진화가 이뤄지면 유기체의 각 “요소들은 그들의 독립성을 잃게” 된다고 말해요. 뜨거운 주전자를 만진다고 해봐요. ‘손’은 엄청 뜨겁겠죠? ‘손’ 입장에서는 죽을 맛일 거예요. 그런데 유기체 입장에서는 그것이 뜨거운지 아닌지 확인해야 하니까 손을 계속 주전자에 갖다 대야 하는 거예요.
‘손’의 입장에서는 그런 일을 하기 싫을 거예요. 하지만 유기체를 위해서는 그렇게 해야 하잖아요. 유기체에게는 적당한 온도의 물이 필요하고, 누군가는 온도를 확인하는 역할을 해야 하니까요. 이것이 ‘손’이 독립성을 잃는다는 의미예요. 인간은 다세포 동물로 분화됐기 때문에 각각 요소들이 독립성을 잃는 거예요. 손은 만지기 싫은 것도 만져야 하고, 귀는 듣기 싫은 소리도 들어야 하고, 눈은 보고 싶지 않은 것도 봐야 하잖아요. 그래야 유기체가 잘 보존될 테니까요.
하지만 단세포 동물은 그러지 않아요. 아메바의 위족은 독립적으로 행동하잖아요. 외부 대상이 ‘지각’되면 바로 수축해 버리잖아요. 왜냐하면 아메바는 ‘손’과 ‘뇌’로 해부학적 분화가 안 되어 있기 때문이죠. 아메바는 ‘뇌’가 판단해서 뜨겁지만 주전자에 계속 ‘손’을 갖다 대라고 명령내릴 수가 없잖아요. 각 해부학적 요소들이 스스로 판단해서 독립적(즉각적)으로 반응할 뿐이죠.
감각 기관은 수색대다.
우리와 같은 유기체의 이른바 감각 섬유들은 오직 자극을 그 진동이 운동적 요소로 전파될 중심 지역으로 전달하는 역할만을 맡는다. 따라서 그것들은 개별적 행동을 포기하고 첨병의 자격으로 신체 전체의 진전에 협력하는 것으로 보인다. 『물질과 기억』 앙리 베르그손
‘첨병’은 수색대 같은 거예요. 수색대의 역할이 뭐예요? 본대보다 먼저 가서 적군을 수색하는 거예요. 적군의 병력은 얼만지, 무기는 어떤 건지 등등 적군의 위험성의 크기와 종류를 미리 파악하는 거죠. 베르그손은 우리의 감각 기관(눈·코·손)이 바로 그 수색대의 역할을 한다고 말해요.
즉, 인간과 같은 “유기체의 감각 섬유(기관)들은 오직 자극을 … 중심 지역으로 전달하는 역할만을 맡는” 거예요. 감각 기관(눈·코·귀)은 유기체(인간)가 위험에 적절히 대비할 수 있도록 특정한 정보를 뇌와 같은 중심 지역으로 전달하는 역할만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 감각 기관들은 당연히 “개별적 행동을 포기하고 첨병의 자격으로 신체 전체의 진전(생존)에 협력하는 것으로 보이는” 거죠.
‘수색대’(감각 기관)는 ‘본대’(유기체)를 위해 아무리 위험해도 적진으로 들어가 정보를 얻어와야 하는 거예요. ‘손’은 유기체에게 필요한 대상이 있다면 뜨겁거나 말거나 가서 만져봐야 해요. 그 정보를 유기체에 전달해야 하니까요. 그렇게 협력해야 신체 전체가 생존(진전)할 수 있잖아요. 개는 ‘코’가 수색대 역할을 하는 거예요. 개도 싫은 냄새가 있겠죠. ‘코’ 입장에서 보면 좋은 냄새만 맡고 싶지, 썩은 냄새나 이상한 냄새를 맡고 싶겠어요? 그런데 ‘코’는 수색대이기 때문에 계속 냄새를 맡아야 하는 거예요.
‘몸’과 ‘손’은 위험에 대응하는 역할이 다르다.
그런데 여기에 한 가지 문제가 있어요. 뭔가 위험한 것이 있다고 해봐요. 그 위험한 것이 유기체에게만 위험하고, ‘손’에게는 안 위험할까요? 그렇지 않죠. 똑같이 위험해요. 만졌는데 뜨거운 거면 ‘손’도 다치는 거예요. 엄밀히 말해, ‘손’이 다치면 유기체 역시 다치는 거잖아요, ‘손’은 유기체를 구성하는 해부학적 요소니까요. 뜨거운 주전자가 있다면 ‘손’도 몸’ 전체(유기체)도 다 위험한 거죠. 그런데 왜 ‘유기체’는 진화를 하면서 ‘감각 기관(손)’을 먼저 위험한 적진으로 내보게 된 걸까요?
유기체 전체를 위협하는 동일한 파괴의 원인이 개별적으로 노출되어 있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 유기체는 위험을 피하거나 상해를 복구하기 위해서 움직일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 반면, 감각적 요소는 작업의 분할로 인해 자신의 운명이 된 상대적 부동성을 보존한다. 『물질과 기억』 앙리 베르그손
베르그손의 말처럼 “유기체 전체를 위협하는 파괴의 원인”이 개별적 요소(손)에게도 그대로 노출되어 있어요. 하지만 유기체는 개별적 요소를 위험 지역으로 내보내죠. 이는 동일한 위험에 대응하는 ‘몸’(유기체)과 ‘손’(감각 기관)의 역할이 다르기 때문이에요. “유기체(몸)는 위험을 피하거나 상해를 복구하기 위해 움직일 수 있는 능력” 갖고 있고, 또 그렇게 해야 하는 것이 몸(유기체)의 역할이잖아요. 그런데 어떻게 이것이 가능할까요? 바로 “감각적 요소(손)가 자신의 운명이 된 상대적 부동성을 보존”하기 때문이잖아요. 이는 전혀 어려운 말이 아니에요.
갑자기 누가 여러분에게 다가와서 각목으로 때린다고 생각해 봐요. ‘팔’을 들어서 막겠죠? ‘몸’(유기체)은 뒤로 빼고, ‘팔’(감각 기관)을 대잖아요. ‘팔’은 죽을 맛이에요. ‘몸’은 위험을 피하거나 상해를 복구하기 위해 움직일 수 있죠. 하지만 그렇게 하기 위해서 ‘팔’은 그 자리에서 있을 수밖에 없어요. “자신의 운명이 된 상대적 부동성을 보존”할 수밖에 없는 거죠. ‘팔’은 수색대인 거죠. 먼저 적진으로 들어가서 얼마나 아픈지 맞아봐야 해요. ‘많이 아프구나. 팔이 부러질 정도구나’. 이 정보를 ‘몸’ 전체에게 알려야 하는 거예요.
모든 고통은 국지적 노력이다.
감각 기관이 상대적 부동성을 보존하기 때문에 유기체 전체는 위험을 피하거나 상해를 복구할 수 있게 되는 거죠. 바로 이것이 고통이 출현하게 되는 과정이에요.
이렇게 하여 고통이 탄생하는 것이다. 그것은 사태를 제자리로 돌려놓기 위한 상처 받은 요소의 노력, 즉 감각신경 위에서 일어나는 일종의 운동적 경향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물질과 기억』 앙리 베르그손
고통은 왜 존재할까요? 그것은 유기체 전체가 위험을 피하거나 혹은 위험으로 인해 발생한 상해를 복구하기 위해서요. 사람이 통증을 못 느끼면 어떻게 되는 줄 알죠? 죽어요. 위험의 인지가 현저히 더뎌지기 때문이에요. 칼에 베였는데 통증을 못 느끼면 계속 돌아다니다 과다출혈로 죽는 거예요. 우리가 고통을 느끼기 때문에 위험한 것들을 인지하고 피할 수 있거예요. 고통을 무작정 피하려고 하면 어떻게 되겠어요? 그래도 죽어요. ‘봉와직염’이라는 병이 있어요. 피부 겉은 멀쩡한데, 피부 안쪽이 곪아 들어가는 병이에요. 그 병에 걸리면 피부를 찢어서 고름을 짜내야 해요. 상태가 심각하면 뼈까지 긁어내야 할 때도 있어요. 그 고통을 감당해야 돼요. 그래야 그 상해가 복구되잖아요.
따라서 모든 고통은 어떤 노력, 어떤 무기력한 노력으로 이루어지기 마련이다. 모든 고통은 국지적 노력이며, 노력의 그런 고립 자체가 그 무기력의 원인이다. 『물질과 기억』 앙리 베르그손
“모든 고통은 국지적loca 노력”이에요. 그리고 그 노력은 “무기력한 노력”이에요. 이는 우리네 삶에서 아주 중요한 통찰이에요. 고통스럽게 하체 운동을 한다고 해봐요. 그 고통은 “국지적 노력”이에요. 즉 몸 전체 중에서 국지적인 부분(다리)에 가해지는 고통을 참으려고 노력하는 거잖아요. 그리고 그 노력은 “무기력한 노력”이죠. 왜냐하면 하체 운동을 하면 ‘다리’ 근육이 찢어질 것처럼 고통스럽잖아요. 그때 ‘다리’가 무기력하지 않다면 그 고통을 피하려 하겠죠. 하지만 ‘다리’는 몸 전체의 유익(건강)을 위해 그저 무기력하게 그 고통을 견뎌낼 수밖에 없고, 또 그래야 하는 거예요.
‘위험’은 치명적이지만, ‘고통’은 가볍다.
노력(고통)이 국지적이기 때문에 고통은 생명체가 겪는 위험과는 절대적으로 불균등하다. 즉, 위험은 치명적인데 고통은 가볍고, 고통은 감내할 수 없을 정도 (치통과 같이)이나 위험은 사소한 것일 수 있다. 『물질과 기억』 앙리 베르그손
우리는 그 “국지적 노력” 즉 몸 일부의 고통을 지속하며 살아가야 해요. 왜 그래야 할까요? 그 노력(고통)이 “생명체가 겪는 위험과 절대적으로 불균등”하기 때문이에요. 쉽게 말해, “위험은 치명적인데 고통은 가벼울” 수 있기 때문이에요. 복싱을 예로 들어볼까요? 복싱 체육관에 가면, 스파링할 때 계속 뒤로 물러나는 이들이 있어요. 한 대도 안 맞으려고 그러는 거죠. 당연하잖아요. 맞으면 아프니까 뒤로 물러서는 거예요. 그런데 그것이 정말 안전한 방식일까요? 전혀 그렇지 않아요.
스파링할 때 한 대도 안 맞으려고 자꾸만 뒤로 빠지는 게 가장 위험한 거예요. 차라리 고통을 감당하고 앞으로 나가는 게 덜 위험한 거예요. 물론 앞으로 나가면서 맞을 수도 있죠. 심지어 더 아프게 맞을 수도 있을 거예요. 상대방이 때리는 힘과 내가 앞으로 들어가는 힘이 합쳐지게 되니까요. 하지만 그 고통에도 불구하고 앞으로 나아가는 게 더 안전한 방법이에요. 앞으로 나아가면 한 대는 세게 맞을 수 있어도, 상대는 더 이상 때릴 수 없게 돼요. 내가 앞으로 나아가서 거리를 좁혀 놓았기 때문에 상대가 나를 때릴 수 있는 공간이 없기 때문이에요.
고통스럽게 운동해야 몸이 건강해지는 것도 마찬가지잖아요. 숨이 턱까지 차고 근육이 찢어질 것 같이 운동하면 고통스럽죠. 하지만 그 고통 때문에 우리의 몸이 더 튼튼해지는 거잖아요. 즉 질병이나 기타 위험으로부터 더 안전해지는 거잖아요. 반대로 운동을 하지 않으면 고통스럽지 않죠. 하지만 몸이 아플 위험은 점점 커지는 거예요. 이처럼, ‘고통’과 ‘위험’은 전혀 균등하지 않아요.
안락은 위험을 증가시키고, 고통은 위험을 감소시킨다.
고통이 크기 때문에 더 안전할 수 있고, 고통이 작기 때문에 더 위험할 수 있는 거예요. 우리는 국지적 노력(고통)을 기꺼이 감당하려고 해야 해요. 그래야 치명적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으니까요. 그런데 우리의 모습은 어떤가요? 국지적 노력(고통)을 회피하려고 치명적인 위험을 초래하는 이들이 얼마나 많던가요? 그들은 주사 맞는 게 무서워서 병원을 안 가려는 아이와 비슷한 거예요. 그 아이는 결국 필연적으로 더 큰 위험에 처하게 되겠죠.
“국지적 노력(고통)”은 중요해요. ‘전체적인 몸’이 위험을 피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상해를 복구할 수도 있기 때문이에요. 열심히 운동해서 근육이 찢어질 같은 고통(국지적 노력)을 견뎌내면 몸은 건강해지잖아요. 반면 “국지적 노력(고통)”이 아닌 ‘국지적 태만(안락)’을 지속하면 어떻게 될까요? ‘입’이 즐겁다는 이유로 정크푸드를 계속 먹으면 어떻게 될까요? ‘입’은 안락할지 몰라도 ‘몸’은 조금씩 병들어 가겠죠.
‘고통’은 삶의 조건이에요. ‘고통’을 무조건 피하려고 하면 안 돼요. ‘손’ ‘팔’ ‘입’ ‘다리’ 같은 국지적인 부분(감각 기관)들은 철저하게 무기력해야 돼요. 또 능숙하게 무기력화하는 연습을 해야 해요. 감각 기관이 무기력한 고통 속에 있어야지만 유기체가 잘 보존되는 거예요. 우리의 몸에 칼이 다가오면 팔로 막아야 하잖아요. 하지만 막상 실제로 그런 일이 닥치면 잘 안될 수도 있잖아요. 그러니 평소에서 ‘칼’을 ‘팔’로 막는 연습을 자주 해야 하는 거예요. 물론 ‘팔’ 입장에서는 가혹할 수 있겠지만, 위험한 상황에 대비해서 팔을 고통스럽게 하는 연습을 자주 해야 하는 거예요.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팔’을 보호하려다 목숨(유기체)을 잃을 수도 있으니까요.
우리네 삶에는 수많은 ‘칼’들이 닥쳐올 거예요. 그것은 감기, 성인병, 암 같은 신체적 문제일 수도 있고, 무기력, 우울증, 공황장애 같은 정서적 문제일 수도 있겠죠. 이런 위험들에 잘 대처하기 위해서는 국지적 노력(고통)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연습이 필요 해요. ‘팔다리가 아프더라도 운동을 한다.’ ‘입이 고통스럽더라도 자연식을 자주 먹는다’ ‘머리가 아프더라도 좋은 책을 읽는다.’ 이렇게 몸 일부의 고통을 잘 다루는 연습을 할 때, 비로소 몸과 마음 모두 건강해질 수 있는 거예요.